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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님의 서재입니다.

1987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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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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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4,795

작성
23.05.1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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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3화 깡패와 대학생 (3)

DUMMY

할망구가 말끝을 맺지 못하는 이유를 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 정도라면, 남영동이 어떤 곳인지 보통사람들 보다는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손주새끼는 절대로 그런 곳에 못 보낸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고, 젊어서 그런지 나름 견딜만했습니다.”



그녀를.. 아니, 할망구를 위한 나의 대답은 상냥하고 친근했으며, 비록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진중하고, 조금은 사랑스러웠을 거다.


그만큼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후.. 그래. 그럼, 김주혁. 대답. 아까부터 너 말투가 왜 그래? 병원부터 갈까? 그리고, 김태춘은 누구고, 조양원은 우리 손주님이 어떻게 알까? 음? 대답!”



이런 썅.. 실패다.


우리 할망구는 확실히 보통 할망구들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이 와중에도 중요한 포인트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저 표정은 뭐지? 저게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며, 애틋하게 손주를 바라보던 그 사람이 맞나?


말 그대로 얼음장에, 오뉴월 서릿발이 따로 없다.



‘쓰읍. 어떻게 한다..’



유혈이 낭자한 항쟁 직전.


전장의 한 복판에서 상대 조직의 두목을 마주한 것처럼.


나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름에 성을 붙이는 건 위험하다.


그게 가족이면 더더욱 화를 내거나 싸울 때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하지.



“김주혁. 대답.”



할망구는 내가 머뭇거리자, 다시 한 번 차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긴장해야 한다. 관계라는 건, 이 짧은 순간에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아, 음.. 그게, 그런 곳까지 끌려갔다 오니까 저도 모르게 그냥 존댓말이 나옵니다. 뭐.. 새삼 그동안 절 힘들게 키워주신 할머님이, 너어무 고맙기도 하고..”



나는 할망구의 기세에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능숙하게 허세를 부렸다.


대체로 가진 패가 없는 사람이 쓰는 방법이지만, 쓰는 사람에 따라서 허세는 가끔 기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고른 건가.


내 속을 꿰뚫어보듯 미동도 없는 눈빛. 날 안 믿는다.


나또한 이빨도 안 들어갈 진실 따위에 발목 잡힐 생각도 없고, 더더욱 미친놈 소릴 배웅삼아 정신병원에 갈 생각도 없다. 전혀.


자, 그럼 이제 어쩐다.


나는 뭐라도 방법을 찾기 위해 할망구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그래. 그 거짓말은 듣기라도 좋으니 믿어주마. 다음.”



엥? 이게 된다고? 뭐가 이렇게.. 아니다. 거짓말인 걸 들켰으니, 실패한 건가?



“아, 그.. 김태춘.. 은 하, 학교에서 쓰는 제 필명입니다. 본명을 대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음.. 그리고 양원이는 조양원이 아니라 김양은인데.. 예, 그 자식이 워낙 프락치 같은 놈이라서 말입니다. 전 걔가 신고한 줄 알고, 그래서..”



하.. 첫 번째는 어찌어찌 넘어갔는데, 역시나 두 번째는 글렀다.


하긴, 내가 형사들한테 내지른 뉘앙스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젠장. 누가 봐도 알맹이는 없고, 조잡하며, 궁색하다.


전생의 내 얼굴과 말투라면, 어떻게든 한 번 묵직하게 밀어붙였을 텐데.



“됐다. 넘어가자. 어차피 이번 한 번이야. 대신, 다시는 엮이지 마라. 특히 깡패들하고, 정치하는 놈들은 안 돼. 알았어? 대답.”



똑 같은 표정.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전히 할망구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 이상으로 깔끔한 건, 성격인가?


필요한 경고까지 보태, 더는 말도 붙일 수 없게 정리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할망구가 두 말 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대답했다.


나처럼, 저런 성격은 두 말하는 걸 제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변명을 할 땐, 절대 더듬거나 망설이지 마라. 차라리 충분히 준비해서, 한 번에 말해. 입 다물고 있는 동안은 그나마 신중해 보일 테니.”



