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귀족과 마차
“신관님들 그럼 불만 없는 겁니다?”
“···.”
신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민이 속인 것도 아니고, 백작의 아들이라는 나를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으니 당장 죽어도 할 말 없었다.
“침묵은 동의죠?”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은 그나마 가장 자비로운 행동이라고 라인하르트가 그렇게 말했다.
“루나, 너는 어때?”
그래도 루나에게는 마지막으로 물어봤다.
“고위신관님이 저런 꼴을 당하는 슬프지만 그래도 사장님에게 해를 끼치려 했으니 어쩔 수 없어요.”
루나는 앞부분에서는 힘이 없었지만, 내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다 됐습니다.”
라인하르트와 기사들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고생했습니다. 레아님도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도움을 주는 레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베린님도, 미아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아, 그리고 그냥 레아라고 불러주세요.”
레아는 마차 문을 열어주며 싱긋 웃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정도 어리긴 했는데, 웃는 모습만큼은 루나만큼 어려 보였다.
“하지만 말을 놓기에는···.”
“뭐 어때요. 우리 미아의 약혼자라는데.”
“콜록!”
옆에 있는 루나가 ‘약혼자’ 라는 말을 듣자마자 콜록 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침을 잘못 삼켜서 사례가 들린 것뿐이에요.”
나는 마차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몸을 풀고 있는 미아의 모습이 보였다. 폭탄 한방 투하한 여자 치고는 되게 아무렇지 않아 보여, 주변 사람들이 과민반응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미아는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집어넣겠습니다.”
기사들은 꽁꽁 싸 매인 아델리아를 들어올렸다.
“하나 둘!”
그리고 레아가 타고 있는 마차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델리아 님이 짐 취급을 받다니.”
루나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자리에서 죽이면 또 관계가 껄끄러워지잖아.”
그러니까, 아델리아의 처분을 놓고 고민을 해봤을 때, 라인하르트의 말처럼 죽여 버리면 참 깔끔하고 좋았는데, 뒷일도 생각해야했다. 루나도 옆에 있는데 굳이 교단하고 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걸 이용해서 도움을 받으면 모를까. 그래서 일단 데려가기로 했다. 레아가 타고 온 마차에 일단 묶어서 태우기로. 나중에 정신 차려도 레아는 귀족 여성이니까 잘 설명해줄거라 믿었다.
“라인하르트님. 지금 가기에는 늦었을까요?”
아까 막 전야제를 시작했는데 시간이 좀 많이 지났기에 이미 끝나지 않았을까 싶어 물었다.
“아직 입니다. 이제 막 캠프파이어를 시작하겠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할 거 제대로 하자. 그런 마인드로 살아왔으니. 이번 일도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나았다.
“그럼 더 늦기 전에 도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와 루나. 라인하르트와 기사들, 베린과 란벨가문의 자매. 거기다가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신관들까지.
“무슨 행렬같이 되었네.”
인원이 확 불어났다.
“그런데 한성님과 신관님의 말은?”
베린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걸어가려고 했죠.”
그러자 베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백작이 되실 분이 걸어가다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베린의 말에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렸다.
“그렇지요. 귀족으로서 품위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희 기사들의 말이라도 타시지요. 저희가 걸어가겠습니다.”
기사들은 자신의 말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에게 말을 탈 것을 권유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빼고.
“말은 고맙지만 저는 말을 처음 타봅니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간 경마공원에서 은퇴한 말들을 타본 적 있고, 놀이공원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은 타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그냥 직원이 끌고 다니는 말 위에 올라타고 있을 뿐, 그걸 승마라고 할 수 없었다.
“예? 그 시대에는 말을 안타고 어떻게 다닙니까?”
베린의 물음에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가장 중세스럽게 대답했다.
“말의 힘이 아니라 마력으로 움직이는 마차를 조종합니다.”
그 말에 라인하르트가 ‘헛’ 하고 웃었다.
“놀라운 시대입니다. 갑옷도 안 입고 말도 안타고 기사들이 마차를 타고 마상전투를 벌이는 시대라니.”
그 말에 서로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창질하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게임으로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제 뒤에 태워도 되긴 하는데요.”
