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재서재재제제개재잭

작은 물의 카페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빨간불고기
작품등록일 :
2016.04.14 11:38
최근연재일 :
2016.05.03 04:37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456
추천수 :
30
글자수 :
81,729

작성
16.04.22 17:18
조회
156
추천
4
글자
26쪽

과테말라 안티구아(6)

DUMMY

엘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진혁은 대체 아린이 어디로 갔나, 궁금했었다. (진혁이 추측하기에)비서인 그녀라면 엘리아 옆에 딱 붙어서 수행원처럼 따라다닐 줄 알았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진혁은 엘리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카페 앞으로 돌아왔다.

“그거 아세요?”, 라며 엘리아가 천진난만하게 물으며 말했다.

“종종 사람들이 음식에서 기억에 가려진 추억을 찾는 경우가 있어요. 기억 속 맛과 차려진 음식의 맛이 같으면 그렇게 되죠.”

요리왕 x룡 같은데서 흔히 나오는 소재지. 집에서 드라마나 애니, 만화만 보는 진혁도 잘 아는 패턴이다.

“하지만 커피나 차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감정을 마시는 사람에게 불어넣는 힘이 있어요.” 엘리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진혁의 신경은 정작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도와준다고 해서 가게에 돌아오긴 했지만 당장 준환에게 뭐라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엘리아님.”

그때 사라졌던 아린이 가게 안에서 나왔다.

“확인 해봤더니 3일 정도 시간차가 존재합니다.”

“역시!”

짝, 하고 손뼉을 마주친 엘리아가 진혁에게 물었다.

“혹시 3일 전에 어떤 일 없었나요?”

“3일 전이요? 그건 왜······?”

“이유는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까 얼른요! 아무거나 좋아요! 사소한 거라도!”

“3일 전이면······.”

그렇다고 해봤자 최근 진혁의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일어나서 알아서 밥을 차려먹고, 카페로 출근 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퇴근······.

아니지, 평범하면서 3일 전에만 했던 게 있잖아?

“···그 날 병원에 갔었어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날. 그리고 3일 전이면 진혁이 정신과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약물 복용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던 때다.

“병원이요?”

“네, 그 때 더 이상 약물 치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거든요.”

“병원이라······. 왜 병원에 갔었던 걸로······. 아! 혹시?!”

삽시간에 다양한 감정들이 엘리아의 표정에서 지나갔다. 마지막엔 “유레카!”를 외칠 듯 입을 쩌억, 벌렸다.

“이제 알겠어!”

“뭐가요? 뭘 알겠는데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진혁이 재촉했다.

“아까 낮에 커피가 쓰기만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고요!”

“에? 쓰기만 하다니요? 엘리아 씨가 원래 그런 커피라고 했잖아요?”

진혁이 기억하기로 과테말라 안티구아 커피는 쓴맛이 강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엘리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커피가 쓰다고 하는 그녀가 진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설명은 안에 들어가서 드릴게요!”

각설하고 엘리아가 앞장서서 카페로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진혁은 괜히 아린 한 번 쳐다본 뒤 따라갔다.

가게 안은 상당히 분주했다. 테이블 마다 더치커피 추출 기구가 올라와 있고 준환이 하나하나 그것들을 세밀히 살펴봤다.

낮에 있었던 손님들의 불만이 거슬렸던 그는 쓴맛의 원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그때 엘리아들이 들어서자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가 집에 돌아가라 했을 텐데.”

친근하던 말투는 사라지고, 아들을 발견한 준환이 살벌한 화를 뿜어내듯이 말했다.

“제가 잠깐 동행해달라고 했어요.”

그 사이를 엘리아가 베시시,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아가씨도 왜 여기 있는 거요? 아까 돌아간 거 아니었나요?”

“도와드리려고요!”

“도와줘? 뭘?”

“커피에서 쓴맛이 나서 고민이시잖아요. 그래서 지금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기구들을 꺼내 놓으신 거고요.”

“···.”

