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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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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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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터닝 포인트(14) - 혼란의 시대

DUMMY

#1


황력(晃曆) / 그라나(Grana) 163년 7월 10일.

인류는 하늘을 되찾았다.


약 한 달에 걸쳐 아시리아의 땅에서 치러진 이클립스 공업과 아가레스 사이의 전쟁.

거기서 승리한 공업은 다시 쉴 새 없이 세계 곳곳에 추락한 아가레스 소탕 작전을 개시한 끝에 결국 공식적으로 하늘 탈환에 성공했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세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 이 행성이 아직 ‘지구’ 라 불리던 시절, 우리 인류는 평범하게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그 너머의 우주까지 진출했죠. 구시대인 지구의 1969년, 인류는 최초로 달에 착륙하기도 했죠. 이건 다들 지겹도록 들어서 아는 얘기일 겁니다. }


{ 하지만 황성이 시작되고 100년하고도 반세기가 넘어가도록 인류에게 하늘은 멀기만 한 이야기였습니다. 먼 나라로 가기 위해선 마음을 다잡고 기차에 오르거나, 배나 차량으로 몇 주, 길게는 몇 달까지 오직 이동에만 시간을 소비해야 하죠. 이건 늘 크나큰 불편이자 인류의 발전을 크게 저하하는 걸림돌이었습니다. }


{ 그러니 이틀 전, 이클립스 공업에서 발표한 ‘하늘 탈환 소식’ 은 인류의 암흑기를 마침내 끝낼 역사적 선포입니다. 인류 기술의 선구자인 헤이카 미켈런이 기어코 인류에게 하늘을 되찾아다 줬다는 건, 그녀의 눈에 인류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자격이 보였다는 뜻이겠죠. 그러니 저희는 마땅히 헤이카 미켈런의 그 공로를 인정하고 그녀에게 힘을 보태야만 합니다. }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하만 박사’ 라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이클립스 공업과 헤이카 미켈런의 업적을 찬양하며 얼굴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얘기를 듣는 사회자와 다른 패널들도 대부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패널 중 다른 중년 남자가 유일하게 불쾌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의 앞에는 ‘로먼 데일’ 이라는 이름표가 보였다.


{ 하만 교수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늘 탈환 소식은 이클립스 공업에서 멋대로 발표한 것이지, 세계 연합의 공식 선포가 아니지 않습니까? 세계 연합은 공업의 발표 이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건 세계 연합에서 공업의 선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 로먼 씨. 그건 ‘침묵’ 이지 ‘부정’ 이 아닙니다. 정말 공업의 선포에 반박할 생각이었다면 세계 연합은 이미 ‘공업이 잘못된 정보를 발표했다.’ 고 의견을 냈겠죠.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공업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 내부에서 아직 내용을 검토 중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너무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겁니다. }


{ ... }


{ 내 말에 반박해보시지요. 하만 교수. 현재도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지금까지 확인된 사상자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헤이카 미켈런이 벌인 건 인류를 위한 숭고한 성전 같은 게 아니라, 인류를 단체로 위험에 빠뜨린 대학살이나 마찬가지란 겁니다! }


{ ..아니요! 그건 틀렸습니다! 피해는 아가레스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 헤이카 미켈런이 직접적으로 입힌 게 아니지 않습니까!? }


{ 아가레스가 어째서 지상으로 추락했습니까? 아시리아는 왜 그 꼴이 된 겁니까? 전부 헤이카 미켈런이 벌인 전쟁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희생과 모든 피해의 책임은 헤이카 미켈런에게 물어야만..! }


{ 잠깐. 두 분 모두 진정하시고. 처음에도 말했지만, 이 토론은 앞으로 우리 인류가.. }


삑 -

루저는 리모컨으로 TV 전원을 꺼버렸다. 시끄럽던 방이 금세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의 눈이 테이블로 향했다. 따놓고 깜빡 잊고 있던 캔맥주의 겉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루저는 맥주를 집어들었다.

