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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빠 님의 서재입니다.

어둠 속에서 뻗어나온 손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라이트노벨

게빠
그림/삽화
북극토끼
작품등록일 :
2014.07.26 14:47
최근연재일 :
2014.07.26 14:4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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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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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5

작성
14.07.2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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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단편

DUMMY

곤륜산으로 들어가는 외길목에는 으레 그렇듯이 허름한 객잔 하나가 서있다.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면 어린애 주먹 하나 크기는 되어 보일까, 숙박실은 손님용만 세서 딱 두 개, 주방 한 칸. 다 쓰러져가는 목재 탁상 두 개. 그것이 전부다.

이 객잔의 이름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창룡객잔'이었다. 창룡객잔.

휘황찬란한 이름에 어울리듯 여의주를 뺏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파리새끼들을 보면 더욱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우웅..."


손님용이라고 치기엔 벌레가 파먹은 자국이 지나치게 많은 의자 위에서 소녀 한 명이 졸린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이제 갓 열 두살은 되었을까, 아직 일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려보이는 소녀다.

연홍빛의 색목안, 썩은 객잔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탐스럽게 길러낸 은발.

객관적으로 봤을때 소녀의 외모는 지나칠 정도로 어리고 수려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소녀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방해라면 모를까.


"음식 날라라. 은향아!"

"지금 가요."


파리 한 웅큼이 들어갈 만큼 입을 쩍쩍 벌리던 은향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쟁반에 놓인 어향육사의 향긋한 향기가 소녀의 코를 찔렀다.

잘게 썰어낸 돼지고기 밑으로 탐스러운 육즙이 섞인 양념이 흐른다. 파릇파릇한 고추 고명이 드문드문 놓인 어향육사. 주방장의 고향인 사천에서 유명한 음식이다.


'냄새 죽인다.'


소녀는 잽싸게 어향육사의 고깃덩이 한 점을 집어삼키고 주방을 나섰다. 탁자 위에는 짐보따리를 짊어진 장삼이사 두 명이 있었는데, 아까부터 떠들어댄 시간이 족히 일 다경은 지났을 것이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남궁세가에 마교의 병력들이 기습을 했다더구만."

"이 친구야! 말 조심하게. 마교가 아니라 명교라고 하지 않던가?"

"아, 아무튼 들어봐. 아무튼 그래서 남궁세가가 그날 부로 완전히 개박살이 났다는데 그 병력에 선봉에 서있던게 아려검객 남궁홍이랜다!"

"이런 미친놈! 아려검객 남궁홍이 마교로 끌려가서 뒈졌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거야?"

"사실이라니까!"

"에라이, 미친 놈아! 저번에는 죽은 전대 마교 교주가 사람 탈을 뒤집어 쓴 괴물이라더니 어쩌니 하더니 정신이 나갔냐?"


탁자를 향해 다가가던 은향의 얼굴이 굳었다. 손에 들린 쟁반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 친구야, 내가 그걸 직접 봤다던? 개방에서 나온 일결제자놈이 주사 부리던 거잖어!"

"에라이, 썩을! 뭐 다른 재밌는 얘기는 없어?"

"글쎄, 그러고보니까 이제 곤륜 아닌가? 방금 생각났는데, 전에 서장에서 내려온 대라신선이 죽었다던데?"


은향의 얼굴에 고리눈이 파였다. 더 이상 듣고 싶지도,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어향육사 나왔습니다."


잽싸게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는 울적한 얼굴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 뒤로 휘날리는 치렁치렁한 은발,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탄식을 알아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녀가 마교 교주를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일처럼 보였다.


사부의 복수.


표면적으로 드러난 명분은 그러했다. 천하를 위해서도, 무림맹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다.

개방의 귀는 중원에서 가장 빠르다. 마교 교주가 죽었다는 비보가 들리자마자 무림맹은 부리나케 시국 처리를 논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마교가 아니라 갑자기 툭 튀어나온 정사대전의 최고 공로자 유은향이었다.

그녀는 구파일방도, 오대세가 출신도 아니다. 서장에서 온 대라신선의 제자.

무공 전폐. 아는 이 없음. 색목인. 출신성분부터 모든 것이 구파일방에게나 오대세가에게나 계륵 같은 존재였다.

까탈스러운 눈치를 은향이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래서 떠났다.

개방의 거지새끼들도 얼씬거리지 않을 산골로.


'사부...'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부의 모습을 상기하는 소녀의 이슬맺힌 눈은 서장의 납재(拉齐 . 에베레스트)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멀고, 지극히 하늘에 가까운 산.

사부가 바랬던 것은 그 하늘보다 높은, 더 높은 곳이었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다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부의 유언이 전음처럼 아스라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다.

그녀는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부의 유언을 들어주겠다고. 그러니 자신의 곁을 떠나가지 말라고.

은향은 사부의 부탁을 들어줬지만, 사부는 끝내 은향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소중한 이를 또다시 잃어버렸다.


"후우..."


