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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2,843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2.11.07 18:05
조회
210
추천
9
글자
20쪽

환상통

DUMMY

#1


사람에겐 모두 끝이 있다.

그게 당연한 이치라는 건 온 세상 사람들이 알지만, 막상 그들은 현실에 들이닥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선 대부분이 그 당연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 한 번만 더 확인해볼 테니까.. 들어갑시다. 제발! 제발 좀 부탁합시다! 군인 양반!”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여기서부턴 재해 복구 현장입니다. 아직 위험하므로 관계자 외 출입은 철저하게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하니까 더 찾으러 가야 하는..”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화를 낼 일도 아니며 무시로 일관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필라드 해안 경비대의 박시헌 하사는 군인으로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나고 있음을 느꼈다. 화를 참는 인내심이라기보단 자신의 정신적 한계가 가까워졌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출입은 허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눈 앞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픔, 절망, 분노. 그런 것이 뒤섞인 남자는 입가를 부들부들 떨었다. 박 하사는 슬슬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또 욕먹겠네.’


그들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 필라드는 아가레스의 재해 탓에 쑥대밭이 되었고, 그 때문에 발생한 실종자는 말도 못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족, 연인, 친구나 지인들이 끝도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박 하사는 그들이 이 안전펜스를 그들이 넘지 못하도록 냉정하게 막아서야만 했다.


“아빠..”

“...!”


박 하사의 멱살이라도 쥘 작정이었던 남자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른 어린 아들을 돌아보았다. 다섯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나이였다.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아직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 그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불행이기도 할 것이다.


“배고파. 엄마는 언제 와?”


박 하사를 흘겨보던 남자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조금씩 멀어졌다.

실종된 아내가 묻혀있을지도 모를 도시를 뒤로하고 ‘뭘 먹고 싶으냐.’ 고 물으며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은 강인했고, 무너져내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박 하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 잘못은 없다. 희생된 이들도, 남은 이들도.


이 재앙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건 이클립스 공업이며 헤이카 미켈런이다.

적어도 박 하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가 영웅이라는 거야.’


최근 TV나 인터넷 뉴스에선 공업과 헤이카 미켈런을 떠받드는 여론이 강했다.

박 하사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자신이 돌려보낸 실종자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얕은 상념에 잠겨 있던 박 하사는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또 실종자의 가족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지익, 지익, 하며 바닥을 끄는 발소리. 그 발소리는 이내 박 하사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박 하사는 작은 한숨을 들리지 않게 쉬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재해 복구 현장입니다. 관계자 외의 출입은 제한되어있습.. 니... 다?”

“...”


상대의 모습을 본 박 하사는 얼어붙었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독기가 들어찬 탁한 백색 눈동자 하나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남자였다. 눈동자와 같은 백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

남자는 검은 정장을 빼입고 있었는데, 오른쪽 소매가 헐렁하게 늘어져 있어 남자의 오른팔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나마 남은 왼팔은 의료용 붕대가 칭칭 휘감겨 있었다. 목 언저리에도 붕대가 보였다. 왼쪽 눈에는 의료용 안대와 붕대가 감겨있고, 코나 뺨에도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어딜 보아도 성치 않은 곳이 없는 남자는 벌써부터 온갖 약 냄새와 병원 냄새가 풍겼다.


잠시 뒤, 박 하사는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감염자!?”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불치의 백사병은 그 증상이 겉으로 또렷하게 드러나고, 소문으로는 전염성도 매우 강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얀 머리와 하얀 눈. 누가 봐도 남자는 백사병 감염자였다. 박 하사는 침을 꿀꺽 넘기곤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안 옮습니다.”

“뭐라고요?”

“안 옮는 백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박 하사의 경계심이 낯선 감염자의 말 한마디로 사라질 리 없었다.

그는 무전기를 쥐었다. 재해 복구 현장에 백사병 감염자가 나타났으니, 그를 격리 조치해야만 했다. 지원을 부를 셈이었다.


“어?”


박 하사는 멍청한 얼굴로 꺼내 든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무전기가 위아래로 예리하게 잘려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바람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던 박 하사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는 남자와 눈을 다시 마주쳤다. 남자의 왼손은 비어있었다.


“안에 찾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


박 하사는 고민에 빠졌다.

이 감염자에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출입을 막아야 하는지, 아니면 이 감염자를 여기서 제압해 격리시켜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혼자서 이 남자를 제압하자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전기가 왜 잘려나간 지도 모르겠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혹시 감응자..?’