미아는 자신이 타고 있는 흑마의 엉덩이 부분을 톡톡 쳤다.
“그건 너무 모양새가 안 나오잖아.”
베린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처럼 한 소리를 하자 미아는 ‘칫’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제 마차에 같이 타시지요.”
그러자 이번에도 레아가 좋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니, 어떻게 생판 모르는 남녀가 같이 마차를 탑니까?”
이번에는 레아를 사모하는 베린이 경악했지만,
“베린님, 우리 언니와 한성님이 같이 마차에 탄다고 질투하시는 건가요?”
아까 한방 먹은 미아가 이번에는 베린을 역으로 찔렀다.
“질투라니! 나는 그냥 남녀간의 도리에 대해···.”
“아. 그런 분이 우리 언니를 그때 그렇게···.”
“됐다! 한성님이 나쁜 분이 아니니 괜찮겠지!”
미아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게 있는지 베린은 결국 한 대 더 맞고 나서야 내가 마차를 타는 것을 허락했다.
“말을 타는 것보다는 격은 떨어지지만 마차를 타는 게 걷는 거보다 낫겠지요.”
라인하르트 역시 마차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이거 되게 작네요.”
마차는 화려했지만 크기는 두명 정도가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았고, 영화에서처럼 마부 옆자리에 타려고해도 마부 자리도 1인승이었다. 루나를 걷게 한다고 해도 나와 레아 그리고 마차에 실린 아델리아까지 타기에는 마차가 너무 비좁았다.
“왜요? 다 못 탈까봐요?”
내 생각을 읽었는지 레아는 싱글싱글 웃었다.
“예.”
“하긴. 이건 2인승인 마차라서 조금 비좁을 수 있겠네요. 그래도 방법이 있답니다.”
레아는 놀랍게도 묶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델리아를 바닥에 눕혔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발을 올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그 다음에 묘한성님께서 앉으시고, 그 위를 같이 다니시는 신관님께서 무릎 위에 앉으면 되겠네요.”
아무리 이 사람이 죄인취급 받는다고 해도 그래도 고위신관인데 저렇게 밞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
루나는 사색이 된 채로 그걸 보고 있을 뿐, 그 모습을 못 보고 있는 신관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했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밞는다는 게 기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에 레아는 여전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리 신관이라도 귀족은 건들면 안 되는 법. 이정도도 고위신관이니까 나름 배려해줬다고 생각해요. 원래라면 마차 뒤에 목매달아서 갔을 텐데.”
웃는 소리로 저런 소리하니까 사이코패스 같았지만, 귀족의 입장에서는 아델리아의 행동이 말도 안 되는 행위인 듯 했다. 내가 귀족인지 몰랐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제 기분이 이상하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죠.”
내가 좀 껄끄러워하자, 레아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로우시군요.”
“언니. 한성 님은 남을 돕는 걸 좋아하는 착한 분이야. 저 곰···아니 베린 님이 체스대회에서 이긴 것도 한성님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거고.”
“미아! 그런 말을 왜 여기서 해!”
미아는 나를 칭찬함과 동시에 베린은 자비 없이 까버렸고, 베린은 그와 동시에 얼굴이 새빨개져 미아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레아는 그런 베린을 보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아, 베린 님의 체스 실력이 갑자기 확 올라 간 데에는 한성님의 도움이 있었군요. 그래도 전 노력하는 베린 님의 모습이 좋답니다.”
레아는 웃으면서도 마지막에 베린에 대한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하하!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베린은 정말 좋은지 헤벌쭉이 된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까 아무렇지 않게 발로 밞던 모습과 베린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니 연악해 보이는 여자가 괜히 란벨가문의 수장이 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한성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다른 방법을 써볼까요.”
“진짜 목매달고 끌고 가실 건 아니죠?”
내가 혹시나 싶어 묻자 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되나요?”
“아니···.”
“농담이랍니다.”
전혀 농담이 아닌데 농담이라고 하니 그것 나름대로 무서웠다.
“기사 분들 죄송한데. 이 여자 좀 마차 뒤 트렁크에 넣어주시겠어요?”
