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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단편-비평제, 정진제精進祭

정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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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精進祭
작품등록일 :
2013.01.17 20:18
최근연재일 :
2013.02.08 23:07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7,403
추천수 :
48
글자수 :
94,496

작성
13.01.2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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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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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35쪽

정의를 향한 노래

DUMMY

<정의를 향한 노래>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건 진리다. 정의라는 것은 승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산물에 불과하니까. - 세실 일리암스 -


이 글은 유로피아가 눈을 뜰 때부터, 나크모얀이 수면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아르케비니아와 그 인근의 산맥 샤이닝 힐에서 국지적으로 벌어졌던 '7년 전쟁' 의 야사 중 하나이다.

모든 야사가 그렇듯 이 글도 다소 과장도 있으며, 허구도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의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이며, 배경이 되는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신 아르케비니아 왕국 왕실 국사편찬위원회 저

[ 아르케비니아 독립운동사 ] 에서 발췌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배경지식이 하나있다. 물론 이 시노쿠 대륙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의 집필 목적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간단히나마 언급하도록 하겠다.

7년 전쟁…… 대륙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그것의 발단은 어느 드워프의 우연한 오리하르콘 광맥의 발견으로 시작된다. 대륙의 변경…… 최악의 산세를 자랑하는 샤이닝 힐 산맥이 줄기, 즉 아르케비니아 왕국의 영토 내에서 대량의 오리하르콘 광맥이 발견된 것이었다.

오리하르콘, 아직도 그 용도와 정체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 금속은 시노쿠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내력을 지닌 금속이었다. 정제하지 않은 상태의 이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냥 회색빛의 돌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일정한 방법으로 정제하기에 따라서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자원이 그렇듯, 쓰면 쓸수록 사라지는 법. 무분별한 오리하르콘 광맥 개발은 이 금속을 희귀 자원으로 만들어 버렸고, 급기야는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노쿠 대륙의 국가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서 아르케비니아에서 발견된 이 오리하르콘 광맥은, 대륙 내부의 여러 왕국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관심이라는 것은 이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아르케비니아에 나타났던 것이다.


대륙 내부의 가장 강성하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노바임, 하스바냐, 롤카, 이 3개의 국가들은 모종의 합이 하에 동맹을 체결, 아르케비니아를 침략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아르케비니아는 한 주도 제대로 못 버티고 망국의 비운을 맞이했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오리하르콘이라는 금속은 나눠 가지기에는 너무나 큰 매력을 지닌 금속이었던 것일까? 아르케비니아 성이 함락 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들 연합국은 서로에게 창부리를 돌림으로써 동맹은 너무 허무하게 깨어져 버렸던 것이다.

두 개의 거대한 산맥 사이의 분지에 있는 아르케비니아는, 다시 한번 이 3국 간의 치열한 결전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들이 동원한 병사의 수는 무려 100만에 육박했고, 피를 피로 씻는 전투는 하루가 멀다고 벌어졌다. 그야말로 '난전' 그것이었다.


이 난전의 와중…… 어느 때부터인가 조금은 특이한 무장집단이 하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은빛화살'이라고 불리 우는 이 무장집단 그 구성부터 무언가 색달랐다. 그들은 대륙 유일의 종합대학 ‘에시테르’ 출신의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다는 강점과 대륙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는 에시테르의 학생들답게 뛰어난 지략으로서, 번번이 3국 연합을 골탕먹였다. 이것이 망국의 백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르케비니아 왕국 주민과 상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됨으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 무장집단이 아닌 조직적인 저항군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장집단이 실제적인 아르케비니아의 재건을 위한 저항세력이 된 것은, 지금부터 언급될 이 스승과 제자의 운명적이고도 기이한 재회라 보아도 전혀 과장은 없을 것이다.




바로 앞도 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내리깔린 샤이닝 힐 근교의 야산. 그곳에 상당히 많은 수의 기병과 보병들로 이루어진 무장집단이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무언가 상당히 급한 일이 모양인지 이들은 자신의 부대를 상징하는 붉은 용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조차 똑바로 세우지 못한 채, 샤이닝 힐 산맥 중앙으로 향하는 좁고 비좁은 악로로 줄기차게 나아갔다.