감응자라면 무전기가 잘려나간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감응자라면 비감응자인 박 하사 혼자서 제압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박 하사는 이미 그를 감응자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여기서 빠져나가도 둘러댈 핑계가 있으니 말이다.


“..쩝.”


입맛을 다신 남자는 걸쳐놓은 정장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박 하사는 눈을 끔뻑거리며 남자가 꺼낸 물건을 확인했다.

그건 사원증이었다.


“이클립스.. 공업...”


노페이스 팀장. 산.


잠시 박 하사의 머릿속에 온갖 것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주마등에 가까웠으리라.


‘나 죽는구나.’


지금 코렌에서 공업의 노페이스 팀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코렌 군대를 학살했고, 에이전트를 학살했으며, 에이전트 본부 건물을 테러로 날려버린 국제 범죄자였다.


나이프 하나로 에이전트 여럿을 동시에 잡고, 혼자서 전차도 찢어버린다는 괴물.

코렌에 알려진 ‘노페이스 팀장 산’ 에 대한 악명은 자자했다.


“문 열면 안 잡아먹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경고였다.



#2


비틀비틀. 산은 눈앞이 흔들렸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발목이 시큰거렸다. 지난번 수술한 곳이 아직 제대로 아물지 못한 탓이었다.


“...”


난장판이 된 바닥도 문제였다. 잘 포장되어 있던 도로는 다 뒤집혀 진흙투성이로 울퉁불퉁했다.

멀쩡한 건물도 별로 없었다. 전부 들이닥친 파도를 견디지 못했거나, 충격파에 쓸려나간 탓이었다.


“어, 어디까지 가는..?”


산의 뒤를 따르던 발소리가 물었다. 산은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쭈뼛거리는 박 하사는 자신이 왜 산에게 끌려다니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가진 무전기를 베어버린 산이었지만 그렇다고 박 하사를 두고 왔다면 결국 산이 이곳에 있다는 걸 코렌 군대가 알게 될 터였다. 산이 박 하사를 끌고 필라드에 들어선 건 그런 이유였다.


“바다 보이는 곳까지.”


대답과 함께 산의 시선은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박 하사는 ‘바다..’ 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름이랑 계급은?”

“바, 박시헌입니다.. 박시헌 하사..”

“그럼 박 하사. 필라드 생존자 명단 같은 거 있을까요?”

“예? 생존자 명단이요?”


박 하사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구조 돼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 명단.”

“있긴.. 하겠죠?”


박 하사의 대답은 영 시원찮았다. 그는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 혼란 속에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더 적었다.


“생존자가 몇 명쯤 됩니까?”

“그건 저도 잘..”

“하아..”

“그래도 제법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가레스가 떨어지기 전에 누군가 해안 경비대에 미리 알려줬거든요!”

“미리?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떨어졌던 거 아닌가?”


박 하사가 묘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웬 젊은 여자가 아가레스가 떨어지기 한 시간쯤 전에 경비대로 달려와 경고했습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해안 경비대에서도 바로 확인을 했고, 아가레스가 정말로 근처 해역에 있다는 걸 알아냈죠.”

“그리고?”

“그러고는 도시 청사 쪽으로 연계해 곧바로 피난 경보를..”

‘한 시간이라.’


충돌 한 시간 전에 울린 피난 경보. 그 신고자가 누구인지 산은 알 수 없었지만 아가레스의 재앙을 한 시간이나 먼저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건 그거대로 신기했지만, 산은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지금 산이 확인하고자 하는 건 그 신고자에 관한 게 아니었다.


“...”


마침내 산과 박 하사가 도착한 곳은 필라드 항구에서도 구석진 곳이었다.

무너진 건물 아래 낡은 횟집 간판이 깔린 장소. 바로 앞엔 바다가 보여야 했지만, 수면 위엔 온갖 잔해가 꽉 들어차 있었다.


산은 먼 수평선에 시선을 두었다.


바다는 고요했으나 산은 당시의 재앙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산은 이미 두 눈으로 시라비아와 아시리아에서 아가레스의 재앙을 목격한 경험이 있었다. 이곳의 재앙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는 거대한 괴수는 바다로 떨어진다. 충돌과 동시에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그 전에 충격파가 먼저 도시 전체를 흔들고, 뼈대가 약한 건물은 그 충격파에 무너진다.

