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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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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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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0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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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4. 고통을 먹는 자 (5)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5.

문을 열고 들어선 오두막의 내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떨어진 듯, 오두막이란 곳과 동떨어진 공간.

파란 하늘이 있고, 바삭바삭 밟히는 초록색 풀들이 돋아난 너른 들판이었다.

“대련모드처럼 인스턴트 필드로 연결된 거로군.”


<‘가디언즈 네스트’의 마지막 관문에 도전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이곳의 주인이었던 올코너스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스탯이 다음과 같이 변화합니다.>

힘 : 550

민 첩 : 100

지 능 : 80

집중력 : 250

행 운 : 20

근 성 : 60


“올코너스라고?”

처음 듣는 이름이다. 위즈에게 안내만 받았을 뿐, 빌헬름텔은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다.

“그래도 단서가 되는 물건 정도는 주어지겠지.”

빌헬름텔은 인벤토리부터 열어보았다. 퀘스트 아이템 같은 게 들어와 있나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그 시도는 실패했다.


<이곳에서는 인벤토리를 열 수 없습니다.>


인벤토리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유저에게 주어지는 개인 공간.

그게 없다면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벤토리가 아예 없는 자들도 있다.

바로 NPC. 이 게임 속 세상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인벤토리라는 마법 같은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NPC가 그런 걸 사용하려면 가방이나, 주머니 같은 별도의 아이템을 준비해야만 한다.

“시스템 메시지는 ‘올코너스’가 되어 움직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올코너스라는 자의 정체는 NPC. 내가 NPC가 되었다는 거로군. 설마 에픽 퀘스트는 아니겠지?”

과거 레드오션에서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퀘스트가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고난이도의 전투상황을 연출했으며, 어느 것 하나 성공한 사람이 없다.

“섣불리 판단하기는 일러.”

빌헬름텔은 다른 것들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스킬창과 스탯창이었다.

스킬창에는 배운 적도 없는 ‘덫 설치’와 ‘맹독화살’이 들어 있었다.

배우고자 한다면 사냥꾼NPC를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스킬들.

하지만 그는 단시간에 샤프슈터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 두 가지 스킬을 배우지 않고 건너뛴 상태다.

스탯창의 힘 550이라는 수치는, 샤프슈터가 제대로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스탯이다.

이때부터는 바위도 일격에 박살낼 수 있게 된다.

스킬창의 ‘덫 설치’와 ‘맹독화살’스킬, 그리고 550나 올린 힘 스탯. 너무나 노골적인 단서다.

적어도 올코너스라는 자가 뭐하는 자였는지 알아내는 건 쉬웠다.

올코너스는 전형적인 사프슈터 타입의 사냥꾼이다.

“올코너스라는 자가 되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겠다?”

빌헬름텔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처가 되기 위해, 사냥꾼 NPC에게 교육을 받은 그다. 보고 들은 게 제법 되었으니 사냥꾼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 정도는 훤히 꿰고 있다.

그는 무릎앉아자세를 취하며, 바닥에 남겨진 흔적들을 읽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초록색으로 변하며, 많은 정보가 떠올랐다.

10분 전에 지나간 사냥꾼들의 발자국, 인기척에 놀라 도망친 토끼의 흔적. 산새들이 남긴 각양각색의 깃털들. 멧돼지가 파헤친 나무뿌리 등등.

그중에서도 빌헬름텔의 눈길을 사로잡은 정보는, 이곳에 사냥꾼들의 흔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지나간 사람들의 숫자만 20명이 넘는다.”

사냥꾼은 무리를 지어도 3~4명을 넘지 않는다. 사냥이란 게 늘 성공하는 게 아니며, 공평하게 분배해버리면 손에 쥐는 건 푼돈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첫 번째가, 귀족의 사냥에 몰이꾼으로 나서는 경우다.

내키지 않아도 귀족에게 밉보이면 인생이 고달파지기 때문에 빠질 수 없다.

“하지만 북소리도 들리지 않고, 귀족들의 사병도 없어.”

두 번째는, 늑대사냥이다.