한숨과 함께 무력감이 신경을 타내려가며 전신을 괴롭힌다. 소녀는 소리 없이 고통에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린다.

마교를 혈혈단신으로 거꾸러뜨린 정의의 협객은 너무나도 작고 무력한 존재였다.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을 차버린지도 모르겠다.

영웅은 자신보다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익숙할 테니까.


"거기 있었구려."


등 뒤에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 뒤를 돌아본 순간 소녀의 눈에 경악이 피어오른다.

팔에 개방 일결제자의 표식이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분명 전에 마주친 적 있는 자다.


'장세팔...'


소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지 한 놈 없을 정도로 가난한 동네인데도 개방이 냄새를 맡은 것인가.

골치 아픈 일을 직감한 이마에서 한 줄기 땀방울이 은발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소리만큼이나 걸걸한 인상의 장세팔이 쓰고 있던 죽립을 올리며 포권했다.


"오랜만입니다. 마교 교주를 척살하신 유은향 대협."





선홍빛 노을이 땅거미 위로 번져올 시간. 밥 짓는 연기가 곤륜산 위로 가물가물하게 오르고 있었다.

여느 때의 창룡객잔이라면 파리를 내쫓느라 분주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개방에서 온 일결제자라는 거지 한 놈이 은전 몇 닢으로 주인을 구워삶았기 때문이다.


"제가 대협께 한 잔 권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친 장세팔이 백주를 한 잔 따랐다. 은향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넌 어린애가 술 마시는 거 봤어?"

"지금 어린애라고 하셨습니까? 나 원."


장세팔이 피식 웃으며 백주를 넙죽 들이켰다. 제법 도수가 높았을 텐데 그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단번에 잔을 비웠다.


"정말 그때 이후로 하나도 안 변했습니다그려?"

"당신도. 그나저나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은향이 어향육사의 고기 한 점을 집으며 말했다. 고기를 집어가는 소녀의 무표정한 입가 위로 장세팔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새어나왔다.

싸한 눈빛을 느낀 장세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일결제자였지 않았어?"


은향은 장세팔의 소매 끝자락에 묶인 매듭 한 가닥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장세팔이 멋쩍게 웃었다.


"뭐, 승급이라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넌 그때 분명히... 아니. 내가 잘못 봤나 봐."


우물거리며 고기를 씹어넘긴 은향은 의심의 눈빛을 거두고 젓가락을 놀렸다. 과거의 일이 어쨌든, 지금은 중요한 것은 공짜로 눈 앞에 어향육사가 생겼다는 것이다.

장세팔은 그런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소녀에게 질세라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은향이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그야...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아왔습죠. 은발 색목인 소녀가 중원에서 어디 흔하답니까?"

"지랄하고 자빠졌네. 솔직히 말해봐."


은향은 그렇게 말하며 장세팔을 쏘아보았다. 장세팔이 어께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용수란 아가씨와는 요새도 연락하고 지내십니까?"

"......"


은향의 낯빛이 하얘지더니 표정이 굳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개방의 정보력 탓이 아니다. 설마했지만 명문정파의 협객을 자처한다는 년의 입이 그렇게 싼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향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 씹갈보년의 대갈통을 정사대전 때 단장포(單杖砲)로 날려버렸어야 했는데."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니가 들은게 맞아."


은향이 뇌까리듯이 말하고는 장세팔이 방금 전 까지 마시던 백주를 한잔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단 맛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좆같이 쓴 맛이다.

술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곧이어 위장에서 불길이 역류한다. 은향은 그 짜릿하면서도 화끈한 느낌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해 내뱉었다.


"씨팔!"





유은향이라는 소녀가 마교 교주를 척살했다는 소문은 강호의 삼척동자도 알 만큼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 흉악한 마교 교주를 척살한 대협이 명문 정파를 자처하는 모용세가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몽고인들과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맡은 색목인들을 필두로 내세운 민족차별정책.

숱한 사람들이 그저 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했다. 그 행각에 앞장선 이들이 바로 몽고의 개, 색목인들이었다.

민중의 골수에 사무친 오랑캐에 대한 증오. 허여멀건한 피부와 쑥 들어간 눈알의 앞잡이들.

한번 눈이 뒤집힌 민중들의 칼날은 자비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머리를 맷돌 사이에 끼워 넣고 그대로 갈아 피죽으로 만들어 마셨고 어떤 이들은 용광로에서 끓는 쇳물을 가져다가 색목인들의 목구멍에 부어버렸다.

그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에서 색목인인 은향도 예외일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땐 잘한 일인지도 모르지.'


은향은 쓰게 웃으며 술잔을 내렸다. 일어났을 때 목이 붙어있는 것을 천우신조로 여겨야 했을 정도로 박복했던 소녀의 강호행.

위기일발의 연속이었다. 착한 사람은 적었고 악한 자들은 많았으며 미친놈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었던 모용수란은 착한 사람보다는 미친놈들의 부류에 가까웠다.


'다음에 마주치면 그땐 진짜 죽인다.'


은향의 입가에서 작게 빠드득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과거를 곱씹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여긴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어?"