허.. 무슨 여자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 깡패 짓을 했어도 필시 전국을 휘어잡을 거물급 기세다.



“네. 그것도 명심하죠.”



나는 건조하지만, 순순히 할망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믿어주고 지켜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 정도면, 할망구는 나를 넘치게 배려했다.


덕택에 나는 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첫 단추를 잘 끼웠고, 덤으로 전생에서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를 앞세웠던 나는 다시 가족이 생겼다.


이상한 건, 정작 내가 왜 남영동에 끌려갔는지, 연루된 사람들은 누군지.


나조차도 궁금해 죽겠는 걸, 할망구는 일절 묻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유에 보태, 왜 저 할망구가 깡패들과 정치하는 놈들은 엮이지 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이야, 그저 이렇게 넘어가 주는 것이 고마울 뿐.


그녀.. 아니, 우리 할망구와 나를 태운 최고급 세단, 별표 560SEL이 어느새 삼청터널을 지나 성북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서, 설마 여기는..’




***




축구장의 3배가 훌쩍 넘어가는 7,000여 평의 대지에, 고풍스럽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들이 자리 잡은 곳.


사이사이, 크고 작은 건물들까지 포함하면 못해도 40여 채는 되는 한옥들이 줄지어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슬쩍 창문을 내리자, 수많은 외제차들이 서있는 주차장이 보였다.


입구에서 주차 관리인과 대리 주차를 하는 사람들이 달려 나와 일제히 90도로 인사를 했다.


필시 주먹질이 서툰 지역 아이들과 그렇게 나이를 먹은 중년일 거다.


할망구와 나를 태운 차는 그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서서히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아마도 저쪽 끝으로 이어진 좁은 도로를 타려는 것 같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선을 돌려 창문을 올렸다.


창문이 닫히기 직전, 찬바람에 언뜻 TV에서나 듣던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태원각.. 그 태원각이다!’



7,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을 '요정정치'라고 불리게 할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요정.


그중에서도 3대 요정으로 불리며,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이 비밀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했던 곳이 바로 이 태원각이다.


이곳의 각주는 당시 군부의 비호 아래 엄청난 부를 이룰 수 있었다는데..


군부 또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태원각과 같은 요정들을 기생관광의 무대로 활용했다.


73년도엔 정부 기관인 국제 관광공사 산하로 ‘요정과’라는 부서를 설치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군부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지방세 감면 등의 특별한 세금 혜택을 줬다.


일본인의 입국제한도 풀어주었고, 통금 제한도 예외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성매매 단속법에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특혜에 특혜를 더했다.


이런 사실을 내가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냐고?


할망구의 경고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처럼, 깡패들도 요정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내가 차재철과 이철성을 만난 곳도 이곳 태원각이었고, 나를 포한한 모든 깡패들이 가장 탐내던 것도 이곳 태원각과 같은 요정이다.


그야말로 화수분과 같지만, ‘급’이 달라 삼키지 못하고, 그저 하수인으로만 머물러야했던 곳.


태원각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뿌드득..”



나도 모르게 내 이가 갈리는 소리다. 왤까?


아니, 보통 그딴 것보단 기생집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명색이 전국구 깡패라는 새끼가 쩔쩔맸냐.. 뭐 그런 게 궁금하겠지.


하.. 니미. 쪽 팔리지만.. 7, 80년대의 요정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건, 단순히 생각해서 주먹질 좀 한다고 깡패들이 경찰서나 군부대를 상대로 싸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요정은 그 공권력을 움직이는 자들과 공생하며 부를 쌓았고, 우리 같은 깡패들은 수시로 그들의 수족이 되어 기생(寄生)했다.


물론, 나름 큰 건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허.. 염병. 대체, 뭐하는 집구석인가 했더니..’



나는 저도 모르게 소환해 버린 영혼의 방언을 내뱉으며, 우리 할망구 김지아 여사를 바라다봤다.


저 눈매는 그 때문인가? 그래도 지금은 박통이나 신군부 초기보다는 나을 텐데..


