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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님의 서재입니다.

화관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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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ella
작품등록일 :
2019.01.16 14:40
최근연재일 :
2019.01.30 11:08
연재수 :
6 회
조회수 :
149
추천수 :
1
글자수 :
25,073

작성
19.01.16 14:50
조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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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기사와 소녀

DUMMY

어린 시절 떠나왔던 고국의 이 손바닥만 거주지도 가정의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세라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불이 켜진 건물을 찾으려면 몇 시간이나 하염없이 운전해 나가야했던 영국의 외진 시골마을에 틀어박혔었다.


해가 지면 억세게 자란 노지의 루바브 향이 지독하게 신선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가족들은 세라의 친척들이었으나 어린 그녀를 지극히 불편하게 여겼다.


하루 중 오직 그들의 저녁식사 시간만이 끝없는 집안일에 지친 세라가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숨죽은 저녁 풀을 쓰다듬는 바람이 깨끗할수록 세라는 몸에 베인 먼지 냄새를 느꼈다.


그 집 다락엔 할머니가 생전에 마련해준 작은 방이 있었다.


모든 것이 낡았지만 세라가 무척 좋아했던 방이다.


세라는 그리워 할 사람도 없이 쓸쓸한 밤, 등받이 없는 의자를 침대 곁으로 끌어와 작은 램프를 밝히던 순간을 좋아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루기도 전에 세라의 방엔 버리는 가구와 꺼낼 일 없는 친척들의 짐이 쌓여 문조차 쉽게 열 수 없게 되었다.


외숙모는 먼 농장에 있는 본 적 없는 친척 남자에게 세라를 보내기로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찾아온 나이 많은 남자는 꽤 오래전부터 그의 아이들과 가사와 농장 일을 돌봐줄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세라는 그가 세라의 외숙모에게 ‘소개비’를 건네는 것을 보았다.


세라는 할머니의 냄새가 나는 낡은 숄을 가방에 숨겼다.


외숙모가 옮겨둔 무거운 가구를 어깨로 밀고 마룻바닥 하나를 뽑아 자신이 할머니와 함께 숨겨두었던 것들을 꺼냈다.


흔한 열쇠가 든 편지봉투와 작은 지갑과 여권이었다.


열쇠가 든 편지 봉투 겉면에 잉크가 흐릿해진 주소지가 보였다.


소중한건 모두 가방에 넣었으니 이제 이 정원의 새 주인들에겐 미움도 미련도 없었다.


차를 얻어 타고 열차를 타고 터미널을 거쳐 쉬지 않고 히스로 공항까지 달렸다.


작은 사고를 하나 겪긴 했어도 집까지 무사히 찾아온 것은 좋았으나, 날이 밝자 이곳에서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작은 싱크대에 기대서 뭔가 기억해냈다.


싱크대 찬장을 열자 책이 또 한 무더기 떨어져 내렸다.


세라가 지금보다 더 요령이 없고 겁에 질린 아이였을 무렵 아끼던 베이킹 책이었다.


사랑스런 쿠키와 케이크 사진이 가득한 표지가 일으킨 향수는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원한 적 없는 책속의 재해들처럼 이것도 어리고 배고팠던 아이에게 손쉽게 현실이 되어주면 좋았으련만 그런 편리한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라는 알 수 없는 차이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봤으나 물어볼 곳도 없는 와중에 무엇 하나 정확히 알 길은 없었고 아무래도 이 병의 증상은 사람의 사리사욕과 관련된 일에는 발동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요컨대 이렇다 할 경제적 부가 가치적 재산적 가치를 가진 그 어떤 재화도 책 밖으로 끌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도도 전기도 끊긴 집 안에서 물 정도는 허락된 걸 감사히 여기고 베이킹 레시피를 눈으로 읽어내려–본래대로라면 반죽에 들어갔어야 할-반 컵 분량의 물을 얻어냈다.


조난이라도 당한 것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양손바닥에 고여 찰랑이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책을 덮어 다시 찬장에 올려두었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해오던가 요리하는데 물이 더 많이 들어가는 책을 찾던가 해야 할 판이었다.



잊고 있었던 한국의 여름은 굉장했다.


오전 10시쯤 벌써 머리카락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이글거리는 하늘 아래를 걸으며 머릿속으로 설국을 간절히 바라본다.


비록 단출한 살림이지만 –전기와 물이 끊긴 집에서도 살림이란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생활이라는 걸 해보려면 일자리가 있어야했다.


한국으로 도망치듯 찾아오는 데에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돈은 이미 바닥을 보였다.


세라는 자신이 기억하던 주택가의 모습을 거의 남기지 않고 높은 빌딩이나 대형 매장이 들어선 길을 걸으며, 그 유리벽 어딘가에 구인 벽보가 붙어있지는 않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 한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도심 한 귀퉁이를 칼로 뚝 자른 듯 모든 곳에서 동떨어진 분위기의 아름다운 호텔과 그 라운지에 앉은 한 남자를.


세라는 감탄했다.


높은 천장까지 닿는 덩굴 꽃나무들로 어디에나 녹색 그림자를 드리운 이 아름다운 라운지는 마치 비밀의 화원 같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로 책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폭풍 같은 반가움이 몰려왔다.


자신이 불러 낸 늑대에게서 필사적으로 구해 주려했던 그때 그 금발머리 남자였다.


