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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최근연재일 :
2019.08.2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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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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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도망길 (4)

DUMMY

며칠이 더 지나면서부터는 한가령은 산길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이동거리가 너무 짧았다. 원래 귀하게 자란 홍위가 생각보다는 산길 험로를 잘 따라오는 편이었고 오히려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또한 험한 산길은 제아무리 숙련된 안내인이라도 길을 헤매기 십상이었다. 둘째로 양식을 구하기도 마땅치가 않았다. 앞으로 갈 길이 먼 만큼 체력은 아껴 두어야 하는데 사냥이나 채집만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북변땅에는 겨울철에나 도착하게 될 겁니다. 북변 땅은 춥고 척박한 땅입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어떻게 나서고 있는지도 알아내야 할 일이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적 많은 곳으로 내려가면 추적자들의 눈에 띄기 십상일텐데.”


호인이 미심쩍다는 투로 물었다. 그는 한가령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뒤쫓는 자들도 우리가 감히 인적 많은 곳을 택하리라고는 생각 못 할 테지.”


두 사람은 홍위를 돌아보았다. 결정은 그가 내릴 일이었다. 홍위가 입을 열었다.


“한가령 자네의 말을 듣기로 하지.”


그들은 산속에서 한뎃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촌 농가에 의탁하기도 하고 산중암자 방에서도 자고 서당에서 기숙하기도 하며 덤불 속에서도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한 두끼 정도 굶기는 예사로 하면서 어떻게든 강원도 땅을 돌파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홍위가 밤도망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전중재 부자와 홍위가 함께 관풍헌을 탈출한 바로 다음날 아침, 노산군이 오래도록 기침하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내관이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객사 방문을 열어보았고, 그제서야 안에 홍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월부 관아가 뒤집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체 어이된 일인가, 노산군이 하늘로 솟구쳤나, 아니면 땅으로 꺼졌다는 말인가! 관내를 샅샅이 뒤졌느냐?”


“관, 관풍헌 객사 경내는 물론이고, 매죽루나 주천강 일대 노산군이 평소 자주 가던 곳을 모두 뒤졌사오나······.”


“아이구!”


영월부사가 아연실색하여 그날로 관풍헌 객사에 있었던 자들을 잡아들여 신문하였으나 홍위를 모시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별다른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관아 사람들을 점고해 보니 오직 사령 공생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뿐이었다.


“수상한 사람이요? 보지 못하였소이다.”


영월부 지경을 지키고 있던 나졸들로부터도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 아니하자 부사는 애가 달았다.


“노산군은 산속 깊은 곳으로 스며든 것으로 아뢰오.”


“그건 나도 알어, 도대체 어디로 숨었느냔 말이여.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부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영락없이 파직이요 정배살이를 갈 판이다. 그는 자신의 관직생활이 끝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하릴없이 부사는 노산군이 실종되었다고 강원도 감영으로 치계를 올릴 수밖에 없었고, 감영에서도 한 바탕 난리가 났다.


“무어야, 노산군이 사라져?”


강원 감사 김광수 (金光粹)는 손을 떨어 가며 부사가 보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으나 그런다고 내용이 바뀌진 않았다. 감사는 글발을 내동댕이치며 장탄식했다.


“아이고, 이제 감사 자리도 다 틀렸고나!”


그렇게 외친들 이미 도망한 홍위가 제 발로 돌아올 것이 아니었다. 강원 감사의 장계가 한양에 도착하자 수양은 크게 놀람과 동시에 분노가 불길 같이 일었다.


“뭐라고, 열다섯 살 난 어린 녀석 하나 제대로 감시를 못하더란 말이냐, 에이! 영월 부사는 당장 벼슬을 떼어버려. 파직 후에 논죄하고 강원감사도 추고해.”


숨을 돌린 수양은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홍위를 기어코 추포해서 압송해 와. 팔도에 엄중히 기찰하되 홍위를 추포하는 자에게는 천금을 내릴 것이며 벼슬 있는 자에게는 직급을 올려 중하게 쓸 것이요, 벼슬 없는 자로는 가자할 것이고, 천민은 면천시켜 준다고 그리해······. 에이! 당장 물러나, 물러나서 홍위를 잡아들이란 말이다.”


“망극하옵나이다.”


