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J.J.의 책장

더 빌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J.J.
작품등록일 :
2021.01.24 01:50
최근연재일 :
2021.03.16 10:26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1,255
추천수 :
40
글자수 :
52,943

작성
21.03.04 00:58
조회
87
추천
3
글자
14쪽

계약의 조건

DUMMY

핏물이 말라붙은 흙이 바람에 바스러져 날아갔다. 아리엘은 그것을 말없이 쳐다봤다.

하얀 머릿결이 바람에 날려 그녀의 얼굴을 덮어댔지만 그녀의 신경은 지금 전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대체 어떻게 여길 빠져나간 거지?"


당연하게도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물음의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대답해줄 이가 없었다.

곁에서 휘하의 다른 타천사들이 사라진 이의 행적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시공간이 뒤얽힌 장소.

이런 곳에서 남은 흔적 같은걸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가벼운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정확한 길을 알고 있는 그녀의 인도 없이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이 곳에서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져 있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그녀는 그가 했던 말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는 빈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선 곤란하다.

그분의 계획에 장차 방해가 될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이곳으로 유인해 처리하려던 것이었는데.....

현세와의 접점이 끊긴 이곳은 물리적 법칙이나 개연성을 벗어나는 곳이었다.

때문에 영혼이 방황하더라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설사 그를 찾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곳이었고 이 자리는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선택된 곳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어떤 힘이 작용했는진 몰라도 그녀의 계획이 틀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꼴로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쯤 자신을 씹어 먹기 위해 분노에 활활 타오르고 있겠지.


그 분노가 자신을 넘어 마스터에게까지 향할까 싶어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 일을 주인에게 보고해야 할지 아리엘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스터는 위대한 존재였지만 잘못을 겸허히 용서해줄 이는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슨 벌을 내릴지 상상하자 그녀는 벌써부터 온 몸이 떨려왔다.


"반드시 그 새끼를 찾아내. 그리고 그놈의 머리를 잘라서 내 앞에 가져와."


그녀의 예쁜 입술에서 정반대의 말들이 쏟아졌다.

곁에 있던 타천사들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일그러진 차원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일라리온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티르빙이 의자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잘 차려입은 정장 차림으로 햄버거를 열 개씩 쌓아놓고 야무지게 먹는 그를 점원들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훈훈하면서도 퇴폐적인 이미지의 남자가 걸신들린 듯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있으니 그것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광경이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회갈색 빛이 도는 머리를 틀어 올린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일라리온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정장 차림이었다.

외근이 잦다는 점이 반영된 바지 차림의 정장은 그녀를 스타일리시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줬다.

그녀가 무인 주문대에서 주문을 마치고 일라리온의 옆에 앉았다.


막 일곱 번째 햄버거를 먹으려던 일라리온이 입을 크게 벌리고 옆을 흘깃 바라봤다.

여자가 일라리온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햄버거 열 개 먹는 거 첨 봐?"


일라리온은 대뜸 여자에게 반말을 던졌다.


"아니오,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왜 쳐다보는 거야?"

"보고 싶어서요."


일라리온이 햄버거를 베어 먹다 말고 인상을 찌푸리며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뭔데, 다단계야?"

"아니오, 그런 건 아닙니다."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은 일라리온이 껄렁껄렁한 표정을 지었다.


"단답형으로 말하지 말아 줄래? 대화 이어가기 힘들거든?"

"죄송합니다. 말투가 원래 이래서요. 확인할 게 있는데 당신이 일라리온인가요?"

"그래, 내가 일라리온이라는 사람인데, 그쪽은 무슨 볼 일이야?"

"루키펠 님의 지시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일라리온이 여자를 아래위로 노골적으로 훑었다.


"뭐야, 비서가 여자였어?"

"보통 여자 아닌가요?"

"아니 나는 남자를 기대했는데."

"바꿔드릴까요?"

"이제 와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나 식사해야 하니까 기다리든 너도 햄버거를 먹든 알아서 해."

"이미 주문해 뒀습니다."


때마침 띵동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갔다.

일라리온이 햄버거 하나를 더 먹고 콜라를 소리 내어 마신 다음 의자에 등을 걸쳤다.


"어우, 이제 좀 살겠네."

"햄버거를 좋아하시나 보죠?"


포장봉투를 든 여자가 다시 옆자리로 걸어왔다.


"맛있잖아. 근데 포장해가게?"

