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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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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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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2.11.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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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추천
10
글자
21쪽

올드 아일랜드(3) - 헤카테

DUMMY

#1


우여곡절 끝에 올드 아일랜드에 입국하고 삼 일째.

오늘도 우린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섬엔 차도, 기차도, 하다못해 자전거도 없으니 이동 수단이라곤 말과 마차 그리고 두 다리가 전부다.


헤이카에다 노페이스 팀 전원. 그리고 공업에서 별도로 데려온 특수팀인 ‘크롬벨’ 까지 하면 총원은 대충 70명쯤. 적다고 볼 순 없는 인원수다.

이 많은 인원이 죄다 말에 올라 이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을 타는 것도 결국은 기술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동 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가 되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한 점은 황제 기사가 머무르고 있는 올드 아일랜드의 왕도가 생각보다 거리가 있었다.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바위에 걸터앉아 주절거려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온종일 걷기만 하던 우린 앞선 이틀이 그랬듯 해가 질쯤이 되어서야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호텔?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숙박 시설은 마을마다 있다는 모양인데, 좁아터진 여관에 7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들어갈 공간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넓고 탁 트인 평지였다. 캠프를 까는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아직은 버틸만하다. 길바닥에 누워 자는 것도 아니고, 텐트에서 자는 거니까. 하지만 이걸 얼마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페이라는 사람한테 물어봐도 ‘모른다.’ 라는 귀찮음이 가득 묻어나온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빨간 눈 꼬맹이도 그렇고.


“집에 가고 싶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이런 상황에도 태연하게 모닥불에서 마시멜로를 구워먹던 헤이카가 날 발견하곤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며 물었다.

나뭇가지에 꿰인 노릇노릇한 마시멜로가 잘 구워졌다. 저걸 언제 챙겨온 건지.. 캠핑 분위기는 물씬 났다.


“조금 지쳐서요.”

“하긴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텐데. 긴장 좀 풀어도 돼. 머스칼도 있고, 다른 팀원들도 있고, 무엇보다 페이가 있으니까 괜찮아.”

“...”


난 그 페이라는 흑기사를 힐끗 살폈다.

그녀는 모닥불에 앉아 무표정하게 단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여자다. 헤이카의 친구라고 했으니 저런 것도 당연한 건가.


그렇다고 경계 대상에서 제외되는 건 아니다. 친구든, 아니든, 올드 아일랜드의 기사라는 점에서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여기 아는 사람 있었으면 진작 말씀하시지. 그럼 더 들어오기 쉬웠을 것 같은데.”

“페이는 올드 나이트 소속이 아니거든. 그렇다고 반 황제파도 아니야. 조금 특이한 입장이라서 섬에 없을 때도 많고.. 그래서 페이를 만날 거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흐음.. 혹시 예전에 공업에 있던 사람이에요?”

“아니.”


고개를 저은 헤이카는 마시멜로 하나를 내 입에 넣어줬다. 살짝 탄 맛이 들어오고 이어서 단맛이 들어왔다. 참 잘 구웠다.


“페이는 내가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만났어. 예전에 말했지? 난 어렸을 때 마법사를 만난 적 있다고.”

“그랬죠.”

“무한(無限)의 눈을 가진 마법사. 내가 그 마법사한테 푹 빠진 것처럼 페이도 그 마법사를 좋아하거든. 서로 좋아하는 게 같으니 금방 친해졌지.”

“음..”


마법사와 현대의 기사, 그리고 대기업 회장님이라니. 참 별난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좀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은 서툴지만 호르바랑 달리 좋은 친구야. 뜻이 같다면 무조건 도와주거든. 그리고 엄청 강해.”

“뭐.. 그 떡대 기사를 단번에 바다에 내동댕이친 거 보면 확실히..”

“무용담도 많아. 어떤 유명한 백기사와 합을 겨루면서도 밀리지 않았다던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콰이라라는 무서운 저격수의 총알도 쳐냈다던지. 그 황제 기사조차도 진지하게 대련을 요청할 만큼 페이의 창은 유명해.”


친구 자랑을 엄청 늘어놓는 헤이카였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그렇지, 대부분은 허풍 같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한동안 떠들던 헤이카는 이젠 고구마가 다 구워졌다는 소식에 재빨리 모닥불로 돌아갔다. 그리고 페이라는 그 여기사와 이것저것 떠들어댔다.