정곡이 찔린 준환이 침묵으로 답했다. 그는 하던 일을 속개하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커피에 대해 능통한 건 알겠지만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나도 내가 뭘 실수 했는지는 아니까.”

냉담한 준환의 태도에 진혁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세상 어느 가정의 아버지가 그렇듯 가장의 고집은 제아무리 무서운 아내가 와도 꺾을 수 없다. 특히 커피에 관한 남다른 고집이 있기에 이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아도 만만치 않았다.

“뭘 실수 했는지는 알 수 있어도 왜 실수 했는지는 모르실 걸요?”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을 했다간 한바탕 하실 기세로 진혁들을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아린이 나서려고 하자 엘리아가 손으로 저지하며 설명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낮에 파시던 커피는 제가 먹기에도 쓴맛이 강했어요. 과테말라 산은 스모키한 향 때문에 쓴맛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아버님이 만드신 건 확실한 차이를 보였죠.”

“그야 그건 안티구아 생두가 단단해서 오래 볶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아가씨가 설명하지 않았나?”

“단단한 생두라서 오래 볶아야 한다는 건 오래 볶아야지만 원두 본연의 맛을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안티구아 커피는 아로마 향이 나면서 단맛이 나기로 유명하죠. 근데 아버님의 커피는 향이 부족하면서 단맛은 아예 나질 않았어요.”

“내가 커피를 잘못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군.”

“엄밀히 말하면요.”

어리숙한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완전히 다른 엘리아가 무서운 아버지와 마주했다. 한 성격 하시는 아버지도 물러섬 없이 눈썹을 가늘게 떠가며 10대 소녀와 눈싸움을 벌였다.

자신의 커피가 엉망이란 걸 믿고 싶지 않겠지. 지난 2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만들어 온 경험이 고작 어린아이에게 꿀리기 싫기도 하겠고.

“왜 그런지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

그런데 웬일로 아버지가 먼저 해명을 요구했다. 커피만큼은 고집 센 아버지가···.

엘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입구에 손님들에게 가져가라고 내놓으신 커피 찌꺼기를 봤어요.”

어제 내가 커피 찌꺼기를 버렸던 통을 가리키자 진혁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무언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냄새만 맡아보면 전부 과테말라 안티구아 커피에요. 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났죠. 자세히 살펴봤더니 3일전에 분쇄한 원두가 최근의 것들이 비해 입자가 굵은 것들을 비교해면······.”

비교해보라며 엘리아가 직접 커피 찌꺼기들을 양손에 한 움큼씩 쥐어서 보여줬다.

“이거······. 크기가 다른데요?”

진혁이 가장 먼저 그 차이를 알아챘다. 누구도 아닌 더치커피 추출 기구에 분쇄된 원두를 채워 넣은 사람이 자신이었기에, 또한 그 차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입자가 고운 쪽이 최근 3일 이내 만들어진 거고 굵은 건 그 전에 만들어진 커피에요.”

“이게 커피가 쓴 이유라고요?”

엘리아는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문제! 왜 이 두 가지 원두는 입자의 크기가 다를까요?”

“그야 입자가 고우면 진한 커피를 뽑을 수 있으니까······.”

추출 기구에 커피를 채울 때도 진혁은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상식적으로 입자가 고우면 물이 투과하기 힘들어서 진한 커피가 나오니까.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선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두 가지를 잘 보세요. 정말 미세하지만 크기 말고도 한 가지 차이점이 더 있어요.”

진혁과 준환의 얼굴 바로 앞까지 엘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엔 어떤 차이가 또 있다는 건지 알지 못했다.

“어? 이거···?”

먼저 답을 알아낸 건 진혁이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서 냄새까지 맡았다.

“정말 미세하지만 입자가 고운 쪽이 훨씬 탄 냄새가 나는데요?”

“딩동댕~ 정답입니다! 우와~ 어지간한 후각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건데 대단해요!”

멋쩍은 칭찬에 쑥스러운 듯 진혁이 뒷머리를 긁었다.