"저는 테이크아웃을 선호합니다. 맛있는 건 다른 것도 많은데요."

"누가 그걸 몰라? 맨날 비프스테이크 썰 순 없잖아. 돈도 없는데."

"돈이라면 저한테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 내가 햄버거를 먹기 전에 나타나지 그랬어."

"그건 미처 신경을 못 썼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일라리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서라기엔 뭔가 나사가 한 두 개 빠진듯한 느낌의 여자였다.


"아니 뭐 이런 걸로 사과까지..... 농담이야, 농담. 그나저나 우리 아직 통성명을 못한 것 같은데."

"릴리아라고 합니다."

"답이 바로 나오네. 혹시 기다림의 미학 같은 건 없는 타입?"

"기다림에 어떤 미학이 있죠?"


여자의 대꾸에 일라리온이 애꿎은 입맛만 다셨다.


".....그런 게 있어. 일일이 물어보지는 말고. 이름이 낯이 익은데..... 릴리스랑은 무슨 관계지?"

"제 어머니시죠."

"아..... 릴리스랑? 그럼 그쪽도 몽마야?"

"맞습니다."


일라리온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비틀었다.


"근데 전혀....."

"전혀.....?"

"색기가..... 아니 몽마가 뭔지는 알지?"

"알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릴리아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하자 일라리온이 흐음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일만 잘하면 되니까. 나도 태생을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야. 그래서 여기 온 용건이 뭐야?"

"루키펠 님이 분부하신 게 꽤 많아서 설명해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하필 이 시간에? 태양의 광량이 가장 충만한 이 시간대에?"

"악마라고 해서 낮에 활동을 못하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선크림을 잘 발랐거든요."

"그게 선크림으로 해결되는 일이었어?"


릴리아의 대답을 들은 일라리온이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릴리아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웃으시죠?"

"아니..... 그냥 잠시 딴생각이..... 어째 루키펠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마스터와 세크리터리 사이에 어울리고 말고 가 있나요?"

"당연히 있지. 꽤 괜찮은 조합 같아 보이는 걸..... 지적인 마왕과 나사 풀린 비서라..... 괜찮네. 로맨스 소설로 써도 되겠어."

"로맨스 소설이라..... 그렇군요."


릴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약간 애틋한 듯한.....

그녀가 상상에 빠져들자 일라리온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봐, 현실로 돌아와. 어이, 내 말 안 들려?"


릴리아가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일라리온이 보였다.


"원래 그렇게 말하다 말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냐?"

"아니오. 원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건 특수한 상황이야?"

"조금 특수한 상황입니다."


릴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일라리온이 두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마왕의 매력이 그녀를 단단히 사로잡았나 보다.


"OK,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하시고, 이제 본론을 읊어봐."

"이곳에서..... 말입니까?"

"그럼 뭐 호텔이라도 예약할까?"

"그건 아니지만 좀 그렇군요."

"얘기하는 장소도 격식을 차려야 돼?"

"루키펠 님의 전언을 이런 데서 전할 순 없습니다."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쉰 일라리온이 남은 햄버거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이것 좀 담아줘요."


햄버거 봉지와 티르빙을 든 일라리온이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적당히 배도 채웠으니까 나가지."


일라리온이 앞장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


".....그래서 이걸 날 준다고?"

"별로 맘에 안 드시나요? 신경 써서 준비해봤는데요."

"아니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너무 튀는 거 아냐?"


일라리온과 릴리아의 앞에는 최신식 BMW 로드스터가 대로변에 서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거야 아공간에 넣어두면 그만이고."


일라리온이 검을 들고 주문을 외우자 검이 물질세계를 떠나 에테르 공간으로 사라졌다.


"자 이제 뭐라고 얘기할래?"

".....차도 넣어둘 순 없나요?"

"이 주문이 그렇게까지 만능은 아니야."


차를 손 끝으로 쓰다듬으며 한바퀴 빙 돈 일라리온이 릴리아를 쳐다봤다.


"키."

"예?"

"키 달라고."

".....아!"


릴리아가 던진 키를 일라리온이 보지도 않고 낚아챘다.


"기왕 준 거니까 한 번 타볼까."


그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하이브리드 엔진이 시니컬한 배기음을 토해냈다.

타이어가 바닥을 긁으며 웅웅 거리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뭐해? 안 탈 거야?"

"아, 네."


릴리아가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자 차가 굉음을 내며 출발했다.