차가운 물기에 손바닥이 축축하고 시원했다. 목구멍에 들이붓자 익숙한 씁쓸함과 풍미가 감돌았다.


캔맥주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은 루저는 옆에 있던 사원증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지금보단 젊은 시절에 찍었던 사진. 그 사진 아래에 쓰인 이름.


‘루저.’


그는 과거엔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은 루저였다.

썩 마음에 드는 코드네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새 코드네임 발급을 위해 복잡한 절차와 심의를 거칠 정도로 루저는 부지런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루저’ 로 굳어버린 것도 그런 게으름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저는 이번만큼은 그 이름이 거슬렸다. 그는 지금 피폐한 패잔병 같은 기분이었다.


“...”


고개를 돌린 창가엔 밤하늘 아래 반짝거리는 도시 전경이 보였다. 그 전경 위로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줄기는 가느다랬다.

감성에 젖기엔 딱 좋은 분위기다. 평소의 루저였다면 저 풍경을 안주 삼아 감상하며 또 영양가 없는 세상 관찰에 몰두했을 정도였다.


다만 지금의 루저는 딱히 그러고 싶단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다른 걸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모든 게 귀찮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열정적인 나태함에 소파에 등을 맞대고 축 늘어졌다.


삑. 삑삑삑.


조금 뒤, 익숙한 도어락 전자음이 몇 번 들리더니 현관문이 덜컹 열렸다. 루저의 시선이 현관 쪽으로 향했다.

현관엔 윈터가 젖은 외투에서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쓴 그녀의 기분도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어휴. 이놈의 비. 며칠짼지 모르겠네.”


그녀가 저렇게 투덜거리는 걸 루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벌써 2주 넘게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윈터는 물기가 남은 우산을 우산꽂이에 휙 던져넣곤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편의점 이름이 새겨진 흰 봉지를 내려놓았다.


루저는 느릿한 동작으로 안에 든 마른안주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약간 꼬릿꼬릿한 냄새가 나는 육포였다.


“집안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왜 TV도 꺼놓고 있어요?”

“재미없어서.”


루저의 대답에 윈터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끄덕였다.


“하긴. 요즘엔 어느 채널을 틀어도 공업. 공업. 하늘이 어쩌구저쩌구, 헤이카 미켈런이 어쩌구저쩌구. 같은 얘기만 몇 번을 듣는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게시판도 전부 그 얘기뿐이라 지겨워요.”


윈터는 루저가 뜯은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자신도 캔맥주를 하나 따고 휴대전화로 태연하게 게임을 켰다.

그녀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저가 물었다.


“겨울아. 재밌냐? 그거?”

“저한텐 재밌는데.. 선배한텐 재미없을지도.”

“왜? 게임이 재밌으면 다 재밌는 거지. 사람 가려서 재밌냐?”

“선배는 버튼 하나 눌러놓으면 자동으로 슥슥 다 해주는 게임이 더 재밌지 않아요?”

“...그래. 나이 먹고 자동만 돌리는 아저씨라 미안하다.”

“아, 그런 뜻은 아닌.. 음.. 크흠.”


콧잔등을 긁적거리던 윈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그러고 보니 약 바를 때 안 됐어요?”

“너 나가 있는 동안 혼자 했다.”

“혼자서도 손이 닿아요?”

“대충 발라놓으면 알아서 나아. 이젠 굳이 약까지 안 발라줘도 돼.”


윈터는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눈초리였지만 그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진 않았다.

에이전트 윈터가 루저의 집에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난번 공업의 노페이스 팀과 충돌했을 때, 루저가 꽤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다 나을 때까지 병원 신세를 지는 게 맞았지만 루저는 병원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만 맡아도 진절머리가 나는 그로선 병원에 몇 주나 발이 묶여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조금 일찍 퇴원한 루저는 집에서 치료를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험하게 구르던 반동이 온 탓인지, 당시 산과의 싸움에서 큰 힘을 남발한 탓인지 루저는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거기서 윈터가 끼어들었다. 한동안 그의 집에 들락거리며 수발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오늘 저녁은 뭐냐?”

