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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셔 님의 서재입니다.

차원 회랑의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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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셔
작품등록일 :
2021.09.06 22:43
최근연재일 :
2021.09.10 18:06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602
추천수 :
1
글자수 :
71,088

작성
21.09.06 22:51
조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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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기만과 냉소

DUMMY

‘그래. 외국어쯤이야 박 터지게 공부하면 배울 수 있겠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글을 배우는 게 순서이니 열심히 익혀보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일세.”


소맷자락에서 그가 책을 꺼냈다. 그림은 하나도 없고 두께도 한 뼘 정도나 되는 벽돌 같은 책이었다.


“인족의 공통문자가 적힌 만자문일세. 제목 그대로 만개의 글자가 있고 이는 필수적으로 암기해야 하지.”


대법전 같은 두께에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다잡았다.


그런데 요술 보따리 같은 그의 소매에서 벽돌 두께의 책이 또 나왔다.


“우리 세계의 기본적인 지식을 담은 교재들일세, 만자문을 암기한 뒤 단어, 숙어, 문법, 문화에 통달하고 그 이후에는 각 종족들의 문자들을 추가로 습득해야 해. 모든 종족의 문자를 익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세력이 크고 역사가 깊은 예순일곱 개 정도면 될 게야.”

“육십 개가 넘는다고요!?”


심기일전해서 공부하겠다는 내 각오가 스낵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일곱 개를 더해서 예순 일곱일세.”

“그걸 다 하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자네는 대화가 되니 읽고 해석할 수만 있으면 되네. 공부할 거리가 반절은 줄어든 셈이지.”

“아뇨! 염치없는 말이고 정말 죄송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고시생도 이만한 책을 쌓아놓고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탁 트인 수련장을 서재로 탈바꿈 시킬 정도로 능운자는 막대한 책들을 내 앞에 쌓아놓고 있었다.


어떤 글자는 지렁이가 기어 다닌 것처럼 생겼다. 모스 부호처럼 띄엄띄엄 점만 찍힌 것도 있고 예술적으로 그림 그리듯 쓴 글자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모양이 다 나왔다. 자기류의 문자를 만드니 어쩌니 했던 만큼 이들 세계의 글자에 규칙성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이것들을 몽땅 외우는 일?


그런 천재적인 두뇌가 있었으면 진작 하버드 대학을 나와서 빼어난 학벌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취직이 대수겠는가. 번역가, 통역가로 활동해도 되고 개인 방송을 하면서 이십개 국어 이상을 사용하는 능력자로 유명해질 수도 있겠다.


‘영어 하나만 기막히게 잘해도 밥 벌어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게 우리나라니까.’


한국이 아무리 헬조선이라 불려도 공부를 잘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몸 건사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 내가 왜 편돌이가 됐을까?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는 일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방법, 헬스를 통해서 몸짱이 되는 방법을 잘 알면서 정작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와 일맥상통한다.


오죽하면 노력도 재능이라는 말이 있으랴.


끈기라는 덕목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인님은 초 천재라서 한 번 보고 다 외우실지 모르는데요. 저는 불가능합니다. 외우다가 늙어 죽을 거예요.”

“오해가 있구먼. 내 비록 영험한 학리의 일족이네만 수많은 언어를 노력만으로 터득할 만큼의 오성은 갖고 있지 않다네.”

“그럼요?”

“수행자들은 의식 교류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흔해. 직접적인 의식 공유는 사승 간에도 엄금하네만, 일부는 상호 교류하며 이를 통해 저변을 넓혀간다네. 비전이 빠진 기본적인 문자와 문화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지.”


능운자가 수행자들의 문자 학습법을 알려준다며 입으로 후-하며 바람을 불었다. 벽처럼 쌓여 있던 책들의 표지에서 반짝이는 글자들이 떠올라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이들은 능운자의 몸을 고스란히 통과했다가 옆에 심어진 나무로 날아갔다.


나무에 쑥 들어간 글자들은 껍질과 줄기, 잎사귀에 빼곡하게 새겨졌다. 그러더니만 이내 부르르 떨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존재는 수행할 자격이 있다고 했지.”


줄기들을 내리고 두툼한 기둥조차 그를 향해 숙였다.


나무가 능운자를 향해 절을 한 것이다. 순식간에 저 식물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지성체가 되었다.


“보다시피 문자를 강제로 습득함으로써 얕은 지성과 미력한 기운이 생겨 하급 목령이 된 걸세. 자연적이건 인위적이건 이런 자들이 즐비하면 목령들도 부족을 이루고 그 중 경지에 오른 자들이 나름의 문자를 창안하여 지식을 전하는 것이지.”


한편, 목령이 된 나무에서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일정한 틀을 따라서 그림을 그리듯 나뭇잎이 어떤 글자들을 만들었다.


“자네가 보기에 목령이 방금 쓴 글자가 무엇 같은가?”

“모르겠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스승님.’ 같은 거겠죠. 평범한 나무에서 종족으로 탈바꿈하게 만드셨으니까요.”

“틀렸네. ‘살려주세요.’거든.”

“나무가 어떤 병충해에 시달리고 있나보죠?”


내 말을 듣고 능운자가 껄껄 웃었다.


“저 녀석은 의식이 부족했을 뿐 이곳에서 자라며 나를 제법 오래 지켜봤지. 그러니 내가 어찌 행동할지 예상한 게야. 영리한 그 예측은 안타깝게도 어긋나지 않을 모양이고 말일세.”