" 놓치지 마라! 세실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백만 라드 아니 이백만 라드라도 주겠다! "


이 기마병들의 선두, 그곳에는 다른 기마병들의 투박한 바스트 플레이트(Breast Plate)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금빛 풀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ur)를 입고 있는 사람이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의 특성상 얼굴을 제외한 모든 몸의 부위가 중장갑(重裝甲)으로 둘러져 있어서 그의 마상에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위태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최소한 준마(駿馬)는 되어 보이는 우람한 말과 그리고 그 말에 장비된 각종 마구(馬具)는 이를 충분히 커버할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 흥! 총상금은 천만 라드인데, 팔백만 라드는 자기가 먹겠다는 이야기잖아.'


그가 제시한 2백만 라드는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에는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병사는 속으로 있는 대로 욕을 해댔다.

물론 2백만 라드는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의 뻔뻔스러운 계산이 담긴 이 말 자체가 병사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금발의 사신 세실……

그녀와 검을 맞대고 살아남은 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오히려 그녀가 무사히 도망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아카피론 장군님 진군속도를 늦추어 주십시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화려한 갑옷의 남자는 그때야 말의 고비를 당겨 속도를 늦춘 뒤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이 귀찮은 존재를 바라보았다.


" 무슨 소리입니까? 멜트 경. 적의 우두머리가 바로 코앞인데."

" 그렇다 하더라도 멈추셔야 합니다. 이미 후속 부대의 진형은 모두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수송대이지 수색대가 아니잖습니까?"


왜소한 체구에, 무장이라고는 상의에 걸쳐 입은 흑갈색 블런트(역주:가죽으로 만든 경 갑옷)가 전부인 그는 살기등등한 중장갑옷의 남자의 말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마법사인 그대가 전술에 대해 무엇을 알겠소. 더군다나 적의 수는 오백 이하요. 아무리 우리가 수송부대라고 하지만 기마병 수만 합쳐도 이천 이상인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이요?! "

" 그것은, 장군님이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을 단순한 도적집단으로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지금껏 우리가 에시테르에게 빼앗긴 군수물자가 경호병이 부족해서 탈취당한 줄 아십니까?"

" 닥치시오. 멜트 경, 우리 대 롤카 제국의 군대가 일게 도적집단에 겁을 집어먹고 후퇴한다니 말도 안 되오. 그대는 그대의 일에나 충실하시오."


그는 이제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곤 잠시나마 진군속도를 늦춘 기마대에 다시 전력진군 명령을 내렸다. 약 이천 여기에 다다르는 기마병들은 그의 명령과 함께 일제히 속도를 높였다.


' 아아 이젠 어떡하란 말인가?'


멜트는 인상을 잔뜩 구긴 체 아카피론 장군의 투구로 가려진 뒷머리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이런다고 별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동안 쌓여온 증오와 분노 때문에 아카피론 장군에게 파이어볼을 날려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이 변방의 국가로 파견된 것도 어느덧 이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궁정마법사 출신인 멜트는 이 전쟁이 이토록 길어질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출병할 당시만 해도 이 전쟁은 길어봤자 여름을 넘기지 못하리라고 장담한 그였지만…… 벌써 3번째의 여름을 이곳에서 맞고 있었다.


슉. 슉슉~.

" 기, 기습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멜트는 갑작스러운 병사들의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칙칙한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하늘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짙은 안갯속에서 이처럼 정확한 화살 공격이 가능한지 정말 신기할 뿐이었다.

벌써 이런 벌써 이런 식으로 기습을 당한 것이 네 번째…… 하지만 이들의 피해 정도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기마병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방패였다. 지금 이들의 지휘관인 아피카론이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슴부터 허리까지 완벽히 감싸주는 바스트 플레이트와, 스크루므(scutum)라 불리는 대형방패로 무장한 이들은 적의 공격 특히 화살공격에 대해서는 완벽한 방어가 가능했다.


