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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게으르고 욕망은 부지런하다.

의자 밑에 코딱지

웹소설 > 일반연재 > 시·수필, 중·단편

휘내림
작품등록일 :
2017.05.07 21:12
최근연재일 :
2022.06.03 14:46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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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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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17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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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밑에 코딱지

DUMMY

여수시 국동. 구봉초등학교로 향하는 오르막길. 오르는 도중에 성지 슈퍼가 보였다. 이 동네에 점빵 다음으로 생긴 작은 가게였다. 이 슈퍼 앞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슈퍼 앞에는 작은 오락기가 있었다. 슈퍼를 보던 누나가 아줌마 몰래 동전을 빼서 오락을 하던 내게 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마지막 보스까지 갈 수 있었다.

추억에 목마른 나는 슈퍼에 들어갔다. 썰렁하게 진열된 물건들. 습한 시멘트 냄새와 양념 분쇄기에 남은 고추장 찌꺼기내가 났다. 테레비를 향해 놓여진 소파. 앉아 있는 흰 머리의 아주머니. 어쩐지 낯익은 것을 바라보는 표정. 긴가민가 하는 눈치였다. 한 번만 지나가는 손님인 척 가게를 훑어봤다. 그리고 마시고 싶지도 않는 식혜를 집었다. 언제나 마트보다 몇 백원 비싼 가격을 냈다. 가게를 나가는 걸음 뒤로 시선이 느껴진다.

슈퍼 앞 허름한 마루에 앉았다. 빗물과 햇볕에 탈색되어 있다. 담뱃불이나 모기향에 그을린 자국도 보였다. 옆에는 빈 소주병이 보인다. 딸기코 아저씨가 깍두기 한 그릇 안주 삼고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딸칵. 차가운 식혜를 한 번에 들이켰다. 머리가 띵했다.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그때. 점빵에 찌든 냄새가 패부 깊숙히 들어왔다. 골목을 바라보던 눈앞이 아득해졌다. 잊고 있던 오래되고 복잡한 감각이 솟아났다. 과거만 존재했던 그 냄새. 냄새 하나에 압축된 추억. 머리에 피가 빠져나간다. 마루에 손바닥을 짚었다. 눈을 감았다.

옥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부채처럼 펼쳐진 집들이 보였다. 옥상마다 조개의 개지 같이 붙어있는 파란 물탱크. 힘겹게 오른자는 그 수고로운 만큼 높은 곳에 살 수 있었던 달동네였다. 너무 가팔라서 어르신 무릎팍을 모조리 작살냈다. 그곳 첫 번째로 높은 골목에 전빵이었다.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킁킁! 매일 코를 훌쩍이며 일어났다. 꽉 막힌 코. 입으로 부족한 숨을 쉬었다.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휴지를 찾았다. 얼굴을 다 덮을 만큼 뜯어 반을 접고 코를 풀었다. 바람이 귓구멍으로 나올 정도로 힘을 줬지만 코는 뚫리지 않았다. 고막만 따끔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누나, 형과 함께 한 밥상에 앉았다. 보고 싶은 만화 영화 대신에 아침 연속극을 틀어 놓은 할머니.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만이 누리는 권리였다. 연속극에서는 툭하면 질질짜고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저질이 느린 사람은 할머니 뿐이었다.

된장국에 밥을 말았다. 얼마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켰다. 그러다 밥 한 톨이 입천장으로 들어갔다. 컥컥 거렸다. 거슬리는 이물감. 밥 한 톨은 알박기를 시전했다. 안 그래도 가득찬 콧물 속에 밥알까지 들어가니 너무 불쾌했다.

밥을 다 먹고 가방을 챙겼다. 전빵을 보던 할아버지에게 용돈 300원을 받았다. 300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문구점까지 뛰었다. 가벼운 주머니가 요란하게 짤랑거린다. 문방구에 들어섰다. 100원짜리 아폴로를 하나 사먹었다. BB탄 총을 주는 뽑기도 했다. 꽝. 코묻은 100원이 증발했다. 남은 100원으로 메탈 슬러그를 했다. 내가 제일 잘하던 게임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실력을 뽐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하나 둘 떠났다. 문방구 시계가 8시 27분을 가리켰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고 뛰었다. 대신 어떤 잡놈의 자식이 내가 하던 자리를 잽싸게 꿰차고 이어서 게임을 했다. 한구탱이 쳐주고 싶었다. 앞으론 끄고 다녀야지.