가축에게 피해를 입히는 유해한 동물이기 때문에, 늑대의 머리를 잘라오면 영주가 크게 포상한다. 이건 주로 봄에 행해진다. 늑대는 봄에 새끼를 낳아 기르기 때문이다. 새끼 때문에 일정한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때야말로, 늑대사냥의 적기다.

“허나 이 계절은 초가을이야.”

자세히 살펴보면 풀끝이 노랗게 시들어가고 있는 게 보인다. 게다가 파란하늘은 지나치게 깊어 보인다.

“그렇다면 세 번째 경우로군.”

바로 귀한 사냥감이 나타났을 때.

잡기만하면 일 년을 놀고먹을 수 있는, 은빛털가죽의 살아있는 여우가 대표적이다.

“토끼나 멧돼지가 남긴 건 무시하고…….”

빌헬름텔은 평범한 흔적들을 배제해 나갔다. 그러자 땅바닥에는 무언가가 끌린 흔적만이 남았다. 그 흔적에는 아무런 정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걸 잡는 게 클리어 조건인가 보군.”

그는 ‘????’가 남긴 흔적을 따라 걸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빌헬름텔은 혼란에 빠졌다. 흔적이 셋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것이다. 사냥꾼들의 발자국도 세 방향으로 갈렸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지?”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확률은 33%.

빌헬름텔은 다시금 바닥에 손을 대고 흔적을 집중해 살폈다. 그러자 세 가닥의 흔적들에게서 미묘한 위화감이 발견되었다.

바로 깊이.

“여기까지는 마른 땅이었지만, 손가락 한마디 깊이가 파여 있었다. 그렇다면 젖은 땅에서는 더 깊이 파여야 정상 아닌가?”

세 방향으로 나뉜 흔적들은, 지금까지 쫓던 흔적과 같은 깊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이건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야.”

빌헬름텔은 즉시 근처를 수색해 들어갔다. 그리고 길가에서 10m 떨어진 곳에서 꺾인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팔뚝만한 굵기의 나뭇가지는 자신이 매달려도 괜찮을 튼튼한 것이었다.

그런 나무 가지가 꺾였다. 그것도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더 위쪽 가지에 매달렸다가 떨어진 건가?”

그는 나무의 크기를 확인했다. 10m가 넘는 커다란 나무는, 길 위에까지 가지를 내뻗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가상의 존재가 손을 뻗어 길 위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가지에서 가지로 이동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여기 꺾여버린 나뭇가지로 보건데, 힘이 다하여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냥꾼들이 얌전히 따라가기만 한 건 아닐 테고, 위협사격을 하거나 큰소리를 내며 신경을 긁어댔을 것이다. 이게 계속되면 피로가 쌓인다. 사냥감에게 이만큼 저렴하면서, 효과만점인 공격은 없다.

그 때문인지 여기에 난 자국은 조심성이 없이 드러나 있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사냥꾼들을 따돌렸다는 안도감까지 느껴지는군.”

빌헬름텔은 발소리를 죽이며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드문드문 언덕들이 모인 작은 산이 연달아 나타나는 지역에 도착했다.

“여긴……위즈님과 함께 여행한 길이군.”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걸었던 곳인데도 눈치 채지 못했다. 빌헬름텔은 뒤쪽을 돌아보았다. 이곳이 시에니투스 근방이라면, 근처에 만년설을 얹고 우뚝 서 있는 산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엔 그런 산이 없었다.

“산이 없을 적의 시절인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당연하군. 그렇다면 올코너스라는 사람은 얼마나 오래전의 인물인거지?”

점점 에픽 퀘스트의 냄새가 난다. 100년이나 200년 전 수준은 아니리라.

빌헬름텔은 난이도에 플러스(+) 표시가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는 점점 흥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 게임을 접을 생각까지 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에픽 퀘스트의 실마리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그 기회가 자신에게 왔다. 이 순간만큼은 현실의 생활고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에픽 퀘스트를 깨는 순간의 환희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빌헬름텔은 바닥에 남겨진 흔적을 따라 언덕을 넘고 넘었다. 이윽고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바위그늘에 우거진 덤불 앞이었다. 그 속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건, 오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덤불이 흔들렸는데, 바람은 안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서늘한지 오싹할 정도다.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났다. 덤불 뒤에 어디론가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빌헬름텔은 무장을 점검했다.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사냥칼의 일종인 ‘보위(bowie)나이프’가 허벅지에 걸려 있고, 손질이 잘된 철궁과 잘 만든 수제화살 20발이 등에 둘러매져 있다. 손도끼와 가죽을 벗기는 작은 손칼은 덜렁거리지 않게 벨트로 꽉 조여 허리에 매달려 있다.