" 당황하지 마라, 방어대형으로 "


몇 번이나 똑같은 패턴의 기습을 당해온 터라 병사들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아피카론의 명령에 따라 둥글게 뭉쳤다. 그리고 기마병들은 일제히 방패를 위로 향하게 치켜들어 진은 일순간 화살하나 파고들지 못할 요새로 변모했다.


" 겁쟁이 녀석들아!, 나와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자! "


벌써 몇 시간째 이런 지루한 추격전이 계속되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아카피론 장군은 진의 중간에서 주변사람들의 귀가 아플 정도의 큰소리로 외쳐댔다.


‘ 훗 ’


멜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정정당당히 라니, 이 세상에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오백여 명의 병력으로 이천여 명의 병사, 그것도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롤카 왕국의 기병대와 정면으로 승부 한단 말인가?

그야 어쨌든 에시테르의 지금 이러한 행동…… 확실히 무언가 수상했다. 분명 지금의 적의 공격 방식으로 볼 때 유인작전임이 틀림없었지만, 그 진의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산악지형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병술로는 화계나 그렇지 않다면 낙석 등이 있지만, 지금 이곳에는 이 두 가지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았다.

첫 번째 화계는 우기로 들어선 샤이닝 힐의 습한 대지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낙석 역시, 아름드리 원시림으로 빽빽이 뒤덮인 이곳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화계 만큼이나 실효성 없는 작전이었다.


" 저…… 적이다! "


그때였다. 화살의 파상 공격이 멈추기가 무섭게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공격 한번 없이 도망만 치던 에시테르는 비탈 진 언덕 위에서 쏟아지듯 나타났다. 약 30여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길게 늘어진 아피카론의 기병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익숙지 않은 지형, 그리고 그동안의 무리한 행군으로 지칠 때로 지친 병사들은 결사의 각오로 달려드는 이들을 막아 낼 리 만무했다. 게다가 선두에서 일방적인 살육을 자행하는 금발의 그 존재는 이들의 사기를 단번에 바닥으로 만들고 말았다.


" 사신이다. 금발의 사신! 크악."

" 내 팔……내 팔이! "

" 진을 유지하라. 진을! "


갑작스럽게 나타난 30여 명의 무장집단은 그대로 진의 중앙을 관통해서 길이라고 말할 수 가파른 비탈길 아래로 사라졌다. 경악할 만큼의 기동력과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들의 공격력은 제아무리 하스바냐 최정예 기병대라고 하더라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변이 탁 트인 넓은 곳이라면 그나마 어떻게 해보겠지만, 이곳은 2천여 명이나 되는 기마병이 행군하기에는 너무나 장소가 협소한 곳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곳에서 습격을 받은 데다가 조금 전 활 공격 방어를 위해 짠 밀집대형의 진은 기마병 최대의 장점인 기동력을 제로로 만들어버려 더더욱 큰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 맙소사. 드래곤이 할퀴고 지나간 것 같군! "


진 선두에서 있던 아피카론 장군과 마법사 멜트는 방금 습격을 받은 진 중앙의 잔혹함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앗 하는 순간에 돌파당했을 뿐이었는데…… 사망자는 50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아직도 피를 뿜어내며 사후 경직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자도 태반이었다. 이들이 입고 있던 방어구는 지금껏 금발의 사신…… 즉, 세실 일리암스가 죽여 온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았다.


" 전군 진을 정비하라. 놈의 뒤를 쫓는다! "

" 마.. 말도 안 돼! 그 명령 철회해 주십시오, 장군. 더 이상의 독단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 뭣이? 이 약해 빠진 마법사가!!! "


그렇지 않아도 적의 기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아카피론은 곤릿(역주:벙어리 장갑형 철제 방어구. 건틀렛이라고 불리기도 함)으로 멜트의 얼굴을 그대로 쳐버렸다. 경 갑옷으로 간단한 무장만 하고 있던 그는 아피카론의 곤릿을 맞고서는 튕기듯 낙마하고 말았다.


