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wrrrrite...!!

고블린왕과 롤랑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긴쓱
작품등록일 :
2022.07.14 13:47
최근연재일 :
2024.03.21 23:16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712
추천수 :
15
글자수 :
113,307

작성
22.07.18 22:42
조회
58
추천
1
글자
11쪽

세 명의 병사(1)

DUMMY

신앙이라는 이름의 철퇴가 민간에게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시대였다.


이 시대의 종교란 철학이자 법률이며 과학이자 민간 삶의 모든 것이었다.

일국의 왕조차도 교회권력을 함부로 반박할 수 없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돈? 보석? 뭐든 좋습니다. 신앙도 버릴게요. 그러니 가족의 목숨만은···."


길쭉귀 달린 머리통이 허공을 유영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철푸덕 떨어져 두 바퀴 굴렀다.


‘길쭉귀의 이교도를 죽인다.’


이 일련의 행위에 라상의 소신이 섞일 여지는 없었다. 교회가 죽이라고 했으니 라상은 죽일 뿐이다.


"개종하겠습니다. 마땅히 개종하리다!"


양조장에 숨어있던 엘프 부부는 라상을 보자마자 큰절을 올렸다.

덕분에 백금발이 빗자루처럼 땅바닥을 쓸었다.


"그러니까 부탁입니다 부디 저희를 살려주십쇼.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십쇼. 저희를 못 본 척하고 갈 길을 가주십시오. 저희를 하루살이와 같은 벌레로 여기시고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쇼! 그렇다면 당신의 가문은 대대로 축복···."


유독 혓바닥이 길었다.

다행히 사내는 설명을 그만두고 그냥 눈으로 보여주었다. 가슴에 묵혀둔 걸 왈칵 쏟아낸 것이다.


"컥!"


목소리가 아닌 혈액으로 말이다.


"꺄악!"


아내는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막상 죽음보다도 암막의 공포가 더 두려웠는지 슬며시 감았던 눈을 뜨더랬다.


'텅.'


덕분에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 그대로 즙을 흩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경추가 잘려 칠칠맞지 못하게 나뒹구는 머리통들, 항구의 정어리처럼 늘어진 절단된 사지들.


'숨소리가 남아있군.'


하지만 라상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시나 한쪽 구석의 건초더미를 들추자 사람이 숨어있었다.


'갓난아기잖아.'


긴 소란에 잠에서 깼는지 아기가 똘망똘망한 눈을 껌벅였다.


—자비로운 전사님. 저희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그저 잘못된 마을에서, 잘못된 부모에게 태어났을 뿐.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라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잘린 머리가 소리를 낼 리는 만무했다.


—저희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머릿속은 흡사 백지와 같습니다. 이교의 교리도, 거짓된 신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저희 아이는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재차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잘린 머리가 소리를 낼 리는 만무하다.


" ···."


라상은 가만히 아기를 응시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며 멀뚱멀뚱 눈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인 무능한 생명.


어쩌면 그 부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아기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순백의 백지와 같으리라. 그저 불행한 마을에서, 불행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불행한 아기일 뿐.


"너무 원망치는 마라."


그러나 이 또한 아기의 운명이자 순리였다. 교회가 죽으라고 명했으니 죽는 수밖에.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을 상기하자 라상의 무거운 어깨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미 검 끝은 아이의 미간을 겨냥했으며, 할일은 검에 체중을 싣는 것뿐.


" ···!"


이윽고, 한 줌의 흙을 들어올리기 위해 삽에 가하는 압력보다도 약한 힘이, 아기에게로 쇄도했다.



***



라상, 그는 이교도 토벌이라는 미명하에 징병되어 온 병사였으며 본래 농부였다.

사실 이교토벌군의 대다수가 라상과 같은 민간인이었으므로 전쟁의 경험에 정신적 문제를 겪는 사내들이 적지 않았다.


"밥 먹으러 와라."

"됐어."


이미 열흘째였다.

라상은 열흘째 밥도 마다하고 막사 천막의 짚더미에 제 빨간 머리를 후비적거리는 중이었다.


"라상, 그러다 죽는다."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지."

"너는 너만 만족하면 된다는 거냐?"


체제는 라상의 멱살을 잡았다. 라상과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체제는 이런 소꿉친구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대체 뭐가 문제냐. 라상."

"그걸 몰라서 물어?"


라상은 엄한 분노를 체제에게 쏟아냈다.