"운전하는 동안 다 얘기해."

"알겠습니다. 우선..... 이 차는 당신에게 드리는 겁니다. 루키펠 님의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해주세요."

"내 성격상 차를 깔끔하게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원하시는 어떤 식으로든 사용하셔도 됩니다. 이미 당신의 소유니까요. 서류 작업도 깔끔하게 돼있습니다."

"일처리는 빠릿빠릿하게 하는군."


릴리아가 핸드백에서 장지갑을 꺼내 내밀었다.


"금전적인 부족함이 없게끔 최상의 대우를 약속하셨습니다. 지갑에 들어있는 카드는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됩니다."

"이런 거 나한테 주면 위험한 거 몰라?"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마음 놓고 사용하십시오."

".....복지 하나는 끝내주는군."

"원하는 어느 곳에서든 묵으실 수 있으니 따로 거처는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주 좋은 선택이야. 나는 한 곳에 얽매여 있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일라리온이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엑셀을 깊게 밟았다.

계기판의 바늘이 속도계를 마구 치고 올라가며 로드스터가 웅웅거렸다.


"비싼 차라 그런지 감이 좋네."

"맘에 들어하시는 것 같군요."

"성능이 좋아서 험하게 굴려도 오래 버티겠는데."


어느새 일라리온의 목소리가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면 이제 처리해야 될 일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뭐든 얘기하라고."


릴리아의 음조가 조금 낮아졌다.


"때가 되면 루키펠 님에게 반하는 군단의 수장들을 모두 제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나도 들었..... 뭐? 모두 제거하라고?"

"네, 모두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들은 거랑 얘기가 조금 다른데. 내가 들은 건 거치적거리는 대군주 몇 명을 처리해달라는 것뿐이었어."

"루키펠 님의 의견에 반한 대군주들이 비밀리에 지옥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의견을 조율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언젠가는 이빨을 드러내겠죠. 그때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일라리온이 핸들을 거칠게 잡아끌자 로드스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갓길에 멈춰 섰다.


"아무리 인력 부족이라고는 해도 말이야. 그걸 나보고 혼자 하라고? 그럴 수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지옥을 평정했지. 이렇게 계약에 묶여서 발버둥 치고 있겠어?"

"물론 그렇겠죠. 본보기로 몇몇 대군주를 소멸시키면 굳이 다른 대군주를 손댈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게 휴지에 코 푸는 일처럼 보여?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기인지 너도 알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경계에 있는 자. 결코 불가능한 얘기는 아닙니다. 시간이 충분하니 그동안 차근차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라리온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백미러를 조정했다.


"어쩐지 호화스러운 대접을 해준다 싶더라니, 처음부터 뼛속까지 울궈먹을 생각이었구만."

"루키펠 님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것입니다."

"지옥에 한 자리 꿰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로 대가를 지불해?"

"원한다면 대군주가 될 수도 있겠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악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때려죽여도 없으니까."

"당신의 생각이 그러시다면야."


릴리아가 핸드백을 닫았다.


"때가 되면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복수를 즐겨 주세요."

"용건은 그게 전부야?"

"네. 제가 전할 말은 이게 끝입니다."

"그럼 좀 꺼져봐. 머리 복잡해 죽겠으니까."


일라리온이 운전대에 팔을 걸치며 머리를 박았다.

릴리아가 일라리온을 힐끔 보며 미소 지었다.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길."


그 말을 남기고 릴리아가 검붉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일라리온이 바람에 흩어지는 그녀의 흔적을 바라보다 이죽였다.


"기분 전환이라니..... 지랄 쌈 싸 먹고 있네."


로드스터가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고속도로 저 편으로 사라졌다.


작가의말

일라리온은 호구인걸까요?

루키펠의 손에 이대로 놀아날 것인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더 빌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은 아무때나입니다. +1 21.02.17 89 0 -
10 데이브레이크 21.03.16 52 1 14쪽
9 두 명의 천사 21.03.09 48 1 13쪽
8 움직임 21.03.05 62 2 12쪽
» 계약의 조건 21.03.04 88 3 14쪽
6 성당의 신부 21.02.26 84 2 12쪽
5 마왕의 독대 21.02.22 89 3 12쪽
4 비스포크 21.02.18 110 5 13쪽
3 옛 연인 +1 21.02.18 164 6 12쪽
2 계약 +1 21.02.17 243 7 13쪽
1 시작과 끝 21.02.17 313 1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