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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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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6.28 18:5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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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17,577

작성
24.05.0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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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글자
9쪽

1. 흰 여우

DUMMY

“오늘도 허탕이네.”


고서점 문을 나선 시현이 쨍하게 맑은 하늘을 쳐다본 뒤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여기는 봤고, 여기는 너무 머니까 다음에 가고, 오늘 한 군데쯤 더 갈 수 있으니까······.”


메모를 확인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시현이, 너 오늘 식당 쉬는 날이지? 집이냐?

“아니 밖이다. 간만에 고서점 도는 중이야.”

-또 할아버지 책 찾으러 다니냐?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영우가 혀를 찼다.


-날도 더운데 고생이다, 야.

“그러게, 이제 유월 초인데 벌써부터 왜 이렇게 덥냐, 요즘 날씨가 진짜 이상해.”

-뭐 단서는 있고?

“청운 고서점에 옛날 요리책 들어왔다길래 와봤는데 할아버지 책은 아니었어. 근데 여기서 들으니까 고서 취급하는 전당포가 있다고 해서 한번 가볼 참이다. 요리책도 있다고 해서.”

-이직할 곳 찾아본다던 건 어떻게 됐냐? 새로 온 주방장이 그렇게 까칠하다며?

“눈치가 많이 보이긴 하는데 아직 좀 더 버텨 보려고.”

-세상 참 야박하다. 거기 그렇게 번창하게 된 게 누구 덕인데.


영우의 말에 시현이 한숨을 쉬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일 다 보고 나면 우리 집 오냐? 내가 맥주 쏠게. 시현이가 맛간장 좀 갖다준다고 했다니까 엄마가 기다리신다. 너네 간장만큼 맛있는 간장이 없다고.

“엉 갖고 나오긴 했는데 오늘 시간이 될까 모르겠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수고!


전화를 끊은 시현은 아까 고서점 주인 진 사장에게 들은 말을 되새기면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손님한테 들은 말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그 손님이 헛말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니께 말해주는 거여. 안서동 종점에서 세 번짼가 네 번째 골목에 전당포가 있는데 거기 고서가 많다는구먼. 오래된 요리책도 몇 권이나 있다고 했으니 한번 들러 보지 그려?”

“예, 혹시 상호가 어떻게 되는 집일까요?”

“그 손님도 한 다리 건너 들은 얘기라 상호는 모른다던데, 간판 가운데 고양이인지 개인지 동물 얼굴 그림이 있다는구먼.”


요즘도 고서를 취급하는 전당포가 있나?

손님이 직접 가본 것도 아니고 한 다리 건너 들은 얘기라니 신빙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볼 참이었다. 안서동이면 별로 멀지도 않고.


시현은 요리사다. 아직 자기 가게는 없고 부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는 식당도 큰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가게를 차리고 할아버지의 요리를 되살리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시현의 할아버지는 대중적으로 크게 유명하진 않아도 요리사들 사이에서는 송 명인이라고 불리며 존경받는 요리사였고, 할아버지의 증조부, 그러니까 시현에게는 5대조 할아버지가 되는 분은 궁중에서 일하는 대령숙수(待令熟手) 중에서도 으뜸으로 이름 높은 숙수였다고 했다.


“대령숙수는 원래 대물림하는 가업인데, 5대조 할아버지의 아드님, 그러니까 우리 현이한테는 고조부님이 되지, 그분은 전통 요리를 잇지 않고 기상천외한 요리를 연구하러 다니셔서 부친께 장작으로 두드려맞고 집에서 쫓겨날 뻔하고 그랬단다.”


어린 시절 시현이 할아버지를 따라 고사리손으로 제법 조물락조물락 요리 흉내를 내는 걸 보고 기특해하던 할아버지가 해준 얘기였다.


“하지만 5대조 할아버지는 당신 대에서 왕실이 끝나고 당신이 마지막 대령숙수가 될 것까진 미처 모르셨던 게야. 고조부는 어차피 대령숙수 자리를 이을 수 없었던 거지.”


할아버지는 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고조부님은 요리사들 사이에서 이단이란 말까지 들을 정도로 엉뚱한 분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큰일을 해내셨단다. 가문의 요리 비법을 모은 책을 저술하셨거든.”

“송가미록 말이죠?”

“그렇지.”


할아버지의 문갑 속에는 손으로 제본한 낡은 책 한 권이 있었다.

시현의 고조부가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요리법을 모으고 자신만의 비법을 더해 저술했다는 책이었다.


낡은 표지에 송가미록(宋家味錄)이라는 제목이 붓글씨로 적혀 있는 그 책은 예전에 TV에도 자주 나오는 이름난 셰프가 돈을 싸 들고 와서 팔라고 했을 때나 고서 전문가가 수집하러 왔을 때도 팔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보물이었다.


“우리 현이는 요리사가 된다고 했지? 이다음에 현이가 요리사가 되면 이 책은 너에게 물려주마.”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시현에게는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나 삼촌이 모두 요리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시현은 할아버지처럼 요리사가 되고 싶어서 할아버지의 모든 것을 열심히 배우려 했다.


하지만 시현이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삼촌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가을이 깊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시현을 불러 송가미록을 건네주며 당부했다.


“현아, 이제 우리 집에서 요리를 이어갈 사람은 우리 현이 뿐이니까 할애비 말 명심해라. 할애비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건 다 버리더라도 이거는 꼭 챙겨야 한다.”