"갓난아기였다."

"그게 왜."

"교회는 갓난아기를 죽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이교도였지."


라상은 멱살을 잡은 체제의 손을 떨쳐냈다.


"체제, 네가 그렇게 꼴통이었을 줄이야."

"걱정해줘도 유난인 놈이군. 나와서 밥이나 먹어라."


체제는 억지로 라상을 막사 천막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이교도 도시 근처의 주둔지에 고향마을의 병사들이 제각기 그릇에 스튜를 받고 있었다.

빵과 육포만 먹던 이들에겐 이런 호사가 없었다. 그래서 체제도 구태여 라상을 끌고 나왔던 것인데···.


"왜 이교도를 죽이는 것이 선행인줄 아시는 지요?"

"그거야 악마숭배자들이기 때문 아닌지요?"


문제는 식사하는 와중 방문한 교회의 설교사였다.

설교사는 헐벗긴 이교도에게 목줄을 채워 대동했다.


"물론 이교도들이 악마를 숭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교도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설교사의 발길질에 이교도가 쓰러지자 여러 사람이 밥맛 떨어졌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무수히 발길질을 당해 멍과 흙으로 범벅된 이교도의 모습은 추하고 더러웠다.


"어우."

"우웩."


라상은 국그릇을 쥔 손을 떨었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놈들이 길쭉귀를 가졌기 때문이지요. 보십시오. 이런 길쭉귀를 가진 생물이 고블린 외에 더 있더랍니까?"

"없습니다."


설교사는 두 손으로 쓰러진 이교도의 길쭉귀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길쭉귀를 쇠뿔처럼 잡아당겨진 이교도가 비명을 질렀다.


"엘프들이란 고블린이나 매한가지지요. 이 고블린같은 길쭉귀만 봐도 그 유사성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놈들은 피부만 하얀색일뿐 고블린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고블린처럼 토벌 대상이지요. 고블린과 마찬가지로 이교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을 듣던 라상이 중얼거렸다.


"이교도가 사람이 아니라고?"

"물론입니다."


설교사는 대동하고 있던 이교도의 한쪽 눈알을 뽑았다. 이교도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설교사는 대뜸 말했다.


"정당한 권위에 순종하라. 이교도를 많이 죽일수록 신께 가까워질 덕행을 쌓는 것이다."


직후, 라상은 설교사에게 주먹을 날렸다.



***



체제는 막사 천막의 건초더미에 누워 라상의 빈자리를 흘겨보았다.


“그 주근깨 곱창난 빨간 머리 녀석."


라상은 설교사를 넘어트린 뒤 깔고 앉아 일방적으로 구타했다. 설교사는 치아가 깨지고 코가 부러졌으니 놈을 용서할 리 없었다.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라상은 인파 속으로 숨어 도망쳤다. 어디로 도망쳤는지는 몰라도 조만간 경비대의 화살에 꿰뚫려 주검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띨띨한 놈."


설마 설교하러온 성직자에게 주먹을 휘두를 줄이야.


지난밤까지만 해도 그곳에서 라상 녀석이 코를 골았건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다만 라상의 개인물건인 수첩만이 놓여있을 뿐.

체제는 라상의 수첩을 펼쳐보았다.


『이교도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이교도를 죽이는 건 살인이 아니다. 이들을 죽이는 건 신께서 용인하신 살생이다.』


체제는 다음 장을 넘겼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인간이 아닌 이교도를 죽였다. 』


체제는 그 병적인 반복을 벗어나기 위해 양피지를 몇 쪽이나 넘겨야 했다.


『이교도인 인간을 죽였다.』


두 문장의 변화는 매우 작은 것이라서 체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불경하군.'


체제는 잉크병을 열어 라상의 수첩에 글귀를 추가했다.


『신념은 흔들리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념은 검과 같다. 어떤 올곧은 검도 결국 부러지고 휘어지기 마련이다.

감정에 따라,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고개를 숙이며 고꾸라진다.


하지만 성서의 글귀와 성인들의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이 신념보다는 신앙을 갈고 닦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앙은 절대적이다.』


그런 뒤 흥, 콧방귀를 뀌고는 수첩을 닫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체제는 한참동안 천막의 천장을 응시하며 다리를 꼬고 누워있었다.


‘이제 라상은 없다.'


그러나 그 불경한 놈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는 더는 알바가 아니었다.


