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포고
#1
쏟아지는 빗줄기 속, 사람의 비명과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땅이 으스러지고 벽이 무너졌다. 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뒤엉키고 뒤집어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된 코렌의 도심 한복판.
그 교차로에 선 루저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 지원! 지원 바란다! 수사본부에 괴물이...! - }
무전이 뚝 끊겼다. 루저는 자신이 뛰쳐나왔던 건물을 돌아보았다.
내부에서 요란하게 날뛰는 것은 거대한 털짐승이었다. 난폭한 기세에 경찰들은 뭔가 해보기도 전에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샤토..”
중얼거리던 루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 키란 샤토가 저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뛰쳐들어가려던 순간, 유리창과 벽을 부순 짐승이 훌쩍 뛰어내렸다. 5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떨어진 짐승에 지면이 푹 꺼지며 으스러졌다.
그 짐승과 함께 내려온 키란 샤토가 루저와 눈이 마주쳤다.
루저를 향해 배시시 웃은 키란 샤토가 우아한 몸짓으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이 대혼란 속에서도 그의 경쾌한 걸음걸이에 루저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샤토!”
“선배!”
샤토를 뒤쫓으려던 루저의 어깨를 캐쉬퍼가 붙잡았다. 몸을 홱 돌린 루저를 향해 캐쉬퍼가 고개를 저었다. 루저는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빌어먹을!”
분하지만 여기서 샤토를 쫓는 건 최선이 아니었다.
“살려줘!”
“어, 엄마가 깔렸어요! 누가 저희 엄마 좀..!
“이게 뭐야! 뭐냐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 도시엔 일반 시민이 많았다. 그리고 날뛰는 짐승들은 비무장 인원에 대한 구분이 없었다.
그들의 발톱과 이빨이 광기를 타고 도시를 파괴했다. 피가 낭자했다.
“캐쉬퍼. 주변에 저놈들 얼마나 있어?”
“잠시만요!”
파장을 터뜨린 캐쉬퍼가 눈을 감았다. 그러는 사이 루저는 하늘로 총을 쏴 총성으로 짐승들의 주의를 끌었다.
겁도 없이 루저에게 달려든 짐승은 산산이 부서졌다. 세 마리째를 가루로 만들던 때쯤, 캐쉬퍼가 눈을 부릅떴다.
“57.. 59.. 60마리.. 아니, 이거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 많은 게 대체 어디서...”
“선배. 어떡하죠? 이거 저희만으론.. 헛!”
캐쉬퍼의 말을 끊은 건 커다란 그림자였다.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새가 빌딩 옥상에 내려앉았다. 접힌 날개를 긴 망토처럼 늘어뜨린 새는 마치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선 채 근육질의 두 팔을 드러냈다.
새가 한쪽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에는 거대한 대궁(大弓)이 쥐어져 있었다. 시위는 강철을 수도 없이 꿰어 만든 듯, 도저히 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새는 그 강철 시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쭉 당겼다. ‘끼기긱’ 하는 강철이 비틀리는 소음과 함께 시위에 무식한 크기의 화살이 걸렸다.
'위험..'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을 넘어오고, 악독한 범죄자들을 상대했던 루저는 본능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위험을 감지했다. 그는 재빨리 캐쉬퍼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직후, 시위에서 해방된 대화살이 공기를 찢어 갈랐다.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가 건물과 차의 유리창을 터뜨렸다. 몸을 강타하는 충격에 루저와 캐쉬퍼가 뒤로 나자빠졌다.
순간적으로 터진 엄청난 압력이 주변을 짓이겼다. 그렇게 쏘아진 대화살은 높은 빌딩의 허리를 뚝 끊어버리곤 도심 중앙에 떨어졌다.
가장 먼저 온 건 역시 충격파였다. 사람과 차가 날아가 뒤집어졌다. 그 뒤를 급하게 쫓듯, 거대한 굉음이 다가와 귀를 때렸다.
마지막으로 박살 난 도시의 잔해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파장을 크게 터뜨린 루저가 몰려오는 잔해의 파도를 가루로 붕괴시켰다. 잔해의 파도는 계속해서 몰려왔다.