“음.. 라면 먹을까요?”

“..어제도 먹은 것 같은데.”


그래봤자 윈터의 안쓰러울 정도로 어설픈 생활력이 남의 집에서 갑자기 빛을 볼 리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일은 루저가 스스로 하고 있었다.

그래도 윈터의 성의를 마냥 무시할 생각은 없었기에 루저는 그녀가 자기 집에 여전히 들락거리는 걸 내버려두고 있었다.


“...”

“....”


TV 소리도 없고, 바깥의 빗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는 적막감.

으레 진중한 이야기의 시작이 그러하듯 윈터는 고민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

“어떤 놈이냐? 나이랑 직업은?”


루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윈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루저는 ‘당했다.’ 라는 걸 깨닫곤 한숨을 푹 쉬었다.


“농담인데, 그렇게 눈 부릅 치켜뜨고 물어볼 일이에요? 누가 보면 우리 아빠인 줄 알겠네.”

“..그런 농담은 재미없다.”

“얼굴 좀 피라고 해본 거예요. 아무리 쉰다고 해도 며칠째 밖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집에 틀어박혀 있잖아요. 게다가 그렇게 얼굴만 찌푸리고 있으면 되겠어요? 한숨도 푹푹 쉬고. 집 무너지겠네.”

“밖을 뭐하러 가. 쉬는 동안엔 집에서 뒹굴어야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루저였다. 윈터는 입맛을 다셨다.


“집에서 행복하게 뒹굴 거리면 저도 이런 말 안 하죠. 선배.”


윈터의 째릿한 눈빛에 루저는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았지만, 윈터는 벌써 루저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그보다 차장한테서 연락은?”


루저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윈터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루저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어찌됐든 지금의 루저에겐 정신적인 휴식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기하래요. 윗분들이 아직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욕심만 그득한 노인네들..”


루저는 정치판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결국 정치가들의 말 한마디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정부의 개였다.


지난번 노페이스 체포 작전에 실패하며 코렌 정부의 에이전트 전력은 반 토막이 났다. 루저를 포함해 네 명이나 있던 팀장급 에이전트도 지금은 루저 하나만 남았다.

두 명이 노페이스 팀장을 잡으려다 비명횡사했으며 시카와 야차에 의해 테러당한 에이전트 본부가 날아가자 이 기회를 틈타 남은 한 명은 사표를 던지고 도망치듯 떠났다.


그렇게 남은 팀장급 베테랑은 루저 하나. 싫든 좋든 그는 이젠 에이전트 본부에서도 정치가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할 판이었다.


“쩝. 슬슬 새 정장을 준비해놔야겠어.”

“뭐하게요?”

“아마 곧 차장이 날 부를 거다. 에이전트 본부의 윗대가리들은 다 뒤졌고 차장 혼자 남았는데, 그 양반은 애초에 감응자도 아니잖아. 현장 뛰는 내 의견이 필요하겠지.”

“높으신 분들이랑 식사도 하겠네요. 끔찍해라.”

“그러게 말이다.”


루저는 다시 캔맥주를 들이켰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목 넘김이 좋았다. 목구멍으로 술을 넘길 때만큼은 귀찮고 메마른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겨울아. 너도 그럼 요즘 할 일 없지?”

“그렇죠. 뭐. 선배네 집 뺀질나게 들락거리는 것만 봐도 알잖아요?”

“조엘은 뭐하냐?”

“걔도 아무것도 안 해요. 할 것도 없으면서 사무실에 나와 종일 앉아있는 게 기특해서 제가 어울려주고 있어요.”