난 턱을 괴고 그런 헤이카의 모습을 멀찌감치서 지켜보았다. 풍경이나 그림을 보는 것처럼 감상 모드였다.

헤이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니. 정말 친한 친구는 맞는 모양이다. 내가 본 적 없던 헤이카의 모습이 많았다.


“좋아해요?”

“엉?”


언제 왔는지 하얀 머리를 한 꼬맹이가 다가와 헤실 거리는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목에서 짤랑거리는 펜던트가 참 꺼림칙했다.


‘이런 여자애까지 괴물 신도로 만들다니.’


바깥에 있었다면 한창 학교나 다닐 나이로 밖엔 안 보인다.

그런데 기사한테 빈대떡이 되고 다시 일어나질 않나, 걸으면서 월교의 기도문을 주절거리질 않나. 여러모로 불쌍한 녀석이었다.


“지금 나보고 불쌍하다 생각했죠?”

“아니.”

“얼굴에 다 티 나거든요. 용사님.”

“..어제부터 물어보려던 건데, 왜 용사님이야?”


녀석은 ‘뭐 그런 걸 묻느냐.’ 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괴물들이 득실거리던 하늘을 청소했잖아요? 그럼 용사님이죠. 용사는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사람이에요.”

“그런 걸로 용사라면 우리 직원들은 다 용사겠네.”

“그렇죠. 그래서 대답은요? 좋아해요?”


녀석이 손가락으로 헤이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와서 뭘 변명하겠는가. 난 다시 턱을 괴고 말했다.


“아마도.”

“흐음. 좋아한다는 것치곤 뭔가 부족한 얼굴인데.. 눈도 반짝거리지 않고, 얼굴이 발그레하지도 않고.”

“날 십 대 소녀들의 청순 만화 남주인공이랑 비교하니까 그렇겠지. 꼬맹아. 난 청순 만화랑 거리가 먼 사람이란다.”

“꼬맹이 아니고 내 이름은 헤카테예요. 그리고 용사님은 아무것도 모르네요~”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랑과 저주는 한 끗 차이예요. 심지어 그게 사랑인지 저주인지 구분하기도 어렵죠. 하지만 결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늘 확인해보는 게 좋아요.”

“그래? 어떤 식으로?”

“스스로에게 묻는 거죠. ‘난 저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가?’ 그리고 마음속의 대답을 끌어내 봐요. 여러 번 생각할 것 없이 제일 처음 떠오른 대답이 본심일 거예요.”


난 헤이카를 사랑하는가?

모르겠는데.


“모르겠다. 어려워.”

“그럼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높죠.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도 늘 거짓말을 하는 부끄럼쟁이거나. 용사님은 어느 쪽이려나?”

“...”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이게 처음도 아니었다. 최근 이틀간 이 녀석은 묘하게 내게만 집요하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처음엔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믿는 신이 있느냐. 새가 좋냐 개구리가 좋냐..

그때마다 대충대충 대답하며 넘겼는데, 그런 비슷한 질문인 것 같았다. 이번엔 ‘사랑이냐 저주냐’ 인가?


“떨어지면 보고 싶고. 위험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지켜주고 싶고. 그거면 된 거 아냐?”

“그럼 저 여자가 용사님한테 해주고 있는 게 뭐예요?”

“음.. 월급 주고. 밥 사주고. 옷도 사줬고. 무기나, 이 팔도 만들어줬지. 이거 의수거든.”


축 늘어진 오른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헤카테는 물끄러미 내 팔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팍 썼다.


“어디서 그딴 팔을 주워다 붙였어요?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하다 했는데, 그 오른팔이었구나? 우웩.”

“야. 사람 팔을 보고 우웩이라니. 이거는 그, 어..”


신인지 뭔지, 하여튼 사람 팔을 잘라다 만든 의수다. 라고 말하기엔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그냥 우리 회사가 기술이 좀 좋거든. 이 섬엔 이런 거 없잖아? 낯설어서 그럴 거야.”

“있어요. 갑옷을 의수로 개조해서 달고 다니는 기사. 그리고 그건 의수라는 개념으로 볼 게 아니잖아요.”

“그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녀석은 한참을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비슷한 거라면.. 죽은 사람 팔을 가져다 꿰어 붙인 거네요. 누더기처럼.”


엇비슷하겐 맞췄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 팔을 꿰어다 붙인 거니까.


“보통 아끼는 사람한텐 그런 거 안 줘요. 혹시 미움받는 주제에 짝사랑하는 거예요?”