" 멜트님, 괜찮으십니까?"


놀란 병사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그를 부축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어금니를 비롯한 곤릿으로 맞은 부위의 이빨이 모두 다 부러져 버렸고, 턱뼈마저 금이 가버렸는지 입마저 제대로 벌릴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 한 번 더 입을 함부로 놀리면, 그 입을 영원히 못 벌리게 만들어 주마. 전군 대열을 정비하라 적을 쫓는다! "


고통에 겨워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멜트를 차가운 눈동자로 휙 훑어본 아카피론은 말머리를 돌려 병사들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몸을 일으킨 멜트의 입에서는 전격 주문 스펠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턱에 심각할 정도의 충격을 입은 지금으로서는 그나마도 어려웠다.


' 죽여 버릴 거야! 네놈…… 죽여 버릴 거야!'


입안에 헌것이 고인 피와 부러진 이빨의 조각들을 뱉지도 않고 그대로 삼켜버린 벨트는 살기 어린 눈으로 아카피론을 노려보았다. 그를 부축하던 병사들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아카피론은 그대로 멜트의 마법세례를 당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 전군 진을 정비해서 적의 뒤를 쫓는다. 낙오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전군전진!!! "


조금 전 멜트에게 죽을 뻔한 사실도 모른 채, 그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물론 아카피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병사들의 눈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 저…… 장군님, 저 길로는 이 많은 수가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 "

퍼퍽-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카피론에게 말을 꺼냈던 이 병사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마상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하지만 멜트 과는 다르게 이 병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카피론은 자신의 말을 몰아 바닥에서 고통에 겨워하는 이 병사를 그대로 짓눌러 버렸다.

" 다시 한 번 명한다. 전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독기 오른 아카피론의 명령에 병사들은 도저히 길 같지도 않아 보이는 오솔길로 말을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길은 정말 엉망이었다. 비탈지고, 좁고 급한 경사, 그리고 샤이닝 힐의 우기에 형성된 지형은 달리는 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히히힝


고통에 겨운 말들의 울음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이 길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곳을 고속으로 이동하자니, 말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일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샤이닝 힐의 우기는 시노쿠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대단한 강우량을 자랑했다. 이러한 비는 풍화현상을 촉진해 나무뿌리가 지면 위로 돌출시켰던 것이다. 그 때문에 길은 더욱 엉망이었고, 아무렇게나 땅 위에 드러난 나무뿌리는 천연의 덫이 되어 말들의 발을 부러트려 놓았다.


" 똑바로 못해!? 그라고도 너희가 대 롤카 왕국의 기마병이냐?! 한낮 도적집단인 저 녀석들도 여길 지나갔다. 너희가 못할 게 뭐냐. 가라 가란 말이다."


아카피론 자신은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으려고 뒤로 처지면서, 병사들에게는 무조건 돌격을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부관이자 궁전 마법사인 멜트에게 마저 곤릿을 날리는 장군의 말을 어떻게 반항을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미 한 명이 그에게 참혹히 밟혀 죽은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사, 살려…… ”“제발 날 버리지마! 아악!”

동료들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데도 그들은 전진만을 계속해야만 했다. 말발굽에 밟혀 동료들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귓전에까지 들려 왔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앞으로 달리는 것뿐…… 타인의 죽음을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길은 여전히 좁고 마치 동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빽빽한 나무로 감싸져 있었다. 방향감각 따위는 상실한 지 오래였고 진 중앙에서는 낙오한 병사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껏 수차례나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후퇴도 아닌 추격을 하면서 아군을 짓밟고 나아가야 하는 이런 상황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 하하하 전진하라.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 가라! 롤카의 용사들이여! "


뭐가 그리 좋은지는 몰라도 흥에 겨워 외쳐대는 아카피론의 이 말에 벨트는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정의!? 동료를 짓밟고서라도 적을 섬멸해야 하는 정의라…… 하긴 지금 이 전쟁 자체가 정의란 단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그리 흥분할 일도 아니었다. 변방의 약소국을 힘으로 제압하고 오리하르콘을 독차지하려는 것이 어찌 정의가 될 수 있으랴! 파병 이전부터 이번 전쟁을 반대한 그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멜트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는 문벌귀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국왕에게 신임을 받는 신하도 아니었다. 오직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이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등용된 일개 마법사일 뿐이었다.