루저는 까슬까슬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육포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한참 육포를 질겅거리던 그가 말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뭐예요?”

“며칠 전, 코렌에 월교의 고위 성직자 하나가 들어왔다.”


윈터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캐볼까요?”

“그래. 오늘 말고. 내일 출근해서 조엘 데리고 슬쩍 가봐. 아마 세계 연합이 지금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건 월교와 뭔가 있기 때문일 거다.”


모든 세상이 공업과 헤이카 미켈런을 적대시했지만, 그녀는 하늘을 되찾았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 세 부류로 나뉘었다.


공업과 헤이카를 지지하는 부류.

공업과 헤이카를 여전히 적대하는 부류.

그리고 어떤 관심도 없는 부류.


루저는 그중에서도 헤이카를 지지할지, 말지를 선택하지 못해 침묵하고 있는 세계 연합의 동향을 줄곧 신경 쓰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 있는 것이 다른 것도 아닌 월교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월교와 의견 충돌이 났을지도 모르지. 세계 연합이 그렇게 갈팡질팡하니 연합의 지시만 기다리는 코렌 정부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걸 테고.”

“..일리 있네요. 한 번 캐볼게요. 월교는 진짜 싫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죠.”

“그래.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이번에 들어온 놈은 사도니까.”


사도라는 단어에 윈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도급 인물의 위험성은 그녀도 소문으로 들어서 대강 알고 있었다.


“사도..”

“키란 샤토라는 놈이야. 전에 세계 연합에 뒷돈 쑤셔 넣던 놈.”

“..엄청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얕게. 살짝만 들춰보라는 거다. 조금만 이상하면 바로 발 빼. 나도 나대로 조사는 해볼 테니까.”

“알겠어요.”


윈터는 진지한 얼굴로 캔맥주를 들이켰다. 루저도 씹던 육포를 넘겼다.

그렇게 다시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끊어져 정적이 내리깔리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들려왔다.


“..그래서 저녁 뭐 먹냐?”

“라면 싫으면 햄버거? 피자? 치킨도 좋죠.”


바닥에 쩍 들러붙는 한숨과 함께 루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른의 건강식이란 걸 보여주마.”

“으엑.”


팔을 걷어붙인 그가 주방으로 향했다.



#2


보르단 세계 연합 본부.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보던 중년의 남자는 보르단의 전경에 취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 밤인데도 불구하고 도시는 문명의 불빛으로 밝았다. ‘황성 최초의 도시’ 라는 명성답게 이 보르단에선 밤늦게까지 도시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


“총장님. 부총장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중년 남자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돌아섰다. 그곳엔 아직 퇴근하지 않고 남아있던 비서가 있었다.


“메이린? 아직 있었나?”

“총장님이 아직 계시니까요.”

“아, 이런.”


세계 연합 니로퍼의 총장, 루터스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비서인 메이린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총장님.”

“후.. 내가 또 혼자 틀어박혀 있었군. 앞으론 내 대답이 없어도 일이 끝나면 그냥 돌아가도록 해.”

“총장님..”

“내 말대로 해. 아무리 비서라 해도 나한테 그렇게 맞춰 줄 필요는 없어. 자네도 자네의 생활이 있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스콧이 왔다고? 내가 약속을 잡아놨던가.”


메이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정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문만 열어주고 자네는 바로 돌아가. 내일 보자고.”

“네. 총장님.”


메이린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조금 뒤, 총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어셔 스콧이 들이닥쳤다.


“루터스! 내가 돌아왔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부끄러워하긴! 하하하!”


쾌활하게 웃으며 문을 닫은 스콧의 손에는 어김없이 콜라 캔이 들려있었다. 루터스는 무사히 돌아온 그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 남자가 가볍게 서로를 포옹했다. 짧은 포옹 뒤, 루터스는 스콧의 몸을 슥 훑어보고 끄덕였다.


“팔다리 전부 멀쩡하군. 그 지옥에서 돌아온 것치곤 말이야.”