“글쎄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사랑이 아니라 저주네요. 얼른 저 마귀 같은 여자한테서 벗어나길 기도해줄게요. 멜리더스 라게더스!”


녀석은 손을 모으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월교의 신을 들먹이면서 기도해봤자 기쁘지도 않은데.


슬슬 귀찮기도 하고, 녀석에게 손을 쉬쉬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삼 일 내내 걷기만 한 탓인지 찌뿌둥한 몸에 피로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이제 자러 갈란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상한 짓? 내가 뭘 했다고 그래요?”

“일단 넌 월교잖아. 꼬맹이라고 안 봐줘. 죽어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녀석한테 어떻게 경계를 안 하겠어?”

“음.. 확실하게 해두겠는데, 난 황제 기사의 포로예요.”


포로가 좋은 뜻은 아닐 텐데, 녀석은 자랑이라도 하듯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여전히 가슴팍에서 흔들리는 월교의 펜던트가 영 눈에 거슬렸다.


“그게 뭐? 그렇다고 네가 월교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글쎄요. 내가 이제 월교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멜리더스 님은 손을 뻗어주지 않고, 블라다카도 나에 대한 건 까맣게 잊은 것 같아요. 갈 곳 없는 어린 양이 되어버렸죠. 심지어 주변엔 무시무시한 기사들이 가득 깔렸고요. 소녀, 불행한 인생이어라.”


흐느적거리던 녀석은 슬쩍 오더니 내 팔을 껴안았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녀석은 볼을 부풀리며 빨간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용사님도 내가 싫어요?”

“어. 싫어.”

“난 좋아요. 용사님한텐 좋은 냄새가 나.”


녀석은 내 옷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렸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 듯, 좋은 듯,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내가 술이라도 취했나?


“바다 비린내. 피비린내. 썩은 과일에 숨겨진 달콤한 향. 아~ 맛있겠다.”

“...내 몸에서 그런 냄새가 나? 고작 삼일 못 씻었다고 그런 거지 같은 냄새가 난다고?”

“몸에서 나는 게 아니에요. 더 깊은 거죠. 영혼에서 난다고 해야 할까요?”

“역시 사이비네. 응. 잘 자라. 꼬마야.”


매달린 녀석을 뿌리치고 텐트로 들어갔다. 그래도 나름 팀장급이라고 개인용 텐트에 고급 침낭까지 있으니 참 좋다.


밖에선 피워놓은 모닥불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녀석들이 떠들고 있었다.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는 것만 빼면 분위기는 누가 봐도 캠핑장이다.


“...그래. 긴장 좀 풀어야지.”


머스칼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여차하면 날 깨우러 달려오겠지.


걱정을 잠시 미뤄두고 눈을 감았더니 금세 잠이 밀려왔다.

계속 억누르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 멀어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2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려온 건 비명이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내지르는 그런 비명.


벌떡 몸을 일으켜 반사적으로 텐트에서 튀어나오자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에 후끈한 열기가 들이닥쳤다.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공기조차 지글거리며 타들어 갔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화상을 입는 것처럼 따가웠다.


불꽃 속에서 날뛰는 건 털짐승이었다. 두 다리로 선 채 시퍼렇게 날이 선 무기를 쥐고 휘두르는 괴물들.

그런 괴물들의 포효에 총성, 비명, 폭음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불꽃에 피가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카르마 나이프를 쥐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덮쳐오는 짐승의 머리를 익숙한 동작으로 베어 떨궜다.

두 걸음째에 세 마리가 덮쳐왔지만, 느렸기에 대응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온 놈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머리를 잘라냈다.


걸음마다 짐승들이 들이닥쳤다. 각 개체가 강한 건 아니지만, 머릿수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았다.

열 걸음을 채 내딛지 못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수십 마리의 짐승이 날 둘러싸고 있었다.


“산!”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짐승들이 일제히 바닥에 납작 들러붙어 터졌다.


“머스칼?”


검은 코트를 펄럭이며 머스칼이 위에서 떨어졌다. 가볍게 착지한 그는 후드가 벗겨져 새까만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나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얼굴이 있을 리 없건만, 그에게선 일그러진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산. 당장 여기서 도망쳐라. 북쪽으로 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

“크루아틀이 왔다.”


그 한 마디로 상황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이제 보니 머스칼은 이미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가 검을 뽑았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바를 난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헤이카는? 헤이카는요!?”