' 이대로 끝인가?'


멜트는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금까지 단순한 습격만을 감행하던 에시테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도발은 너무나도 계획적이고 치밀한 것이었다.

소규모의 병력으로 아카피론의 자존심을 건드려, 샤이닝 힐의 악로 중의 악로로 유인. 후미의 수송부대와 수비 병력인 기마 부대를 때어 놓았다. 그리고 악로라는 지형을 이용해 기마 부대 최대의 장점인 돌파력과 기동력을 거의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리 매복하고 있는 궁수들과 호응함으로써 도주하는 동료들의 추격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유인 작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또한, 타이밍 역시 정말 환상적이었다. 거의 따라 잡을만하면 하늘에서는 화살의 비가 내렸고 아카피론의 부대는 꼼짝없이 추격을 멈춰야 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덥지근하고도 습한 날씨 그리고 세 시간에 한 번식 내리는 스콜 등은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을 급격하게 떨어트렸다. 여기에 조금 전 습격과 아카피론의 어이없는 명령은 더해져 시노쿠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롤카 왕국의 기마 부대를 일개 오합지졸의 상태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 힘없는 자의 운명은 원래 이런 것이야. 높으신 분들의 탐욕의 희생양이지…… 마치 소모품과 같은 것. 우리의 꿈 따위,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이 고통스러운 삶…… "


멜트는 갑작스레 떠오른 고향 생각에 목이 멨다. 그리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곳에는 그의 소중한 가족들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 거짓과 탐욕,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미친 지휘관의 아무런 힘없는 부관일 뿐이었다.


' 하지만…… 아카피론 넌. 사신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죽는다. 죽어간 동료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줘야겠지.'


그는 언제라도 마나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주변의 마나를 조금 식 모았다. 그리고 발동어 한마디만 외치면 시전 될 수 있도록 천천히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대인 공격마법 중 최강의 주문을……


" 오오! 숲이 끝났다!"


멜트가 스펠을 거의 다 외웠을 무렵, 선두를 달리던 척후병이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은 저마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척후병이 가리킨 곳으로 힘차게 내 달았다. 멜트 역시 그가 원하건 원치 않건, 뒷사람에게 떠밀려서라도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 숲이 끝나 있었다. 그리고 장소도 넓었다. 비록 구름 때문에 파란 하늘은 볼 수 없었지만, 구름 속에서 힘겹게 빛나고 있는 햇빛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은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 함정……! '


한마디로 말하자면 완전히 고립된 지역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화살 세례라도 당하면 그야말로 전멸을 면할 길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너무나…… 조용했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모두 흩어져라! 마법이다! "


멜트는 미친 듯 외쳤다.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강력한 의지에 의해…… 평소의 4배. 아니 다섯 배 이상은 몰려드는 것 같았다. 이런 형태의 주문은 단 한 가지. 6 서클 동급 최강의 주문 파이어 월!!!


푸화하학


병사들이 체 놀라기도 전에 땅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말의 다리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리면서 말 위에 타고 있던 병사들까지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그들의 몸, 심지어는 그들의 갑옷까지도 타들어 갔다. 파이어 볼 따위의 불길은 이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순간 연소시켜 버리는 그 강렬한 화염, 그것은 마나가 만들어낸 최악의 기적이었다.


