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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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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7.01 22:32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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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18,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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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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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화 마왕성 문지기

DUMMY

1화 <마왕성 문지기>



에스가르드 대륙의 암흑지대에 위치한 마족들의 낙원 마계 타이타닉.

타이타닉 중심지에는 마왕이 있었다.

마왕은 마왕성에 앉아서 휘하 부하들을 부려 인간계를 침공해왔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용사가 이곳에 다다랐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용사들은 마왕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이유에는 마왕성 앞을 지키는 갑옷의 거인이 있었다.

마왕군 간부조차 인정하는 명실상부 마왕성 최강자.

문지기의 압도적인 무력이 용사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 심심해. 자리 비우지 마라. 밥도 여기서 먹어라. 문을 지켜라. 왜 이렇게 문지기에게 바라는 게 많아?”


하지만 이따금 코딱지를 날린다던가 엉덩이를 긁는 행동은 소문과 많이 다르게 하찮은 모습이었다.

위대한 소문의 주인공 가더는 좀처럼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일어날 줄 몰랐다.


“오늘로 며칠째지?”


용사가 매일 오지는 않으니 일 년의 절반은 이러한 모습이다.

가더는 오늘도 자세를 고쳐 앉아 바닥에 작대기를 그렸다.


“1780··· 1783·····.”


어린아이도 아니고 맨바닥에 낙서하는 게 옳냐고 마족 사이에서 말들이 많다.

하지만 사천왕조차 피해 다니는 게 이 길목이다.

문지기가 하루하루 채운 작대기는 마왕성 길목을 빼곡히 채웠다.

예전에 이 사실을 모르고 착륙한 와이번이 저녁 만찬이 된 뒤, 다들 조심하며 지나갔다.


“1782일.”


오늘 그은 마지막 작대기까지 전부 세었다. 오늘의 업적을 달성한 나뭇가지가 휘었다.


“1782일···.”


그러나 새로운 기록에 기뻐하는 일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뿌득하고, 나뭇가지의 가녀린 허리가 부러졌다.

가더는 이마를 감싸며 ‘하하’ 웃었다.


“이런 제기랄-!”


그러고 울부짖었다.

처음에는 마왕군 간부들도 놀라서 뛰쳐나왔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문지기, 가더 타나토스는 이마를 짚은 채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1782일! 하하 하하하···!”


이리도 실성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왕성의 문지기는 일인 체제다.

밥만 제공해 주고 잠을 땅바닥에서 자며 24시간 문 앞을 지켜야 하는 극한 직업.

심지어 마왕성에서 거의 내다 버린 자식 취급인지라 무리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다.

마왕성 문지기의 역할이란 그런 거였다. 언제든 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투력 측정기.

물론 가더는 약하지 않았다.

높으신 분에 의해 마왕성 빈자리에 꽂아 넣어진 거지만, 말단들이 그러한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제기랄! 사 년. 사 년이라고! 이 이상 어떻게 버티라는 건데!”


그렇게 십 년을 살았다.

사 년 동안 쌓인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같은 마왕성 말단들도 얼굴 한 번 보여주러 온 적 없다.

문지기의 평균 수명은 길어봐야 일 년.

용사가 찾아오면 제일 먼저 죽을 사람에게 굳이 찾아와서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문지기가 십 년째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단전에서부터 저절로 욕지거리 나오는 상황이었다.


“외로워. 외로워. 나도 우아하게 테라스에 앉아서 소꿉놀이하고 싶다고···.”


한 마족이 이렇게 망가지는 일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나름 실력자이고 오래 일했는데. 집 지키는 개처럼 콩고물이나 떨어지지 않을까 기다리는 신세가 제법 처량했다.

언젠가 가더가 한 귀로 듣고 흘렸던 ‘하루라도 정사를 거르면 외로워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라는 말. 다른 건 몰라도 ‘외로워서 죽겠다.’라는 문장만큼은 현재진행형으로 공감하는 중이었다.

