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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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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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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먹구름 몰려오다

DUMMY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霜降)도 지나 입동 (立冬)도 이미 맞은 지 오래인 음력 11월 한양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한양 저잣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얀 입김을 불어 대며 누비옷자락 사이에 손을 넣고 다녔고, 그나마도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올해 계유년 (癸酉年)의 겨울은 예년보다 더욱 소슬한 기미가 있었다. 그것은 날이 유달리 추워서가 아니었다. 한양에 발붙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얼마 전 궁궐과 명망 높은 고관대작들의 집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알고 있었다.


고명대신이자 어린 주상을 보필하고 있던 삼정승 즉 영의정을 지내고 있는 지봉 (芝峰) 황보 인 (皇甫仁), 북변을 개척한 호랑이 정승 좌의정 절재(節齋) 김종서 (金宗瑞), 우의정 애일당(愛日堂) 정분 (鄭苯) 등이 피를 뿌리며 목숨을 잃고, 그 외에도 숨져 간 조정 신료들이 수십 인이었다. 훗날 계유년에 일어난 정변이라 해서 계유정난 (癸酉靖難)이라고 부를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삼정승은 물론 수십 인의 조정 신하들이 무참히 죽어갔으니 당연히 입 가진 사람들이 이에 대해 입을 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들은 눈치를 보면서 쉬쉬할 뿐이었다.


“나라가 망할 징조군!”


“예끼 이 사람, 나라가 망하다니.”


“그 왜······. 이 왕조가 개국 초부터 크게 피바람을 부르더니 이제는 또 대신들이 척살당하더라잖나. 이게 망할 징조가 아니면 무에야?”


“이 사람 그게 어디 그래. 그게 다 수양이가 왕노릇이 하고 싶어 그리된 것이지.”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진다 싶자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다른 사람이 나직하게 주의를 준다.


“어허, 자네도 입조심해. 수양대군 대감 일파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 아, 자네들도 함부로 혀를 놀리다 생살부 (生殺簿)에 이름 오르고 싶어?”


“······.”

그 말에 입방아를 찧던 사람들은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텅 빈 거리를 쓸고 지나가자, 스산하기 짝이 없는 한기에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생살부! 말 그대로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의 이름을 정해 놓았다더라는 섬뜩한 물건이겠으나 사실 실제로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고급 신료들이 조직적으로 몰살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있어도 그럴 듯했다. 소문에는 수양대군이 직접 썼다더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수양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한명회의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일찍이 불우하여 과거에 거듭 실패해 문음 (文蔭)으로 궁지기 같은 말직이나 전전하며 놀림을 받았는데, 그 때 뱃속에 모진 한을 품고 살생부의 이름 하나하나씩을 아로새겼더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장안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 한명회 눈에 거슬리면 살아남지를 못한다.


잠시 무연하게 있던 이 하나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어찌 팔삭둥이에 불과한 자가 이다지도 큰일을 저질렀을꼬.”


“듣기론 송도 (松都)에서 궁지기 노릇을 할 적부터 무신들과 사귀고 다녔다는데······.”


워낙에 무사 사귀기를 좋아하던 한명회는 일전 수양에게 소개했던 한가령 뿐 아니라 일찍이 내금위 (內禁衛) 출신으로 무예가 뛰어나던 양정 (楊汀), 유수 (柳洙) 같은 이들을 천거할 수 있었고, 이는 수양의 꿈꾸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외에도 역시 내금위 출신인 홍달손 (洪達孫) 같은 이도 수양의 심복으로 천거되었고, 수양의 가노 (家奴)이자 기골 장대한 역사 (力士) 임운 (林云)도 가세했으니 그 수가 삼십여 인이었다.


