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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오브덕 님의 서재입니다.

썩어빠진 용사 이야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오브덕
작품등록일 :
2023.04.17 01:22
최근연재일 :
2023.04.17 01:26
연재수 :
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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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4

작성
23.04.17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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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DUMMY

프롤로그


“먼 옛날에, 마왕이 살았어요. 마왕은 아주아주 못된 심보덕에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다 부수고 다녔죠. 그러던 어느날 마왕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마왕에 의해 고통받고 있던 그때, 선택받은 멋진 용사가 사람들을 구하고 멋지게 세상을 구해냈어요. 앗, 그런데 이걸 어째요. 마왕이 다시 나타난게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용사는 늙어 다른 사람에게 용사를 맡기고 휴가를 떠났는데... 용사가 죽었더군요. 어머나, 이걸 어쩐담? 결국 세계는 마왕에 의해서 지배 당하고 말까요?”


“......그래서, 지금 나보고 용사를 하라는 거야?”


“어머, 똑똑하고 눈치 빠르신 용사님은 저희도 환영이랍니다~”


가장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그것도 가장 포근한 우리 집 안에, 그것도 나만의 장소인 내 방 안에, 한 여자가 정장을 빼입고 둥둥 떠있다.


그것도 동화책처럼 보이는 내용의 PPT를 들고, 신발로 내 책상을 즈려밟고 올라가서 말이다.


“어때요, 구미가 당기지 않나요? 어짜피 할 일도 없고, 집에 도움도 안되는 백수신데~”


“난 너가 꼭 니 직장에서 짤려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


“괜찮습니다, 저는 평생직장이거든요. 어쨌든, 어떠신가요? 저희와 함께 용사가 되어보지 않을래요?”


어렸을 적부터, 나는 꼭 특별한 사람이 되고싶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에서, 꼭 한번 용사가 되어보고 싶었다.


“까짓거.”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해봅시다.”


나는 이 짓을 시작했으면 안됐다.



...



“여기 사인해 주시고~, 저기도 사인해 주시고~ 아! 저기 저 조항은 꼭 체크 해주셔야합니다.”


자신을 마케팅부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여자가 가리킨 손 끝에는 매우 작은 글씨로


‘사망시 주) 천인그룹에 본인의 전 재산을 환원한다’는 글귀가 써져 있다. ...더 작은 글씨로 장기나 몸의 일부가 기증되거나 판매될 수 있다는 항목이 적혀있다.


“...미친거 아니냐?”


“네~?”


마케팅부는 억지로 끌어올린 듯한 미소로 일관했다.


“혼잣말이야, 혼잣말.”


한숨을 푹 내쉬며 옮긴 시선 끝에는 내가 받는 지원에 대한 내용이 쓰여있었다.


“그런데, 이거 있잖아. 돈이나 이런 경제적 지원은 누가 해주는 거지?”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죠, 뭐긴 뭐에요~”


“혈세를 왜 나같은 백수한테 투자해주는 건데.”


마케팅부가 내 말을 듣고는 킥킥대며 답변했다.


“그게~ 용사라는게 1대 2대 이렇게 내려오는 거거든요, 용사가 누군가로 결정되면 그 사람에게 능력과 지원을 해드리고 용사분은 마왕을 막으셔요,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죠. 그런데~ 저희도 어른들의 사정이라는게 있으니까~ 한번에 용사가 둘이면 재정이 딸리는 구조거든요. 또 둘이면 희소성이 없다나 뭐라나~ 그래서 한번에 한 용사밖에 뽑지를 못해요. 게다가~ 뽑는 방식도 완전 가챠나 다름이 없으셔서~”


그 말을 들으니 약간 빈정이 상했다.


“그럼 그냥 순전히 운으로 결정했다 이런거야? 뭐 다른 채점요소는 없어?”


내가 말을 끊자 잠시 말을 멈추던 마케팅부가 더 썩은 듯한 미소로 상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흉악한 범죄자이시거나~ 빨간줄이 그여있다거나~ 하시면 추첨에서 제외되시구요. 그런거 없으시다 하시더라두~ 남에게 피해를 많이 입히고 사셨으면 그 분도 추첨에서 제외되신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인구 중 정말 억세게 운이 좋게 뽑히신 거죠~ 물론 더 능력있고 사명감 넘치고 멋있고 재력있는 그런 분도 좋겠지만은~ 윗사람 말에 꿇으라면 꿇는 사람이 더 좋으니까~”


“입좀, 입좀 다물어 제발.”