애들 장난 같은 기분이 들자 준환이 한껏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입자가 고운 쪽은 내가 로스팅 과정에서 원두를 태웠기 때문에 쓴맛이 난다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 설마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로스팅 과정에서 실수를 한다는 건 초보자가 아니고서는 확률이 높은 실수는 아니에요. 설령 까다로운 직화 방식을 썼다고 해도 오히려 까다롭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쓰셨을 겁니다.”

“그럼 왜 이런 차이가······?”

엘리아는 다시금 커피 찌꺼기를 통에 버리고 손을 털며 말했다.

“똑같은 원산지 커피를 똑같은 방식으로 추출한다면 입자의 크기가 굳이 달라질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입자 크기가 일정해야만 맛이 균질할 거예요. 그런데 입자 크기가 다르고 탄냄새가 난다는 건 추측이지만 로스팅이 아니라 분쇄 과정에서 실수를 하셨기 때문이죠.”

직접 생두에 열을 가해서 태우고 말고를 결정하는 로스팅이 아니라 분쇄 과정에서 원두가 탔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진혁은 쫑긋 귀를 세웠다.

준환은 아직도 못마땅한 눈치다.

“분쇄과정에 문제가 있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그냥 평소 쓰던 분쇄기에 똑같은 설정으로 커피를 갈았을 뿐이네. 그리고 입자가 더 고운 건 추출 과정에서 더 진한 커피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뿐이고.”

진혁도 입자가 고운 건 그런 거라고 처음엔 여겼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몇몇 커피는 고의로 분쇄도를 높여서 추출했던 적이 있다.

엘리아는 그렇지 않다고 경쾌하게 검지를 휙휙, 저었다.

“입자의 크기가 다른 건 그렇게 변명하실 수 있지만 냄새가 다른 이유까지 감출 수는 없습니다.”

“···.”

“흔히 대량의 원두를 분쇄할 때 가끔 하는 실수 중 하나인데 분쇄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열을 고려하지 않아서 원두가 타곤 하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진혁도 알고 있다.

기계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계식 자동 커피 분쇄기를 이용할 땐 원두를 넣고 계속 갈아주면 안 된다. 분쇄되는 과정에서 마찰열이 생겨 원두가 원했던 로스팅 포인트보다 더 볶아지기 때문이다.

“대량의 원두를 분쇄할 때는 갈다가 멈추기를 수시로 반복해야 돼요. 입자를 일부러 곱게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끊어가며 분쇄해야 마찰열이 발생하지 않죠.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끊어가지도 않고 입자가 고와질 때까지 원두를 그냥 가셨던 거예요.”

그제야 진혁은 왜 커피에서 쓴맛이 나는지 알게 됐지만―

단 하나,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정식 바리스타가 아니더라도 준환의 카페는 강릉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 2년 동안 별 탈 없이 만들던 커피가 하루아침에 쓰디쓴 싸구려 블랙커피로 전락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커피나 차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감정을 마시는 사람에게 불어넣는 힘이 있다고.”

“그게 무슨······.”

진혁은 점점 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달라진 입자 크기, 분쇄 과정에서 타버린 원두, 쓴맛이 나는 커피까지―

그때 불현 듯 진혁이 본 아버지는 더 이상 화나 분노가 아닌 참기 힘든 울컥함으로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빠?”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준환의 신경은 진혁이 아닌 엘리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엘리아도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아무 문제가 없던 커피 맛이 바뀐 건 아버님의 흔들리는 마음이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운을 때며 엘리아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 흔들리는 마음은 아드님이 병원에 갔다 오면서 발생했고요.”

‘나······ 때문에?’

설마 하는 마음에 진혁이 돌아보자 준환이 갑자기 테이블에 털썩 주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주저앉은 준환은 이마를 짚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실은 걱정 되셨잖아요.”

대뜸 그렇게 말하는 엘리아다.

“여기서부턴 제 상상이긴 하지만 아드님이 병원에 갔다 오면서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셨어요. 그때 생긴 불안과 걱정 때문에 기존에 잘하고 계시던 분쇄 과정이 엉망이 되셨을 거예요.”