장세팔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득의만연한 미소였다.


"다름이 아니고 백가장에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백가장에? 거긴 전에 무림맹 지지가문이었을 텐데?"


은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장세팔이 백주를 한잔 들이키며 답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잖습니까. 이제 마교가 힘을 잃었으니 집안 정리를 시작할 때지요."

'이래서 무림놈들이란.'


은향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 말이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에 심정이 착잡해졌다. 토사구팽을 피해 도망친 사냥개 한 놈도 무림맹은 용납하기 힘든 것일까.


"그래서 내가 할 일이 뭔데 그래?"

"혹시 마교 교주의 신물 성화령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은향의 눈빛이 변했다.


"들어는 봤지."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요. 백가장이 비밀무고에 그걸 꿍쳐놨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걸 가져와주셨으면 합니다."


장세팔의 말을 듣던 은향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성화령은 마교 교주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물건이다. 서장의 명교에게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구니까.

하지만 왜 백가장에서 그것을 꿍쳐놓은 것일까. 그리고 무림맹에서 그까짓 쓸모없는 돌멩이 몇 조각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한참을 고민하던 은향이 말을 꺼냈다.


"맨입으로?"


은향의 말을 들은 장세팡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그가 말했다.


"그래서 부탁하는 겁니다."

"대뜸 금분세수한 사람을 찾아와선 다시 강호일에 끼어들라니, 그것도 맨입으로? 네 쓸모없는 대갈통은 몸에 살점이 남아돌아서 장식으로 붙여놓았니?"

"..."


모욕적인 언사에도 장세팔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은향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공청석유."


장세팔이 풉,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게 있을리가..."

"이 거지새끼가 날 핫바지로 보나. 네놈 새끼들 비밀무고에 꿍쳐놓은 영약이 족히 한 창고는 넘는 걸 모를 줄 알아?"


장세팔은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은향의 추측이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당장에 마교를 털어서 얻은 영약에다 듣도 보도 못한 고대의 비급들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암투가 일어나는 게 무림맹의 현 실태였다.

장세팔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것을 보며 은향이 미소지었다. 비웃음에 가까울 정도로 영악한 소녀의 미소. 한참을 고민하던 장세팔이 입을 열었다.


"돈으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쪽은 제 소관이 아니라서..."

"그럼 거래 쫑이지. 내 눈앞에서 꺼져."

"아니 그게 저..."

"내 말 안 들리냐?"


고압적으로 나오는 유은향의 언사에 장세팔이 두 손을 들었다. 결국 장세팔은 울상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일단 청탁은 해보겠습니다만 장담은 못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장세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체 무림에서 금분세수하신 분이 영약은 무슨 이유로 탐내는 겁니까?"

"네깟 놈이 알아서 뭐할 건데? 난 선불로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빨리 가져오기나 해!"


말이 끝나자마자 유은향이 호통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접시 위의 어향육사는 고기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백주를 들이키는 장세팔의 눈이 유은향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 두고 보라지.‘





백가장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림에서 아는 사람이 있을까 말까한 약소 문파였다.

정사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다 낡아빠진 이류 문파였지만 역사와 전통만큼은 무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시기, 장평대전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 30만 명을 생매장한 희대의 살인마 백기가 그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에는 잘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던가. 어느새 백가장의 가세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쭈그렁 노친네가 되어 북망산천을 바라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사대전 이후 그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제법 방비를 잘해놨네.’


은향은 기척을 감추고 나무 위에 올라 백가장의 진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까만 한밤중에 복면을 뒤집어쓴 작은 소녀를 찾아내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은향이 관찰을 시작한 지도 벌써 5일 째. 장세팔이 전해준 정보가 맞는 것인지 한때 꾀죄죄했던 이류 문파의 보초들은 기름이 반들반들하게 비쳐나오는 쇠가죽 갑옷과 날카로운 창병기로 무장한 채 건물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은향이 정사대전 때 만났던 백가장 무사들의 모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도 정사대전 때 뭔가 한 몫 단단히 움켜잡은 것일까.


‘두 시진 마다 교대를 했지. 조금 있으면 기회야.’


한 쪽 손을 가슴위에 얹고 심장박동수로 시간을 재던 은향이 백가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주목했다. 틀림없이 두 사람. 분명 보초병이다. 두런두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은향이 노려온 인수인계 시간이다. 반 다경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벽을 넘기에는 최적의 기회.


‘지금!’


결심을 굳힌 은향이 백가장의 뜰을 향해 갈고리를 던졌다. 묵직한 쇠못이 백가장의 땅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인수인계에 정신이 팔린 보초들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단단히 박힌 쇠못 위에 걸린 밧줄을 타고 은향이 날다람쥐처럼 미끄러져 내려왔다. 행여나 소리를 들을까 바닥을 구르며 떨어진 은향은 재빨리 송곳을 뽑고 구멍이 파인 바닥을 덮었다. 감쪽같이 구멍을 덮고 한 시름 놓은 은향이 어둑어둑한 나무그늘 밑에 엎드린 채 생각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백가장을 요 며칠간 관찰해왔지만 비밀무고의 위치는 확신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보초들 중 한 명이라도 없어진다면 분명 눈치를 챌 거야.’