그 뒤는 높은 파도의 차례다.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해일. 해일은 게걸스럽게 도시를 먹어치우고, 시치미를 뚝 떼며 바다로 돌아간다.


아가레스가 바다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런 재앙이다. 산사태나 해일, 지진과 같은 선상에 둘 천재지변이다.

만일 아가레스가 바다가 아닌 필라드 육지에 떨어졌다면 필라드는 핵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필라드의 재앙을 상상하던 산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무너진 횟집 건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곤 하나뿐인 왼손으로 돌무더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도망치면 잡아먹습니다.”


산이 돌무더기를 치우는 동안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던 박 하사는 기겁하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산은 그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 횟집에 나이 많은 영감님이 하나 있었는데, 어떻게 된 지 모르죠?”

“예...”


박 하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산은 애초에 별 기대 없이 물었기에 특별히 아쉽다는 반응은 하지 않았다.

코렌 정부군이라고 해서 주민 하나하나의 생사를 전부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산은 한참이나 돌무더기를 치웠다. 물론, 사람의 손으로 파내는 건 한계가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했다.

산은 밑에 깔린 간판에 손을 얹었다. 박 하사는 뒤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생존자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산의 질문에 박 하사는 숨을 삼키며 재빠르게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바로 나왔어야 할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피, 피난민 캠프..”

“그 피난민 캠프는 어디에?”

“...”


이번엔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간판 위의 흙먼지를 손으로 쓸어내던 산이 고개를 돌려 박 하사를 보았다.


“말할 수 없다?”

“..예.”


박 하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생존자. 그것도 다친 민간인들이 모여 있는 피난민 캠프의 위치를 산에게 알려주는 건 문제가 커질 위험이 있다. 어쩌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박 하사는 용기를 내 대답한 것이다.


산은 그런 박 하사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은 그가 피난민 캠프의 위치를 불지 않은 게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코렌에서 ‘산’ 이라는 인간이 가진 이미지는 무자비한 학살자였으니 말이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합시다. 피난민 캠프에서 그... 젠장. 그 영감 이름이 뭐더라.”

“..이 횟집 주인분이 무사한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산은 횟집 간판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끄덕였다.


“왜 그런 게 궁금한 거죠?”

“알던 사람.. 아니, 친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제,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박 하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산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박 하사의 얼굴이 공포로 질려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이 도시가! 필라드가 왜 이렇게 됐는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들 때문입니다! 당신들 때문에..!”

“압니다. 아니까 이렇게 찾으러 온 거죠. 코렌 정부에 구속될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키며 대답한 산의 눈이 날카롭게 박 하사를 향했다. 박 하사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당신은 헤이카 미켈런과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알죠? 왜 그 여자가 이런 재앙을 일으킨 겁니까?”

“하늘을 되찾으려고.”

“그깟 하늘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했던 겁니까..? 수천, 수 만 명의 사람 목숨보다?”

“...”


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말이 없었다.

코렌의 군인을 향해 ‘이클립스 공업의 주인이 사실은 인류 혐오자다.’ 라고 말하는 건 위험한 걸 넘어 너무나 잔인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재앙을 일으켜놓고.. 재앙에 휩쓸린 사람을 찾으러 왔다니.. 웃기지도 않네요.”

“...”

“..그래도 부탁은 들어 드리겠습니다.”


박 하사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산은 눈을 크게 떴다. 떨리는 숨을 내쉬던 박 하사는 주먹을 움켜쥐고 산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모두가 당신이랑 똑같습니다. 가족, 연인, 친구. 그런 사람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그냥 똑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그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만 합니다. 그게 제 일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박 하사는 머뭇거리다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러니 제게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겁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돈?”

“아뇨. 한 대만 때리게 해주십쇼.”

“그걸로 된다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섭게 날아든 주먹에 산의 몸이 뒤로 나자빠졌다.

그대로 축 늘어진 산의 게슴츠레한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헉.. 허억...”


주먹을 날릴 때까지 온갖 용기를 쥐어짠 박 하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후’ 하며 숨을 내뱉었다.


“전 당신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타인을 걱정하는 인간성이 아직 남아있는 걸 봐서 당신이 찾으려는 그 사람은 찾아 드리죠.”

“...이 횟집 사장.”


산은 왼쪽 주머니에서 구식 휴대전화를 꺼내 툭 던지며 말했다. 무너진 잔해 아래 깔린 횟집 간판을 보며 박 하사는 휴대전화를 냉큼 챙겼다.


