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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네 님의 서재입니다.

19세기 조선 재벌가문에 환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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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네
작품등록일 :
2022.10.31 22:14
최근연재일 :
2022.11.1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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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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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장 천주교도 종친의 아들

DUMMY

2장 내 이름은 이채중.


혼자서 잘 놀다가 고함을 지른 바람에 온 집안을 발칵 뒤집고, 이번 생의 아버님이신 이채중(李采重) 어르신에게 꾸중을 들은 난 내 방에서 자숙한다는 핑계로 방안에 틀어박혔다.


“일단 성인이 될 때까진 조용히 지내자. 지금은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시작한 시기인데······김조순 집권기에는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니까 일단은 가만히 있는 게 좋겠지.”


세도정치의 시작은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붕괴한 상태에서 김조순이 사망하자, 그의 자식들과 조카들 그리고 친족들이 그가 쌓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점차 막장 행보를 달리면서부터이다. 바꿔 말하자면, 김조순이 살아 있는 지금은 그나마 제대로 굴러간다는 얘기였다.


“왕위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만 잘 인식시킨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지장이 없을 텐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

“도련님. 진지 드실 때 되었사옵니다.”

“알겠다. 내 곧 가마.”


결론을 내릴 때 밖에서 하인이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자, 난 대답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찰자 양반이 재미없게 나아갈 것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아마도 이 세계 역사가 내가 살던 세계 역사와 비슷하게 나아갈 가능성이 컸기에 그런 모양이겠지. 가만! 그럼 이 세계와 내가 살던 세계 차이점은 무엇이지? 대체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내가 살던 세계와 역사가 분기된 것이고, 또 어째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지?”


* * *


‘이런 차이점이 있는데도 같은 길을 걸어간다오?’


식사를 하러 모인 장소에서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생각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차이점.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늘에 계신 천주님. 오늘도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아버지께서 식전 기도를 마치신 후, 온 가족이 성호까지 긋는 것을 확인한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가족들처럼 기도하고 성호를 그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연유로 자기 부친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해서 밥이 잘 안 넘어갔다.


“창응아. 왜 그러느냐? 오늘따라 네가 입맛이 없어 보이는구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냐?”


아버지께선 평소 같았으면 머리통만 한 밥그릇을 밥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을 내가 두어 숟가락 뜨다가 고민에 빠져 끼니를 거르자, 식사를 마친 후 하인들이 밥상을 모두 내간 후에 내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살피시며 질문하셨다.


“아닙니다, 아버님.”

“허허,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면 솔직히 묻도록 해라.”

“그, 그것이······. 다른 집에 비해 우리 집이 왜 식전에 기도를 올리는지 궁금합니다.”


부친의 말에 난 주저하다가 질문했다.

대체 언제부터 식전에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였으며, 또 아버님이 천주교를 믿으셨는지를 말이다.

그러자 부친께서는 표정을 굳히셨다가, 곧 쓴웃음을 지으시며 입을 여셨다.


“그래. 너도 우리 가문이 왜 천주교를 믿는지 알게 될 때가 왔구나.”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하하. 그게 말이다······.”


아버지는 어린 날 들어 무릎에 앉힌 후 설명을 시작했다.


* * *


조선에 기독교가 전래 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되시는 목조 이안사 시절로, 당시 동북면 일대를 다스리며 이안사를 위시한 여러 군벌과 관리들의 항복을 받아들인 옷치긴 왕가의 산지(散吉) 대왕(大王)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를 퍼뜨린 것이 계기였다.

당시 산지 대왕에게 초빙된 경교 사제들은 중동에서 전래 된 의술을 바탕으로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하는 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쳐왔기에 현지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작성한 세례자 명부 덕분에 다른 몽골 왕가들처럼 행정력이 부실한 옷치긴 왕가가 호구조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침 동북면의 고려인들은 고려 조정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으며, 동시에 그들이 믿던 불교(특히 교종(敎宗:경전을 중시하는 불교 종파))에 대해서도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부패한 승려들의 고리대금으로 백성들을 착취한 것으로도 모자라 각종 불교 행사를 위한 과세 등으로 백성들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지 대왕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경교는 하층민들 위주로 삽시간에 동북면 일대에 널리 퍼져나갔으며, 당연히 이안사와 그의 직계 후손들도 경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전인 옷치긴 왕가가 경교 선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데, 일개 군벌 수장인 그가 어찌 이를 막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불교도인 이안사의 식솔 중에도 경교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생겨났고, 당연히 이안사를 따라 동복면까지 함께 한 고려인과 인근의 여진족 중에도 하나둘씩 경교 교회를 다니는 자가 늘면서, 어느새 한반도 동북면을 시작으로 우수리강을 따라 산재한 여진족들 부락에 경교의 교세가 빠른 속도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불교도들은 경교 교세의 급속한 확산에 반발했다.