" 아이스 바리어(Ice Barrier)! "


4서클 빙계 방어주문. 급조한 덕에 멜트 자신의 방어에도 힘에 부쳤다. 희미한 아이스 실드의 기운이 그의 몸을 뒤덮었지만, 그 파이어 월의 뜨거운 열기는 그의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만약 조금만 더 열기가 지속되었다면 그 역시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운명을 피치 못할 터였다. 하지만 파이어 월의 그 강렬한 불길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 전멸……인가 ”


멜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주위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이 스쳐 간 곳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형체마저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말들의 주검, 그리고 아직도 고통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는 기마병들의 시신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 나만 살았는가? 아닌 것 같군…… "


주위를 살펴보던 멜트의 인상은 곧바로 구겨졌다. 자신 말고도 생존자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기뻐해야겠지만, 그는 절대 기뻐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생존자는 다름 아닌 아카피론 장군이었으니 말이다.


" 오, 멜트경 살아 있었군. 역시 멜트 경은 뛰어난 마법사일세. 자, 적이 오기 전에 어서 귀환주문을…… "

" 풋, 하…… 하학. 제길 제대로 웃지도 못하겠군. 다시 한 번만 말해 보시지? 아.카.피.론. 장군! "


멜트는 너무나 황당하고도 역겨운 그의 이 말에 실소하고 말았다. 그가 어떻게 이 불지옥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가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인챈트 마법으로 불에 대한 보호가 걸려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아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처음 아카피론 장군의 생존을 보았을 때 그야말로 증오로 불타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혹시라도 죽었다면 멜트는 분명 통곡을 했으리라……


“무슨 말인가? 멜트 경. 난 그대의 상관이다!”

“상관? 훗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만능의 힘 마나! 그 목적 없는 강대한 힘이여. 지금 나의 눈을 가리며, 나의 영혼을 짓누르는 자, 그에게 영겁의 저주를 내릴지니…… 잘 가시오, 아카피론. 벌써 이렇게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나의 동료들이여. 나도, 곧 뒤따라가지. 알. 휴론. 패일 론. 케로 안 일티라스! 부패하라 사악한 영혼이여!!! 타일런트! ”

" 자…… 잠깐! 멜트. 무슨 짓이야. 기다…… 으아악! "


멜트가 재구성한 마나는 음침하고도 소름 끼치는 공포로, 그에게 다가갔다. 서서히 아카피론 장군을 감싸기 시작한 그 공포는 이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 제발 멈춰, 큭 크아아아아! ”


찢어질 듯한 비명이 연이어 울려왔다. 하지만 멜트는 한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 그를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표현할 길 없는 극심한 고통에 휩싸인 아카피론은 이내 자아마저도 붕괴 되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아카피론의 몸에서 이상한 조짐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조짐은 그의 갑옷 밖으로 드러난 몸 전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의 피부는 일순간 검게 변하는 듯하더니, 이내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액체로 변하여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코를 찌르는 악취. 그의 몸은 문자 그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 크어어~ "


이젠 시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뭉개져버린 아카피론은 더 이상 직립자세를 유지치 못하고 괴성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참혹한 모습에 멜트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한 것이 멜트는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 후후…… 역겨운 최후로군. 딱 어울려, 네놈에게는. 자 나도 뒤따라가야겠지? 금발의 사신에게 살해당하는 건 이쪽에서 사양하겠어."


멜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검을 하나 주워들었다. 파이어 월의 영향으로 대부분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 날카로움은 여전했다. 검을 주워든 멜트는 천천히 자신의 목에 그것을 가져다 댔다.




그가 막 목을 긋기 직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은 너무나 정확히 멜트가 쥐고 있는 검신에 명중했던 것이다. 이때의 충격으로 순간 그는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 훗 재미있군. 마법사. 이름이 멜트 패르미온 이었던가?"


단검이 날아왔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바라본 멜트는 너무나 놀라 순간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전방을 가로막고 있던 절벽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그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희미해 존재감마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멜트에게로 다가옴에 따라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멜트의 눈앞에 나타난 이들은 약 30여 명의 기마병이었다. 각자 다른 무장과 병 장비를 볼 때 그들이 정규군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들이 바로 에스테르였던 것이다.