“크롬벨 팀에게 맡겼으니 괜찮겠지. 먼저 북쪽으로 올라갔어.”

“다, 다행... 다른 인원들은?”

“일단은 모두에게 피하라고 전해뒀는데, 잘 도망쳤는진 모르겠군. 네가 안 보여서 찾아다닌 거야. 내가 최대한 막아볼 테니 어서 도망쳐라.”

“크루아틀이 온 거라면 머스칼도 피해야..”


머스칼이 고개를 저었다.


“짐승의 수가 너무 많아.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먼저 가. 최대한 빨리. 아일랜드 섬 북쪽엔 커다란 숲이 있어. 그 숲에 들어가면 안전할 거다.”


그렇게 말하며 머스칼은 내 등을 떠밀었다. 그와 동시에 머스칼의 압력이 뒤에 덮쳐오던 짐승을 짓눌러 터뜨렸다.


“가! 어서! 지금 네 상태로는.. ...!!!”


불꽃이 튀어 오르며 머스칼의 검이 무언가를 막아냈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스칼을 짓누르고 있었다.


강철로 전신을 둘러싼 거구. 불꽃처럼 펄럭이는 붉은 망토. 쇳덩어리 헬멧의 정중앙의 렌즈에서 새빨간 빛이 점멸했다.


“크루아틀!”


머스칼이 압력을 쏟아부으며 지면이 으스러졌다.


휘말리지 않도록 몸을 빼 상황을 확인했지만, 검붉은 빛이 크루아틀의 손끝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시리아에서 봤던 빛의 칼날이었다.

머스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빛의 칼날을 손톱처럼 세운 크루아틀이 천천히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머스칼!”

“뛰어라! 산!“


번뜩이는 섬광이 세상을 갈랐다.

빛의 칼날이 머스칼의 몸을 꿰뚫고 그의 등 뒤로 지면을 새까맣게 태웠다. 내 바로 옆을 스쳐 간 다섯 줄기의 손톱자국에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쿨럭!”


피를 토하는 기침 소리. 이를 악물고 고통을 억누르는 머스칼의 신음에 강철이 짓이겨졌다.

압력을 최대한 끌어낸 머스칼이었다. 크루아틀의 몸을 두른 쇳덩어리들이 푹푹 찌그러졌다. 하지만 역시 움직임을 멈추진 못했다.


머스칼을 꿰뚫은 빛의 칼날이 그의 몸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었다.

이대로면 머스칼을 잃는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이프를 말아쥐고 바닥을 차려는 순간, 빛의 칼날이 다시 한 번 번뜩였다.


칼날이 머스칼을 갈랐다. 그의 몸에서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고, 그 피조차 초고온의 칼날에 닿자 순식간에 바싹 타 사라졌다.


빛의 칼날에 꿰인 머스칼이 축 늘어졌다. 크루아틀은 그런 머스칼을 내려다보며 붉은 렌즈의 조리개를 조였다 풀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사고를 가속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어째서 크루아틀이 여기 있는 거지?’

‘올드 아일랜드를 먼저 침공한 건가?’

‘우리가 황제 기사와 동맹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 위해서?’


“우선 하나.”


크루아틀의 투구에서 조악한 기계음과 짐승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머스칼이 첫 번째? 그럼 처음부터 머스칼을 노리고 이곳에 왔다는 얘긴가?


“다음은 황제.”


크루아틀이 무릎을 구부리자 섬뜩한 소리를 났다. 칼날에 꿰인 머스칼이 검을 떨어뜨렸다. 후두둑 쏟아지는 피나 내장이 새까맣게 탔다.


‘머스칼이 당했다.’

‘적의 가장 성가신 전력부터 깎아내려는 거였어.’


크루아틀은 정복자다.

전쟁이란 무력의 수단을 통해 모든 걸 자신의 지배하에 놓는 천생의 싸움꾼이자 전쟁광.

그런 괴물이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 다음은 너다. 살아남는다면.”


크루아틀의 붉은 렌즈가 날 정확하게 겨냥하며 말했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 난 그저 놈의 앞에서 이를 악무는 게 전부였다. 나이프를 겨눌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압도적인 위압감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만약 두 번째가 황제 기사가 아니라 나였다면 여기서 내 목숨은 끝났을 것이다.