미닫이 문을 열었다. 킁킁! 차가운 교실 공기에 코를 훌쩍였다. 콧물이 흐르지 않도록 쎄게 들이마셨다. 눈알이 빨려 들어갈 정도였다. 마침 콧물이 밥알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크아! 쾌감! 코가 시원하게 뚫렸다. 코물리에로서 이 맛에 소견은 이렇다. 뒤로 넘어간 콧물은 여름 한 나절 동안 녹은 제리뽀에 향과 맛을 빼고 꿀떡 삼킨 맛이다. 앞으로 흐르는 파랗고 끈적끈적한 콧물은 멍개 내장를 초장 없이 삼킨 맛이다. 만약 그때 토를 했다면 절반은 아침밥이고 절반은 콧물이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뻥 뚫렸던 코가 금세 차올랐다. 콧물이 흘렀다. 손등을 올렸는데 소매에 콧물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어깨와 팔에도 붓으로 획을 그은 모습으로 콧물이 굳어 있다. 코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하얀 흔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콧물은 끝도 없이 질질 흘렀다. 닦다보니 코 아래가 건조했다. 따갑고 근질근질했다. 미치도록 답답하고 불쾌했다. 코를 뜯어내버리고 싶었다.

"아, 더러워!"

더러워? 왼쪽에 앉은 여자애가 짓거린 한 마디에 부끄럽고 화가났다. 말 없이 여자애를 노려보다가 콧물 묻은 손을 뻗어 어깨를 쓰윽 문댔다. 콧물을 문대자 여자애가 어깨를 뒤로 빼며 비명을 질렀다. 코묻은 손을 들어 올렸다. "문대 분다". 여자애는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수업 시간 내내 콧물이 흘렀다. 양손은 이미 콧물 범벅이었다. 뜯어온 휴지는 몇번을 접어 썼는지 모른다. 헉헉 거리며 입으로 숨을 쉬었다. 이처럼 무거운 숨은 없을 것이다. 결국 손가락으로 콧물을 팠다. 파고 나면 손가락 끝에 이슬처럼 콧물이 맺혔다. 이제 문댈 곳은 단 한 곳. 의자 아래로 손을 쓰윽 넣었다.

점심을 먹을 때가 왔다. 의자를 책상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 위에 가방도 올려 놓는다. 깔끔한 마무리다. 나도 의자를 거꾸러 놓았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콧물이 겹겹이 농축되어 암록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이었다. 고개를 요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폈다가 가방을 얹었다.

며칠 후. 과학 시간이었다. 4명씩 조를 짰다. 실험을 위해 준비물로 사이다가 필요했다. 내 옆에 앉았던 여자애가 사이다를 가져왔다. 초록색 유리잔에 사이다를 담고 어떤 실험을 했다. 실험이 끝나고 사이다가 남았다. 조원끼리 나눠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여자애가 나만 사이다를 주지 않았다. 문대분다의 앙금인 것이다.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깟 사이다 쯤이야 우리 전빵에 몇 상자는 쌓여 있었다. 그러나 서운했다. 아니 기분 참 더러웠다. 다른 세 명은 다 마시고 있는데 나만 못마신 것이다. 소외감을 느꼈다.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패주고 싶었다.

다시 며칠이 흘렀다. 자리를 바꾸는 시기가 왔다. 선생님이 정해준 것인지 뽑기로 뽑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모두가 자리를 바꿨다. 대략 키가 작거나 눈이 나쁜 아이는 앞에 앉았고 키가 크고 눈이 좋은 학생들은 뒤에 앉았다. 나는 뒤에 앉았다. 시력도 나쁘고 키도 그리 큰 것도 아니지만 공부를 잘 안 하고 떠들어대서 선생이 뒤에 앉혔다.