진노한 수양 앞에서 대소 신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돌아나왔다. 홀로 남은 수양은 용상 팔걸이를 부르쥐었다 놓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서성거렸다.


한편 수양의 눈 앞에서 물러나온 한명회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 때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판서 (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 (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 (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하고 있었으니 일약 고관대작의 반열에 오른 셈이었다.


“아, 이보시오, 자준 (子濬)!”


호협하면서도 어딘지 방자한 기가 있는 목소리가 뒤에서 쩌렁 울렸다. 한명회가 돌아보니 그는 가칙 (可則) 홍달손 (洪達孫)이다. 호방한 무반 출신인 그는 한명회와 의기투합하여 수양의 수하에 들었고,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지금은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兵曹判書)로 그 역시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도총관을 지내고 있었다. 한명회가 경계하면서 대답했다. 본디 홍달손과는 꺼리는 바는 없는 사이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시오.”


가까이 다가선 홍달손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명회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감께서는 여에게 숨기시는 것이 없겠지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거요?”


홍달손은 대답 대신 한명회를 노려보았다. 한명회는 속으로 거리끼는 것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불쾌했다.


“말을 해 보시오.”


“내, 주상전하의 밀지를 받고 내금위 (內禁衛)에서 칼밥이나 먹었다는 날랜 심복 부하들 십여 인을 가려뽑아 영월로 내려보내었소.”

“그래서요?”


“아, 그래서라니요?”


홍달손의 수염 터럭이 부르르 떨리었다.


“그 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 노산군은 영월 바깥을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었소, 결단코!”


“그러하다면 노산군이 대감 부하들을 뚫고 지나갔다는 말씀이오?”


“그건 말도 안 되오. 노산군이 날개가 돋치어 하늘로 솟구치거나 땅으로 꺼질 재주가 있다면 모를까, 땅으로 걸어가는 이상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을 테고, 그리하였다면 틀림없이 어느 한 곳에서 고혼이 되었을 거란 말이오. 당연히 여에게도 보고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데 잡지를 못했단 말이지요······ 그리고 보아하니 대감께 기별도 없었고.”


홍달손은 자못 불쾌하게 씹어뱉었다.


“그렇소.”


“그렇다면 노산군에게 날개가 돋친 것이 분명하겠구려.”


“뭐요?”


한명회의 무심한 대답에 홍달손이 고리눈을 떴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요?”


“대감이 말했잖소. 대감 부하들이 그리 유능하다고. 그런데 노산군을 잡아들였다는 기별이 없으니 그러면 뭐겠소.”


홍달손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여에게는 솔직히 털어놓아보시오, 대감! 우리 사이의 정의가 그정도는 되지 않소.”


“무엇을 말이오.”


“대감 정도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노산군에게 간자를 붙여놓았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좋도록 생각하시구려.”


한명회는 슬슬 의미 없는 대화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홍달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치솟아오르는 성질을 누르며 내뱉었다.


“만약 대감께 무슨 정보가 들어온다면 여에게도 말씀해 주시오. 어떤 자가 있어서 내가 직접 기른 부하들을 없이 했는지 내 꼭 알아보아야겠소.”


홍달손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가버렸다. 뒤에 남은 한명회는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의 고질인 편두통이 도지는 모양이었다. 한가령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한명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한가령이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아니하겠지. 절대 그럴 일이 없음이야.’


한명회는 신경질적으로 조복 자락을 떨치며 궐문 쪽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을 타고 오르던 홍위 일행은 철원군 (鐵原郡) 풍전(豐田) 근처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한가령은 산길을 버리고 평지로 가기로 했다. 그 말에 호인은 입을 삐쭉이었다. 산중 험로를 타는 것이 느리다지만 평지라도 어차피 두 발로 걸어야 하는 것은 매일반 아닌가. 그의 구시렁에도 홍위는 묵묵히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일어나다가 이내 다가오는 이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홍위와 호인은 흡사 선술 (仙術)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한가령은 마치 마술처럼 어디선가 말 세 필을 구해 온 것이다.


“역참 (驛站)에서 구해 온 역마일세.”


한가령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말에 오른 그가 먼저 앞서 나가자 호인이 홍위를 돌아보며 소곤거렸다.