크루아틀은 구부정한 몸을 세우며 단숨에 하늘로 치솟았다. 날개도 없이 단순한 도약임에도 땅이 크게 흔들려 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불꽃 너머 짐승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놈들은 쓰러진 날 찢어발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짐승들의 발소리 사이로 가볍고 재빠른 발소리가 섞여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불꽃을 헤치며 하얀 옷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목에 걸린 월교의 펜던트가 불꽃의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들 사이로 느릿하게 걷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홀로 검은 옷을 차려입은 그의 하나뿐인 눈이 나와 마주쳤다.


“!”


남자가 귀신같은 속도로 날아들어 내 멱살을 잡아올렸다. 굳어있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어..? 오코넬..?”

“산아. 조용히 듣기만 해라.”


꽃무늬 머플러와 같은 무늬의 안대. 참수도와 낡아빠진 구식 시라비아제 권총을 가진 처형인.

내 스승이기도 한 이 남자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백사가 일으킨 환각 같은 게 아니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오코넬이다.


왜 마피아 처형인이 월교와 함께 움직이고 있지?

머리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오코넬이 얼굴을 들이밀고 목소리를 낮췄다.


“시라비아는 크루아틀의 휘하로 들어갔다.”

“어..?”

“내가 뒤를 쫓는 시늉을 하마. 그러니 도망쳐라.”

“오코넬? 뭔가 있습니까?”


누군가의 목소리에 오코넬이 재빨리 날 걷어찼다. 뒤로 내동댕이쳐짐과 동시에 바닥을 짚었다.


“그냥 좀 성가신 벌레입니다. 제가 처리하죠.”


오코넬은 재빠르게 날 덮쳐왔다.

그의 하나뿐인 눈이 소리 없이 말했다. ‘달려라.’ 라고.


난 그의 신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바짝 쫓는 오코넬의 참수도가 몇 번 허공을 갈랐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처음부터 날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달릴 수 있었다. 조금 뒤엔 속도를 붙여 있는 힘껏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오코넬의 칼부림 소리는 이미 들려오지 않았고, 하늘엔 커다란 만월(滿月)이 덩그러니 떠올라 있었다.

그 만월의 달빛을 받으며 올드 아일랜드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건 모두 크루아틀의 짐승이었다.


거대한 날개와 눈이 이쪽을 발견하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아까부터 최대한 속도를 내고 있지만, 어째선지 아무리 달려도 앞서 갔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달빛과 칠흑뿐인 세상이었다.


‘방향..’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온통 똑같은 황야였다. 처음에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건 맞았는데, 달리면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보니 방향 감각이 고장 난 것처럼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기껏 도망친 곳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는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아, 여기 있었네.”

“!!”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던 중,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난 나이프를 내밀었다. 나이프 끝에는 빨간 눈이 덩그러니 있었다.


“헤카테?”

“맞아요. 용사님.”


피로 새빨갛게 젖은 옷을 입은 녀석이 싱긋 웃었다. 난 녀석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네 짓이지?”

“네? 뭐가요?”

“네가 크루아틀을 부른 거지? 우리가 여기 있다고?”


녀석의 목에서 짤랑거리는 월교의 상징을 노려보았다.

망할 짐승들은 결국 월교에서 나온 괴물들이고, 이 꼬맹이 또한 월교였다.

너무 안일했다. 경계를 늦춘 게 화근이었다.


“이 타이밍에 크루아틀이 올드 아일랜드에 갑자기 침공해? 녀석은 머스칼을 노리고 있었어. 그리고 곧바로 여길 찾아왔지. 우리가 올드 아일랜드의 어디에 있을 줄 알고? 기사들은 뭘 하고 있었길래 저놈들이 오는 것도 몰랐던 거야? 다 네 짓이지?”

“...”

“..긴장을 푸는 게 아니었어. 월교인 걸 안 시점에서 계속 감시했어야 했는데.. 너 때문에 머스칼이...”


그때, 하늘 높이 울리는 괴조의 울음소리에 흠칫했다. 땅에도, 하늘에도 적들이 있고 길까지 잃었다.

구름에 달빛이 가려져 모든 게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사님. 이쪽.”


어둠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눈동자가 말했다. 녀석은 나이프를 겨눈 내 손을 덥석 쥐더니 끌어당겼다.


“뭐 하는 거야?”

“만나러 가는 거예요.”

“누구를..?”


머리는 이게 함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의 빨간 눈이 그런 날 돌아보았다.


“무한(無限)의 눈을 가진 마법사.”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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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8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2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7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4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5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9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2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9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8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1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7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6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9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6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3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5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5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0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2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8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3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2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1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9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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