이 말을 한 서큐버스는 분명 지금도 ‘하하호호’ 웃으며 인생을 즐기는 중일 것이다.

이제는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지경이었다.


“티미. 내 유일한 친구. 마왕님에게 잘못 걸려서 근신만 3년째구나.”


가더의 눈앞에 근신 당한 말 동료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유일하게 제 신세를 이해해주던 가고일이 근신 당하자, 안 그래도 싸늘했던 배식 담당의 태도가 더 냉정해진 듯했다.


“심심해. 외로워. 싸우고 싶어.”


가더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아기처럼 몸을 웅크렸다.

선대 마왕 때부터 살아남아서 마왕성을 수호한 문지기.

최강 문지기는 오늘도 외로움에 눈물 흘렸다.


“마왕님은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안 놓아주려는 걸까?”


우스갯소리라도 뱉으면 기분이 좋아지려나 싶었다.

그런데 하하하 웃다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등줄기를 따라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 설마? 아니지······?”


머릿속에서 위험한 나팔 소리가 울려댔다.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가 빠르게 처졌다.

문지기 생활 10년.

처음으로 이 생활에 위기감을 느꼈다.

후임이 나타날 때까지만 일하기로 약조했던 게 10년 전 일인데.

어째서 10년이 지나도 후임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걸까.


“아. 아··· 안돼···!”


이윽고 손가락을 빨던 치아가 덜덜 떨렸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투구를 감싸 쥐었다.

이쯤 되니 인정해야 했다.

그는 마왕에게 사기당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문지기로 일해야 하는. 실로 마족다운 계약에 속고 만 것이다.


“싫어!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나 혼자 외롭게 죽기 싫다고!”


허리가 젖혀지도록 발작했다.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너덜너덜해졌다.

맨바닥에 엎드려서, 십 년의 문지기 인생 처음으로 절망했다.


“나는 죽을 때도 혼자냐고 이 나쁜 놈들! 천사 같은 놈들! 사기꾼 놈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인제 와서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네놈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아라!”

“닥쳐! 그런 나쁜 말을 하다니! 네놈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냐?”


가더는 상체를 일으켜서 무시무시한 말을 한 곳을 향해 손가락질하였다.

그곳에는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존재가 떡하니 서 있었다.


“어라?”


칠흑빛 투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앞가리개에 신기루가 씌었나 싶어서 마른세수했다.

그래도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확실히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분명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일어서라 마왕군 놈! 일어서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눈이 부시게 빛나는 은빛 갑옷, 어디선가 본 듯한 문양이 달린 깃발.

남기사와 세 명의 동료.

믿기지 않지만. 마왕을 암살하러 온 네 명의 용사였다.


“너, 너희들은 용사냐?”

“그러면 누구겠느냐! 어서 일어나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오글거리는 대사와 번쩍번쩍한 갑옷.

가더의 용사탐지 레이더가 옳다구나 춤을 췄다.


“하하하! 그렇군. 용사들이 온 건가!”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 웃었는데 용사들이 검을 고쳐 쥐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기분이 좋아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쿵-


누워서 생떼 부리던 일도 잊고 지면을 딛고 일어섰다.

점점 커지는 신장과 함께 무거운 중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윽! 용사님 조심하세요!”


사제로 보이는 여성이 경고했다.

서로 착용한 금속 보호구가 덜그럭덜그럭 떨렸다.

공기 중의 마력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숨 막히는 압박감이 그들 사이에 생겨났다.


“어서 와라. 내가 바로 마왕성의 문지기인 가더 님이시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나를 꺾고 가야 하는데. 과연 너희들이 할 수 있을까?”


가더는 양팔 벌려 그들을 환영했다.

철제 투구 사이로 붉은 안광이 빛났다.

그러나 환영 인사와 다르게 압도적인 살기에 남기사의 손이 떨렸다.

그래도 남기사는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검을 놓지 않고 있었다.


“좋다. 도망치지 않은 배짱을 높이 사도록 하지.”


가더는 땅 위에 솟아있는 막대를 잡았다.