“나으리, 역로행정은 본디 병조 (兵曹) 소관이올시다. 개인이 함부로 구해 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찰방 (察訪) 이하 수십 인이 지키고 있을 터라 훔치기도 불가능합니다요.”


“호인 자네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가.”


홍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이올시다. 필경 수양이든, 한명회든 저자에게 무언가 허가증이라도 내주지 않고서야, 저렇게 할 수 없사온데 그런 자가 영문 모르게 나으리를 돕는 것은 둘째치고, 다시 돌아가겠다니······.”


홍위도 호인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도 어차피 없었다.


“과연 일리가 있는 걱정이네. 하지만 이미 나는 한 번 죽었을 목숨이야.”


“나으리!”


“그러나 염려치 말게. 자네 부친의 목숨 값으로 살아난 목숨이기도 하니까. 내 목숨을 소홀히 다루지는 않을 것일세. 여하튼, 지금으로서는 저이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겠군. 다른 방도가 있나?”


호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 역시 황해도 (黃海道) 이북으로는 발을 디딘 적이 없었고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 세 사람 중 그나마 그쪽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는 오로지 한가령뿐이었다.


“저자가 나를 해할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고, 지금이라도 손바닥 뒤집기로 할 수 있네. 자, 이제 말에 오르세. 갈 길이 멀지 않나.”


호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수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호인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역시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은 앞서 가는 한가령을 뒤따라갔다.


“우선은 관북도 (關北路)를 타고 갈 것이오이다.”


조선왕조가 열리면서 기존의 교통로는 고려시대의 그것을 상당수 이어받았다. 그러나 도읍지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진데다 또 영토가 함길도 일대까지 확장되기도 했으니 수정 보완은 필수적이었다. 그에 따라 총 열 개의 도로가 정비되었고, 그중 하나가 한양에서 함길도 경흥부 (慶興府)까지 이어지는 관북도였다.


“경흥이라, 경우에 따라 육진까지 바로 갈 수도 있지 않은가?”


홍위의 질문에 한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중도에 결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세 사람은 묵묵히 말을 몰아갔다. 본디 역마는 규정된 바는 없으나 하루에 90리 정도를 가고 그 때마다 늘어서 있는 역에서 말을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홍위 일행은 한가하게 역마다 들러 말을 바꿀 형편은 되지 못했다. 한가령의 말로는 이미 역에는 홍위의 용모파기가 나붙었더라고 한다.


“말이 아주 지칠 때쯤 바꾸는 편이 낫겠소이다.”


길이 좋으면 힘센 말 한 필로 하루 오백리 길은 너끈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요소의 길목마다 지키고 있을 군병들을 피해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이 때 조정에서는 홍위를 잡으려고 혈안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홍위 일행이 경기도로 들어설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역로를 따라 포천 (抱川), 양주 (楊州) 누원 (樓院)을 거쳐 영평 (永平) 양문역 (梁文驛)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그들은 뱃사공을 하나 빌려 임진강 (臨津江) 나루터를 건넜다. 포교들의 기찰은 한가령이 어련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똑바로 북상해 갔다. 고려 오백년 역사가 담긴 송도 (松都)를 거쳐 평양 (平壤)을 바라고 달리는 것이다. 곳곳에 있는 검문들을 피하고 하느라 얼마간 지체되었기에, 그들이 대동강 남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늘은 예서 묵어가야 합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대동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올라갑시다.”


한가령은 평양 성내는 피할 작정이었다. 애초에 성문을 통과하려면 감영의 포교들이 말탄 이들 하나하나를 기찰하려 들 것이 뻔했으므로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홍위는 말없이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평양성을 바라보았다.


평양성! 한때 왕도이기도 했다는 이곳은 그야말로 풍류를 위한 곳이다. 대동문을 나와 연광정 (練光亭) 정자에서 실버들 그늘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는 대동강 수려한 경치를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지을 수도 있고, 뱃놀이를 즐긴 후 날이 어두워지면 애련당 (愛蓮堂)에서 부벽루 (浮碧樓)에 비껴 뜬 달밤 정취를 호젓하게 즐겨볼 수도 있다. 팔도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평양 기녀들의 가무를 즐기는 것은 덤이라 하겠으니, 대명 사신들이 한양을 찾을 적에 으레 이곳에서 유숙하며 풍류를 즐기는 곳이다. 저 숙부 양녕대군 (讓寧大君)도 이곳 평양에서 기녀 정향과 어울려 논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홍위에게는 그러한 감흥은 느낄 틈이 없었다. 평양성 높다란 돌성은 오히려 홍위에게는 어떤 불길한 느낌마저 주는 곳이다. 쫓기는 입장에서 보면 관가의 입김이 클 곳은 꺼려지는 것이다.