이왕 모험을 하는 김에 가장 삼엄한 곳부터 뛰어든다. 은향은 꽤 당돌한 결정을 내리고는 처마 밑 그늘에 몸을 기댄 채 살금살금 건물로 다가갔다. 이제 막 증축공사를 끝낸 백가장은 2층의 툇마루에도 보초병을 한 명씩 두어 철통같은 감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둠 속에 숨어서 다가가는 은향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 왔다.’


은향은 복면 밑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끼며 안도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가슴을 몇 번이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여기가 비밀무고가 맞다면 성화령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마침 순찰 시간인지 문 앞의 보초들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은향의 눈에 들어왔다.


은향은 발뒤꿈치를 올리고 까치발을 한 채 살금살금 걸어갔다. 보초가 혹시나 등 뒤로 시선을 돌릴까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지만 이윽고 모퉁이를 돌자 비로소 안도감이 놓였다. 건물의 문앞에는 당연하다는 듯 자물쇠가 걸려있었지만 은향은 씩 웃으며 품에서 이쑤시개 같이 생긴 쇠붙이 하나를 꺼냈다. 하호문의 도둑들이 자주 쓰는 자물쇠따개의 일종이었다.


‘가져오길 잘했네.’


은향이 실실 웃으며 자물쇠에 쇠붙이를 끼워넣었다. 얇은 막대가 자물쇠를 헤집고 은밀하게 들어가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일은 끝난다. 이윽고 찰칵 하는 짜릿한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땅 위로 떨어졌다.


‘좋아!’


은향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칠흑 같은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쑥 튀어나오더니 자신의 뒷통수를 붙잡았다. 미처 당황할 새도 없이 단단한 무릎이 은향의 안면을 무섭게 강타했다.


“꺄아아아악!”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소녀의 한 줄기 핏방울. 그리고 은향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내렸다.





“여기까지구나.”


사부는 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사부가 입은 피 묻은 적삼 밑으로 새하얀 눈덩이들이 잘게 쪼개져 살갗 위로 흘러내렸다. 납재(拉齐. 에베레스트)의 봉우리 위로 깔린 구름은 너무도 곱고 깨끗하여 설령 죽음 앞에 선 사람이라도 그 광경을 본다면 초연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눈밭 위에 누워서 한참 하늘을 바라보던 사부가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은향아.”

“예. 사부.”

“내가 네 몸을... 왜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은향이 잠시 있다가 대답했다.


“인류를 위해서입니까?”

“반쯤은 맞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사부의 얼굴 근육이 조금 위로 경련했다. 은향의 머리빛깔처럼 새하얀 눈. 사부는 두 팔을 간신히 들어 떨어지는 눈 한 송이를 잡았다. 이제 다시는 느끼지 못할 서늘하리만큼 청량한 감각을 음미하며 사부는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으로 겪은 고난. 끝내 지키지 못한 자신. 자괴감. 죄책감. 무력감.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야. 그게 내 본의든 아니든... 너와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인류가 그것을 겪게 되겠지. 그 과정 속에서 네가 찾은 해답은 무엇이었느냐?”

“사부...”


은향이 애처로운 얼굴로 사부의 허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것이 사부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직감하는 제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며 그대로 눈꽃이 되었다. 은향의 목에서 떨리는, 하지만 확신에 찬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찾은 해답은... 무공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무공이 아무리 고강한 자도 결국에는 장강의 뒷물결에 휩쓸리게 됩니다. 하지만... 굳건한 의지. 한낱 필부의 것일지언정 의지가 남는다면, 설령 사람이 죽더라도 의지만은 영원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불초제자 유은향이 강호에서 얻은 깨달음입니다.”


사부는 보랏빛 피를 입가로 흘리며 은향의 얼굴을 마주했다. 제자에게서 흘러내리는 아스라한 눈물방울이 사부의 얼굴로 떨어져내렸다. 회광반조의 순간. 이것이 정녕 사부가 원하는 대답인 것일까. 은향의 손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자식처럼 바들거렸다. 대답을 들은 사부는 생명이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지금껏 제자 앞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염화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네가 그것으로 답을 찾았다면... 나는 만족한다.”

“사부.”


은향이 목 메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사부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사부의 두 눈이 감길 듯, 눈꺼풀이 서서히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사부의 남은 눈동자가 티끌만큼도 남지 않았을 순간. 사부는 한 마디 유언을 남겼다.


“부디 나를 내 고향... 유격사성(犹格斯星. 유고스)으로 보내다오.”





‘이건 또 뭐야?


백가장의 소가주 백준휘는 당황과 긴장이 섞인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여느 젊은이처럼 주색잡기를 좋아하는 백준휘에겐 누구나 그렇듯 돈이 필요했고, 가주는 돈에 있어 제법 깐깐한 사람이었다.