레아는 실신한 아델리아를 발로 툭툭 찼다. 그런 레아도 대단했지만, 깨지 않는 아델리아도 대단했다.
“예.”
기사들은 아델리아를 들어 올린 다음, 마부가 열어주는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트렁크도 살짝 작았고, 짐도 좀 있었기에 아델리아의 허리를 몸을 좀 구겨 넣어서야 들어갔다. 아델리아는 땀을 좀 흘릴 뿐, 놀랍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장님. 감사드려요.”
루나는 까치발을 들더니, 나에게 귓속말로 감사를 표했다.
“네 얼굴보고 그렇게 요청한 거야. 아니면 나도 신나게 밞았어.”
나는 그럴 생각이 없지만 그냥 루나에게는 그렇게 둘러댔다.
“네. 정말 감사드려요. 고위신관님이 저 때문에 저런 고초를 겪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루나는 성녀후보가 아니라 지금 당장 성녀로 뽑혀도 될 만큼 착했다.
“네 탓이 아니라 저 여자가 너무 무리수를 둔 거니까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루나는 완전히 수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듣고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는지 아까보다는 표정이 괜찮아졌다.
“자. 이제 잠그겠습니다.”
마부가 트렁크를 닫고 자물쇠를 잠근다고 알렸다.
“숨 막히면 어떻게 하죠?”
나는 다시 자물쇠로 잠기는 트렁크를 바라봤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좋아하는 신 곁으로 가는데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요?”
레아는 무서운 소리를 하면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자. 이제 자리가 만들어졌으니 오세요.”
아델리아가 숨 막혀 죽지는 않겠지. 죽으려 하기 전에 깨지 않을까?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비어 있는 레아 옆자리에 앉은 다음,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 안 탈거야?”
루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사래 쳤다.
“에이. 가장 어린 신관인 제가 어떻게 타요?”
다른 신관들은 걷는데 자기는 마차를 타는 게 미안했는지 타지 않았다.
“신관 루나. 그냥 타세요.”
“맞아요.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하지만 다른 신관들이 오히려 루나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나는 거절하려다가 다른 신관들의 ‘넌 눈치도 없냐?’ 라는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건 나랑 잘 되라는 풋풋한 감정이 아니라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루나보고 해결해달라는 애원에 가깝다는 것을, 현대인인 나도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엘랑의 신관은 남자를 꺼려한다고 들었는데 억지로 권할 필요 있을까? 그냥 걸어가게 해줘도 될 것 같은데.”
미아는 거기에 아무렇지 않게 기름을 부어버렸다.
“후우.”
루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더니, 점점 붉어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관 루나. 귀족 분들과 마차를 같이 타는 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알고 마차에 타겠습니다.”
그렇게 루나는 내 무릎 위에 살포시 앉았다. 루나의 키가 작았기에,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고, 무릎에 앉았음에도 무겁다라는 느낌이나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 하나도 안 들 정도로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한성 님 제 옷 때문에 더우면 말씀하세요. 조금 들어올려서···.”
“아냐! 괜찮아. 이대로 있어도 돼.”
루나가 몸을 살짝 일으켜 자신의 옷을 조금 걷으려고 했기에 내가 만류했다.
“루나 너도 불편하면 말해. 자세 바꿔줄테니까.”
나는 루나의 편의를 봐주려고 했다. 정 안되면 다리를 벌려서 그 안의 공간에 앉아도···아니 이것도 좀 자세가 이상하구나.
“아뇨.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요.”
루나는 놀랍게도 내 권유를 듣자마자 무릎 끝에 앉아 있는 대신 오히려 나에게 기대듯 더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그냥 이대로 있어도···.”
왜인지 마지막은 여운이 느껴졌다.
“다 되신거죠? 출발해도 될까요?”
레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발해도 된대요.”
레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사들은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럼 이제 출발합니다!”
드디어 기사들과 신관을 대동한 마차 행렬이 축제가 한창인 도시로 향했다.
- 작가의말
덥네요!
일요일이라 평소 연재시간보다 조금 일찍 올려봤습니다.
월요일 부터는 다시 오후 11시 반쯤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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