“나으리 어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 쉬셔야 합니다.”


호인의 재촉에 홍위는 다른 두 사람을 따라 나룻터 근처에 있는 객점에 들어섰다. 객점은 자못 소란스러웠다. 술청 마루며 방 안에는 날이 밝는 대로 평양성 안에 들어갈 장사치는 물론 한량들이 들어서 있었다. 홍위는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들 중에는 분명 잘 차려입은 양반들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홍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자도 있을지 모른다.


“먼길 왔는데 노곤하다. 자리가 안에 있는가.”


가령의 말에 사환노릇을 하는 키 작은 곰보 중노미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다가 객의 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홍위가 생각해보니 자신들의 옷차림이 땀과 먼지에 절어 있어 꼴이 말이 아닐 것 같았다.


“글쎄올시다, 내레 방이래 있는지 없는지 봐야 하갓시오. 손님들이래 밥 지을 땔나무나 쌀은 있시오?”


“먼길 여행하느라 건량은 없고······ 예 쇄은 (碎銀) 부스러기는 약간 있구먼.”


중노미는 가령이 건넨 은 부스러기를 미심쩍다는 듯 요모조모 살피었다. 개국 초부터 선대왕들께서 나름대로 중화의 예를 본받아 화폐를 유통시키려 노력했건만, 그 결과는 영 신통치가 않았다. 대개는 베와 같은 포목으로 조금 물물교환을 하는 정도인데, 먼길 오가는 사람들이 무거운 베를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 은 부스러기가 화폐 대신으로 쓰였다. 물론 이런 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극소수였으니 중노미가 미심쩍어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중노미는 쇄은 조각을 든 채 안으로 달려갔다. 은조각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것이 맞다면 천칭에다 무게를 달 것이다. 세 사람은 다소 기다렸다. 호인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홍위에게 말했다.


“고개를 숙이시고, 눈에 덜 띄도록 하십시오.”


어쩌면 홍위를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쇄은 조각에는 관심을 보일 자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술청 안에 있는 자들 태반은 탁주 잔을 걸치고 있었으며, 행색으로 보아 홍위를 알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반 각 못 되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중노미가 다시 달려왔다.


“작은 방 하나는 있고, 저녁이래 곧 준비되갓쇠다.”


“하나뿐인가?”

“나룻배 기다리는 사람들이래 많이 들어왔시오.”


호인의 질문에 중노미는 무뚝뚝하게 되받았다. 홍위는 그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해 보였다.


“말 세 필도 있네.”


중노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방 하나를 안내받았다. 호인은 자신이 모시는 홍위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 영 껄끄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홍위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우리는 여느 행객들과 같이 보여야 하네.”


홍위의 말에도 호인은 극구 사양하며 마루로 나섰다. 하늘 같은 상전과 같은 방을 쓴다는 것도 껄끄러웠고, 혹여 수상한 자들이 올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이다. 홍위 일행이 식사를 기다리는 사이 바깥에서는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홍위가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내어보니 호인이 대답했다.


“떠돌이 점쟁이인 것 같습니다.”


홍위가 바라보니 과연 뾰족한 염소 수염을 기르고 얼굴은 가무잡잡하면서 약삭빨라 보이는 왜소한 남자가 술청 한가운데 서 있다. 그가 자신을 둘러보는 사람들 앞에서 신명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 구월산 (九月山)에서 일찍이 점 치는 능력을 배우게 되었댔쇠다. 본시 구월산 자락에서 나무하구 심마니 노릇도 하면서 지내온 사람이우.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구월산에 점 치는 이인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점쟁이라는 남자가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남자를 흘겨보았다.


“아따 그 양반 소갈머리하고는,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보시우. 몇 년 좋이 삼을 찾아 산을 헤매었는데, 어느 그믐날 밤에 고만 산주인을 만났지 뭐겠습디다.”