" 일루젼(역주:환영마법)!. "


그리고 절벽은 곧 사라졌다. 그때야 멜트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이곳은 에시테르의 잔당을 발견해 처음 쫓기 시작한 바로 그곳이었다.


" 일루젼 맞습니다. 멜트 선생님."


조금 전 들려온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조금은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뒤이어서 들려왔다.


" 다, 당신은!!! "


멜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새하얀 백마를 타고 30여명의 무장집단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멜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기억하시죠?"

당연히 멜트는 그를 알고 있었다. 로이드는 롤카 왕국의 5번째 왕자이자, 자신의 영특한 수제자였으니까. 한때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그를 여기서 만나다니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잘 믿기지 않는 멜트였다.


“왕자님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은 여기에 계신 것입니까?! 그 누구보다 더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으시던 나의 스승님이 왜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이 저주받아 마땅할 이 전쟁 한 복판에 왜…… 왜!?”

로이드의 그 목소리는 존경하는 스승에 대한 실망, 그리고 다시 재회했다는 기쁨으로 묘하게 엇갈려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 한마디, 한마디에는 마치 마나가 담기기라도 한 듯 멜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 전일게 신하일 뿐……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 거짓말! 거짓말 마십시오. 전 스승님께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신하(臣下)란 자신의 주군의 잘못된 판단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바른길로 이끌 의무가 있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맹목적인 충성(忠誠). 그것이야말로 불충(不忠)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만! 왕자님. 왕자님은 뭐가 그리 잘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십니까? 롤카 왕국이 이렇게 미쳐 날뛸 때까지 당신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잔말 말고 어서 저를 죽여주십시오! 제발!”


" 무슨 말씀…… 흡. 우~ 무슨 짓이에요! "


한참 열변을 토해내던 로이드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자 말을 채 잊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곳에는 아카피론이 입고 있던 갑옷에는 못 미치지만 적어도 실용적인 면에서는 월등히 뛰어난 중장갑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마상에서 차가운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시끄러 로이드. 여기서부터는 내가 말한다. 내가 누군지는 알겠는가? 로이드의 스승.”

“물론 이지요. 금발의 사신을 몰라봐서야 어찌 롤카의 마법사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뭐 좋다. 그럼 존칭은 생략하겠다. 아무리 당신이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나의 나이에 반도 못 미칠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선 그녀는 성큼성큼 멜트에게로 다가왔다. 상당한 무게의 중장갑을 입고 있었지만, 갑옷 부딪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이다.


" 멜트. 넌 정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 "


겉보기에는 이제 소녀티를 막 벗은 애송이의 모습인 엘프의 물음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의…… 지금의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이야기. 그는 엘프의 물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그럼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힘이 곧 정의다."

" ! "


멜트는 이 괴변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실소할 뻔했다. 그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엘프에게 입을 열었다.


" 훗, 힘은 정의가 아니다. 금발의 사신이여. 우리 롤카 제국을 보아라. 우리는 힘이 있지만, 정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 흥! 그건 네놈들의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렇겠지? 만에 하나 너희 3국의 동맹이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아르케비니아를 삼켰다면. 너희는 이 전쟁을 정당화시킬 거고, 시간이 흐르면 이 일은 당연한 일이요. 3국 연합은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는 신성 국가라고 우길 것 아닌가? 그리고 힘이 있기에 그것은 정론이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 그렇지 않다. 정의는……"

" 시끄러워! 지난날 이 대륙의 역사를 봐라. 힘이 약한 정의가 있었는가? 정의는 항상 강했고, 그 정의라는 것의 이름으로 힘없고 억눌린 자를 악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너희 3국 연합이 우리를 한낮 도적집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엘프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그것이 정의야. 이것이 진리였어! 빌어먹을 정의!!!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젠 내가 정의가 되겠어! 검에 마음을 담는 힘. 정의는 힘이 아니라는 믿음. 그것이 나의 정의!!! ”