정사대전 때 벌어들인 돈을 흥청망청 쓰며 즐겁게 살던 때는 지났건만, 백준휘의 나쁜 버릇은 여전했다. 돈 될 만한 것이 어디에 있을지 머리를 굴리다 생각이 닿은 것이 바로 비밀무고의 물건이었다.

어차피 퀴퀴한 먼지만 잔뜩 쌓인 골동품들 따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총관이 적는 장부의 위치는 사전에 알아두었다. 그리하여 백준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만 되면 비밀무고를 들락거리는 게 일상이 되었을 텐데... 그날은 좀 달랐다.


‘이걸 이제 어떻게 처리한다.’


보초들이 돌아오기 전에 비밀무고로 소녀를 업고 들어온 백준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침입자를 백가장에 알릴 수는 없다. 그랬다간 이놈이 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무고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낱낱이 드러낼 테고, 그렇게 되면 백준휘는 끝장이다. 그럼 살인멸구 해버릴까? 백준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가볍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니다. 도적질은 몰라도 살인은 중범죄다. 시체를 은닉하는 것도 보초들이 가득한 백가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좋지...’


갑자기 찾아온 침입자를 잡고도 근심걱정에 빠진 백준휘의 얼굴이 쓰러진 소녀의 복면을 향했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나 보려고 복면을 벗긴 순간, 백준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어슴푸레하게 비춰진 소녀의 얼굴. 청아하고 미려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잡티 하나 없는 고운 피부와 앳된 얼굴 위로 박힌 석류빛 눈동자. 창백한 얼굴에 스며든 도화빛은 가학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 이 소녀가 조금만 더 자랐더라면 백준휘는 보는 순간 상사병에 걸렸으리라.


백준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소녀의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폭포수처럼 풍성한 은발, 그 곳에서 풍겨나오는 여물지 않은 소녀의 향취가 백준휘의 물건을 자극했다. 뜻하지 않은 횡재에 사내의 얼굴은 색욕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단... 따먹고 보자.’


한순간 백준휘의 눈에 성욕으로 가득 찬 추악한 빛이 일었다. 거친 입술을 들이댄 채 소녀의 입에 혀를 넣으려던 순간, 소녀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이 자식이!”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백준휘의 눈앞에 별이 튀었다. 소녀의 발길질이 백준휘의 턱을 강타한 것이다. 엉겁결에 일어난 사태에 백준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벽까지 밀려났다. 그 사이 은향이 잽싸게 무고의 문을 열려 했지만 무슨 장치라도 되어있는지 삐걱댈 뿐 열리지 않았다. 백준휘가 입가로 흐르는 비릿한 피를 삼키며 말했다.


“이 도둑놈 새끼가 적반하장이라 하더니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누가 누구를 도둑놈이라고 해야 할지 논란의 여지가 가득한 말을 뱉으며 백준휘의 신형이 소녀를 향해 짓쳐들었다. 백가장의 무공인 백가권법의 초식이 은향의 몸에 적중되기 직전, 그녀는 몸을 잽싸게 굴러 피해냈다. 내공이 실린 주먹이 벽을 내리치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진동했다.


‘젠장.’


은향이 내심 혀를 찼다. 장세팔이 선불로 준 공청석유를 보관해두고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연달아 날아오는 백준휘의 권각은 매서웠지만 은향의 몸은 그보다 더 빨랐다. 줄곧 회피에 전념하던 은향의 눈이 번뜩였다. 빈틈을 발견한 것이다.


“하압!”


소녀의 한 줄기 기합과 함께 주먹이 백준휘의 몸을 격타했다. 하지만 내공이 실리지 않은 작은 소녀의 주먹으로 그의 몸에 상해를 입힐 수 있을리 만무했다. 백준휘는 오히려 몸을 격중한 그녀의 팔을 잡고 그대로 땅에 패대기쳤다.


“꺄악!”

“분수를 모르는 도적놈같으니, 오늘 버릇을 고쳐주마!”


쓰러진 은향을 가슴을 향해 쏘아진 일장. 소녀는 당황하지 않고 마침 무방비 상태인 백준휘의 근건(跟腱. 아킬레스 건)을 걷어찼다. 반탄강기의 내가고수라고 할지라도 근건은 주의해야 할 치명적인 약점인데 그것을 무방비 상태로 맞은 것이다.


“꺼허억!”


백준휘는 볼성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통증을 호소했다. 오늘 맹세코 아버지에게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저 도적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임시로 내공을 운용해 통증을 억누르고 일어선 백준휘의 눈에 불이 일었다.


“네년을 토막 내어 돼지 먹이로 만들어 주겠다!”


씩씩거리며 일어선 백준휘가 한 팔로 선반을 쓸었다. 마침 선반 위에 올려져있던 칼 한 자루가 백준휘의 손에 집혔다.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었지만 칼날은 아직까지도 예기가 서려있었다. 백준휘의 입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간다!”