내가 마케팅부를 쏘아봐도 그녀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간단히 말해서 C~S급 뽑기 상자에서 C급이 뜬 경우죠~ C급 인물은 그래두 10% 아래 기물인데~ 좋게 말하면 운이 좋은..”


“됐다. 관둬.”


마케팅부의 말을 듣기 싫었기에 이후 나오는 항목들은 대충 사인하고 그녀에게 다시 넘겨줬다.


“어머, 빠르시네~ 다른 곳에 취직하실 때는 계약서 꼼꼼히 읽어보셔요~”


“뭐?”


그녀는 황급히 계약서를 서류가방에 넣고 가방을 잠궈버렸다. 그것도 삼중잠금.


“그럼~ 뒤처리는 이분들께서 맡아 주실거랍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앉아있던 침대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왜 이렇게 자세하냐고? 내가 봤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여기 사인하신 분이 맞으신가요?”


딱봐도 힘깨나 쓰게 생기신 두 분께서 정중하게 내 침대에 신발을 신으시고 서 계셨다.


“맞는데요.”


내가 답하자 두 분은 웃으시더니 내 양팔을 그대로 잡고 들어올렸다.


“이동하실게요.”


그것이 내 모든 문제와 사건의 시작점이었다.


.....


첫 날은 가볍게 시작하겠다는 말을 들은지 5시간 정도 될 무렵, 트레이닝실로 보이는 곳에서 체력 측정 겸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5시간 전부터 시작한 것이다.


“용사가 되시려면, 빠른 다리와 지구력은 기본 소양이십니다. 그건 저희가 선생님께 드리는 능력에 포함이 안되있으셔요,”


“왜 포함이 되지 않은거죠?”


내가 1kg 아령을 숨차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돈이 꽤 세거든요. 아무래도 정부가 세금을 지원을 별로 안해주셔서..”


두 분중 한 분께서 내 등을 받쳐주시며 말했다.


“얼마 정도 받으시는데요?”


나머지 한 분이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내 질문에 답변해주셨다.


“한 12조 정도..”


순간, 내 귀를 의심했었다. 내가 오늘 한 이야기만 잘못 들은 걸로 칠 수 있다면, 이 이야기가 거짓이길 바랬다.


“에? 완전 차고 넘치지 않나요?”


“저희도 다 인력인데, 월급도 받으면서 일해야죠.”


그렇구나, 내가 쓰레기같은 생각을 했구나, 라는 마음이 들었다.


“직원이 정말 많으신가 보네요! 하긴 요즘 일자리가 좀 부족했긴 했죠. 하하.”


“300명 정도면 많긴 하죠.”


아까 내가 거짓이길 바랬던 말은 취소하기로 했다. 미쳤구만, 미쳤어.


“아니, 그 정도면 조금 더 연구나 이런데 재정을..”


“저희도 다 생명이고 한 회사의 직원인데. 회식도 하고 향락도 즐기고 해야죠, 어떻게 사람이 일만하고 사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껄껄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럼 저한테도 그런 혜택이 있나요?”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이미 용사 계약을 체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인권을 스스로 발로 차고 오셨다는 건데, 저희는 오직 ‘인간’이나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에게만 대우해 드리거든요. 사실 저희도 보호 명령이 떨어져서 그렇지, 아니면 이런 멸치는 고이 접어 던져 놓고 무게 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 말이 너무 심했군요. 사과드립니다.”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안한 척 하는 게 꼴보기 싫었지만 내가 그를 쏘아보자 허리를 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하하, 뭐 그러실 수도 있죠. 저도 집에서 인간보다 못한 취급 받은 적도 많아요~ 개밥먹고 그러고..”


“왜 그러고 살까, 나 같으면 인생 리셋하고 새 인생 노렸을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죽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개밥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믿어줬으면 좋을 것 같다.