“자, 잠깐만요!”

진혁이 황급히 엘리아의 발언을 막았다.

“병원에 갔던 건 물론 치료차 갔던 건 맞지만 3일 전에 갔을 땐 더 이상 약물 치료를 안 받았다고 진단 받은 거예요. 걱정할 게 아니라고요.”

병원에 갔다고만 알고 있던 엘리아가 해괴한 표정을 지으며 놀랐다.

“에엑?! 진짜요? 간만에 머리 써서 추리했는데 틀렸던 건가······. 그, 그럼 완치가 돼서 기쁜 마음에 잘못 분쇄하셨을 수도! 아, 아니면 정말로 실수로 잘못 분쇄하셨던가!”

아무래도 엘리아는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들어간다’는 말을 인증하고 싶은 듯 횡설수설 다른 추리들을 내놨다.

아쉽지만 진혁이 보기에 거기까지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준환이 3일 전부터 분쇄한 커피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이었다.

“아니, 아가씨 말이 맞아요.”

준환이 초연한 낯빛으로 얼굴을 들었다.

“아빠?”

“아가씨 말대로 계속 일에 집중을 못했습니다. 아들을 못 믿었기 때문이죠······.”

“못 믿다니? 뭘 못 믿어?”

“네 상태 말이다! 약물 치료는 끝났지만 트라우마는 남았다면서!”

“···!”

설마 준환이 알고 있을 거라곤 진혁은 상상도 못했다. 부모님에게 약물 치료만 끝났다고 하면서 완치됐다고만 했지 트라우마 증상까지 남았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준환이 무섭게 두 눈을 부릅떴다.

“모르고 있었겠지만 네 담당 의사랑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혹여나 네가 어떤 이유로 아빠, 엄마한테 거짓말을 할 거랑 생각이 들었거든.”

진혁은 담당 의사가 커피를 건네주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분명 이 커피는 아버지가 줬다고······.

“하지만 왜? 왜 내가 거짓말을 하는데?”

“네가 트라우마를 고치겠다고 가게에 나와 놓고 하나도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2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게에 나왔던 진혁이지만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하물며 손님 접대조차 하나도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트라우마를 고치겠다고 가게에 나오는 건 핑계처럼 변해버렸다. 그저 미경이 그랬던 것처럼, 진혁은 자신이 백수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싫어서 가게에 죽치고 있던 것밖에 되지 않았다.

준환은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 그것까진 괜찮았다. 근데 3일 전에 의사가 그러더라. 약물 치료가 끝났다고.”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았구나.”

“그리고 트라우마는 아직 낫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지.”

설마 거기까지 알고 계실 줄이야······. 일부러 트라우마 관해서만 빼놓은 건 애초에 소용없던 짓이었던 거다.

“사실 그게 제일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다른 정신적 문제야 약과 상담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지만 트라우마는 직접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치료가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2년 동안 가게에 꾸준히 나왔으면서 전혀 호전되지 않았으니······.”

그런 놈이 하루아침에 완치됐다고 떠들었으니 준환으로선 약물 치료가 끝나고도 더욱 걱정됐다. 다른 병이 나았어도 아들이 다신 다른 사람과 마주할 수 없을까봐······.

“그런 생각이 들다보니 커피 만드는 일에 집중이 안 됐다. 그나마 로스팅은 신경 썼지만 설마 분쇄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군.”

준환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커피 제조는 꽤나 섬세한 일이다. 아무리 기계가 좋아졌다지만 결국 사람의 손길에 따라 커피의 질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제아무리 스페셜티 커피라고 해도 알맞은 로스팅 포인트, 분쇄도, 추출 방법까지 모든 작업에 신경 쓰지 못하면 원두 본연의 맛이 발현 되지 못한다.

“아빠, 난―”

진혁의 입술을 때자 준환이 손으로 막는 시늉을 보였다.