은향의 얼굴에 불안의 빛이 스쳤다. 권각술과 검의 대결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고수들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자신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상대가 무슨 검초를 쓰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어둠 속에서 춤추는 한 줄기 검로가 은향의 몸을 노리고 날아든다. 섬뜩한 파공음이 귓전을 울리며 날카로운 예기가 눈 앞을 스친다. 줄기차게 날아드는 검의 초식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 은향이었지만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다급해진 은향이 아무 선반에나 손을 넣어 도자기건 장신구이건 잡히는 대로 던져버렸다. 허나 백준휘의 공세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허공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파편과 연달아 내리치는 검의 대결은 누가 봐도 백준휘의 승세를 점칠 수 있으리라. 한참 뒷걸음질을 치던 은향의 등이 마침내 벽에 닿았다.


“더 도망가보시지?”


백준휘의 입술 끝이 삐죽하게 솟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일검. 그것이 정확히 은향의 귓가를 스치고 벽에 박힌다. 그 틈을 타 백준휘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려던 은향은 오히려 그의 손에 목이 잡히고 말았다.


“웁...!우웁!”

“크하하! 진작 이랬더라면 좋았을 것을.”


광소를 터뜨리는 백준휘의 눈에 광기가 일었다. 허공에 번쩍 들린 은향의 목에서 가냘픈 숨소리가 빠져나왔다.


“웁! 우우우우웁!”


건장한 팔뚝으로 소녀의 가느다른 목을 쥐어짜자 소녀의 애달픈 비명이 핏방울처럼 흘러나온다. 백준휘의 얼굴에 만족감과 흥분이 피어올랐다. 오늘 자신을 괴롭힌 이 도적놈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되었다는 성취감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전 무고의 빗장이 열린 것도, 등 뒤에서 소년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일순간 푸욱, 하는 소리가 비밀무고에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백준휘의 손아귀에서 죽어가던 은향의 동공이 커졌다. 백준휘는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칼날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피거품을 게워냈다.


“커, 커어어어억...”

“천세일교. 일월신명. 제 51대 명교 교주 독고영 대종사를 대신해 죄 없는 명교도들을 척살한 악적 백준휘의 명을 이 아려검객 남궁홍이 거둔다.”


백준휘의 가슴팍 위로 튀어나온 서늘한 칼날. 그 뒤에서 들려온 소년의 청아한 목소리. 은향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했다. 백준휘의 심장을 꿰뚫은 칼날이 뽑혀나오자 그의 몸이 스르륵 무너지며 은향의 몸도 밑으로 떨어졌다. 소년은 재빨리 다가가 은향을 두 팔로 받아내고는 물었다.


“괜찮소? 소저.”

“넌...”


은향이 어둠 속에 가려진 소년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여자아이처럼 고운 얼굴의 소년이 자신을 향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소년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구해드리고 싶었지만 이 백준휘라는 자의 무위가 고강해 소협으로서는 암습을 하지 않고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는지라...”

“아, 아냐. 구해준 게 어딘데...”


은향이 막혔던 숨을 캑캑 내쉬고는 온 몸에 잔뜩 묻은 먼지와 파편들을 털어내며 말했다.


“너 명교에서 왔다고 했지? 영이가 보냈다고?”

“대종사를 아십니까?”


감히 대종사 독고영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명교의 장로들이 들었다면 경을 칠 노릇이었겠지만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은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사대전 전에도 만났지. 결국 대종사가 되었구나. 영이라면 잘 해내겠지.”

“그렇습니까. 유은향 대협께서 대종사와 친분이 있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날 알아?”


은향이 놀라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대종사의 청탁을 받아 흉악한 전대 대종사를 말살하고 정사대전을 끝낸 저희 명교의 은인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소년의 말을 들은 은향이 비로소 안심했다. 아마 그는 전대 대종사의 비밀을 알고 있거나 독고영에게 자신을 소개받았으리라. 은향이 물었다.


“근데 무슨 목적으로 여기 온 거야? 설마 날 구하려고 온건 아니겠고.”


소년이 미소하며 답했다.


“말씀하자면 깁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나야 남는 게 시간인데 뭘.”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백가장은 정사대전 때 저희 명교의 신물인 성화령을 빼앗아 지금껏 저희를 협박하여 무수한 금품을 빼앗아왔습니다. 그 금품으로 전의 이류문파였던 백가장은 다시 위세를 부리고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몇 번의 협박을 이겨내던 중 저희 측에서 성화령의 위치를 파악해냈습니다. 마침 그간 명교의 소녀들을 상대로 흉악한 짓을 일삼던 악적 백준휘를 척살할 겸 소협이 이곳에 파견된 것입니다. 방금 성화령은 무사히 되찾았고 백가장 식솔들은 명교의 이름 아래 천벌을 받았으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보초들을 처리했다고? 혼자서?”

“예.”


그래서 보초들이 좀 전에 어디론가 향했구나. 은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눈앞의 소년이 대견스러워져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독고영의 취향이 이런 소년이었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아이는... 잠시 은향은 머릿속에서 잡생각들을 털어버리고는 물었다.