거대한 땅울림과 함께 대지가 갈라졌다.


"무슨!"


남기사가 외쳤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배틀 엑스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무려 이 미터가 넘는 거대한 도끼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딱 봐도 흉흉한 기운이 감돌고 커다란 도끼를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들었다.


“게일, 비켜!”

“호오, 마법사인가.”


가더의 붉은 안광이 빛났다.

여성 마법사가 가더와 남기사 사이에 끼어들었다.

은연중에 문지기의 무력을 남기사가 감당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거다.


“크크큭.”


가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신장이 백 칠십도 못 되는 작은 마법사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실망스러웠던 사 년 전과 다르게 이번 세대는 싸울 의지가 가득해 보인다.


“너희는 정말 최고다···.”


이 순간 사 년간의 외로움이 보답받았다.

작게 혼잣말한 투구 속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최대한 눈물을 투구 밑으로 쏟지 않기 위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죽어도 여운은 없어···.”


지독한 외로움 끝에 찾아온 달콤한 과실.

제발 좀 제대로 싸우라는 마왕님의 명령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 여기까지 도달한 보상으로 너희에게 선공의 기회를 주겠다. 내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낸다면 보내주도록 하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고 단 한 번의 위기도 없는 문지기 가더.

안 싸우고 보내준 적은 있어도 싸움에서 진 적은 한 번도 없다.

가더는 양팔을 활짝 벌려서 용사에게 선공을 양보했다.


“와라! 어서 와서 내게 상처를 입혀봐라! 감히 너희가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는 용사 일행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때문인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한 번 더 소리쳤다.


“후읍. 후읍. 츄릅! 오지 않는 거냐? 오지 않는 거냐!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간······!”


선공을 양보한다고 말했지만, 인내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배틀엑스를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내가 간···”

“슬립(sleep)!"

“아, 잠깐만.”


쿵-


가더는 무릎을 꿇었다.

자신만만하게 외쳐놓고 첫 마법에 당해 체면을 구겼다.


“하, 멍청한 마족 같으니. 게일 님이 너 같은 놈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단 말이야.”


마법사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방금 사용한 마력의 흔적이 가더의 주위에 맴돌았다.

슬립(sleep).

인간의 불면증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치유마법.

그만큼 마법 저항력을 상당히 무시하는 마법이었다.


“그래. 이거 한 방 먹었구나.”


그래도 가더는 무지막지한 마법 저항력으로 저항하였다.

하지만 완벽히 저항한 건 아닌지 비틀거리는 몸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큭. 큭큭큭. 운이 좋았군. 약속대로 너를 제외한 모두를 들어가게 해주마. 하지만 다른 놈들은 벌써 기뻐하지 마라. 마왕님의 힘은 나보다 훨씬······”

“딥 슬립!”

“이런 망할···!”


자칭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문지기 가더.

사 년을 기다린 일이 무색하게 힘없이 쓰러졌다.



*****



‘망할 마법사.’


어둠. 공백.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식의 세계.

이곳에 유일한 지성체는 가더뿐이었다.


‘마왕님에게 또 한 소리 듣게 생겼네.’


가더는 복잡한 심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그가 아는 마왕이라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용사를 놓친 일을 기억하고, 또 마왕님의 성격을 떠올렸다.

수면 상태에서 일어나고 겪을 참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쩌면 밥을 굶길지도.’


일주일간 금식이라는 형벌이라도 내려지면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벌써 마왕님 앞에서 드러눕는 일까지 생각하였다.


‘제발 그러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미래가 어떻든 간에 지금 걱정하는 일은 무의미했다.

수면 상태에 빠진 의식 안에서 걱정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밥을 굶기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마족은 신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대비하는 일이었다.


‘스테이터스 온.’


손을 뻗어서 스테이터스 창을 불렀다.

스테이터스란, 모든 인족이 받은 신들의 축복이다.


퐁퐁퐁-


하얀빛이 모여서 글자를 이루었다.