“산주인이라 그러면 호랭이 말여?”


“그랬댔쇠다.”


그 말에 술청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이었다. 홍위도 호기심이 들었고, 호인 역시 그의 말주변에 빠져들고 있었다.


“거 백년 묵은 호랭이는 사람으로도 둔갑한대지? 그러니까 말여, 사람으로 딱 둔갑해 오드래는 말여. 머리는 하얀 윤건을 쓰구, 옷도 새허연 도포자락에, 학우선을 들고 오드래지 않어. 그러더니 호통을 치드래. 네 이놈! 네가 감히 산군의 영역을 침범하였으니 죄가 무겁도다, 그러니 오늘 딱 잡아가야하겠다, 그러더란 말이지.”


“아이구, 간밤 꿈이 천년 묵은 산삼 캘 길몽 같다 여겼더니 이제 꼼짝없이 물려죽게 생겼네. 그래서 싹싹 빌었습지요, 내가 고향에 노모를 봉양하고 있는데, 늙으신 노모 병구완을 하느라고 산삼도 찾고 봉양하느라 나무도 하고 있더라고 말여.”


“임자에게 노모가 정말 있기는 한 거여?”


누군가 외치자 사람들이 와 하고 웃어댔다. 점쟁이가 눈을 부라렸다.


“그럼, 내가 애미없는 호래자식이라는 거여?”


웃음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아 글쎄 임자가 산군을 앞에 두었다 생각해 보시구려 일단은 목숨 연명부터 해야지······ 암튼 그렇게 사정하니까 산군 표정이 퍽 누그러지더란 말이지. 그러더니 한숨을 팍 쉬더니, 좋다, 네 효성이 갸륵해서 내 영지를 범한 것은 괘씸하나 특별히 살려준다, 이러더래.”


“산주인이 본디 효자에 약하더라고 했어!”


“아무러나······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이게 밑지는 거여. 당장 목숨은 구해도 구월산에서 나무하구 심마니 노릇하면서 먹구사는데······ 그래서 또 빌었지.”


“엣기, 저 배짱 좀 보소.”


“암튼 울며불며 그랬지. 그러더니 산군께서 그러더라고, 그놈 참 효성은 많은데 말 많은 놈이라며······ 그리구서는 자기 흰 눈썹 한 가닥을 뽑아 붙여주데.”


“산군이 사람 참 잘 봤네, 말 많은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그래서 이 눈썹이 무슨 소용이 닿습니까, 그랬지. 그러더니 산주인이 네 눈이 있으면 용처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더니 사라졌지. 그 백털이 바로 이것이여.”


점쟁이가 제 오른편 눈썹을 가리키자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호인도 마찬가지였다.


“에이그, 참말 있구먼!”


“그래서, 이게 무슨 용처가 있다던가.”


사람들의 말에 점쟁이가 눈을 부라렸다.


“아 이 사람들 내 말을 여태 헛들었소. 내가 츰에 구월산에서 점 치는 능력을 어찌 얻었나, 그리 얘기했잖여······.”


“그래 임자 이 흰 터럭이 점치는 능력의 근원이란 말여?”

“그렇구말구, 이 터럭이 턱 허니 붙으면서는, 세상이 달리 보이잖겠어.”


“어떻게 말여?”


“사람의 전생도 더러 짐작허구, 내생도 또렷이 보이지······. 내 일찍이 사주팔자 서책은 본 적도 없지만서두, 이게 그리 환하게 보일 수가 없데.”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점쟁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그렇다면 자신들의 신수 봐달라며 보챘다. 거기까지 본 홍위는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는 영월 길 가는 도중에서 만난 선비 정호찬과 고승 백운 대사가 떠올랐다.


‘정말 술수라는 것이 있는가.’


유가 제왕학을 배운 홍위는 워낙에 괴력난신 (怪力亂神)은 믿지 않았다. 못 배운 이들은 일식 월식과 같은 천문 현상에도 미혹되기 쉽지 않던가. 그렇지만 지금 같아서는 혹하는 데가 없지는 않았다. 홍위는 쓰게 웃었다.


‘내 마음도 그리 나약해졌는가.’


