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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곡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어머니의 열무김치


어머니의 열무김치

 

오늘은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셨습니다. 

옥상 화단에 심어 놓은 열무를 뽑아다가 십 년 만에 김치를 담그셨습니다. 김치를 담가야 할 여동생은 며칠째 밤늦게 들어오고, 열무는 여기저기 장다리가 쑥쑥 올라오고 곧 꽃마저 피울 기세였습니다. 그걸 더는 못 보겠다 싶었는지, 오늘은 열무를 뽑자 하셨지요.

함께 다듬은 열무를 어머니가 물에 씻고 소금으로 숨을 죽이는 사이, 나는 마늘을 다지고 양파와 미나리 써는 일은 도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고춧가루, 쪽파, 양파, 미나리, 다진 마늘…, 거기에 젓갈을 조금 얹어 열무를 버무리셨습니다.

 

어머니는 늘 나의 뒷모습을 보고 계셨지만, 뻣뻣한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까지도 뒤돌아볼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에게는 내 뒷모습 보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당뇨를 여러 해 앓으시면서 어머니와 종종 마주치게 되었고, 합병증으로 시력이 크게

약화되고부터는 내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눈이 흐려질 때마다 어머니는 세상 일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를 놓고 청소와 빨래도 놓고 자식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도 하나 하나 내려놓았습니다. 견디듯 사는 날이 많은 어머니는 우리가 잠시 소홀할라치면 비상소집령을 내립니다. 때로는 '혈압 200'으로. 때로는 '호흡곤란'으로.

 

"맛있게 됐네."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참으로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내가 만든 세상 최고의 요리라도 되는 양 마냥 기뻤습니다. 시집간 동생에게도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한 통 가득 담아 냉장고에 넣고, 남은 김치를 동그란 유리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오늘 저녁은 거의 열무김치로 밥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김치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은근히 살피시던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오늘밤은 어머니도, 나도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잘 것 같습니다. 

                                                                  (전에 적어 놓았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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