“그리고 미나라는 이름의 여자. 나이는 스무 살 정도. 목 언저리까지 오는 검은 단발에 붉은 눈이니 눈에 잘 띄고, 찾기도 쉬울 겁니다.”

“..두 사람이면 됩니까?”

“한 명.. 아니.”


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혹은 소리를 지를 것처럼.


“고양이 한 마리도.”



#3


박 하사는 떠났지만 난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슬슬 해가 지고, 바다에 황혼이 드리우는 시간이었다. 하늘도 붉은색과 검푸른 색이 뒤섞여 서로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얻어맞은 뺨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가려워.’


있지도 않은 오른팔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헤이카가 말했던 환상통이었다.

말로만 듣던 건데, 직접 겪어보니 꽤 성가셨다.


가렵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가끔은 아프기도 하고, 따갑거나 불에 타듯 뜨겁기도 했다. 뜨거웠을 땐 바닥에 나자빠져 데굴데굴 굴러다닐 정도였다. 생에 꼽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아..”


주머니 속 내 휴대전화를 꺼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완전히 새하얗게 바랜 머리칼. 안대를 하지 않은 남은 눈깔도 흐리멍덩하고 하얗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중증 백사병 감염자였다.

원래부터 감염자이긴 했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니 제대로 실감이 들었다.


“...”


중증 백사병 환자들은 심각한 환각, 환청에 시달리고 결국엔 미쳐버린다고 한다. 많은 백사병 감염자가 바로 이 단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딱히 내겐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병상에서 깨어나고 지금까지 어떤 환청도, 환각도 없었다. 겉모습만 바뀌었지 증상은 이전과 똑같이 별거 없었다.

그와중에 뺨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참, 세게도 때렸다.


“윽..”


근질거리던 오른팔이 이젠 슬슬 아팠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통증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잔류하는 감각이 여전히 팔을 콕콕 찔러댔다.


“산. 슬슬 갈 시간이다.”


익숙한 목소리에 조금 고개를 돌렸더니 검은 코트와 후드가 보였다. 후드 아래엔 시커먼 얼굴이 물끄러미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주변 경계. 연합의 에이전트가 올 수도 있으니까.”

“거 참 든든하네. 예. 돌아갑시다.”


아시리아의 최종 결전 이후. 큰 수술을 몇 개 끝내고 헤이카로부터 겨우 받아낸 외출 허가.

레베스타의 으슥한 의료 시설에 박혀있던 내가 지금 코렌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머스칼의 능력 덕분이었다. 어디로든 훌쩍훌쩍 날아가는 머스칼의 능력은 정말 마법 그 자체였다.


어쨌든, 덕분에 필라드에 들어와 나름의 수확은 건졌다. 언제 연합의 에이전트가 날 잡으러 올지 모르니 머스칼의 말대로 이쯤에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여전히 같은 하늘이 보였다. 슬쩍 보니 머스칼이 해가 떨어지는 수평선을 감상하듯 보고 있었다.


“산. 정말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뭐가요?”

“네 오른팔. 그걸 잃을 가치가 있는 일이었냐고.”

“...”


쿡쿡 찌르는 오른팔을 보았다. 있을 리가 없었지만 지금도 오른팔의 감각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감각. 주먹을 쥐는 감각. 손을 펴는 감각까지.


“잘 모르겠네요.”


팔이 날아간 적은 처음인데, 그럴 가치가 있었느냐고 묻는 거에 어떻게 대답할지 번뜩 떠오르진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공업은 졌다. 헤이카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고, 세상이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땅히 했을 뿐이다. 해야 했을 일이다.


“의무감에 한 건가? 아니면, 헤이카를 위해서?”


의무감이 맞겠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해야 했을 일? 아니, 정확히는 ‘하고 싶은 일’ 이었다.


거기서 엑스트라로 끝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헤이카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헤이카를 위해서. 저 자신을 위해서. 가치가 있었느냐고 물으면 역시 잘 모르겠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 같네요.”

“그렇군.”

“왜요? 칭찬이라도 해주려고요?”


수평선 너머로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내리깔리는 푸르스름한 어둠에 머스칼의 후드 안쪽은 더욱 어두워졌다.


“돌아가지.”


머스칼의 창백한 손이 매끄럽게 허공을 갈랐다.


곧, 텅 빈 하늘은 지겨운 병원 천장으로 바뀌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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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6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3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5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5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0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2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8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3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2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1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9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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