새로 앉은 책상은 어느 조각가가 파놓은 작품 수 점이 각인되어 있었다. 또 어느 현대 미술가가 그려놓은 해석 불가능한 추상적인 그림들도 그려져 있다. 그리고 어느 비관주의자가 이 학교가 얼마나 더러운지에 대한 악평도 있다. 나도 커터칼로 책상을 조각하고 교과서에 낙서하고 종이를 접으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됐다.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집으로 갈 시간이다. 모두가 책상위에 의자를 뒤집어 놓았다. 기계적으로 가방을 올려 놓았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전에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 그 자리에는 사이다를 주지 않았던 그 여자애가 서있었다. 그여자애도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자 밑에 묻어있는 암록색을 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칠판에서 벗어나 산만해지는 시간. 옆에 앉아 있던 어떤 고마운 자식이 의자를 보며 외쳤다.

"코딱지다! 코딱지다!"

모두의 고개가 소리를 향한 나침반이 되었다. 코딱지를 보고자 하는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천사소녀 네티인지, 프리큐어인지 예쁜 여아용 가방은 석화된 콧물과 닿은 사실로 무가치하고 더러운 쓰레기가 되버렸다. 다시 쓰기엔 굴욕적인 물건이 되버린 것이다. 내가 봐도 너무 끔찍했다.

지금의 사대강보다 더 진하게 오렴된 암록색의 콧물은 벌꿀의 로얄 제리처럼 완전 농축되어 의자의 재질과 하나가 되어가지곤 그냥 그 자체가 아에 그냥 완전히 그냥 아주 그냥 의자 일부분이 되버려서 틈도 없이 도색이 되버려서 아주 100% 효율로 흡수가 되버려서 어느 물감을 섞어도 저 색만큼은 따라할 수 없을 만큼이어서 초록을 사랑하는 어느 화가가 어디서 저런 색을 담은 물감을 구했습니까? 상연이 선생님?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고개를 숙이며 애걸 할 것 같은 그런 색이었다.

가방에 코딱지가 묻은 것을 들켜버린 여자애는 코딱지가 아니라며 부정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은 신나게 코딱지가 묻은 의자와 가방을 보며 놀렸다. 여자애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누구의 코딱지인지에 대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길냥이보다 은밀하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식당으로 질주했다. 머리가 내 턱보다 아래에 있는 저학년을 재치고 식판을 들었다.

미역국에 밥을 말았다. 뜨거웠다. 습관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다. 꿀떡꿀떡 콧물 넘어가듯 잘 넘어간다. 말아먹는 것 하나는 잘 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이 꿈이었다. 다 말아먹은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보다 빠르게 교문을 벗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테레비에 게임기를 연결했다. 친구에게 빌린 게임팩을 끼어 넣었다. 모든 걸 잊고 씬나게 게임을 했었다. 그리고 그 날에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 삭제 했다.

마루에서 손바닥을 뗐다. 가벼워진 깡통을 화단에 던졌다. 좀 더 올라가 전에 살았던 집에 가봤다. 낯선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가봤다. 생각보다 작았고 낯설었다. 이곳에 다녔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대충 둘러봤다.

보고 만져도 가물가물한 추억이다. 그것이 냄새 한 방에 생생히 떠오른 것이 참 신기했다. 만약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의자 밑에 코딱지와 서있던 여자애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작가의말

 햄릿이 위텐버그에 유학하면서 영향 받은 프로테스탄트주의가 햄릿의 인생관과 내세관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에 대한 레포트로 한 동안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A4 10페이지 분량을 냈는데. 이번에는 미술치료에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회화의 기술 감상문 써오라고 한다. 수필 은 매주 써야 하고. ㅠㅠ 이놈의 학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40 대포알.
    작성일
    18.06.14 15:28
    No. 1

    고개가 나침반이 되었다, 가방이 쓰레기가 되었다 이 문단은 작가님도 쓰시고 으쓱 하셨을듯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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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170년 미래전쟁 (1장) 17.08.10 70 1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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