드래곤의 형상을 닮은 테두리 안에서 수많은 글자가 나열되었다.


[직업-수호자]

[무력 300]

[맷집 900]

[마법저항 900]


‘그리고.’


스테이터스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 스킬.

그중에서도 특출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 스킬이 있었다.


[고유스킬- 무의식 속 자아, 역경을 극복하는 자]

[무의식 속 자아- 몸이 정신을 잃어도 사고를 계속할 수 있다.]

[역경을 극복하는 자- 한 번 피해받은 공격에 대한 내성이 증가함.]


고유 스킬의 효과가 다시 한번 크게 향상됐다.

그 사실에 흡족하며 마법 내성 목록을 살폈다.

슬립과 딥슬립에 대한 내성이 추가됐다.

새로 갱신된 스테이터스를 닫았다.

가더는 이번 싸움을 떠올리며 한 가지 다짐했다.

다음에 슬립을 사용하는 용사를 만나면 인정사정없이 묵사발 내리라.


‘그런데 다음인가······.’


그런데 벌써 다음 용사를 기다릴 생각 하면 몸에 힘이 빠졌다.

선대 마왕에게 부탁받은 뒤 10년의 세월을 보낸 문지기 생활.

오랜 시간 동안 일했지만 일에 애착이 생기지 않았다.


-뭐? 오늘도 네가 용사를 치웠다고?


그러던 중 오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대 마왕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였다.


-그, 그래 잘했다. 그런데 그렇게 일만 하면 쓰나? 내 것도 남겨··· 가 아니라, 아직 나이도 어린데 휴가라도 가는 건 어때?


‘휴가!’


가더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번갯불처럼 찾아온 깨달음에 환희가 차올랐다.

휴가. 휴가라니.

이 얼마나 감미로운 단어인가.

혼자 외로워서 지친 거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놀고 오면 된다. 심지어 휴가 기간에 대타로 들어온 마족이 문지기 자리를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이딴 업무 얼른 주고···.’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마왕성 안에서 편히 보내자.

-라는 생각으로 행복한 상상을 펼친 그때였다.


‘아. 벌써 깰 때가 됐나?’


무의식의 세계가 일그러졌다.

몸이 잠에서 일어날 때가 찾아왔음을 알았다.

행복한 상상을 접어두고 허공 속에서 중심을 잡았다.

마왕님과 대면할 일이 겁났지만, 휴가를 떠올리며 용기 냈다.

서서히 의식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수면 위로 올라갔다.


번뜩-


현실에서 눈을 떴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건 마왕이 아니라, 차갑고 축축한 흙내음이었다.


“우욱!”


깜깜한 어둠 속에서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어째선지 몸이 흙 속에 파묻혀 있었고 오염된 검은 흙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비릿한 흙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어서 흙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우웩! 에이 씨! 이게 뭐야!”


무사히 흙무덤 밖으로 나오자마자 투구를 내동댕이쳤다.

다리까지 빼자 온몸에서 후두둑 흙이 떨어졌다.

달 아래 드러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투구에 가려졌던 붉은 눈동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오랜만에 세상에 보이는 문지기의 수려한 외모.


“으··· 우욱!”


그러나 투구 밖의 신선한 공기를 만끽할 틈이 없었다.

가더는 손가락을 굽히고 입 앞에 갖다 댔다.

잠시 망설이다가 목구멍 안쪽까지 닿을 정도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우웨에엑!”


목구멍으로 넘어간 흙을 토해냈다.

검붉은 빛이 인상적인 녀석들도 토사물과 함께 나왔다.


“오웨에엑.”


마기가 가득한 토지에 사는 악마 지렁이.

제 존재를 과시하며 꿈틀거렸다.

가더는 왠지 또 속이 안 좋아져서 한 번 더 구역질하였다.


“이런 망할 놈들! 그냥 두고 가지! 왜 땅에 묻고 난리야!”


토해낼 거 다 토해내고 나서야 역정을 냈다.

감히 자신을 잠재운 마법사의 얼굴이 또 떠올라서 방방 뛰었다.


