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만약 수도 서울과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지하자원 많은 강원도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하면 뭘 포기할까하면 어떻게 답할까 모르겠네요 어찌되었든 수도란 것은 다양한 지역을 묶은 국가의 심장이라는 정치적 상징성도 가졌고 경제적으로는 각지에서 들어오는 자원들을 가공할 인프라를 갖춘 곳입니다 그런만큼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남은 것 또한 소련의 유럽영토 중심과 다를바 없는 모스크바를 포기안함으로서 소련 전체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죠 그런만큼 원역사에서도 모스크바를 계속 방어 강화한 만큼 결국 1순위는 모스크바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모스크바가 안전하다는 전재하에서 우크라이나가 넘어간 시점에서 레닌그라드 다음으로 중요한게 바로 카프카스죠 뭐가 되었든 결코 카프카스를 포기 안할겁니다 솔직히 과연, 독일이 카프카스로 올까라고 하면 현 상황상 불가능에 가깝죠
흑해함대 사령부는 언제나 크림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입니다 다만, 대한민국 해군도 진해말고 여러곳에 해군기지를 가졌으나 일본제국 연합함대도 구례 말고도 요코스카라든가 트럭등 다양한 해군기지를 보유한만큼 흑해함대도 얼마든 이동이 가능합니다 당장 세바스토폴이 있는 크림반도만 하더라도 과거 그리스 식민도시였던 테오도시아가 세워졌고 베네치아와 경쟁한 제노바의 지배기에는 카파라고 불렀던 페오도시아(테오도시아의 러시아식 발음)가 있고, 아조프해 안에서는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로스토프주에 위치한 타칸로크와 함께 카프카스에는 타만반도 끝에 자리잡아 흑해와 아조프해 사이에 있는 템류크외에 카프카스에 위치한 노보로시스크와 바로 아래의 투압세등 다양한 해군기지가 있습니다 전에 전체가 움직였다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흑해함대 기함 역할을 하던 강구트급 3번함 세바스토폴이 세바스토폴에서 노보로시스크로 대피하였던거예요 노보로시스크와 투압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로도 유명한 청색작전에서 카프카스의 바쿠 및 그로즈니 유전 점령을 목표로한 남부집단군 산하 A 집단군에 의하여 함락당하였고 쿠르스크 전투후 소련 반격작전에 따라 소련군이 수복합니다 아! 계속 말씀드렸듯이 강구트급 3번함 세바스토폴은 소련시절에 10월 혁명을 뜻하는 옥차브리스카야 레볼치야(발음: 악찌브리스까야 레발류찌야)급의 3번함 파리시스카야 콤무나(발음: 파리시스카야 깜무나,파리 코뮌)로 불렀고 다시 세바스토폴로 돌아간 건 전쟁말이기에 당장은 세바스토폴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전도 역사의 변화로 더 길어지거나 치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원역사와 거의 비슷한 요소가 있죠. 수도를 포함한 인구집중된 주요지역을 장악하여 500만 이상의 병력 동원한 적군과 달리 영토에 비해 인구수가 적은 러시아 국경 내지 외곽을 차지하여 70만을 넘지 못한 병력 동원한 백군, 주요도시들을 장악한 덕분에 주요 교통수단인 철도 장악을 통한 신속한 병력전개가 가능하고 군수공장등의 인프라와 그걸 유지할 노동인력을 쉽게 갖추어 장비유지 가능한 적군과 다르게 장비의 질은 좋으나 그걸 유지할 인프라 부재에 장비를 해외에 의존해야하는 백군, 비록 강제징집으로 500만을 모으면서 그에 따른 불만으로 경직된 군대가 되며 군벌들의 군 장악을 쉽게 했지만 체카라는 무자비한 정보기관이 존재하면서 228호 명령에 따라 가족을 인질로 강제 편입된 구체제 장교들과 그외 경직된 군대를 장악하던 군벌들에게 공포로 통제하고 감시가 가능하며 그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동일시하는등 외국 개입에 대한 분노로 애국심에 의거해 들어온 구체제 장교들의 존재에다 공산주의 지도층이 있는 위원회를 사령부로 두어 최소한의 전략적 명령 수립과 하달이 가능한 적군과 달리 내부 상하명령체계가 잘 잡혔으나 구심점이 없고 국경과 외지를 따라 흩어진 병력에다 구체제에 대한 불신에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가난등 전쟁피로에 지친 대부분의 징집병들의 불만으로 가득한 백군등 모든게 백군에게 분리하였죠. 그나마 구심점으로 확실한 차르일가는 처형되었고 키릴은 이 시기에 볼셰비키와도 붙어 차르가 되려했기에 백군에서 분노의 대상이었으며 그나마 구심점이 될 콜차크의 존재에도 흩어진데다 각자가 왕당파나 공화파등 뚜렷한 색체가 있으니 아주 막장의 군벌조합이라 각부대를 통합해서 전략적 판단을 할 힘도 없으니...