“······.”

“할애비가 우리 손자한테 가르쳐 줄 게 참 많은데 아무래도 다 못 가르치고 떠날 것 같구나. 하지만 우리 가문의 비법이라 할 만한 요리는 여기 다 적혀 있으니 나중에 찬찬히 잘 공부해 봐라. 어디서 구할 수 없는 귀한 기록이니까 소중히 보관하고.”


시현은 할아버지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목이 메었지만 일부러 밝은 어조로 물었다.


“여기, 중간에 빈 부분은 뭐예요. 할아버지?”


음식의 종류, 용도, 효과, 재료의 구분 등 장을 나누어 가며 빽빽하게 기록된 낡은 책 중간에 십여 페이지 정도,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만 묶여 있는 부분이 있었다.

노르스름하게 바랜 빈 종이 부분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빈 종이 같지? 그런데 이게 사실 빈 종이가 아니라고 하더라. 할아버지도 못 읽었고 네 증조부님도 읽을 수 없었는데, 고조부님 말씀에 따르면 여기 진짜 비법이 있다고 했어.”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데요.”

“글쎄다. 이걸 읽을 수 있으면 이 세상의 한계를 넘는 요리사가 된다고 했다는데 사실 할애비도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고조부님의 유언이니까.”


할아버지는 여윈 손으로 시현의 손을 꼭 잡았다.


“네 고조부님은 기인이셨으니까 허투루 남기신 말은 아닐 게다. 만약 이게 정말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라면 언젠가 우리 현이가 읽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할아버지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셨다.

시현은 슬픔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 송가미록을 소중히 챙겨두고 할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몇 장씩 읽어보곤 했다.


그런데 삼촌이라는 작자가 사업과 도박으로 집안을 들어먹은 것으로 모자라 그 귀한 기록까지 훔쳐다 팔아먹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을까.

몇 년째 연락도 되지 않는 삼촌을 떠올리며 시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2년제 전문대 조리학과를 어렵게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식당에 취직해 일하면서 시현은 틈틈이 송가미록을 찾아 고서점이며 골동품점 등을 돌았다.

비슷한 책이 나왔다는 말만 들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갔지만 아직 송가미록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


“여기쯤이려나?”


안서동 종점에서 주변을 둘러본 시현은 골목을 하나씩 뒤져보기 시작했다. 주소도 상호도 모르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어, 비 오네!”


쨍하게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면서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비를 여우비라고 하던가.

젖을 듯 말 듯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주변에 안개처럼 깔리면서 주변이 보얗게 흐려졌다.


보자, 지난번 흐린 날에 배낭에 넣었던 여벌 우산이 있었지?

시현이 주섬주섬 접이식 우산을 꺼내서 펴는데 저만치 앞쪽으로 뭔가 하얀 것이 지나갔다.


‘뭐지? 강아지? 아니 고양이인가?’


우산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털이 복슬복슬한 하얀 동물이 시현의 앞을 가로질러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풍성한 꼬리를 유혹하듯 살랑살랑 흔들었다.


‘고양이 꼬리가 저렇게 복슬복슬하던가?’


시현은 홀린 듯 흰 동물을 따라서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만치 앞에서 흔들리는 흰 꼬리를 따라 두어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에 외따로 선 이층집 앞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하얀 동물이 보였다.

쫑긋한 귀, 갸름한 얼굴, 뾰족한 코, 풍성한 꼬리와 날씬한 다리를 가진 자그마한 동물이 시현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여우다!’


갸름한 금빛 눈으로 시현을 쳐다보는 것은 흰 여우였다.


작가의말

실제 조선 후기 대령숙수 가문은 안(安)가였지만 작중에서는 가상의 송(宋)가로 설정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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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4. 커피 스콘(1) +4 24.05.23 595 4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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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2. 메밀묵(3) +7 24.05.21 604 42 14쪽
21 12. 메밀묵(2) +6 24.05.21 604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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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0. 타락죽 +8 24.05.18 647 42 12쪽
17 9. 왕과 숙수와 고양이(3) +4 24.05.17 673 41 12쪽
16 9. 왕과 숙수와 고양이(2) +6 24.05.16 686 44 11쪽
15 9. 왕과 숙수와 고양이(1) +4 24.05.15 694 46 12쪽
14 8. 복숭아정과 +7 24.05.15 733 48 12쪽
13 7. 망정수(忘情水)(4) +5 24.05.14 745 47 13쪽
12 7. 망정수(忘情水)(3) +5 24.05.13 768 44 12쪽
11 7. 망정수(忘情水)(2) +3 24.05.12 806 43 13쪽
10 7. 망정수(忘情水)(1) +3 24.05.11 825 42 12쪽
9 6. 두부달걀채소쌈(2) +7 24.05.10 883 47 11쪽
8 6. 두부달걀채소쌈(1) +7 24.05.10 915 46 11쪽
7 5. 형제(2) +7 24.05.09 917 42 11쪽
6 5. 형제(1) +3 24.05.09 974 39 13쪽
5 4. 복숭아구이 +6 24.05.08 1,031 50 11쪽
4 3. 서왕모의 복숭아 +5 24.05.08 1,094 51 11쪽
3 2. 이상한 전당포(2) +5 24.05.08 1,194 57 13쪽
2 2. 이상한 전당포(1) +8 24.05.08 1,224 5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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