사람들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그만두어. 우리네가 이렇게 입방아를 찧는다고 하루아침에 뒤집힌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겠나. 그만 가세.”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금슬금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대로 세상은 하루 아침에 뒤집혀 있었다. 국권을 농단하는 국적을 처단한 공로로 주어진 정난공신 (靖難功臣) 1등에 수양대군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올리어 영의정, 이조판서 (吏曹判書), 병조판서 (兵曹判書)를 겸직케 했으며, 나머지 공신이며 요직도 모조리 수양 일파들이 휘어잡았다. 가령 좌의정에는 원로대신이자 수양을 지지할 뜻을 밝힌 학역재 (學易齋) 정인지 (鄭麟趾)요, 우의정에는 수양의 사돈인 간이재(簡易齋) 한확 (韓確)이다. 그 외 수양을 따르는 무리들이 여럿 출사하여 그물망처럼 조정을 감시했다.


“북변에서 난리가 일어났더란다.”


뒤숭숭한 민심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변에서 탈이 났다. 정난 당시 참살당한 김종서의 신임을 받았던 뛰어난 무장이던 함길도 도절제사 (都節制使) 원봉(圓峰) 이징옥 (李澄玉)이 변란을 일으켰다가 참살당했다는 소문이다. 엄청난 거구이자 출중한 완력으로 야인들에게 ‘어금니 있는 돼지’ 라고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그가 야인들과 결탁해서 변란을 꾀하다 목이 잘리고 멸문을 당했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전율했다.


“이징옥 같은 역사가 어찌 그렇게 갔을꼬?”


“듣기론 종성부사 (種城府使)가 베푼 술자리에서 피살당했다는데. 그 자리에서 장남과 차남도 같이 목숨을 잃었다는군. 딸은 공신들에게 노비로 하사되구.”


“여덟 살 난 셋째 아들만이 어디론가 피신했다던데.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더군.”


한양으로 올라가는 한강 나루터 근처에 있는 객주집 안에서는 온통 변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야인족의 발호를 감시하며 정예군을 거느리는 이름난 무장이 오히려 야인들과 결탁해서 반란을 꾀하다 참살당했으니 그 여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객주방 한 가운데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야기꽂을 피우고 있었다. 방 구석에 앉아 있던 선비 하나와 늙수그레한 스님 하나도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비록 이징옥이가 횡사했다지만, 함길도에는 아직도 그 도당들이 적지 않더라네. 조정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이야. 암, 한 번 변란이 일어났는데 두 번은 못 일어나겠나.”


“소문에는······ 그게 또 변란이 아니라더라는 이야기도 있네.”


“변란이 아님, 무에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중 하나의 말에 다른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목이 쏠리자 말 꺼낸 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이징옥이가 알다시피 김종서의 파당 아닌가. 그런데 그 집안이 근일 정변에서 도륙을 당했구, 이징옥이는 함길도 정예군을 이끌고 있지. 말다한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사람들은 움찔했다. 한참만에 누군가 말했다.


“원 이 사람. 큰일날 소리하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소.”


이야기는 다시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불안하게 방구석에 돌아앉아 있던 이들을 살폈다. 시선이 박두함을 눈치채자 구석에 앉아 있던 선비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같이 있던 노승을 돌아보았다. 행색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먼 길 여행을 했던 모양이나, 옷 차림새는 수수하면서도 또한 정갈했다. 두 사람은 서로 불필요한 말을 아끼면서도 목소리는 차분하고 확실했다. 이야기를 마친 사람들이 무료하게 돌아눕기 시작하자 선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성뿐 아니라 함길도도 어수선한 모양이군요.”


“산중에서 범 하나가 새로이 산군이 되었다면 의당 전에 있던 범 식구들은 모조리 물어 죽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선비의 말에 나이든 노승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빛 바랜 승복에 가사를 걸친 그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눈썹과 수염은 하얗게 세어 있었다. 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허허허. 이씨는 왕씨에게 그리하지 아니하였다던가요. 이 모든 것이 업보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


선비는 입을 다물었다. 노승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정 선비께서는 장차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시생은 당분간 천하를 좀 더 주유하며 두고 볼 생각입니다. 난세에는 당분간 몸을 숙이고 있어야겠지요.”