당연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굴욕이나 당시 러시아인들 생각에 하나의 땅인 우크라이나 통치를 용인했고 레닌그라드와 지척인 발트3국과 다르게 벨라루스라는 안전지대도 갖추었으니 나름 나쁘게는 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나마 백군 봉기가 있지만 원역사와 달리 동유럽에서 여전히 독일의 영향이 존재하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증이 있으니 군사적인 동유럽으로의 확장시도도 불필요하죠. 거기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도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두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더해 리투아니아 공국 후신 자처한 벨라루스와 러시아령으로 병합한 전적에다 벨라루스의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인한 갈등속에 폴란드계 반란으로 빌뉴스를 강제점령한 폴란드와 그곳에 저항하던 볼셰비키 노동연합과 싸움이 불씨가 되었고 어찌되었든 폴란드 제2공화국이 우크라이나 국민정부 지원요청으로 개입하며 확전되었으며 그 폴란드도 막 독립한 신생국가란 점등을 고려해보세요. 그러면 독일의 영향에 있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폴란드와 독일에 의해 확실히 리투아니아니령으로 못 박힐 빌뉴스, 신생국들과 달리 내부 반란 토벌하며 여전히 건재한 독일제국의 존재탓에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 및 확장론이 좀 더 빠르게 식어질테고 러시아 소비에트는 내전 수습한 후 소련건국하고서는 스탈린의 강력한 공업화에 따른 경제등 국가성장에 따른 체급강화를 우선할 것은 당연한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크라이나외에도 벨라루스도 포기해야 러시아 소비에트가 더 안도할테고, 그렇게 병력을 빼야 최소 50만 이상의 병력이 더 가져지기에 독일제국이 루덴도르프 공세에서 그나마 이길 여지가 생기는 거죠.
거기다 독일은 결코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생각도 없으며 이제 서부의 위협이 끝났으니 다시 동유럽에서의 우세를 찾고자할겁니다. 다만, 지치기도 하고 협상국 눈치가 있으니 직접 군사개입은 힘드나 대신 백군을 적극 지원하며 무기를 넘겨주고 영프등 연합군의 백군 지원 통로를 제공하며 실질적인 조약 파기를 일으킬겁니다. 분명,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렇다할 전과가 없기에 대양함대를 동원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점령시도를 원하나 스파르타쿠스단의 난에서 일부 피해 입은 점과 전면전 확대 반대에 따라 대신 국가 목표인 우크라이나의 친독 색채를 위해 독립지원으로 방향틀죠. 겉으로는 안 드러나지만 의도적인 무기양도에 자금 지원등에서 이미 소련은 눈치챌것이며 조약이 언제든 파기될거라는 예상탓에 좀 더 독일이 선넘길 기다릴것이고 백군이 밀리면서 독일이 반도 벨라루스 서부를 장악하면 그걸 명분으로 조약파기를 선언할겁니다. 그래도 앞서 말했듯 서부에서 숨통 틔여서 다시 동부확장 여유가 있는 독일이기에 전면전은 보류하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동부 장악에 더 집중한 소련은 독일과 불안한 평화를 유지할겁니다.