세라는 건물의 깨끗한 유리 앞에 서서 자신의 행색을 점검했다.


증명사진이라도 준비할 생각으로 예쁜 긴 머리를 공들여 빗고 나온 자신을 칭찬했다.


마음이 바빠져 발부터 옮기면서 얇은 블라우스를 아래로 잡아당겨 매무새를 다듬었다.


작은 짐 가방에 챙겨온 몇 안 되는 외출복으로 밝은 초록색이 자신의 창백한 안색이나 검은머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화려한 곳에 들어가려고 하면 누군가 지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초조했다.


그렇다 해도 세라는 자신에게는 있을 리 없는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뻐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금발의 외국인 미녀가 안내해 준 자리는, 고맙게도 비어있는 두 테이블 건너 그 남자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


도기에 심겨진 키 큰 꽃나무들 사이로 빛이 쏟아져, 독서중인 남자가 있는 풍경은 마치 가치 있는 명화처럼 보였다.


나이 많은 외국인들이 몇몇 보일 뿐 실내는 매우 정숙했다.


책 냄새를 떠오르게 하는 마른 나무 줄기 향이 할머니가 곁에 있던 시절의 자신의 방과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매우 낯설고 근사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속에서 찾아낸 거목 위에서 할머니의 숄과 꽃잎을 이불 삼아 자고 일어난 피로한 몸에, 이 커다란 고급 소파는 저절로 한숨이 나올 만큼 편안했다.


이렇게 편안하고 온몸이 푹 감싸이는 소파라니 세라는 저 남자의 독서가 지금 얼마나 안락할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남자의 테이블 위엔 낯익은 표지의 원서가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 Lolita, Atonement 순서로 쌓여있었고, 의외롭게도 두보의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커다란 손이 Atonement 위에 三吏三別을 얹었다.


숨죽이고 쳐다볼 생각이었지만 조심스레 모아둔 숨이, 두보를 둘러싼 시대의 비통함과 금발 머리 외국인 남자 사이의 방대한 괴리감으로 인해 ‘쿨럭’하고 기침소리를 내버렸다.


자기가 낸 소리에 스스로 놀라 허겁지겁 커다란 메뉴판을 세워 뒤에 숨은 뒤 주문이 급한 척 아까 봤던 금발의 여성과 눈을 맞췄다.


- 안녕하세요 아가씨. 이 사람 행복하게 죽었나요?


그러나 눈을 마주친 여성이 미소를 띠며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보다 빠르게, 그 반대 방향에서 슬프면서도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톡톡 하고 손가락 끝으로 두보의 초상화가 그려진 책표지를 치는 소리 까지 들렸다.


- ...그... 그다지요.


낯선 남자가 자기 뒤통수에다 대고 뭘 묻는 건지 굳이 보지 않고도 아는 자신의 처지가, 지금껏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는 자백 같아서 세라는 귀까지 빨개진 채 두보의 말년을 실토했다.


- 애프터눈 티로.


메뉴판을 받으러 온 여성에게 주문을 한건 어느새 세라의 테이블 앞에 선 그 남자였다.


그 아름다운 여성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가 내민 메뉴판을 받아 돌아갔고 세라는 분별없이 라운지로 들어온 것을 심하게 후회했다.


- 어려 보이는데 두보를 아나요?


키 큰 외국인이 푸른 눈을 빛내며–유창한 한국말로-한국인이 한자가 가득한 책을 알고 있다고 칭찬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가까이서 본 남자의 외모는 심하게 고상한 것이라 말문이 막혔다.


빛이 비치면 금발인지 백발인지 알기 어려운 머리카락이 마찬가지로 색이 엷은 푸른 빛 눈동자나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너무나도 어울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 반갑습니다 아가씨. 아서라고 불러주세요.


- 저는... 세라예요. 저... 방해해서 미안해요!


세라가 척수반사로 대답하고는 집안의 가스 유출 여부를 걱정하는 소릴 하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무릎에 손을 얹는 평범한 모습에도 왠지 모르게 위엄이 느껴졌다.


- 아닙니다. 심심해서 아무데나 참견하고 싶었거든요. 괜찮다면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매우 친절하게 대해져 얼굴로 피가 몰리는 와중에 테이블 위로 사랑스러운 티 포트들과 셔벗 잔, 은테가 둘러진 예쁜 3단 트레이와 은으로 만든 커트러리가 놓여졌다.


- 그...... 자... 잘 먹겠습니다...


세라는 박차고 나갈 타이밍을 놓쳐, 다시 엉거주춤 앉아 난데없이 얻어먹는 형태가 되었다.


뺨이 뜨거워졌지만 따듯하고 달콤한 냄새가 오랫동안 비어있던 속을 자극해 떨리는 손으로 데워진 찻잔을 들었다.


따듯한 차가 여름 꽃잎 향을 풍기며 메마른 입술을 거쳐 허기진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눈앞에 초콜릿 코팅이 반짝이는 에끌레어나 샌드위치와 마카롱이 가득 하다는 사실과 자신에게도 '반가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뻐서 세라는 웃는 얼굴이 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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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증상 사용 설명서 19.01.17 19 0 12쪽
3 덮지 못한 책 19.01.16 19 0 10쪽
» 기사와 소녀 19.01.16 19 0 10쪽
1 늑대와 소녀 +1 19.01.16 44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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