“오늘 따라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가능성을 봤으니 그걸로 된 거야. 하지만 오늘처럼 쓰러진다면 야외 판매까지 따라 나오라고 하고 싶진 않다.”

“···.”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진혁의 단전에서부터 소용돌이 쳤다. 이걸로 준환의 본심을 알게 됐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 가게를 나오지 말라는 소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진혁은 아버지를 돕고 싶었다. 아니, 가족 전체를 힘들게 하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버젓이······. 버젓이······!

“정말 그게 다이신가요?”

엘리아가 불특정 다수에게 물었다.

“정말로 아드님이 야외 일을 안 나오면 그만인 거예요?”

“······이번엔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반쯤 포기한 기색으로 준환이 말했다. 더 이상 무얼 숨겨봤자 엘리아에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엘리아가 빙긋이 웃었다.

“두 분의 대화를 들어보면 아드님은 어떤 병 때문에 쓰러지신 거라면서요. 하지만 그 병을 극복하려고 가게에 나오셨던 거고. 아버님은 아드님이 그 병을 극복하길 원하시고요.”

진혁과 준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드님이 야외 판매에만 안 나가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까 아버님이 처음 화를 내셨을 때 그러셨죠. 아예 가게 일을 도울 생각 말라고요.”

“그건······.”

그냥 홧김에 그렇게 말하셨겠지, 라고 생각하는 진혁. 그러나 잠깐이나마 찌푸려지는 준환의 미간이었다.

그러다가 준환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하! 대단한 아가씨군. 커피 맛만 잘 보는 줄 알았더니······.”

“헤헷~ 칭찬 감사합니다!”

전혀 칭찬 같지 않은 비아냥거림인데도 엘리아는 해맑기만 했다.

“나중에 얘기할 참이었다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다 말하마.”

준환은 진혁과 똑바로 마주보며 다음 할 말들을 차례로 꺼냈다.

“너 정말 가게 일이 하고 싶은 거냐?”

“어? 갑가기 왜······?” “2년 동안 가게에 나오면서 트라우마가 고쳐지지 않은 건 혹시 카페 때문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면서 현실에서 도망치기에는 아빠 가게만큼 좋은 곳은 없었겠지.”

“아, 아냐! 그런 건 절대!”

“끝까지 들어.”

어느 때보다 진중한 준환의 눈빛에 진혁은 쉽게 압도 됐다. 평소 묵묵하더라도 가끔 풀어지던 아버지에게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아빠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난 네가 가게를 물려받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오히려 이 카페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도피처가 되어버리니까.”

“···.”

도피.

진혁은 조용히 그 단어를 곱씹었다.

처음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없었고 어느덧 핑계거리가 되어 도망갈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무의식적인 안도감에 진혁은 아버지의 카페를 늘 찾아왔었다. 집에 있어봤자 미경이 뭐라도 하라며 쪼아대니까, 그 때문이라도 가게로 도망 나왔던 것이다.

“강요하진 않으마. 이대로 카페에 계속 나와도 상관없어. 언젠간 극복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준환은 할 말이 끝난 듯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다들 나가요. 내 할 말은 끝났어요. ······그리고 가게 문 닫을 시간입니다.”


*


“아~ 아~ 결과적으로 화해를 한 분위기는 아니었네요.”

기지개를 피던 엘리아가 피로한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영업 종료 직전 쫓겨난 진혁, 엘리아, 아린 세 사람은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에 나와 있었다. 엘리아와 아린이 돌아가기 위해서다.

“죄송해요.”

“···.” 엘리아가 사과했지만 진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이 파라노마처럼 쭉 이어져서 지나갔다. 아버지가 저렇게 깊게 생각할 줄도 몰랐거니와, 진혁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속마음을 준환은 완전히 꿰뚫어봤다.

그 와중에 준환은 진혁에게 잘못했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도리어 언젠가 괜찮아 질 수 있다며 진심 어린 충고 또한 아끼지 않았다.

“에잇!”

그때 엘리아가 있는 힘껏 진혁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렸다.

쫘아아악!

“끄악!”