“좋아. 사냥을 시작해볼까.”

그는 화살을 하나 꺼내어, 시위에 가볍게 얹은 상태로 덤불을 헤치고 들어갔다. 만약 들고 있는 무기가 총이었다면, 개머리판을 어깨에 견착시킨 채 전방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덤불에 가려진 뒤쪽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들어가야 하는 좁은 바위틈이었다. 빌헬름텔은 활을 등에 짊어지고, 보위나이프를 꺼냈다. 석궁이면 모를까 이런 좁은 곳에서는 활을 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사냥꾼이 주요 무기를 봉인 당했다는 뜻이며, 역으로 사냥감에게 사냥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빌헬름텔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사냥꾼에게 불리했지만, 동시에 사냥감을 독점할 기회이기도 했다.

빌헬름텔은 아예 엎드린 채 좁은 틈을 기어서 이동했다. 다행이 좁은 구간은 3분 만에 끝났다. 게다가 문제의 사냥감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

처음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직립보행을 하는 존재가 벽에 기댄 채 비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바닥에 남겨진 고랑과도 같은 흔적이 설명되지 않는다. 상대는 지팡이 같은 것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빌헬름텔은 반사적으로 상대의 하반신을 살폈고, 물결치듯 움직이는 꼬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마치 뱀과 같은 유연한 움직임.

“라미아!”

빌헬름텔의 목소리가 컸음인가, 상대가 뒤를 돌아보았다. 빌헬름텔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살아 움직이는 실뱀인 여자가, 노란 눈동자를-그것도 세로로 쭉 찢어진 홍채를 좁히며 노려보는데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가까이 가면 죽일 거라는-살기까지 쏘아 보내니 더욱 그럴 수밖에. 가상현실 게임이기에 이런 점에서는 지나치게 리얼했다.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절대 게임에 익숙해질 수 없다.

“큭! 하지만 퀘스트를 위해서라면!”

빌헬름텔은 활을 꺼내 화살을 재었다. 그때 라미아 여자가 풀썩 엎어졌다. 그는 활을 겨눈 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라미아 여자가 갈퀴손을 휘둘렀다. 그 엉성한 공격은 빌헬름텔에게 닿지도 못했다.

“지쳤군.”

힘이 빠진 사냥감을 처리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활을 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훤히 드러난 라미아의 부푼 배에 박혀 있었다.

“새끼를……뱄군.”

빌헬름텔은 신음을 흘렸다.

뱃사람들만큼이나, 산사나이들도 이러면 안 된다-저러면 안 된다 하는 터부가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사냥감이 새끼를 뱄다면 잡지 않는 것이다.

사냥꾼은 자연이 베푸는 은혜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

만약 욕심을 부려 새끼고 뭐고 간에 마구 잡아들이면, 사냥감은 씨가 마르게 된다.

“하지만 이건 마물인데…….”

일반 짐승도 아닌데 그런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가.

빌헬름텔은 라미아 여자가 피를 토해내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기엔, 저 피가 너무도 붉다. 가까이 다가가 라미아 여자의 몸을 살피던 빌헬름텔은 등 쪽에 난 창상을 발견했다.

“독화살인가?”

맹독스킬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처에 손이 닿자 독에 대한 저항력이 발동되었다.


<중급 신경독입니다.>

<독에 대한 저항력(70%)으로 이겨냅니다.>


닿는 것만으로 경고 메시지가 떠오를 만큼, 강력한 신경독이었다. 독의 정체를 파악해낸 빌헬름텔은 라미아 여자의 몸이 지나치게 차갑다고 느꼈다. 원래 파충류이니 몸이 차갑겠지만, 새끼를 밴 상태인데도 체온이 낮은 건 이상 현상이다.