.....



서러운 일주일이 끝나고, 내 트레이닝을 담당했던 두 사람은 내 몸을 보고는 만족하며 나를 이능관리부서로 보냈다.


“얘, 생각보다는 쓸만하더라고,”


두 사람 중 하나가 안경 쓴 여직원 앞에서 나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상부에서 뭐 이런 놈이 뽑혔냐고 노발대발했던 때가 일주일 전인데,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는 놈 인가봐?”


안경 쓴 여직원이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왜인지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조금 나왔을지도 모른다.


“보자, 어떤 게 좋을까? 뭐, 원하는 거라도 있나요?”


여직원이 키보드를 탁탁 두들기며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경쾌한 타건음이었지만 여전히 내 기분은 더러웠다.


“말하면 들어주시나요?”


내가 묻자 여직원이 답했다.


“저희가 안내받은 재정 선에서 처리해 주실수 있구요..”


“얼마정도죠?”


“한 천 칠백..?”


천 칠백억원이길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했다.


“..만원 정도 여유가 있으시네요.”


“...미쳤어요?”


다 필요 없고 3백만원만 손에 쥐어주고 집으로 보내줬으면 좋겠다.


“아니, 계약서에 다 있는 내용을 가지고 태클을 거시면.. 원래는 그것보다 더 낮게 기대비용이 책정이 됐는데, 증언을 토대로 최대한 올린게 그거란 말입니다. 상한선이에요, 상한선!”


여직원이 짜증난 듯한 말투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리드미컬한 타음이 내 고막을 둥둥 울렸다. 머리 아프다. 다 짜증난다. 다 죽었으면.


“...원래는 얼마였는데요?”


“천 오백..”


그나마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천 오백만원 정도는 하는구나, 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원이요.”


“..돌았어요?”


분명 남는 돈은 저 여직원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겠지.


“천 오백원으로 무슨 능력을 구할 수 있는데요? 뭐, 계란을 한 손으로 깔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구할 수 있는가?”


“아뇨, 그건 4천 6백원.”


혼란하다. 혼란해. 도무지 대화가 안되는 기분이다. 게다가 너무 서럽다. 내 가치가 고작 삼각김밥 하나랑 맞먹는다니. 이건 인격모독이다. 뭐라도 받으면 그대로 런이다. 경찰서에 신고하면 포상금으로 12조 혈세에서 2억원 정도는 떼주겠지. 부디 그때가 되기 전까지 나에게 잘해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천 칠백만원으로는 뭘 구할 수 있죠?”


여직원이 다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내 질문에 답했다.


“권총 한 정?”


“머리에 총맞고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 이건 어떠세요?”


여직원이 구석에서 박스를 하나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두근두근 뽑기함... 이라고 마분지로 덧대어진 폰트가 딸랑 하나 쓰여있다.


“능력 가차죠!”


“....네?”


.....


“그게 뭔... 월급도 가챠돌려서 받아요? 왜 이렇게 다들 사행성에 빠져살아요? 도박은 불법이니까 지구 역배에 올인빵 걸고 화성에서 머스크랑 도지타고 뛰어노는 해피 라이프를 꿈꾸는 거에요? 그냥 그럴거면 니가 마왕하세요, 12조 받고 횡령 줄타고 쎄쎄쎄 하지 말고.”


“어머, 말이 심하시네, 그거 아세요? 당신 아직 용사 아닌데. 계약서에 따르면 폐기처분은 직원 한명이 찬성할 경우 이뤄진답니다. 용암에서 생존수영하고 싶은거 아니면 입은 조신하게 놀려주세요.”


오. 이런.


“그래서, 할거에요, 말거에요. 빨리 골라주세요. 조금 있으면 6시 정시 퇴근이니까.”


여직원이 뽑기함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여기 나오는 능력이 대체 뭔데요, 그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으니까..”


여직원이 내 말을 끊으며 확률표를 내 앞에 걸었다. 1회에 1500만원에, 쓸데없어보이는 능력들이 여러 개 나열되어있었다. 삶은 계란과 날계란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 계란을 일자로 세울 수 있는 능력, 입에서 계란을 뱉을 수 있는 능력... 아예 계란 관련 능력을 따로 분류해 놓은 표가 있었다. 다른 항목을 살펴보자, 제일 먼저 확률이 표기되어 있었다. 염력은 0.00127%, 공중 부양은 0.00214% 등의 의미없는 숫자의 나열이 눈에 띄었다.