찰진 소리와 함께 아찔한 비명이 울렸다.

반쯤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진혁이 엘리아에게 외쳤다.

“뭐하는 짓이에요!”

“아핫! 정신이 돌아왔다!”

“등짝 스매시 맞고 정신 안 돌아오는 사람 거의 없거든요?!”

어머니 경미에게도 내주지 않았던 등짝을 처음 보는 소녀에게 강타당하니 저릿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그런 진혁을 보며 엘리아는 즐거운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히히~ 가끔 저도 멍하니 있으면 아린이 때리더라고요. 그럼 정신이 바짝 드는 거 있죠!”

‘아아, 누가 외국인에게 한국 전통 충격요법을 가르쳐 줬나 했더니 이 여자였구먼!’

진혁이 째려보자 아린이 뭘 보냐는 듯 시선을 흘린다. 되게 얄밉단 말이지······.

“아린은 뒤통수를 때리긴 했지만요.”

“···그런 짓을 했다간 싸웠을 겁니다.”

“에엣?! 싸, 싸우는 건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엘리아였다. 하긴 외국에서는 뒤통수를 만지는 게 오히려 친근함의 표시라고 하잖아······.

“―가 아니잖아!”

“아닌 가요! 뭐가 아닌 거죠?!”

뭔 말만 하면 바로바로 반응이 왔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엘리아다.

어쨌든 정신이 돌아온 진혁은 잠시 아버지 생각을 접었다.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아빠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아뇨! 제가 뭘 했다고······.”

겸손을 부리기엔 엘리아가 보여줬던 능력들은 결코 평범치 않았다.

맛과 향만으로 커피 원산지에 생산 지역까지 알아낸 것도 모자라 로스팅 방식과 분쇄도, 추출 날짜까지 전부 정확하게 맞췄다.

‘대체 뭐하는 여자애지? 어린 나이에 저만한 능력에 지식이라니······.’

어지간한 천재 바리스타가 아니고서 불가능한 능력. 하나하나 되뇔 때마다 감탄만 나왔다.

“아무튼 정말로 감사했어요.”

진혁은 진심을 다해 살짝 허리까지 숙여가며 감사함을 표현했다.

“아뇨~ 저야 말로 좋은 원두 구했으니까요! 저야 말로 감사하죠!”

엘리아는 품속에 들려있던 유리병을 자랑스레 들어보였다. 준환이 오늘 여러모로 도와준 답례로 준 과테말라 안티구아 원두였다. 물론 분쇄되지 않은, 딱 로스팅까지만 한 원두들이다.

“아, 그러고 보니―

“엘리아님.”

진혁이 통성명을 하려던 찰나, 아린이 조심스레 엘리아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어? 아아~ 그래. 그래야 하는 구나.”

수긍하던 엘리아는 아린이 떨어지자 진혁 쪽으로 돌아봤다.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저희는 데리러 온다는 사람이 있어서 빨리 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거기까진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아뇨~ 아뇨~ 이 근방이니까 굳이 그래주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무언가 아쉬웠던 진혁은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직 통성명도 못했고 이것 저것 묻고 싶은 게 많은데······. 그렇다고 억지를 부려가며 붙잡기도 뭐 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여기서 헤어지기로 결정한 진혁이 조금씩 물러섰다. 엘리아도 꾸벅 상체를 숙이며 작별을 고했다.

“나중에 뵐 수 있으면 또 봬요!”

“네. 안녕히 가세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길 저편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엘리아들을 보며 진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 종일 도움만 받았는데······.’

감사인사를 건넸는데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물며 엘리아가 떠나고 나니까 더욱 허전한 마음이었다.

띠리리리!

그때 진혁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준환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왜요, 아빠?”

[그 두 사람 갔냐?]

“네, 지금 막 헤어졌어요.”

[이런······. 여기 모자를 두고 갔는데······.]

