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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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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7.02 18:50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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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566

작성
24.06.0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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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글자
11쪽

20. 경성 오므라이스(3)

DUMMY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삯바느질 일을 돕고 오빠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고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던 누이였다.

몸집이 작고 얼굴이 앳되어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누이가 집안일에 바느질에 다람쥐처럼 종종거리는 걸 보아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최근 부쩍 늘어난 여학생들이나 한껏 멋을 부리고 시내를 다니는 아가씨들을 보면 누이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여중까지만 마치고 바로 집안일을 돕기 시작한 누이는 보수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새롭게 생긴 영화관이나 카페 등을 다니지 못했다.

연호가 주말에 집에 왔을 때, 바느질을 맡기러 온 아가씨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영화관이며 카페, 신식 옷차림이나 음식 이야기 등을 하는 걸 누이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한 번도 저도 가보고 싶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어때, 먹을 만 하니?”

“응, 맛있어요!”


옥순은 냉정한 오라비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는 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오므라이스를 오물오물 씹었다.


***


“우리 오빠는 식구들에게 다정한 표현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속이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노부인, 성옥순은 촉촉이 젖은 눈시울을 손등으로 살짝 문지르더니 시현을 향했다.


“나한테 그 오므라이스를 사주려고 오빠가 돈을 꽤나 아껴서 모았을 거예요. 그때는 비싼 음식이었거든.”

“그렇지요. 값이 만만치 않았어요.”


금손이 맞장구를 쳤고 노부인이 하아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난 후에는 경양식이 흔해지고 값도 싸져서 오므라이스니 돈까스니 다 쉽게 먹을 수 있게 됐지만, 난 사실 양식이 입에 안 맞기 때문에 별로 먹을 생각을 안 했어요. 케첩도 별로고."

"예에."

"그런데 그때 오빠가 처음으로 사줬던 오므라이스만은 아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자꾸 나서 꼭 다시 먹어보고 싶었어요.”


노부인의 아련한 눈을 보며 시현이 물었다.


“오늘 오므라이스는 입에 맞으시는지요?”

“응, 맛있어요. 사실 이 오므라이스가 더 맛있어. 그런데 왠지 꼭 그때 먹었던 것 같은 느낌이 나네요. 요즘 것과는 좀 다르게 새콤달콤한 케첩이나 야채가 녹아 있는 것 같은 밥맛도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먹자마자 그때 생각이 났어요.”

“재료의 비율이나 당도와 농도 등을 당시 낙랑 찻집의 것과 비슷하게 하려고 많이 찾아봤는데 마음에 드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시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노부인은 몸을 일으켜 시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우리 오빠가 죽고 나니까 자꾸 옛 생각이 났거든. 이걸 먹으니까 내가 처음 오므라이스를 먹던 그때, 그 소녀 시절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 드네. 이런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요.”


노부인은 주름진 입가에 소녀 같은 미소를 띠었다.


이 총각 요리사의 오므라이스를 먹자 마치 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오래전의 기억이 아른아른 되살아났다.

죽은 오빠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십 대의 풋풋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고 찻집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어제 들은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진짜 먹고 싶었던 건 오므라이스가 아니라 그때 그 시절, 소녀 시절의 추억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고맙네요. 총각.”


***


시현이 금손과 함께 돌아간 뒤 노부인은 뒤뜰로 나왔다.

대여섯 걸음이면 끝에서 끝까지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뒤뜰이었지만, 한쪽에 그네가 놓여 있었다. 손녀 정연이가 어릴 때 타던 그네인데 치우지 않고 계속 두었다.


노부인은 조심스럽게 그네에 걸터앉았다.


“왕!”


나루가 깡충거리며 뛰어와서 노부인의 무릎 위로 팔짝 올라앉았다.


“나루야, 나루도 우리 오빠 기억하지?”

“왕!”


나루는 꼬리를 흔들면서 노부인의 발에 얼굴을 살짝 비볐다.


“그래, 다들 우리 오빠가 냉정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안 그렇다는 거 나루는 알지? 널 데려온 것만 봐도 그렇지.”


십오 년 전 오빠가 처음 나루를 데려왔을 때 나루는 누군가와 싸웠는지 아니면 학대라도 받았는지 몸에 상처가 많았다.

핏자국이 엉긴 털이 지저분하고 다리도 세 개밖에 없는 강아지를 어정쩡한 자세로 안고 온 연호는 무뚝뚝한 얼굴로 누이에게 강아지를 내밀며 말했다.