고양이 쥐 생각한다고 쓸데없이 짠하다.


가만, 근데.. 태원각 각주의 이름이 원래 김지아였나?


아니다. 분명히 뭔가 다른 이름이었는데.. 뭔가 다른..


젠장, 모르겠다. 거기까진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따로 무슨 공부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사람 풀어서 뒤를 캐?


쳇. 살아갈 시대와 앞날은 알아도, 정작 내가 누군지를 모르니 답답하다. 정도를 생각했을 쯤.


우리 할망구가 운전기사에게 손을 올려 차를 멈춰 세웠다.




***




“이런, X팔.. 마! 니 내 누군지 모르나? 내가 내다, 이 X섀끼야! 어데 버러지 같은 기, 꾸물꾸물.. 카악, 퉤! 확마! 저리 안비키나!”


“전무님. 제발 먼저 이것 좀, 이것 좀 놓으시고..”



웬만한 문화제 뺨치는 태원각의 정문 앞에서 술 취한 놈이 비틀대며 지랄 중이다.


그놈 곁에서 쩔쩔매며 놈을 만류하는 중년의 표정이 난감했다.



“큭큭큭.. 와? 겁이 나가 내한테 손은 못 대긋나? 하이고야, 빙신, 빙신.. 됐다, 마. 치아라!”



주먹질을 할 것처럼, 아비 뻘은 되어 보이는 중년에게 손을 올리는 놈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놈은 이내 이도저도 못하는 중년에게 흥미를 잃은 듯, 자신의 왼쪽 손으로 고개를 돌렸다.


놈의 손엔 입가에 피를 흘리는 어린기생의 머리채가 잡혀있었다.



“아야, 가자. 오늘 그렇게 처 잘 나신! 니캉 내캉! 한 판 재미지게 놀아야 안 쓰겠나. 으잉?”



야무지게 입술을 앙당 문 기생은 이미 한 바탕 진하게 손찌검을 당했는지, 저고리 앞섶까지 뜯겨져 상처투성이였다.


놈과 어린 기생 주위로 그를 막으려는 자들과, 그를 지키려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대치했다.


그러나 양복을 입은 건장한 두 무리의 사내들은 중년인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눈치만 봤다.


필시 그 놈의 정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리라.



“왜 이리 소란이냐?”



그때, 우리 할망구가 사극에나 나올법한 익숙한 대사로 그들 앞에 섰다.



“가, 각주님.”



맨 처음, 그 놈을 전무라 부르며 말렸던 중년이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태원각 쪽 사람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줄줄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덩달아 인사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할망구의 뒤에 섰다.



“큰 선생님..”



할망구를 바라보는 어린 기생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여기저기 실핏줄이 터지도록 차돌같이 당당하게 버티긴 했어도, 아직 그 상황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리고 여려 보였다.



“뭐꼬? 할매 뭔데? 와 남의 일에 참견이고? 쓰읍.. 마, 됐고! 보소. 어이, 할매요. 그 씰데없이 끼아들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소!”



어린 기생과 주변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듯, 놈의 말투가 끝 간 데 없이 불손했다.



“저, 각주님 그게..”



억울해서 인지, 민망해서 인지, 중년인의 보고가 다급했다.


하지만 할망구는 손을 들어 미처 시작도 못한 중년인의 보고를 무표정하게 잘랐다.


그 모습을 비웃듯이 번갈아 보던 놈이 다시 어린기생의 머리채를 고쳐 잡았다.



“이리 온나, 이 X년아.”



놈이 태화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거들먹거리며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삼정 그룹 3세 이재훈 전무. 가뜩이나 아버님도 승계구도에서 밀려 어수선할 텐데, 여기서 이러고 계셔도 괜찮습니까?”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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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화 깡패와 대학생 (2) +3 23.05.10 521 12 12쪽
2 1화 깡패와 대학생 (1) +2 23.05.10 642 11 13쪽
1 회고. 개새끼들 전성시대 +5 23.05.10 1,006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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