빌헬름텔은 즉시 자신의 가죽옷을 벗어서 라미아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라미아 여자가 밖에 남긴 흔적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다. 범위가 넓었기에 그는 풀로 덮어 대충 가려놓기만 했다. 그리고 마른 풀을 베어와 동굴 안에 넉넉히 깔았다.

작은 나뭇가지도 안으로 잔뜩 들여왔다. 밖에는 사냥꾼들이 득시글거린다. 불을 피우려면 연기가 덜나게 피워야만 했다.

빌헬름텔은 겉껍질을 벗겨서, 하얗게 속이 드러난 나뭇가지로만 불을 지폈다.

곧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라미아 여자의 몸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인벤토리만 열 수 있었어도…….”

위즈와 함께 마시려고 사둔 벌꿀술을 떠올리며 빌헬름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미아가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인벤토리에는 해독에 좋은 약초들도 있었다.

“가만있자. 이 동굴 끝이, 위즈님과 함께 들어온 보물방이라면……야광초가 자라고 있겠지?”

빌헬름텔의 얼굴이 밝아졌다. 야광초가 자라는 곳이니, 쓸 만한 약초가 있을 지도 모른다.

허나 동굴 끝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다.

야생들쥐들이 떼를 지어 다리를 물어뜯고, 혼란한 틈을 타 흡혈박쥐들이 배를 채웠다. 무엇보다 스티키 젤로 인한 피해가 컸다. 보위나이프가 벽에 달라붙어버렸고, 화살통까지 잃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무기는 손도끼와 화살 두 개.

옷이 누더기가 되다시피 해서 빠져나왔을 때에는, 체력게이지가 5% 수준에서 간당거리고 있었다. 사냥꾼이 고작 들쥐와 흡혈박쥐에 당해 큰 피해를 입고, 허둥거리다가 스티키 젤에게 장비를 뺏겼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다.

굳이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두고 충분히 상대한다면 적은 피해로 해치울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빌헬름텔은 너무 서둘렀다.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그대로 밀어붙이며 전진했고, 무기로 죽인 들쥐보다 밟아서 터뜨린 쥐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가 서두른 이유는 라미아 때문이었다.

일단 불까지 피워 따뜻하게 해두었지만, 몸속에 퍼진 독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뱃속의 새끼까지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살려놓고 말겠다.”

그냥 활을 쏴버렸다면,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일이다. 라미아는 마물이고, 마물을 죽이는 건 영웅시되는 일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사냥꾼의 금기 때문만이 아니다. 새 생명을 잉태할 존재를 해하면서까지 이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빌헬름텔은 생명공학 계열 연구자로서, 그 누구보다 생의 의미를 깊게 이해한다고 자부했다. 맹독을 가진 독사도, 징그러운 벌레도, 그 생명의 존귀함과 비천함을 재는 잣대는 없었다.

이 같은 생각은 게임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분명 라미아의 얼굴은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로 끔찍했다.

짐승의 눈동자, 수막이 펼쳐진 물갈퀴 손.

살아서 꿈틀거리는 머리카락들.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더욱 혐오스럽기까지 한 괴물.

하지만 그런 괴물이라도 새끼를 배고 있다니, 쉬이 죽일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품고 있는 건 생명. 미래를 살아갈 존재다.

빌헬름텔은 야광초가 피어 있는 공간을 헤집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도에서, 체온을 올리고 독을 중화시키는 약초들이 모아졌다. 그것들을 허리춤에 쑤셔 넣은 빌헬름텔은, 들쥐가 다시 리젠될까봐 서둘러 라미아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곳에는 세 명의 사냥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써 흔적을 지웠지만, 그걸 눈치 채고 쫓아올 정도의 실력자들.

“거봐. 돕는 이가 있을 거랬잖아?”

“이보쇼 형씨. 그 약초……설마 마물을 살리려고 캐온 거요?”

뒤쫓아 온 사냥꾼들의 분위기가 흉흉하다.

원래 산사나이는 그 기질이 거칠다. 그래서 먹을 게 없는 시기에는 노상강도로 돌변하는 자들도 있다. 빌헬름텔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냥꾼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약초를 씹어서 라미아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리고 꺼져가는 불에 땔감을 넣어 다시 되살렸다.