“뽑은 능력은 바로 적용 되고, 교환, 환불 불가니까. 알아서 선택해주세요.”


“그럼 한 번 돌리고 남은 2백만원은..”


“남은 건 반납이죠. 어딜 감히 돈을 빼돌리시려 합니까, 그거 다 횡령이에요. 감빵가고싶어요?”


그래, 내가 먼저 들어오면 넌 2년정도 뒤에 오겠지. 횡령/도박죄로 감빵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질 걸, 내가 보증한다.


“아 예..”


“그럼 한 번 돌리시는거 맞죠? 여기 손 집어 넣으시면 됩니다.”


“예,예.”


내가 박스의 구멍에 손을 넣자 무수히 많은 캡슐들이 내 손바닥과 손등을 굴러다녔다. 기회는 한 번이다. 내가 모았던 운을. 여기에 전부 쏟으리라는 일념 하나로 상자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나에게 딱 맞는 캡슐을 찾으려했다.


‘....이거? 아냐, 너무 둥글어. 그럼.. 이거? 아냐, 표면이 까슬까슬해. 그럼....요건..’


“소용 없어요. 아무리 뒤져봤자 원하는 능력은 안나오니까요. 게다가, 남은 운이 어디있겠어요? 이미 용사로 뽑힌 이상 남은 운은 없다고 쳐야죠. 뭐 하나 더 좋은 거 뽑겠다고 그렇게 추하게 뒤져봐도 아무 소용 없답니다.”


여직원이 어디선가 가져온 팝콘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씹으며 말했다.


“잠깐, 잠깐. 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아는건데요? 무슨 독심술이라도 알고 있는거에요?”


여직원이 나를 잠시 보더니 킥킥대며 덧붙였다. “당연하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답니다. 지금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명심하세요. 용사로 뽑힌 이상 최선을 다 해야합니다.”


“아니, 직원이면서 어떻게 그런 걸 가지고 있는건데요? 뭐 용사님놈분들이 남긴 돈으로 가챠라도 돌렸어요?”


여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거 횡령 아니에요? 딱 기다려요. 사표 쓰게 해줄테니까.”


내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들자, 여직원이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거 아세요?”


그 순간, 나를 향해서 자그마한 동전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와 옆의 벽에 박혔다.


“나 이 능력만 있는 거 아닌데.”


“주작이네.”


~주작작


연기의 끝에는 금색으로 프린팅된 종이가 반짓이 모셔져있었다. 정말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솜과 포장재에 둘러싸여 그 뒷장만 빼꼼히 보이고 있었다.


“거봐요, 인생 한방이라니깐.”


여직원이 어디선가 들고온 팝콘을 한 움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종이를 뒤로 돌리자, ‘증폭’이라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게 뭔데? 막상 호들갑은 다 떨어놓고 이게 뭔지 모르겠잖아.”


내 핀잔에 여직원이 어쩔 수 없다는 둥 말을 이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을 말 그래도 증폭시켜주는 거죠. 물론, 뭐가 증폭되었는가는 모르지만.”


“운에 미쳤군.”


어찌됐든, 쓸만한 능력이 내 손에 들어온건 분명해보였다. 왜인지 기분이 고양되어 뭐든 할 수 있게만 느껴졌다. 물론 기분만 그렇지만.


“그럼 이제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난거지?”


내가 떠나려는 포즈를 취하자(떠나려는 포즈는 정확하게 묘사를 못하겠다. 내가 그 당시 무슨 몸짓을 했는지는 기억도 안나니까.)


“잠깐, 잠시만요. 여기, 사진 한 장만 남기고 가시면 됩니다.”


여직원이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 플래시를 터뜨리며 잽싸게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의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지만 뭐, 내 알바인가. 지가 알아서 하겠지.