“정연이가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꼴이 이래서 볼품은 없다만 길바닥에 그냥 버려두긴 뭣해서 데려왔는데, 한번 키워보련?”


조카 핑계를 댔지만 사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던 건 정연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옥순이었다.


열서너 살 무렵의 옥순이 길에서 죽어가는 강아지를 주워온 적이 있었다.

옥순은 정성껏 강아지를 보살펴서 살려냈지만 엄한 아버지가 강아지를 키우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었다. 집안 형편도 넉넉지 못한데 군입을 늘릴 수 없다고 하면서.


“농사짓는 집에 소나 말, 염소처럼 도움이 되는 짐승이면 몰라도 우리 같은 집에서 개나 고양이라니 팔자 좋은 소릴 하는구나.”

“왜요. 개는 집을 지키고 고양이는 쥐가 못 들어오게 지켜주는데.”

“네 엄마가 바느질을 하잖니. 손님들 옷감이나 천을 다루는데 개나 고양이가 상하게 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냐? 개가 있으면 손님들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 그거 이제 밥도 잘 먹고 살 만한 거 보니 다 나았다. 다른 집 주려무나.”

“아버지, 제가 잘 돌볼게요. 강아지 먹일 만큼 제가 덜 먹을게요. 예?”


강아지와 정이 많이 들었던 옥순은 어떻게든 강아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고 강아지도 마치 어미를 따르듯 옥순을 졸졸 따랐지만 어느 날 오빠가 강아지를 데려가서 누군가에게 주어버렸다.

옥순은 며칠이나 잠을 못 자고 눈이 붓도록 울었지만 오빠는 강아지를 잘 키워줄 집에 보냈다는 말뿐 어디 보냈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옥순이 찾아가서 강아지를 도로 데려오겠다고 떼라도 쓸까 봐 그랬는지.


“이놈이 그때 그 녀석이랑 닮았더구나.”


연호는 먼 산을 보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예?”


옥순은 잠시 뒤에야 연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오빠도 참, 그게 언젯적 일인데요.”


옥순은 당시 오랫동안 오빠를 원망했었지만 오빠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엄격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심한 어머니와 어린 누이를 건사하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오빠에게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오빠는 늘 입을 꾹 다물고 힘든 티를 낸 적이 없었다.

옥순은 그때의 원망을 마음에서 털어 버린 지 이미 오래인데 오빠는 아직 그 일을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었던 걸까.


흰 머리의 남매는 오십여 년 전 어느 날 찻집에서 커피와 오므라이스를 사이에 놓고 어색하게 앉아 있던 그 날처럼 마주 앉아서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오빠가 돌아가셨지. 나루야. 네가 오빠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야.”


노부인은 조금씩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귓전에 오빠의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옥순아. 그때는 내가 미안했다.”

“아니에요.”


노부인은 마치 오빠가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산들바람이 가볍게 불어서 그네 위 노부인의 흰 머리카락과 나루의 부드러운 털을 살포시 날렸다. 나루가 부인의 몸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


“보여요! 보여요!”


시현이 이 층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은롱이 깜짝 놀라 구르듯 계단을 내려왔다.


“왜 그래? 형아? 무슨 일이야?”

“송가미록이 보여, 다섯 줄이나!”


드문드문 식별이 어렵기는 했지만 새로 보이는 글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현은 울컥하는 마음이었다.


“이건 내 오므라이스가 그 어머님 마음을 울려서 그런 거겠지?”


단순히 맛있어서 마음을 울린 것뿐 아니라 타락죽이 금손과 은롱의 추억을 소환했듯이 오므라이스가 노부인의 추억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축하하네, 자네 능력이 확실하게 개화한 것 같아. 우리 같은 존재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는 게 확실하군.”


금손이 계단 난간을 타고 사뿐사뿐 내려오며 말했다.


“그렇죠? 그 어머님이 정말 좋아하신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어디, 송가미록에서 보인다는 건 어떤 글인가?”

“예. 여기.”


시현은 거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송가미록의 빈 책장을 가리켰다.


“여기 다섯 줄입니다.”

“한번 읽어보겠나? 나한테는 보이지 않거든.”

“아 참 그렇죠.”


송가미록의 빈 부분은 금손이나 은롱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드문드문 보이는 글줄을 조심스레 읽어나갔다.