하지만 상전인 옷치긴 대왕이 통치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작정하고 경교 선교를 지원하는 터라 다들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이를 용인해야 했고, 덕분에 이안사가 죽고 이행리가 천호장(千戶長:밍간)과 다루가치(원나라 지방관리) 직위를 물려받을 당시의 경교 교세는 기존 불교와 거의 백중세를 이룰 정도로 성장해버렸다.

다만 급격한 교세 확장의 여파로 부족들 사이의 갈등은 종교 문제까지 더해 점차 커졌다.

어느 정도이냐면 경교를 믿는 여진족 부락이 불교를 믿는 여진족들의 공격을 받으면 같은 여진족이 아니라 같은 경교를 믿는 고려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심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원래 역사에서는 이행리가 다른 여진 천호장들의 공격을 받아 오동(斡東)에서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현재의 원산으로 도피했었지만, 이 세계의 이행리는 여진 천호장들이 종교 문제로 극심하게 내분을 벌이느라 이행리를 공격할 여력이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이 세계의 이행리는 오동에서의 기반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수정력이라도 있었는지, 1287년에 옷치긴 왕가의 제4대 왕인 나얀(乃顔:타가차르의 손자)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세력을 잃고는 원산으로 도피해 원래 역사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이행리의 도피 이후에도 만주 동북면과 함경도에서 경교와 불교는 서로 백중세를 유지했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중동을 지배하던 일 칸국의 칸 테구데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이후, 몽골군에게 보호받지 못하게 된 이란과 소아시아의 경교도들이 몽골과 중원을 거쳐 경교도 최후의 낙원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진 동북면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 동북면은 나얀이 일으킨 반란의 여파로 인명 손실이 극심했기에, 그 일대를 다스리던 옷치긴 왕가는 경교도 피난민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받아들였다.

그 결과 동북면의 종교의 균형이 깨져버렸다.

더욱이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에는 이슬람교도와 홍건적의 학살을 피해 중앙아시아와 중원의 경교도들까지 대거 피난을 오게 되면서, 동북면 일대는 인종의 용광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종다양한 이민족들이 들끓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피난민 대부분이 경교도이다 보니, 비록 인종은 틀릴지라도 종교적 결속력은 단단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안사의 후손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부터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지지자들은 신진 사대부들로서, 평소 고려 말기의 부패한 사찰들을 비판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불교도 모자라 경교라는 이질적인 종교가 그들의 앞에 떡하니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경교 사제들은 당시 부패했던 불교와 달리 청빈한 삶을 지키며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리스 철학이라는 해괴한 사상까지 가르쳐주고 있었으니, 자신들의 정체성과 지위가 위협받게 된 유학자들이 그들을 떨떠름한 시선으로 보게 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같은 조선인으로 취급한다지만, 동북면 백성들은 인종적으로 조선인들과 별개의 민족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불교를 믿어왔던 조선인들과 달리 대부분 경교라는 낯선 종교를 믿고 있었기에, 일반 조선 백성들 또한 정서적으로도 거리감을 두게 된 건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당시 종친들과 동북면 출신 관리 중에도 경교를 믿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이성계 또한 본인이 독실한 불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 부하들을 배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법을 따르고 풍습을 존중한다면 같은 조선인이라고 우기며 그들을 반 억지로 조선에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경교 수도사들의 의료 선교활동 덕분에 의원을 찾기 어려운 하층민들이 혜택을 본 데다, 충실한 세례자 명부 작성으로 호적조사도 쉬워졌기에, 경교는 고려 말기의 혼란으로 엉망진창이 된 행정망을 복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으니, 조정에선 지방 사대부들의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경교 사제와 신도들을 감싸줄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 덕분에 여말선초 혼란기에 붕괴한 행정망을 복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원래 역사와 달리 이 세계 동북면 여진족 중 경교를 믿는 부족들은 함경도 곳곳에 세워진 교회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미사를 봤으며, 교회 인근 마시장에서 거래도 하는 등 조선의 정책에도 잘 호응하고 있었기에 조선의 여진족에 대한 통제는 그만큼 쉬워졌다.

