서임이 세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 지도 벌서 사흘째. 그동안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세자라는 건 꽤나 힘들고 피곤한 직업이었다.
처음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세자의 몸에 들어와 있다니. 내 아비를 죽인 원수이자 가문을 멸망시킨 몹쓸 놈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문을 멸망시킨 공으로 그는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얻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믿었던 의정대군마저 그리 세자를 챙기고 나오다니! 덕분에 이놈의 왕실 가족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말았다.
의식을 차린 첫 날은 방 한구석에 걸려있는 칼을 정신없이 보았다. 이 칼로 이 몸을 찔러버릴까? 이 칼로 이 몸을 두 동강 내 죽여 버리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아버지의 한이 풀리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세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에 휩싸여 있던 것도 의식을 차린 첫 날 뿐이었다. 그 모든 고민은 다음 날부터 시작된 정신없는 일과에 치이는 바람에 더 이상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 세자란 놈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 해 온 것인지. 본디 세자는 백성들 사이에서 성질머리 고약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서임이 직접 세자가 되어보니, 세자가 이 모든 일과를 다 소화해내고 있는 거라면 그 정도의 성질머리는 부려 마땅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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