“자자, 됐습니다. 이제 저기로 가시면 되셔요~”


여직원은 방금 찍은 내 얼굴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며 말했다. 나는 여직원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고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아까 뽑은 능력 때문인가, 조금 빨라진 것 같기도..”


확실히, 그 여직원이 말한대로 내 능력이 어느 정도 ‘증폭’된 것처럼 느껴졌다. 저번에는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저번보다 한 1/10 정도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물론, 큰 차이는 없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의 끝에는 커다란 문이 달려있었다. 소의 뿔, 염소의 눈, 사자의 갈기, 그리고 호랑이의 얼굴을 한 괴수가 그려진 철문이었다. 그 철문의 가운데에 난 두 개의 손잡이는, 나보고 이 문을 열 수 있냐는 양 달려있었다. 내가 문을 아무리 두들기고 앞에서 소리를 쳐도, 문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내가 그 문을 아무리 당겨대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내 앞을 막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10분이고 20분이고 철문 앞에서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문 옆에 쪼그려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문에 있는 문양과 눈싸움만 하고 있을 때, 문득 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것도 하나의 시련.. 아닐까?’


그래, 만화나 동화에서도 이런 문들이 많다. 이제 갓 용사가 된 사람이 용사가 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는 문이었나. 그래, 그런게 분명하다. 이것들은 지금 나를 시험해보고 있는 거다. 과연 이 놈이 이 문을 열어낼 수 있는지 없는지.


‘그래, 까짓거 이 문 따위 몇 번이고 열어재껴주마.’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온 신경을 지금 이 상황에 집중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집중했던 적은 고3 수능 이후로는 없던 것 같다. 아니, 그때보다 더 할지도 모른다. 그때 문제의 반을 다 찍고 3시간을 내리 잤으니 지금이 더한 순간일지도.


‘-흐읍..’


내 팔이 부서져라 문을 당겼음에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포기할 수 없다. 지구를 구할 용사가 이따위 문에 주저 앉을 수는 없다. 그래,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뭐하세요?”


순간, 내 집중을 끊고 카운터에서 날 쳐다보던 여직원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을 던졌다.


“안 보여요? 지금 제게 주어진 첫 시련을-”


“그거, 미닫이 문인데요.”


아니, 누가 미닫이문 손잡이를 중간에 박아두는 건지. 날 맥이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저 여직원들 주위에 몰려든 다른 여직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 모두가 날 보며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냥 다 죽었으면 좋겠다.


“아니, 누가 미닫이문 손잡이를 중간에 달아놓는데요? 이런 근본없는 문 디자인은 28년을 내리 살면서 본 적이 없는데,”


“그거, 저희 사장님이 디자인하신 건데 그 말 지금 저희 사장님에 대한 도전 맞죠?”


여직원은 어느샌가 품에서 꺼낸 녹음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치사한 놈.


“어머, 지가 오해해놓고 머쓱하니까 괜히 그런다.”


“됐어요. 근데, 이거 하나는 명심해두라고요.”


내가 진짜 용사가 되는 순간.


“내가 잘되면 너네들은 진짜 끝이니까.”


“그러세요. 난 여기 VIP 룸에서 팝콘이나 뜯으면서 그렇게나 잘나신 용사님이 마왕 날숨 한 번에 갈갈이 찢기는 거나 볼테니까.”


“그러던지. 만약 내가 잘되면, 진짜 용서따위는 없으니까 그렇게 알라고요. 알았어요?”


나는 내 내면의 분노를 그대로 끌어담은 체, 미닫이 문의 손잡이를 거칠게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문 앞 공간에는 길게 죽 뻗은 검은 통로가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다음에 돌아왔을 때 내 앞에서 질질 짜지나 마세요.”


나는 이 세상을 지키겠다는 일념하에, 어느 때보다 말끔한 정신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

.

.


“...저번에도 저런 사람 있지 않았나?”


“있었지.”


“그 사람은 어케 됐더라?”


“종이학마냥 접혀서 클립꽂이로 마왕 책상 위에서 마왕의 사무 처리에 기여하고 계시던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될 거 같냐?”


“마왕이 지 아들래미한테 레고라고 속이고 던져주겠지.”


“그래도 마왕 살림에는 쓰이겠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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