또한 중앙아시아와 중원에서 피난을 온 경교도들이 고향의 농작물 종자들과 함께 보다 발달한 농기구와 농법과 수리 기술 등도 가지고 왔기에, 이 세계 조선의 농업 생산성은 원래 역사보다 높아졌다.

따라서 당시 사대부들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이를 용납할 수밖에 없었다.

경교 사제들의 도움 덕분에 엉망진창인 행정력을 복구하기가 쉬워진 데다, 이성계를 따르던 여진족들을 제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온 종자와 농기구, 농사법 덕분에 농업 생산성도 향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행정력이 복구됨에 따라 경교 사제들의 효용성도 줄어들었으며, 독실한 불교도인 세조의 집권기부터 왕실에서 경교와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되면서 경교의 영향력은 서서히 약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경교의 교세가 확 꺾여버렸다.

당시 조선을 침공한 왜국 장수 중 한 명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십자가가 수놓아진 깃발을 군기로 사용할 정도였으며, 천주교 수도사도 대동시켜 선교활동을 시켰었다.

그 결과 천주교와 경교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 일부 신자들이 왜군에게 협력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임진왜란 이후 하삼도에서 경교 신도들이 순왜가 아니냐는 오해 아닌 오해를 사게 되면서, 지방 향반들과 결탁한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에게 공격받고 밀려나게 된 것이다.

결국 당시 종친과 사대부 출신 경교도들은 자신과 하삼도 신도들의 안위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성리학 원리주의자들과 암묵적인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 * *


“그것이 경교 신자들의 조정 출사 금지와······.”

“신앙을 지킨 종친들은 군호는 받을 수 있는 데다 주상전하의 윤허가 있으면 출사도 할 수 있지만, 대신 왕위계승권은 박탈당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건 오히려 종친으로선 축복이니 일단 넘어가자꾸나.”

“예.”

‘축복이라······. 역모에 휘말릴 일이 없어졌으니 틀린 말은 아니네.’


대답한 직후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버지께서 설명을 계속하셨다.


“아무튼, 당시는 경교 사제들이 지방 수령들의 업무를 보조해주는 데다, 의원을 찾아가기 어려운 서민들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벌인다는 공을 인정받았기에 그 정도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단다.”

“······그럼 천주교도 경교와 마찬가지 제한을 받으며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까?”

“그렇단다. 게다가 우리 가족들에겐 나쁜 일만은 아니란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천주교를 믿는 이상 음모에 휘말릴 확률이 극단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란다.”


작가의말

종친으로 할일 없이 놀고 먹는 한량으로 지낼래? 아니면 기독교도가 되어 자유로이 살래? 하고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어찌 대답하시겠습니까?

종친은 유사시 왕위에 오를 수 있지만, 대신 언제든지 역모에 휘말려 사약을 먹거나 유배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도 종친은 역모에 휘말리지 못하는 대신에 왕위 계승권 자체는 없으며, 종친으로서의 특권도 적게 받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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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6장 조정에서 청나라의 정세가 거론된다.(2) +1 22.11.14 156 6 12쪽
15 6장 조정에서 청나라의 정세가 거론된다. +1 22.11.13 147 8 13쪽
14 5장 가문의 비밀(5)(수정) +3 22.11.12 166 6 12쪽
13 5장 가문의 비밀(4) +1 22.11.11 161 6 15쪽
12 5장 가문의 비밀(3) +1 22.11.11 168 8 15쪽
11 5장 가문의 비밀(2) +3 22.11.10 196 5 13쪽
10 5장 가문의 비밀. +2 22.11.09 207 5 13쪽
9 4장 김좌근을 만나다.(3) +1 22.11.08 205 9 14쪽
8 4장 김좌근을 만나다.(2) +2 22.11.07 218 10 14쪽
7 4장 김좌근을 만나다. +3 22.11.05 260 7 12쪽
6 3장 김조순이 아들들과 중원의 정세를 의논한다.(2) +1 22.11.04 292 10 14쪽
5 3장 김조순이 아들들과 중원의 정세를 의논한다 +6 22.11.03 387 10 12쪽
4 2장 천주교도 종친의 아들(2)(수정) +2 22.11.02 503 15 15쪽
» 2장 천주교도 종친의 아들 +6 22.11.01 629 38 13쪽
2 1장 어느 낙오자에게 주어진 기회 +2 22.11.01 711 41 12쪽
1 프롤로그 +2 22.11.01 703 3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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