정 선비라고 불린 이의 대답에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세라······ 과연 그럴까요.”


노승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상대도 보통내기는 아니오이다. 보십시오. 단 하루 만에 손바닥 뒤집기로 천하를 뒤엎었지 아니하였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팔다리가 묶인 어린 사람뿐······. 난세가 도래하기에는 형세가 이미 기울지 아니하겠습니까.”


“순리를 거역하고 정당함이 엎어진다면 그것이 이미 난세의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정선비의 말에 고승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정선비께서는 보기에 내심 난세를 바라는 듯하시구려. 그렇지 아니하오?”


정선비는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을 아니했다. 노승이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세가 오는 것도 하늘의 뜻일 것이오, 가는 것도 하늘의 뜻이올시다. 난신적자가 발호하는 것, 충신이 저잣거리에서 뭉그러지는 것, 모두가 하늘의 뜻이올시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 선비는 화제를 돌렸다.


“대사께서는······ 술수에 능하지 않으시오. 그 어린 사람의 전정을 점쳐 보실 수 있으시겠소.”


“허허, 정선비께서도 이미 알 만큼 아시는 분 아니오이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승은 눈을 감았다. 입 속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던 노승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선비는 그를 지그시 쳐다볼 뿐 재촉은 하지 아니했다.


“정명 (正命)은 칠십 수라.”


노승은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삼년 안으로 횡사수를 면키 어려울 것이오.”


정선비는 미리 짐작하였다는 양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면할 방도는 없으리까.”


“쉽지는 않으리다. 실낱 같은 수가 하나 있겠지오마는.”


정선비는 노승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구중궁궐 안에서 귀하게 자란 분이 차마 택하기 어렵겠소이다.”


“개흙 속에서도 진주는 그 빛을 잃지 않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여느 잡석이라면 개흙 속에서 분변치 못하오리니.”


“천하 일품 진주라 하여도 개흙 속에 잠기어 건져낼 수 없다면 어찌 드러나겠소이까.”


노승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대사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려오이까.”


“발길 닿는 대로······. 우선은 강원도 구경이나 할까 하오이다. 그런 다음에는 금강산을 거쳐 백두산으로 올라가 참선을 하리다.”


“대사 정도의 분이라면 산중 암자에 묻혀 여생을 보내시는 것이 아쉽소이다. 능히 왕사 (王師)의 재주가 있지 아니하십니까. 대사의 스승 되시는 분께오서도······.”


정선비의 말에 노승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라에서 이제 불도를 누르고, 새로이 유가를 중흥시킬 요량이라지요. 천시는 거역하기 어렵소이다. 일찍이 무학대사께오서도 내다보신 일이니 하물며 소승 같은 퇴물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이지요.”


“그 재주를······ 전도 유망한 후학에게도 가르치시는 일도 보람이 아니오이까.”


“허허, 소승의 눈은 이제 개흙 속 진주를 분별키에는 너무 흐려졌나 봅니다. 보이지가 아니합니다그려.”


그 말에 정선비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시생은 그에 미치지 못한단 말씀이십니까?”


“허허, 선비께서는 이 하찮은 돌중에게서 더 배우실 것이 없으오리다. 그래, 정선비께서는 장차 어디로 향하실 작정이시렵니까.”


“시생, 대사처럼 당분간 강원도 바람을 쐰 연후에, 영월 (越寧) 땅으로 갈 생각이외다.”


“영월이라······. 궁벽한 곳이나 심신을 다스리기에는 과히 나쁘지는 아니한 곳이지요. 소승도 보덕사 (報德寺) 주지와는 안면이 있기에 언젠가 한 번 찾아가볼 생각이었으나 미처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대사와 시생과의 길이 얼마간은 겹치리오이다.”


선비의 말에 노승은 잔잔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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