“성화령은 어떻게 했어?”

“벌써 챙겼습니다.”

“잠깐 볼 수 있을까?”

“예. 여기...”


소년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은향의 앞에 성화령을 내밀었다. 명교의 교주를 증명하는 신물. 소년의 손 위에 들려진 검은 쇠막대들. 그것을 본 은향의 눈에 긴장과 의심이 맴돌았다. 자신이 아는 것이 맞다면, 이것은 틀림없는 진품 성화령이다. 장세팔이 가져다 달라던 물건. 소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줄기 식은 땀방울이 소녀의 은발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은향 대협...?”


유은향의 모습이 왠지 수상했던 소년이 불안한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뚫어지도록 성화령을 살피던 은향이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틀림없는 진품이네.”

“그렇죠?”

“응.”


은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맴돌았다. 이제 가야할 곳이 남았다.


“이제 가시렵니까?”


은향은 등을 돌린 채로 답했다.


“가야지. 일을 끝내러.”






-백가장이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입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지는 모르지만 그런 소문이 들려왔다. 백가장이 있는 사천지역에는 협객을 자처하는 온갖 잡배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무림맹에서 왔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방의 거지들도 있었다. 동창에서 파견된 수사관들도 왔지만 끝내 흉수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무림의 은원관계로 점철된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 외에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표면적으로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지만 은향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우.”


은향은 귀 밑까지 내려오는 가죽 방한모 밑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장세팔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하늘은 자신을 별로 도와주고 싶은 기색이 아닌지 곤륜에 도착하는 날부터 함박눈을 내려주셨다.


‘빌어먹을.’


전신을 두껍게 감싼 털옷을 두른 채 은향은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두꺼운 털옷과 설피(雪皮) 위로 쌓이는 함박눈이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걷다 툭 튀어나온 바위 위에 앉아 눈을 털던 은향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봤을 순백의 공간. 영혼과 자연의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는 천상. 은향은 그곳을 향해 손을 뻗았다. 쏟아지는 함박눈의 틈 사이로 햇빛이 은향의 얼굴로 비치기 시작했다.


“아아...”


은향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부가 죽기 직전까지 납재로 가기를 부르짖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죽을 자리를 선택한다면 가장 초탈해질 수 있는 자리다. 전혀 인간 같지 않았고, 실제로도 인간이 아닌 사부였지만 죽는 순간에 그는 그 어떤 자들보다 인간다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다른 존재든, 인간이든...


상념에 빠진 채 하늘을 바라보던 은향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좀 전부터 걸어올라온 산길에서 틀림없는 인기척이 들렸다. 은향이 고개를 돌리자 죽립을 쓴 사내의 잔상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은향은 품속에 손을 넣고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은향이 내쉰 숨결이 얼어붙은 안개가 되어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빨리 오셨군요.”


장세팔은 이 추운 날씨에도 꾀죄죄한 누더기 하나만 걸친 채로 포권했다. 개방이 거지들의 모임인 것은 분명하지만, 누군가를 얼어 죽으라고 보내지는 않을 텐데... 그런 것 치고 장세팔의 모습은 너무나도 의연했다. 사실은 그가 내가기공의 절정고수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들 정도로.

은향은 포권을 받지 않고 담담히 장세팔을 응시할 뿐이었다. 장세팔은 말없이 은향의 앞에 놓인 바위에 앉았다. 은향이 물었다.


“늦었군.”

“이런 날씨에 유은향 대협처럼 빨리 오는 게 이상한 겁니다.”

“나는 네놈이 더 수상한데.”


은향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느낀 장세팔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넌 정사대전 때 어디 소속이었지?”


장세팔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정사대전 때 있었던 일은 무림맹에서 불문에 부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만.”

“내가 아는 장세팔은 정사대전 때 죽었어. 바위에 깔려서.”


은향은 품에 넣어둔 가죽 물통을 꺼내 따뜻한 물 한잔을 들이켰다. 은향이 말했다.


“처음 네놈을 창룡객잔에서 봤을 때 나는 네게 물었지. ‘왜 네가 여기 있냐고.’ 네가 만약 진짜 장세팔이라면 넌 그 질문에 내가 원하는 답을 했어야 정상이었어.”

“...”


장세팔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정사대전 때 참여했던 무림맹 일원들은 전공과 출신을 막론하고 모두 일 계급 특진되었어. 선봉에 나서서 싸웠던 네놈이 아직도 일결제자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아.”

“...”

“그 뿐만이 아냐. 네놈이 훔쳐달라고 말했던 성화령은 마교에서 가져갔어. 그런데도 무림맹에서는 사건을 은폐하기는커녕 동창의 수사관까지 요청해서 사건을 확대하고 있어. 네놈이 진짜 개방에서 온 놈이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장세팔의 한 마디. 그 순간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가 싸늘하게 변했다. 어색한 싸늘함은 이내 차갑게 얼어붙어 한 줄기 날카로운 살의로 변하기 시작했다. 은향이 남은 물을 한 잔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넌 인간이 아냐. 내 사부, 그리고 독고원과 같은 족속이겠지... 안 그래, 장세팔? 아니, 이젠 미고(米戈, Mi-go. 유고스에서 온 균사체.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중 하나인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에 등장하는 외계생명체)라고 해야 하나?”