“지금 사람 무시하는 거야?”

성깔 있게 생긴 사냥꾼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빌헬름텔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이 마물은 새끼를 뱄소.”

“뭐? 이 치가 미쳤나. 지금 새끼를 뱄다고 했어? 마물이 새끼를 밴 게 뭐가 어쨌다는 거냐?”

빌헬름텔은 직감적으로 이들이 질 나쁜 쪽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좋은 말로 해결하기는 글렀다.

“우리들의 금기를 잊었소? 사냥감이 새끼를 뱄다면,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 정신 나간 놈아! 이건 마물이다! 그딴 걸 왜 챙겨!”

빌헬름텔은 세 사람이 서 있는 위치로, 그들의 관계를 유추해보았다. 앞에 나선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서로 끊임없이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꽤나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빌헬름텔은 그들이 라미아를 독차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밖에는 아무도 없고, 여긴 우리 넷 밖에 없겠군요.”

“뭐? 웃기지 마라! 여기 입구가 좁아서 우리 셋밖에 들어오지 못했다!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나오지 않으면 입구에 불을 질러버릴 거다!”

그 말을 들은 빌헬름텔은 더욱 확신했다. 입구가 좁다면 한 사람만 들여보내도 됐다. 그리고 불을 질러 연기를 들여보낼 생각이라면 진즉 했어야 한다. 마물에게 반격당해 부상당할 가능성마저 제로로 만들, 기가 막힌 방법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리하지 않았으니, 밖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바보도 아닌데 이러지 맙시다, 이거.”

빌헬름텔은 일부러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마물 따위에게 온정을 베풀긴 싫었소. 그렇다고 터부시되는 일을 저지르면 부정 탈 게 아니오. 그래서 일단 살려놓는 거요. 그게 두렵지 않다면 댁이 죽이시던가.”

“살려놓은 다음엔 어쩌자는 말이냐?”

“당연히 새끼를 낳게 해야지요.”

“그 다음엔?”

“새끼를 낳았다면, 당연히 배가 홀쭉해지지 않겠소? 더 이상 새끼를 밴 게 아니란 말이오. 당연히 죽여도 되지.”

“그럼 새끼는?”

“마물이라고는 하나, 어린 새끼요. 산채로 잡아다가 마법사에게 팔아넘기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요. 태어나서 처음 본 게 우리들이라면, 어미로 알고서 허튼 수작을 부리지도 않겠지.”

빌헬름텔의 이야기를 들은 세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로서는 이런 식으로 부정 탈 일을 피하는 방법을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마법사에게 마물이 낳은 새끼를 팔다니.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한 가지 제의하겠소. 내 고향친구 중에, 레미라까지 가서 마법을 배운 놈이 있소. 그놈을 통하면 꽤 괜찮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텐데……그 일에 동참할 사람이 필요하오. 딱 둘만 있으면 되오.”

그러면서 빌헬름텔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홀로 앞에 나선 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요? 왜 내게 추파를……크헉!”

그는 피를 토하며 엎어져버렸다.

“네, 네 녀석들……어째서…….”

그러자 피 묻은 단검을 닦으며, 뒤쪽의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요. 마물 같이 부정한 것에 관계하면서, 4명이라니……그건 너무 이상하지 않소. 그렇다고 저 자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고.”

“알고 지내는 마법사가 있다질 않소. 우린 그런 대단한 나리들 그림자도 못 봤으니 별수 있나.”

배신당한 사냥꾼은 원통함에 눈을 감지 못했다. 빌헬름텔은 그 눈을 감겨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만남이 좋지 않았소.’

남은 두 사람은 알아서 해독제를 꺼내어, 라미아를 치료하고 불에 기름을 부어 더욱 따뜻하게 해주었다. 모포를 꺼내어 덮어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빌헬름텔은 더욱 정신을 다잡았다. 망설이지 않고 동료를 죽이는 모습을 보니, 이들의 성향은 확실히 악(惡)이다. 그가 먼저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죽어서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들 역시 죽여야 한다.’

빌헬름텔은 그 타이밍을 라미아가 새끼를 낳는 순간으로 정했다.