이리되면 트로츠키와 투하쳅스키 vs 스탈린의 갈등폭발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도 없는데다 강한 적이 눈앞이기에 대숙청에도 영향줄 것이며 자본국가들의 내전 개입과 함께 독일의 존재는 소련의 기술 버프의 동기도 부여하고 독일과 소련간 반목 역사에 근거가 되기 충분하다 봅니다. 어차피 군벌들의 군장악시도와 구체계 장교진들의 영향에 따른 군국주의 시도에 대한 통제를 위해 숙청이 불가피할 것이며, 어쨌든 굴욕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한 분노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볼셰비키 이탈과 암살시도에 따른 레닌의 단명(이른 죽음)과 내전에서의 실전경험에 의해 민주적이고 합의적인 문화 약화 및 군대식 관료체제를 통한 관료독재정으로 가는 건 똑같으나 이런 역사변화는 뜻밖의 변수가 되죠. 무엇보다도 내전 경험으로 소련의 첩보전 능력과 방첩도 늘며 소련식 기동전을 적립했는데 독일이란 존재는 소련의 군사전술 연구에 더 영향을 줄테고, 이건 도리어 독소전에서 독일에게 악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무기만 개발하면 다가 아니라, 보급이 되어야한다는게 문제죠. 아무리 산업 인프라도 꾸준히 늘고 차량보급도 히틀러의 변덕성이 좀 고쳐져 집중력이 있어짐에 따라 꾸준히 늘어난다고해도 결국 석유등 자원을 수입에 의존하는 독일체계와 석탄액화기술을 통한 인조석유 수요 만으로도 부족한 독일군 규모, 그런 물자를 보급하기에는 열악한 소련의 도로 사정과 소규모라도 6.25 당시 태백산맥 부근의 소규모 빨치산에게 국군과 UN군이 고생한 점에서 여전히 위협적인 파르티잔의 사보타주, 유럽 기후에 맞추면서 소련기후에 적응 안되는 독일 기계장비의 내구력, 여전히 부정확한 소련에 대한 정보등은 계속 마이너스의 요소입니다. 거기다 제약도 많고 급격히 군비를 확충하여야하기에 신무기 투자가 늘었던 원역사와 다르게 큰 군대 유지비도 엄청 깨지는데 검증안된 로켓연구에 투자가 될까요? 된다쳐도 그건 나치당 집권기이며 빨라도 나치당 창설초에 나치당 자체 지원을 해도 일개 정당 지원으로 한계니 여전하게 V2는 원역사보다 몇달 빨리 만드는게 가능할겁니다. 뭐, 나치당 집권후 집중투자받으면 된다쳐도 일단 한스가 발언권크니 로켓 개발자금이 티거와 판터 연구로 갔을 텐데 그것도 고려해야죠. 돈이 많은 그 미국도 왜 군축해서 무기 개발도 취소할까요?
좀더 반박하면 1차 만으로도 돈도 엄청 깨지고 반발도 심할텐데, 2차가 가능할지도 모르고 아무리 잡아봐도 나치당 집권이 빨라야 1929년 이후인데 어떻게 10년만에 3차까지 될 수 있습니까? 빌헬름 3세 성향이야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죠. 허나, 결국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란것은 결국 국가를 기업처럼 만들고, 비상상황에서 국가가 모든 자원과 지식등을 통제하여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죠. 그말은 뭘하든간에 결국 독재를 의미하며 국가 위기상황에서는 어떤 것이든 다 희생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공산당 토벌에서도 단순 가담자만으로도 보복의 강도와 진압의 잔혹성이 큼에도 용인된 것입니다. 아무리 기존 나치즘이 민족우선이지만 여기서는 전체적으로 모든 민족을 통합한 다민족주의로 갈지라도 국가 위기에서는 국가의 권력이 강할테고 그 국가의 범죄도 위기 극복의 명분에서 면죄부가 된다는 파시즘 사상은 민주주의와 대립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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