그리 마음을 정리한 체제는 막사 천막 속 라상의 자리에 수첩을 내팽개쳤다. 그런 뒤 머리 한 켠에 남아있던 잡스런 감정도 털어냈다.



***



꿈속에서 체제는 라상이 되어 있었다. 설교사에게 손찌검 했다는 이유로 유일교의 병사들에게 쫓기는 상황이었다.


"배신자다. 이교도의 편을 든 배신자다!"


고향 사람들이 그를 숨겨주기도 했지만 결국 설교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저 빨간머리다!"


그는 눈에 띄는 빨간 머리 탓에 어딜 숨어도 금방 들키기 마련이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화살이 날아온다. 개중 하나가 파공음을 내며 머리통의 바로 옆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 체제는 빨간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투구를 푹 눌러쓰고 병사들 틈에 끼어들었다. 투구를 눌러쓰면 누가 누구인지 전혀 분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봐."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체제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헉!"


체제는 기함을 지르며 눈을 떴다.


'꿈이었군.'


막사 천막이었다. 너무 오래 라상의 생각을 해서 그런지 라상의 꿈을 꾼 모양이었다.


'평생 동안 갈 친구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세상은 불확실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다면 그나마 보증되고 안전한 것을 택하는 것이 체제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나저나 투구를 열심히 쓰고 다녀야겠군.'


체제는 잠시나마 화살이 난무하던 악몽 속을 떠올렸다.

그런 꿈을 꾸어서인지 체제는 밖으로 나갈 때만큼은 투구를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라상과 같은 불경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이교도들은 솜씨 좋은 활쟁이들이 많다.

방심하다 혹시나 이교도의 기습을 당하게 될지 그가 어찌 알겠는가?



***



체제는 기사의 종자였다. 아침마다 체제는 기사의 말에 건초더미를 가는 역할을 했다.


'이 짓도 이젠 지겹군.'


그런데 이미 마구간 대용의 천막에는 선객이 존재했다. 금발에 곱상한 티가 나는 것이 제법 좋은 가문의 종자로 보였다.


"안녕, 나는 폴이라고 해."

"생크도르프의 체제다."


저쪽에서 대뜸 물었다.


"덥지 않아 체제? 이 날씨에 그렇게 무거운 투구를 쓰고 다니면 말이야."

"나는 잘 때 빼곤 투구를 벗지 않는 주의다."


체제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그는 저 폴이라는 청년에게 묘한 경계심을 느꼈다.


'오지랖이 넒은 놈이로군.'


직전에 화살에 머리통을 뚫릴 뻔 한 꿈을 꾼 뒤라 그런 것일까.

어째서인지 투구를 벗고 싶지 않은 체제였다.


하지만 투구 얘기가 나온 김에 체제는 비스듬해진 투구를 바로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고블린왕과 롤랑의 노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 가짜 성녀(4) 24.03.21 2 0 12쪽
20 가짜 성녀(3) 24.03.20 4 0 13쪽
19 가짜 성녀(2) 24.03.19 7 0 11쪽
18 가짜 성녀(1) 24.03.19 6 0 12쪽
17 말할 수 없는 이름(9) 22.11.09 14 0 11쪽
16 말할 수 없는 이름(8) 22.11.05 14 0 12쪽
15 말할 수 없는 이름(7) 22.08.24 25 1 11쪽
14 말할 수 없는 이름(6) +1 22.08.22 27 1 13쪽
13 말할 수 없는 이름(5) 22.08.22 28 1 11쪽
12 말할 수 없는 이름(4) +1 22.08.02 36 1 12쪽
11 말할 수 없는 이름(3) 22.07.31 28 1 12쪽
10 말할 수 없는 이름(2) 22.07.27 34 1 14쪽
9 말할 수 없는 이름(1) +1 22.07.25 36 1 12쪽
8 세 명의 병사(5) 22.07.22 43 1 12쪽
7 세 명의 병사(4) 22.07.21 38 1 12쪽
6 세 명의 병사(3) 22.07.20 40 1 12쪽
5 세 명의 병사(2) 22.07.19 48 1 13쪽
» 세 명의 병사(1) 22.07.18 59 1 11쪽
3 치즈와 길쭉귀(2) 22.07.15 47 1 14쪽
2 치즈와 길쭉귀(1) 22.07.14 68 1 13쪽
1 슬픈 노래만 부르는 베니 22.07.14 109 1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