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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백야 일상


[백야 일상] 스스로에게 보내는 글

1.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뇌하고 써서 나온 글이, 재미있거나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또 고뇌하는 것은 최소한의 양심 때문이다. 내 글을 읽어주는 자들에 대한.

2.
산문에도 리듬이 있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그 리듬을 타고 써내려갈 때가 있다.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꽤 인정받는다. 역시 글은 분위기를 타고 단숨에 휘갈겨야 한다. 그렇다고 한 권 내내 그럴 수는 없다. 제발 이 장면만큼은, 하는 대목에서는 저런 신내림을 받고 리듬을 타고 싶다.

3.
저 리듬을 내재율이라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겠다. 일정 분량 써놓고 다시 읽어볼 때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리듬감이 살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지우고 또 지운다. 지우는 분량만 없다면 나도 머신 소리를 들을 텐데.(뭐 그렇게 지운다고 해서 또 티가 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 대동소이한 건데... 작가 만족에 불과한 거다.)

4.
내재율과 리듬은 곧 흐름과 이어진다. 유장한 흐름. 굴곡이 있되 삐뚫어지거나 막힘이 없는 흐름. 작품 몇 개 내지 않았을 때 금강 선배가 조언해줬던 게 그거다. 
유장함을 잃지 마라.
만약 내가 지금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흐름을 놓치지 마라."라고 하겠다.

5.
글을 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세 가지 뿐이다.
자뻑. 겸허. 오기.
내 글 안에서 자뻑하고 내 글 앞에서 겸허하며 내 글 밖에서 오기를 가져라.

6.
늘 이야기하지만 나는 언제나 내 글이 최고다, 언제나 이게 내 대표작이 될 거야, 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그 자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지만 ㅜㅜ 그리고 곧 자학이라는 놈이 방문을 두드리지만.)
언제나 글을 시작할 때면 그 자뻑은 내게 엔돌핀이 되고 마약이 된다. 새로운 글을 시작할 수 있는, 끈질기게 이어가고 매조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뭐 그 마약에 취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언젠가 이야기했듯 글쓰기는 자뻑과 자학의 연속이므로, 곧 이어지는 자학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우울해진다. 그러니 자뻑의 시간이 길어지도록, 그리고 최대한 늦게 자학이 찾아오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연마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7.
자뻑은, 오만은 자기 글 안에서만 해도 충분하다. 타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게 선배든 후배든 혹은 독자든. 
그들의 칭찬과 격려와 비판, 조언과 힐난 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없다. 모든 걸 겸허하게 수용하라. 그리고 걸러 낼 것은 걸러 내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서 내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는 거다. 스스로 정상에 우뚝 섰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는 법이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고 비참할 때가 있다. 혹은 좌절감에 빠질 때도 자학에 몸부림칠 때도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오기라는 놈이다. 뭔가 보여주겠어. 글로써 이야기해주지. 다음 글을 잘 봐. 하는 식으로 모든 오기를 글에 쏟아부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같은 작가이자 형동생하는 이지만, 한때는 무협작가 대 독자로 만났던 이가 있다. 그가 내 글을 읽고(아마도 천하공부출소림이었을 것이다) 평했던 대목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다들 문체가 좋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대학생 리포트 수준의 글솜씨로 이런 이야기를...
저 대학생 리포트 수준의 글솜씨라는 말은 꽤나 오랫동안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그 수준을 넘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그게 태양의 전설 바람의 노래를 쓰게 된 계기였다. ㅡㅡ;;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하이텔 무림동 시절이다. 어느 독자가 말하기를 <신인작가들은 비극을 쓰지 말라. 어줍잖은 글쓰기로 쓰기에는 벅찬 분야다>라며 당시 모든 신인작가들을 한꺼번에 깠다. 당시 두어 작품 냈던 나도 신인작가, 오기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쓴 글이 취생몽사다. 물론 망했다. ㅡㅡ;; 비극도 희극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로.

망하고 망하지 않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저렇게 오기를 가졌기에, 조금이나마 색다른 글을, 조금이나마 향상된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이야기다. 신주오대세가의 혹평은 무림포두를 낳았다. 독자들의 비평과는 무관하게 내 스스로는 무림포두가 신주오대세가보다 조금은 더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9.
여전히 나는 글을 쓰면서 자뻑에 취한다. 독자들의 비판과 비난에 겸허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악착같이 오기를 부린다. 비록 십 년 넘게 죽작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끈질기고 버티고 있는 건 저 세 가지 때문이라고 여긴다. 
치열하게 글을 써보자. 언제고 내 마음에 드는, 읽는 이들의 마음에 드는 글 하나 정도는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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