실제론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테지만, 루저에겐 천고의 시간이 지나고 잔해의 파도가 그쳤다.
그는 주륵 흐르는 코피를 닦아내며 휘청거렸다. 공기를 일그러뜨리던 능력 파장이 사라졌다.
그렇게 두 팔을 축 늘어뜨린 루저가 고개를 들었다.
"...웃기고 있네."
넋두리처럼 흘러나온 말과 달리 루저의 메마른 얼굴엔 절망이 내려앉았다.
번듯했던 도시는 이미 형태도 남아있지 않았다.
#2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연합 본부 테러대책국 긴급대응팀장 알렉스 코튼이라고 합니다. 현재 국장님께서 부재중인 관계로 제가 브리핑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작지도, 크지도 않은 회의실.
그의 앞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줄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한 알렉스는 최대한 표정을 굳혔다.
보르단이 위치한 나라, 뉴런드의 케틀런 대통령.
세계 연합 니로퍼의 총장 루터스와 부총장 어셔 스콧.
그 외에도 뉴런드 각 부문에서 최고 책임자들이라 할 수 있는 거물들은 다들 침묵한 채 알렉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그라나(Grana) 163년 7월 14일. 보르단 세계 표준시 약 08시를 기준으로 세계 곳곳에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알렉스가 작은 리모컨을 조작하자 회의실 안쪽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세계 지도 위에 놓인 각종 위성 사진과 현장 사진, 혹은 영상 자료들이 재생됐다.
“피스칼의 코스바할, 레쉬타폴.”
“시라비아 미다스, 콜레타.”
“연방 남부의 우론. 동부 청설 지역.”
“암레드의 피콘, 제네드, 피트리.”
“빅토리아의 부에르 레이콘.”
“코렌의 카시라트, 태운, 올드 타운.”
“자할의 키누트, 볼른.”
“올드 아일랜드의 페론.”
“그리고 이곳 뉴런드의 호스탈, 하비스, 보르단.”
알렉스가 쭉 읊은 곳은 지도에 붉은 원이 그려진 곳이었다.
“이 중 보르단과 올드 아일랜드의 페론, 시라비아 미다스 세 곳을 제외하곤 도시급 거주 지역은 거의 완파된 상황입니다.”
세계 연합 본부가 있는 보르단은 최첨단 자가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본래 아가레스의 재해나 사막화, 그 외 타 세력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스템이었지만 그 시스템이 이번 테러의 피해를 축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시라비아는 그 마피아들의 영역이었고, 올드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황제 기사의 올드 나이트가 존재하는 이상, 테러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하지만 그 세 곳을 제외하더라도 피해가 너무나 컸다. 붉게 칠해진 피해 지역 지도를 훑어보던 어셔 스콧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저 많은 나라의, 저 많은 거주 지역 테러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고? 이걸 테러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피해 조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진 ‘테러’ 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건 아마..”
“선전포고로군.”
주름살이 내려앉은 입가를 비틀며 남자가 말했다. 알렉스는 남자를 향해 눈을 마주쳤다.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
“테러범.. 아니, 테러에 사용된 무기는 ‘짐승’ 이라지?”
“예.”
알렉스가 다시 조작한 스크린에 테러 당시의 상황이 잡힌 영상과 사진이 떠올랐다. 가지각색의 모습을 했지만, 어느 하나 인간이라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건 말 그대로 짐승이었다. 털가죽을 두르고, 혹은 깃털과 날개를 가진 말 못하는 짐승들.
하지만 그런 짐승들이 기괴할 정도로 거대해지고 인간처럼 움직이며 도시와 사람을 공격했다. 심지어 인간의 언어를 내뱉기도 했다.
억지로 흉내 내는 언어는 조악했고 섬뜩한 기분을 들게 했다. 알렉스는 버튼을 눌러 영상을 멈췄다.
“크루아틀 정복군이군요.”
연합 총장 루터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끄덕였다.
“월교에서 따로 움직임은?”
“월교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블라다카 교주의 행방은 현재 추적 중이고 다른 사도들도 추적에 나섰지만 쉽지 않아 보입니다.”
