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Prolog
우중충한 하늘은 당장에라도 비를 쏟아 낼 듯 태양을 감추었다.
태양 빛을 머금고 그 주위를 둘러싸은 먹구름은 선명한 빛줄기 하나 놓치지 않았고
그 아래, 평야 위에 우뚝 선 거대한 성은 수많은 군사에게 포위 된 상태였다.
화살 한 방, 화약 터지는 소리, 심지어 지하도를 달리는 쥐 새끼의 걸음마에도 싸움이 시작 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 한 사내는 거대한 성을 말없이 올려다보며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 이건 자살 행위다. 리키. ”
그때, 형체를 알 수 없이 검은 오라만 풍기는 물체가 리키라는 사내의 시선을 가득 메웠다.
“ ······. ”
리키는 머릿속을 울리는 검은 형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혀가 베어진 것처럼, 침묵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저 무거운 턱을 힘겹게 움직였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검은 형체는 그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한 듯 크게 소리쳤다.
“ 나를 위해 죽어라! ”
「 ······. 」
그의 함성을 시작으로 대군이 성 위를 일제히 오르기 시작했다.
총성이 하늘에 메아리치고 포성이 땅을 울린다.
리키는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화살촉이 뺨을 스치는 것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전시 상황의 혼란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고요함만이··· 마치 우주 공간에 놓인 듯한 이질적인 감정만 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리키는 맹목적인 목적을 따라 한 마리의 야수 혹은 괴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대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중갑을 입은 병사들도 종잇장처럼 찢겨나갔으며 땅을 한 번 밟으면 기마병도 쫓아가지 못할 속도로 움직였다.
「 촤- 악! 」
죽은 병사들이 흩뿌리는 피가 리키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는 다른 병사를 죽여가며 전진하고 있다.
본인이 성문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리키는 살육의 축제를 벌이며 어느 순간 혼자가 되었다.
“ 뭘 망설이고 있지? ”
그때, 또다시 검은 형체가 리키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저 멀리 궁전이 보이는 길 위로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것의 목소리는 마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 것처럼 고막 안을 울렸다.
리키는 궁전을 한 번도 본적 없었지만, 그의 맹목적인 목적이 다름 아닌 그곳이었기에 땅을 접어달리며 순식간에 내부로 진입했다.
「 두근··· 두근···. 」
그 순간부터 고요함은 사라졌다.
요동치는 심장은 그것이 한 번 뛸 때마다 대포 소리보다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처럼 큰 불안감을 느낀 리키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의 전신에 맺힌 식은땀이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좁아진 시야는 급기야 주변을 검게 물들였고 화려하게 치장된 궁전 내부는 온통 어둠 뿐이었다.
「 두근··· 두근··· 두근···. 」
그때, 홀로 밝게 빛나는 문이 리키의 두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주변의 어둠을 내쫓을 정도로 환했으며 문은 형형색색 무늬와 그 아래 깔린 카펫으로 고풍스러운 기조를 더했다.
리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땅을 접어달리던 그였지만, 순간 발목에 족쇄를 찬 것처럼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 ··· 님, 하··· 히읏··· 응앗······.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야릇한 신음.
리키는 그 익숙하고도 친숙한 목소리를 부정하다못해 귀를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 도대체 왜? ' 그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누가 조종하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 파- 악! 」
“ ······. ”
실내의 화사한 빛이 리키의 검게 물든 주변을 순식간에 밝게 비춘다.
그곳엔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큰 침대가 화려하게 치장된 모습으로 놓여 있었고 그 위엔······.
젊은 남녀가 태초의 모습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키는 동태 눈으로 처음의 상황을 부정했지만, 침대 위에 알몸의 여자가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을 땐, 짓눌리 듯 무너지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리키는 곧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대검을 움켜쥐며 일어서려는 그 순간, 검은 형체가 그의 시선을 가득 메우며 말했다.
“ 이것이 네가 바라던 모습이었나? ”
“ ······. ”
리키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에 삼켜진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검은 형체를 통과해 지나칠 뿐이었다.
허나 그는 침대 위의 두 사람에게 더는 다가갈 수 없었다.
결계처럼 나뉜 두 공간은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그저 관음만 허용했을 뿐이었다.
리키는 포기하지 않고 곧바로 대검을 들고 결계를 내려쳤다.
「 쾅! 콰- 앙! 콰아앙! 」
“ 이런 비효율적 사고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저 수많은 인간 중 하나 일 뿐이다. 너라면 다른 대체재를 쉽게 찾을 수 있겠지. 아니한가? ”
“ 틀렸어! ”
한 번도 리키의 대답을 듣지 못 했던 검은 형체가 처음으로 그의 대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 난 겁쟁이가 아니야! ”
리키는 울분을 토하며 양손으로 대검을 잡고 결계를 내려친다.
「 콰아- 아앙! 」
“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
“ 저 모습을 보고도 말인가? ”
“ 그래! 난 포기하지 않아! ”
「 콰아아- 아앙! 」
“ 그녀가 널 포기했다면? 눈앞에 대답이 보이지 않는가? ”
“ 이유를 묻고 직접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절대 포기 안 해!!! ”
그때, 리키의 절실함이 담긴 대검이 마침내 결계를 박살 냈다.
“ 흥미롭군··· 뒤, 조심해라. ”
「 쑤- 욱. 」
리키가 결계 안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로 날카로운 검이 가슴팍까지 뚫고 나온 것이었다.
“ 아······. ”
리키의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비에 걸린 것처럼 곧 몸 전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네 겨우 팔 하나 뻗을 수 있었고 그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본인의 존재를 모른 채, 서로를 여전히 탐하는 두 사람이었다.
리키는 정신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죽음인가?' 사방이 점점 그림자에 삼켜진다.
리키는 어둠에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마지막 단말마를 외쳤다.
“ 유리아!!! ”
「 짹- 짹. 」
“ 헉··· 헉······. ”
리키가 가파른 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내린다.
'꿈··· 인가?' 리키는 안도했지만, 연신 들썩이는 어깨가 불안감을 쉽게 떨쳐 내지 못했다.
참새 지저귀는 소리와 따스한 햇빛만이 그의 심정을 달래듯 어루만져 줄 뿐이었다.
“ 리키? 무슨 일이야? ”
그때, 누군가 리키의 방문을 활짝 열며 다급하게 들어왔다.
갈색 머리와 청아한 얼굴을 가진 소녀가 은하수를 담은 듯한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다가간다.
“ 헉··· 헉······. ”
리키는 그 순간까지도 놀란 속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소녀가 그의 곁에 앉으며 젖은 이마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결이 리키의 뺨에 닿자, 그가 소녀를 왈칵 안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안도감이 리키를 덮쳐왔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을 뿐이었다.
“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침대가 다 젖었네. ”
“ 어··· 지독한 악몽이었어. ”
그때, 소녀가 리키의 뺨을 양손으로 잡았다.
망설임 없이 입술을 가져간 그녀는 키스로 위로를 대신하였고 리키는 그 무엇도 견줄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 우리 둘 다··· 타지에서 고생이네. ”
소녀가 리키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 곧 끝날 거야. 약속 할게··· 유리아. ”
“ 후후··· 그래. ”
태양이 더 높게 뜨고 따스한 햇빛 아래 새들의 노랫소리가 더 커져 온다.
그렇게 화이트리전의 아침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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