홍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저녁상이 들어왔다. 개다리소반 셋에 각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고봉으로 한 그릇, 채소와 나물 반찬 몇과 간장 종지 등속이 올라왔다. 한가령도 들어오는데, 호인은 들어오지 않았다. 홍위가 이상히 여기는데, 그제서야 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원 그 점쟁이, 제법이더이다. 잘 맞추던걸요.”


“자네······ 무언가 누설했나.”


홍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올시다. 적당히 꾸며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점쟁이가 진가를 잘 짐작하더군요. 겁나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자들은 자네의 얼굴 표정을 읽고, 자네에게 끊임없이 말을 유도하는 게야. 그러면서 허실을 탐지해내는 것이지.”


“정말······ 하지만 그자 말로는······.”


호인의 말에 가령이 조용히 말했다. 입을 헤벌린 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산군이니 하는 말도 미욱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수작이지. 염두에 둘 것 없네.”


호인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 친구도 제법 순박한 면이 있군, 홍위는 그렇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실상 그 자신도 어느 정도는 술수에 약간 미혹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편 바깥에 앉아 있던 염소수염 점쟁이는 호인이 막 들어간 방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턱을 긁적거렸다. 그는 술청 마루에 있을 적부터 그 안에 있는 세 사람이 무언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수상하다기보다도······ 무언가 미묘했다. 행색은 초라한데, 그와는 다른 기품이 느껴지는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자신에게 점을 친 젊은이의 태도도 무언가 수상쩍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점쟁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을 치우고 있던 중노미에게 다가갔다.


“이얘 저 방 안에 들어간 이들을 아느냐?”


“알 리가 있소.”


“예끼,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어쩔 참이냐그래.”


“하지만 선불로 두둑히 받았으니 별 상관이 있겠소. 도적놈이 은부스러기를 내준단 말이오?”


은 부스러기! 점쟁이는 염소수염을 비틀었다. 용건이 없으면 바쁜데 방해하지 말라는 투로 중노미는 홱하고 사라져갔다. 하지만 점쟁이는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무언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의말

참고문헌

조선 시대 평양은 어땠을까···곳곳이 명소, 평안감사는 \'꽃보직\', 매일경제 2018.8.15.일자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8/08/511171/)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역참제도(驛站制度)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U7UY&fldid=Cq5D&datanum=569&q=%BF%AA%C2%FC%C1%A6%B5%B5&_referer=V7kfJwkeLEGMZxGlgqZEmUfvPtBmGg9r2t5RMOPAcazqowHra-lNn9fzwzLSoLN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원군 (鐵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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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연의 실타래 (2) +11 19.05.15 934 34 22쪽
21 인연의 실타래 (1) +8 19.05.14 950 32 29쪽
20 야인 잠상 노릇 (3) +4 19.05.13 909 27 15쪽
19 야인 잠상 노릇 (2) +9 19.05.12 950 29 22쪽
18 야인 잠상 노릇 +8 19.05.12 1,060 26 31쪽
17 낯선 이들, 그리고 압록강 넘는 길 (3) +6 19.05.11 1,014 31 20쪽
16 낯선 이들, 그리고 압록강 넘는 길 (2) +10 19.05.10 1,028 27 23쪽
15 낯선 이들, 그리고 압록강 넘는 길 +2 19.05.09 1,087 26 23쪽
» 도망길 (4) +4 19.05.09 1,102 22 24쪽
13 도망길 (3) +4 19.05.08 1,125 31 19쪽
12 도망길 (2) +10 19.05.08 1,153 29 20쪽
11 도망길 +4 19.05.07 1,223 30 26쪽
10 영월 정배살이 (4) +2 19.05.07 1,072 24 21쪽
9 영월 정배살이 (3) +8 19.05.06 1,059 25 23쪽
8 영월 정배살이 (2) +8 19.05.06 1,065 21 22쪽
7 영월 정배살이 +4 19.05.05 1,135 22 11쪽
6 먹구름 몰려오다 (2) 19.05.05 1,095 21 20쪽
5 먹구름 몰려오다 +1 19.05.05 1,175 24 12쪽
4 유년 시절 (3) +2 19.05.04 1,327 18 22쪽
3 유년 시절 (2) 19.05.04 1,598 24 18쪽
2 유년 시절 +5 19.05.04 2,624 29 13쪽
1 프롤로그 +14 19.05.04 3,506 5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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