“..화면으로 봐도 대강 알겠지만, 피해 규모가 큰 것 같군.”
“정확한 건 집계가 나와야 합니다만, 현재로선 최소 수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주 도시는 시설이 모두 붕괴되어 사용할 수도 없게 되어 대량의 난민 발생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케틀런 대통령이 찌푸린 미간을 짚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레스 재해가 발생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전세계에 퍼진 월교 지부들은 어쩌고 있지?”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오히려 월교의 성직자들이 손수 나서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이번 테러로 피해를 본 월교의 시설도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성직자들에겐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모양이군. 휘말려도 관심도 없다는 뜻일 테고.”
알렉스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그는 레이저포인트로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레베스타의 북서부. 시라비아에선 북쪽에 위치한 나라. 피스칼이었다.
“피스칼 군부는 이전에 수도 샤크잔을 크루아틀에게 빼앗긴 뒤로 북쪽 거주 도시인 코스바할까지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 테러로 코스바할이 당하고, 마지막 방어선이던 레쉬타폴까지 밀리면서 사실상 피스칼 정부는 붕괴했습니다.”
“피스칼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그 괴물에게 넘어갔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흠.”
케틀런 대통령은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어셔 스콧이 입을 열었다.
“데미지 컨트롤 상황은?”
“연합의 병력과 에이전트를 총동원하곤 있지만, 재난 발생 구역이 너무 광범위한 탓에..”
“하늘로 가면 되잖나. 하늘로. 구조대든, 군대든, 에이전트든. 하늘로 가면 금방 도착할 거 아닌가? 아가레스도 다 떨어지고 없는데, 왜 아직도 하늘을 비워두는 거야?”
어셔 스콧의 발언에 알렉스는 놀란 듯 보였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작 스콧은 자신의 발언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문젠가?”
“그게.. 부총장 각하. 연합군 전력에는...”
알렉스가 땀을 삐질거리며 말했다.
“항공 전력이 없습니다.”
“아.”
‘하늘은 인류의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가 너무나 당연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누가 돈을 들여 수송기를 만들고, 항공기를 만든단 말인가.
모두가 무의미하게 돈을 내다 버리는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일이었다.
“..헤이카 미켈런.”
조용하던 케틀런 대통령이 말했다. 그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저마다 숨을 삼켰다.
“현재 항공 전력을 보유한 건, 전 세계에 그 여자뿐이군.”
“각하! 이클립스 공업의 손을 빌리자는 말씀이십니까?!”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맞춰 연합 총장 루터스가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지금으로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여자의 죄를 덮어두자는 말씀이십니까?”
“헤이카 미켈런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잊으셨소? 그 여자는 전 세계에 아가레스를 떨어뜨렸잖소.”
“공업의 힘을 빌리는 건 나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루터스 총장은 물끄러미 케틀런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깍지끼고,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던 대통령이 깊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연결해주게.”
#3
“난리 났네.”
병실 침대 위에 누워 뒹굴던 산은 휴대전화 속 인터넷 기사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전세계 이곳저곳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 그리고 짐승 괴물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산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공업에선 크루아틀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카의 하늘 탈환이 끝나면 크루아틀이 싸움을 걸어올 거랬지.’
그 예상이 현실로 드러났을 뿐이다. 정작 그가 요양 중인 이 아시리아의 버려진 도시엔 아무런 일도 없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옆에 놓아둔 또 다른 휴대전화가 울렸다. 재빨리 낚아챈 휴대전화를 들여다본 산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이전에 어셔 스콧이 넘겼던 휴대전화였다. 화면에는 ‘멋쟁이 스콧’ 이라는 발신자가 떠 있었다.
‘멋쟁이 좋아하시네.’
산은 하나 남은 손으로 과자를 입에 넣었다. 그리곤 한참을 오물거리며 고민하던 끝에 전화를 받았다.
“예. 받았습니다. 귀찮으니 딱 한마디만 듣고 끊겠습니다.”
{ 뉴런드의 케틀런 대통령일세. }
산의 입에서 과자가 뿜어져 나왔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