세실은 자신의 이 외침이 체 사라지기도 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든다. 그것은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이 위태로운 낡은 검이었다. 그녀는 그 검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 봐, 이것이 나의 검이야. 너무나 나약한…… 이래서는 우린 정의가 될 수 없어. 잘난 척하지만 나 역시 유사인간 중 하나인, 미약한 하이엘프에 불과해. 나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릴 봐. 5백 남짓의 사람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부탁해. 멜트. 우리에게는 마법사가 필요해. 진실로 빛의 마음을 가진 마법사를 말이야…… "


엘프의 힘 있는 목소리는 곧이어 울먹이므로 변해갔다. 엘프는 검을 바닥에 힘없이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멜트의 발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 난 무서워. 이대로는 우린 절대 정의가 될 수 없어.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야. 우린 곧 괴멸될 수밖에 없겠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 갔어. 이젠 싫어! 이제는, 그러니…… 그러니, 제발 도와줘.”


세실은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은 볼을 타고 연이어 세실의 차가운 갑옷을 적셨다. 주위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가끔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훌쩍이는 세실의 숨소리가 다였다.


“ 과연…… ”


멜트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적은 수의 병사들로 대륙역사상 최악이라 일컬어지는 이 난전의 마당에서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말이다.


"허나, 그대는 나의 적. 저는 한 명의 주군밖에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멜트의 답변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무리 그의 조국이 썩었다 하더라도, 멜트는 배신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의 신념. 누가 뭐래도 롤카제국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온 너무나 소중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 주군이라…… 그럼 저를 위해서라도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보다는 그래도 제가 더 정통성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로이드는 멜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미 그의 성격까지 다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의 제안에 멜트는 다시금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로이드의 말은 단 한마디도 틀린 곳이 없었다. 현 롤카제국의 왕은 약 4년 전 일련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나쁘게 말하자면 역적의 무리에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 왕자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 저희의 정의, 아니 우리 모두의 정의를 위해 당신의 마나를 움직여 주십시오."

"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는 반문했다. 그러나 로이드는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후후, 역시 로이드 왕자님다우십니다. 일어서십시오. 금발의 사신."


멜트는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세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나의 흐름마저 느껴지는 그의 힘차고도 은은한 음성이 울렸다.


" 어울리지 않습니다. 금발의 사신이 눈물이라니…… 이 멜트 페르미온, 당신의 정의. 아니 우리의 정의를 위해, 저의 마나, 저의 생명 모두를 걸겠습니다. ”




아르케비니아 력 1302년

소규모의 무장집단에 불과한 에시테르는, 대륙 전체를 꼽아도 열 명이 넘지 않는 대 마도사급 마법사를 두 명이나 보유함으로써 이 길고 지루한 7년 전쟁의 새로운 변수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에시테르의 아르케비니아 독립군으로서의 첫걸음이었다.



작가의말

2013년 1월 22일(화) 오후 01시 04분에 응모된 작품입니다. :)

달리 제목은 없고, 다만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2013년 1월 25일(금) 오전 11시 35분에 참가자께서 메일을 통해 따로 제목을 보내오셨습니다. 다음 작품부터는 이런 경우가 없길 바라며 재빠르게 수정했습니다. :D

 

-

 

상실이라는 주제에 정확히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잃은 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군상들을 제가 예전에 쓰던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에 대입시켜 써봤습니다. 그럼... =_=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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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깨비 안개 13.02.01 236 4 25쪽
10 Eternal Snow 13.01.30 278 2 7쪽
9 할머니 13.01.29 277 2 7쪽
8 보이는 것에 대하여 13.01.27 473 2 16쪽
7 상실 13.01.26 290 3 7쪽
6 죄의 벌 13.01.25 227 2 15쪽
5 그는 자신을 로만이라고 소개했다. 13.01.25 272 3 14쪽
4 무제 13.01.25 249 4 7쪽
3 구멍과 소년 13.01.23 396 2 21쪽
» 정의를 향한 노래 13.01.23 457 3 35쪽
1 지구 최후의 날, 그 후...... 13.01.23 290 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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