“우씨. 만약 도망쳐서 나오기만 해봐. 아주 그때는 나도 봐주지 않고 험한 꼴을···”


어설픈 묏자리를 짓밟아서 망가뜨렸다.

그게 누군가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밟았다.

꿈틀대는 악마 지렁이도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열심히 묏자리를 훼손하던 중, 사타구니를 스치는 차가운 감촉은 느꼈다.


“젠장! 아직도 꿈틀대잖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잔뜩 쥐어뜯었다.

멀쩡했던 갑옷에는 검으로 뚫린 구멍이 있었다.

구멍 안으로 악마 지렁이가 들어온 게 분명했다.

속옷 안에서도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 이런 망할 놈들이···.”


모멸감과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었다.

콧바람을 ‘흥’ 불자, 기다란 녀석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바닥을 가득 채운 생명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 씨! 얼른 이 일을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몸을 부르르 떨고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용사도 해치웠을 시간이다.

마왕에게 혼나든 말든 간에 당장 얼굴을 봐야 했다.

마왕성이 아닌 장소에서 휴가가 절실했다.


“이봐! 대타 좀 구해봐!”


문 앞에 서서 설렁줄을 흔들었다.

팔짱을 낀 채로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나와?”


가더는 미간을 찡그렸다.

평소에 줄을 잡아당기면 삼십 초 안에 담당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오 분이 지나도 고개조차 보이지 않는다.

원인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삐져서 그런 건 아니겠지.’


마왕님바라기가 들었으면 뺨 맞을 말이었지만, 생각보다 삐졌을 가능성은 컸다.

그래서 가더는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했다.

과연 오늘은 저녁밥을 무사히 먹을 수 있을지···.

이에 대해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안 돼!’


마왕님 성격이면 백 퍼센트다.

이대로라면 굶게 된다.

하지만 굶는 일만은 안된다!

어떻게든 용서받을 방안을 검토하며 다시 한번 줄을 잡아당겼다.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엎드려서 싹싹 빌겠다는 생각까지 갔다.

마왕성 최강 문지기인 가더가 밥 앞에서 자존심 따윈 켈베로스에게 던져준 그때였다.


쾅! 콰광!


“어?”


큰 소리가 났다. 마왕성 꼭대기에서 들린 폭발음이 점점 코앞으로 다가왔다.


콰앙!


“어어?!”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소리가 났다.

이내 마왕성이 황금빛에 둘러싸였다.


“뭐야? 무슨 빛이···.”


빛이 가라앉자 황량한 풍경이 드러났다.

한 번 벌린 입을 도저히 다물 수 없었다.


툭. 투두둑-


온갖 파편이 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마왕성의 일부였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마왕성의 존재가 온데간데없었다.

가더가 서 있는 위치를 기점으로 마왕성이 사라졌다.


“어?”


대신 황폐한 공터만이 눈앞에 자리하였다.

하얗게 백지가 된 가더의 머릿속은 현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을 어려워하였다.


“내 저녁밥은?”


그러다 뱉은 말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몇 번이고 현실 부정하며 공터를 바라보았다.

한참 전에 끊어진 설렁줄을 손에 꼭 쥐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 저녁밥은 없다.

문지기 가더 타나토스는 오늘, 집과 저녁밥 그리고 일자리를 잃었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음···! 용사의 테러로 직장을 잃은 문지기! 과연 그는 무사히 저녁밥을 먹을 수 있을까···!


작가의 TMI: 마계-타이타닉 대륙. 인간계-센츄어리 대륙. 문지기 가더는 갑옷을 입으면 키가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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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화. 길 +1 22.11.02 406 7 13쪽
4 3화. 마왕성 문지기 22.11.02 586 6 24쪽
3 2화. 마왕성 문지기 +4 22.11.01 683 24 16쪽
» 1화 마왕성 문지기 +5 22.11.01 896 24 19쪽
1 프롤로그 +7 22.11.01 1,014 36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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