손을 휘젓자 뜨거운 불길이 허공에서 타올랐다. 뱀처럼 불이 나무를 휘감았고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만들고 사라졌다.


순간, 나는 오싹했다.


그는 식물 하나를 없앤 게 아니었다. 살려달라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알고 지성이 생긴 존재를 만들었다가 멋대로 없애 버린 것이다.


“깊은 산중에서라면 모를까, 이 섬은 내 소유일세. 졸지에 아까운 천기를 빨아먹는 식충이를 들인 셈이 되지. 목령 탓에 제자들의 수행이 더뎌지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마른 침만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네는 기본기를 떼는 데 적잖은 시간을 들여야 하게 되었다네.”


이세계에서 문자의 의미는 지구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책들은 너무 많았다. 읽는 것조차 1년은 걸릴 정도인데 외워버릴 수준에 이르르라는 건 정말로 무리한 일이다.


“다른 방법을 쓰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술법을 익힐 머리가 못 되는 수행자들이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들을 위한 거, 무공 같은 걸 배우면 안 될까요? 머리 쓰는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자신 있거든요.”

“전제부터 틀렸네. 수행자란 그런 저질의 재능으로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는 오늘부터 글을 배우도록 하게.”


말투만 부드러울 뿐, 답을 정해놓고 그는 내게 대답만 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백 년이면 그럭저럭 수학이 되었을 터. 그 뒤에 보세나. 물론, 자네의 수명이 다해서 죽는 일이 없도록 장생환 만개를 내려줌세. 수명을 일정 부분 보장해주는 이 장생환이 자네에게는 큰 효험이 없으리라는 점을 나 역시 알고 있으나 뾰족한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옥색 주머니를 내게 주고는 네 명의 제자에게 내 식사와 감시를 겸한 안전 확보, 기본 교육을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모름지기 생명에 대한 욕구는 훌륭한 동기를 부여하는 법. 새 삶에 익숙해진다 하여 고향을 망각하지는 말게. 가족, 친구, 연인처럼 사랑하고 쥐고 있을 때는 아껴주지 못한 모두를 떠올리는 걸세.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시게나.”


이 말을 끝으로 능운자는 백년간의 폐관 수행에 들어갔다. 내 덕분에 얻었다는 뭔지 모를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란다.


남겨진 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쉽게 말하는 백 년은 내가 살아온 날보다 몇 곱절이나 되는 살아야 하는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공부만 하라니. 저게 말이 돼?’


내심 오만가지 욕을 퍼부을 즈음 잉어를 때려잡은 꼬장꼬장한 남자가 내게 말했다.


“손님. 저는 진이라 불러주십시오. 주인님께서 명하신 대로 오늘부터 글공부를 시작할 것입니다. 하오나 소인이 보기에 백년까지 걸리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줄어든단다.


“그럼 어느 정도죠?”

“부단히 공부하신다면 오십 년으로 성과를 보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 나이가 스물여덟 살. 여기서 오십년이 더해지면 일흔 여덟이 된다. 제아무리 지구에서 ‘백세시대’라는 말을 하지만, 일흔 여덟 살은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나이였다.


안 되겠다.


‘이 미친놈들에게서 탈출해야 해.’


여기는 아랫동네의 노예 사냥꾼과는 다른 생김새의 감옥이었다.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


늙어 죽는지 않으려면!


‘균열이 어디 있지?’


또 하늘에서 추락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구름 섬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균열을 통한 이동뿐이었다.


그러나 능운자는 치밀했다.


꼬마가 생글생글 웃으며 입에서 뿌연 유령을 뱉었다.


“저는 만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손님께서 돌아다닐 곳들은 주인님이 정해주신 곳들 뿐이에요. 오늘부터 제가 딱 달라붙어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드릴게요!”


자기 얼굴과 똑같이 닮은 꼬마 유령이 내 팔뚝에 밴드처럼 찰싹 감겼다.


그뿐이랴.


“제 이름은 초령이에요. 의식의 영역이 부족해서 몇몇 문자는 공부해서 터득한 부족함 많은 수행자죠. 부족하지만, 그 경험을 살려서 손님이 즐겁게 공부하시도록 도와드릴 거예요.”


소녀는 자신의 손을 뚝 떼어내 내 발목에 매달았다. 이번에는 발찌가 되었고 금방 새로 자란 손을 흔들며 말했다.


“혹시라도 구름 밑에 떨어지시는 일이 없도록 지켜드리는 건 덤이죠.”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협박!


끝을 중년 여성은 자신을 ‘숙’이라고 소개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


“손님께 드릴 영양식은 화원의 재료를 아낌없이 써도 된다고 하셨어요.”


친절함으로 무장한 밀착 감시.


“주인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맛있게 제가 요리해드릴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시도록.”


빠져나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생에 매국노였던 걸까?’


행운과 불운을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락내리락 하며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는 절대로 좌절하지 않는다. 균열을 보는 내 능력은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저들이 눈치 챌 수 없을 것이다.


균열에 손을 가져다 대면 탈출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어떤 장소로 가게 되건 생존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데 전념하면 됐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에~”


숟가락으로 교도소 지하를 파서 빠져나가는 범죄자의 영화도 있다. 그가 숟가락으로 긴 세월 인내했듯 나 역시 한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부지게 먹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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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만과 냉소 21.09.06 2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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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낯선 이들의 친절 21.09.06 5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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