가장 어수선할 때이며, 곧 황금으로 뒤바뀔 새끼의 존재 때문에 탐욕으로 눈이 뒤집힐 그때를…….

두 사냥꾼이 방심하도록, 빌헬름텔은 활에서 시위를 풀었다. 탄성이 약해졌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혹시 활시위 남는 것 있소? 내건 습기 때문에 못쓰게 되어버렸구려.”

“미안하구려. 나도 이게 마지막이라서.”

“나도…….”

빤히 속 보이는 수작이지만, 빌헬름텔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끼도 화살도 치워놓았다. 누가 봐도 비무장인 상태다.

진통이 시작되는지 라미아가 끙끙대는 소리가 높아졌다. 사냥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모포에 덮인 라미아의 몸뚱이가 마구 요동쳤다.

“애 낳는 건 사람이나 마물이나 매한가지로군.”

빌헬름텔은 소매 속에 손칼을 숨긴 채, 불가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야광초를 끄집어내어 연기를 쐬었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냥꾼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야광초로 뭘 하려는 거요?”

“혹시라도 마물이 수작을 부릴까 싶어서 미리 준비해두는 거요.”

“그런 효과가 있었소?”

“대단한 건 아니오. 그저…….”

빌헬름텔은 몸을 휙 돌리며 야광초를 두 사람의 코앞에 내밀었다. 연기를 쐰 야광초가 하얗게 작열하며 눈부신 빛을 쏟아냈다.

“큭! 무슨 수작을!”

“이노옴!”

두 사냥꾼이 허둥거리며 단검을 쑤셨지만, 빌헬름텔은 여유 있게 피하며 그들의 뒤쪽에 섰다. 미리 눈을 감은 상태였기에, 그는 야광초의 강렬한 빛에서 눈을 보호할 수 있었다.

빌헬름텔은 손칼을 꺼내 즉시, 사냥꾼 하나의 목에 대고 그어버렸다. 그리고 쓰러지는 사냥꾼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또 다른 사냥꾼이 뒤 돌아서자마자 눈을 쑤셔 버렸다.

“으악! 내 눈이! 내 눈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사냥꾼.

빌헬름텔은 시위를 벗겨놓은 활을 집어 들었다. 시위를 풀기 전에는 철궁이었지만, 시위를 풀었기에 그것은 약간 구부러진 쇠막대기였다. 도끼가 너무 멀리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냥꾼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처리해야만 했으니.

철궁이 사정없이 휘둘러졌다. 잠시 후 동굴 구석에는 세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포개어졌다. 그때였다.

“키야악!”

라미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찔거렸다. 모포가 검게 물들어갔다.

“나왔구나!”

빌헬름텔은 양수에 젖은 모포를 들춰 얇은 막에 둘러싸인 새끼를 끄집어냈다. 어미와 달리 실뱀 같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지 않았고, 번들거리는 피부의 새끼는 작게 울며 입을 뻐끔거렸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빌헬름텔은 새끼가 눈을 뜨기 전에, 라미아의 품에 안겨주었다. 만약 눈을 떠서 처음 본 대상이 자신이라면, 어미로 알 게 아닌가. 그런 곤란한 일은 사양이었다.

한동안 새끼를 바라보던 라미아가 입을 열었다.

- 인간……하는 일을 모두 보았다. 기억한다. 어째서이지?


작가의말
올코너스 : 마물이라도 생명은 소중해. 그러니 마물을 살리기 위해서 사냥꾼 놈들을 쓱싹!
폭렬천사 : 사냥꾼은 생명이 아냐? 왜 죽여?
올코너스 : 시커먼 사내놈들은 없어져도 티가 안나.
폭렬천사 : .........
올코너스 : ......가만 있었으면 걔들 나 죽였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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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통을 먹는 자 (5) +4 14.02.02 800 21 24쪽
55 4. 고통을 먹는 자 (4) +3 14.01.30 959 21 21쪽
54 4. 고통을 먹는 자 (3) +5 14.01.25 852 24 21쪽
53 4. 고통을 먹는 자 (2) +4 14.01.22 1,097 38 21쪽
52 4. 고통을 먹는 자 (1) +2 14.01.20 1,091 28 21쪽
5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ED) +1 14.01.14 893 2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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