멀어져 가는 엘리아들을 본 진혁은 그제야 엘리아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모자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녀들 부르기에는 너무 멀어진 거리. 결국 직접 모자를 전해주기 위해 진혁은 카페로 돌아갔다. 준환이 무어라 했지만 전혀 듣지 않은 채 모자만 갖고 후다닥 나왔다.

다시 대로변에 나왔을 땐 엘리아들은 점으로 변해 있었다. 더 멀어졌다간 놓칠 수도 있었기에 진혁은 전력을 다해 그녀들을 뒤쫓았다.

“헉···! 헉···! 젠장! 내가 뭐 때문에!”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나! 내가 왜 이렇게 뛰는 거냐고!’

간만의 뜀박질에 흉부가 터질 것 같았지만 진혁의 속도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빨라졌다. 어느 때보다 충만한 의욕이 지친 신체에 아드레날린을 촉진시켰다.

뛰다보니 엘리아들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놓칠 새라 진혁도 얼른 골목에 진입했다.

“이이익!”

하마터면 차와 부딪힐 뻔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거의 가까워졌을 즈음, 소리 내어 그녀들을 부르고 싶었던 진혁이지만 거친 숨소리만 나왔다. 이럴 바에 발을 더욱 빠르게 굴려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방 30m까지 다다르자―

‘어? 저긴?’

엘리아들이 다시 코너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딱히 진혁이 아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 구조상 엘리아들이 들어간 골목은 건물과 건물 사이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는 비좁은 통로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혁은 골목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그 순간 진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포트(Teleport).”

아린과 손을 맞잡은 엘리아가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 주문을 외우자 두 사람의 발아래 기아학적 문양이 빛 무리 형태로 나타났다. 처음엔 덩어리였던 빛들은 점점 원형으로 퍼지더니 마법진을 구성했다.

촛불의 마지막 불꽃처럼 빛들이 점점 강해졌고 이윽고 두 사람을 감쌌다.

“이게 무슨―”

그때 진혁과 엘리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진혁을 발견한 엘리아는 전에 없던 동공의 크기를 자랑하며 놀랐다.

놀랍긴 진혁도 마찬가지였지만 서로의 표정을 제대로 보기 전에 이미 엘리아와 아린은 빛과 함께 허공에 사라졌다.


과테말라 안티구아 끝


작가의말

과테말라 안티구아는 실제로 과테말라 산 커피 중 최고급으로 칩니다.

특이하게 과테말라 커피는 생산지의 해발 고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데 안티구아가 최고 등급인 SHB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커피는 아닙니다. 

소설에도 나왔지만 과테말라 커피 대부분이 스모키한 향이 있어서 쓴맛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거든요. 

특히 안티구아는 더럽게 비싼데다가 기본적으로 로스팅 포인트가 높아서 잘못했다간 타버리기 쉽상입니다.

(전 여러번 태워먹었습니다. 빌어먹을;;; 좋은 기계를 사던 지 해야지...)


그렇다고 맛 없는 건 아닙니다. 제 입이 싸구려인거니까요... ㅠㅜ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작은 물의 카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또 사죄문]잃어버린 맛(1) 누락... 16.04.28 113 0 -
공지 [사죄문]모든 초고는 걸레다. +2 16.04.20 125 0 -
11 잃어가는 맛(4) 16.05.03 91 0 13쪽
10 잃어가는 맛(3) 16.04.28 86 1 8쪽
9 잃어가는 맛(2) 16.04.28 73 1 11쪽
8 잃어가는 맛(1) +4 16.04.27 96 0 14쪽
» 과테말라 안티구아(6) +4 16.04.22 157 4 26쪽
6 과테말라 안티구아(5) +2 16.04.22 157 3 25쪽
5 과테말라 안티구아(4)(1차수정) +2 16.04.18 102 4 18쪽
4 과테말라 안티구아(3)(1차수정) +4 16.04.17 100 5 20쪽
3 과테말라 안티구아(2)(1차수정) +2 16.04.16 131 5 24쪽
2 과테말라 안티구아 +3 16.04.14 177 3 15쪽
1 프롤로그 +5 16.04.14 275 4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