“......”


묵묵히 앉아 은향의 말을 듣던 장세팔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죽립을 벗어던졌다. 지금껏 죽립에 가려져온 ‘그것‘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더벅머리 밑으로 이마를 둥글게 쪼갠 자국이 머리 전체를 고리처럼 덮고 있었던 것이다.

장세팔. 아니, 장세팔의 거죽을 뒤집어 쓴 미고가 말했다.


“제법이군. 지구인.”

“지구인이라...”


은향이 피식 웃었다.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쓰지 않을 표현에 실소가 나온 것이다. 미고는 장세팔이 살아있을 적의 음성을 기막히게 흉내냈다.


“너는 흥미로운 존재다. 내 동족이 키워낸 지구인의 자식이. 내 동족이 수십 년간 쌓아온 결실을 단 한 순간에 무너뜨렸지. 그리고 이제 내 시험을 통과했으니 너는 자격이 있다. 너는 우리 일족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자. 너희 인류가 현재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미고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이 손을 잡아라. 너를 우리 일족이 만든 발명품으로서 인정한다. 맹세코 너를 우리 동족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글쎄.”


은향이 미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은향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좀 귀에 거슬리는데 ‘발명품으로서 인정해준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줄래?”

“우리 동족이 인류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크나큰 축복이자 은혜. 너희 인류가 멸망할 때 까지 설명한대도 너희는 결코 그 축복의 일 푼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행운.”


은향은 기쁜 듯이 웃었다.


“그래? 너무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래서 나도 너에게 행운을 하나 선사해 줄까 하는데, 어때?”

“무슨 행운을 말하는 거지?”

“이런 거.”


순간 은향의 품속에서 무언가 번개처럼 뽑아졌다. 마치 짧은 쇠막대에 나무 손잡이가 달린 것처럼 생긴 그것이 햇빛을 받자 눈부신 섬광이 양옆으로 번쩍였다. 손잡이 앞에는 손가락 하나를 걸 수 있을만한 걸쇠 하나가 달려있었는데, 그 위로 둥글고 뭉툭한 물레처럼 생긴 것이 쇠막대의 꽁무니를 감싸고 있었다. 장세팔이 멈칫 할 새도 없이 은향이 그것의 걸쇠를 잡아당겼다.


-콰앙!


곤륜산을 뒤흔들 정도로 아찔한 폭음과 화염이 터져나갔다. 동시에 막대 끝에서 초음속으로 쏘아져나간 탄환이 장세팔의 거죽을 찢어발기고 미고의 육신을 꿰뚫었다. 옆에서 들었더라면 고막이 찢어져나갈 정도의 폭음. 은향은 털옷을 벗어던지고 쓰러진 미고를 짓밟았다. 사부와 같은 보라색 피가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고가 죽어가는 벌레처럼 온 몸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어, 어...째...서?”

“어째서냐고?”


은향이 얼굴을 찌푸리며 미고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보랏빛 피가 사방으로 튀며 쌓인 눈을 적셨다. 부들거리며 바닥을 짚으려는 미고의 팔을 은향이 거세게 짓밟으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알아? 내 사부가 만든 단장포(單杖砲)라는 거야. 네 동족이라던 독고원이도 결국엔 이거에 맞아 뒈졌는데, 알고 있어?”


은향은 미고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내 사부가 돌아가시기 직전 남긴 유언을 하나 들려줄까?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외계인을 모조리 죽여라.’ 였어. 외계인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동료도 될 수 없으니 모두 죽여라. 그래서 난 그 가르침을 앞으로도 쭉 실현해 나가려고하는데,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렇게 말하며 은향은 단장포를 미고의 다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소리에 뒤이은 미고의 비명이 눈 속에서 메아리쳤다. 은향이 터져나간 미고의 다리를 짓밟고는 오른팔을 겨눈 채 방아쇠를 당겼다. 또다시 비명, 눈 위로 스며드는 보랏빛 혈액. 소녀의 발 밑에는 장세팔의 찢어진 살거죽, 그 위로 지구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기괴한 보랏빛 생물체의 모습이 삐져나왔다. 은향은 슬슬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겨누었다.

그때, 미고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지껄여 봐.”

“그런... 그런 식으로 한다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을 성 싶으냐? 너희 인류의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인데... 어째서...”


은향이 씨익 웃었다. 애초에 이 자식들한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나만의 소개를 해야지.

은향은 단장포의 약실 뒤쪽에 달린 노리쇠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옥에 가서 독고원이가 물으면 전해줄래? 대라신선의 수제자 유은향이 보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줄줄이 보내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이야.”


-쾅!


향긋한 화약 냄새와 단장포의 따뜻한 울림. 그 사이에서 은향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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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뻗어나온 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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