“생강을 말끔히 씻어 껍질을 벗기고······음, 그다음은 흐려서 안 보이고요. 다음 줄에 찬물에 생강을 넣고······ 푹 달여낸 뒤 서천꽃밭 소리꽃의 흰 꽃잎 세 장과 붉은 꽃잎 한 장, 같은 꽃에서 추출한 꿀 반 홉을 넣어 우린다. 알이 굵고 실한 배를 골라 여덟 쪽으로 쪼갠다······.”


시현이 말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여기까지 보입니다. 이 뒤는 안 보이네요.”

“오, 꽤 많이 보이는군.”


금손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은롱을 향해 말했다.


“소리꽃의 꽃잎과 꿀을 쓴 걸 보니 아마도 그거 같지?”


은롱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시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난 뭔지 알 거 같은데 형아는 어때?”

“글쎄, 너무 조금밖에 안 보여서.”


시현은 고조부의 단정한 글씨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생강과 배와 꿀을 쓴 걸 보면······ 어쩌면 향설고 같기도 한데, 서천꽃밭의 꽃잎을 넣어 우린다니까 짐작이 가질 않네.”

“그렇지, 향설고가 맞네. 하지만 이건 평범한 향설고가 아니고 말이지.”


금손이 말꼬리를 늘이면서 시현을 향해 빙긋 웃었다.


“이건 소리를 잃은 자,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실어증 환자에게 특효약인 향설고 만드는 법이야.”


***


“실어증 환자요?”

“음, 자네 고조부가 치유의 요리를 만드는 재능이 있다고 했잖은가? 윤수의 지인 중 크게 안 좋은 일을 겪은 후 말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네. 어떤 약을 써도 어떤 의원에게 보여도 효과가 없었는데 윤수는 어떻게든 그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싶었던 게야.”

“여기 나오는 향설고가 그 치유제인가요?”

“그렇지. 윤수는 굉장히 많은 약재를 조합하고 실험해 봤고 죽림의 식자재도 여러 가지로 조합해 본 끝에 결국은 제대로 된 치유제를 만들어 냈다네. 물론 윤수에게 치유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렇군요. 금손 씨는 혹시 이 조리법을 알고 계세요?”

“아니 나는 자세한 제조법까지는 모르지. 그건 이제 자네가 알아내야 하는 부분이고.”

“예에.”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은롱이 시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 향설고, 죽림에서도 보존했었는데 이제 다 쓰고 없어. 형이 또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당.”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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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605 51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7 24.05.31 604 45 12쪽
31 20. 경성 오므라이스(1) +5 24.05.30 604 42 12쪽
30 19. 연잎밥 +7 24.05.29 606 47 12쪽
29 18. 연저육찜 +7 24.05.28 629 48 12쪽
28 17. 송가미록 +5 24.05.27 645 40 12쪽
27 16. 삼족구와 송가미록 +7 24.05.26 642 50 12쪽
26 15. 나루서점 +4 24.05.25 652 41 12쪽
25 14. 커피 스콘(2) +5 24.05.24 662 44 12쪽
24 14. 커피 스콘(1) +4 24.05.23 674 43 12쪽
23 13. 수수떡과 메밀전병 +10 24.05.22 682 49 12쪽
22 12. 메밀묵(3) +7 24.05.21 685 45 14쪽
21 12. 메밀묵(2) +6 24.05.21 687 43 12쪽
20 12. 메밀묵(1) +7 24.05.20 721 47 12쪽
19 11. 감투 +5 24.05.19 723 42 12쪽
18 10. 타락죽 +8 24.05.18 737 45 12쪽
17 9. 왕과 숙수와 고양이(3) +4 24.05.17 765 43 12쪽
16 9. 왕과 숙수와 고양이(2) +7 24.05.16 775 47 11쪽
15 9. 왕과 숙수와 고양이(1) +4 24.05.15 790 49 12쪽
14 8. 복숭아정과 +8 24.05.15 837 51 12쪽
13 7. 망정수(忘情水)(4) +5 24.05.14 851 52 13쪽
12 7. 망정수(忘情水)(3) +6 24.05.13 879 48 12쪽
11 7. 망정수(忘情水)(2) +3 24.05.12 922 47 13쪽
10 7. 망정수(忘情水)(1) +3 24.05.11 943 46 12쪽
9 6. 두부달걀채소쌈(2) +8 24.05.10 1,012 51 11쪽
8 6. 두부달걀채소쌈(1) +7 24.05.10 1,048 49 11쪽
7 5. 형제(2) +7 24.05.09 1,050 4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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