“내가 누군가? 어셔 스콧이란 말일세. 그런 전장에서 고꾸라질 남자가 아니지.”


스콧은 콜라를 들이켜곤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끼익’ 하는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루터스도 자기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빨리 말하라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가 몇 년 지긴데. 자네 눈빛만 봐도 이젠 다 알아. 내가 아시리아에서 뭘 보고, 뭘 느꼈는지 듣고 싶다는 거잖아?”


루터스가 피식 웃었다. 그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뭐, 시작은 별 느낌 없었네. 그놈의 짐승 놈이 붙어있는 바람에 하루종일 구린내만 맡아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았지.”


그가 말하는 건 크루아틀이었다. 루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군. 스콧. 어쩔 수 없었어.”

“알고 있네.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자네가 블라다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이번 전쟁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을 걸세. 어쩌면 공업이 아니라 월교가 하늘을 차지했을 수도 있지.”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덧붙인 스콧은 다시 콜라를 호로록 마셨다.


“그놈은 그놈대로 귀찮게 굴고. 블라다카의 비위는 맞춰줘야겠고. 그래서 꿀꿀했는데, 역시 헤이카 미켈런은 내 기분을 싹 바꿔주더군. 정말 멋진 공연을 보여줬어.”

“공연이라.. 자네한텐 그 전쟁이 공연 정도의 감상이었나 보군.”

“실제로 그랬어. 무대 아래에선 평범한 일상뿐이잖나. 마법사나 기사, 고리타분한 판타지는 무대 위에서나 나오는 거야. 그러니 공연이지.”


루터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공업이 마법을 썼나?”

“썼고말고. 무슨 짓을 한 건진 더 조사가 필요한데, 그건 분명 마법이었네. 단순히 현대 과학 기술로 재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역시 델라리온 머스칼은..”

“마법사겠지.”


두 남자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콜라를 홀짝인 스콧이 입을 열었다.


“헤이카 미켈런은 결국 성공했네. 하늘을 탈환했어. 정말이야. 모체를 잡았으니 하늘 위엔 더 이상 아가레스가 없을 거야.”

“...정말 성공할 줄이야.”

“근데 재미난 게 하나 있어. 그 승리의 핵심은 공업도, 델라리온 머스칼도 아니었네.”


스콧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루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레베스타 에이전트 본부장을 기억하나? 코드네임 핸들러. 레베스타에선 사무엘. 과거엔 코렌에서 박민욱이란 이름으로 에이전트 루저의 파트너였던 남자.”


루터스가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세계 연합의 외교관 신분으로 시라비아에 보냈던 핸들러가 그대로 공업에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데려갔던 다른 레베스타 에이전트와 전직 피안파의 간부인 화련도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아마 그들도 공업에 붙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극히 일부뿐이었다. 레베스타 에이전트 본부장이 세계 연합의 뒤통수를 쳤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봤자, 연합의 체면만 구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레베스타에서 개발한 ‘캔들’ 을 자신에게 사용했네. 그 결과, 핸들러는 세계 최초로 ‘복합능력’ 을 각성한 감응자가 되었지.”


지금은 죽고 없는 레베스타의 통합의회의 의장 베네딕트 해리슨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캔들 프로젝트.

캔들의 부작용으로 베네딕트 의장이 레베스타에 수도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공업에게 제압당했다는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잊힌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공업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이며 그 사실을 루터스와 스콧은 알고 있었다.

위험성이 너무 커 폐기되었다는 것과 달리 사실 베네딕트 해리슨의 캔들 프로젝트는 이미 완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각성한 능력이 뭐였는지 기억하나?”

“관측(觀測)인가.”

“맞아. 게다가 그 능력은 점점 강해져서 미래까지 관측했지. 여기까지 생각하면 자네도 슬슬 감이 오지 않나?”

“..사무엘은 헤이카 미켈런이 승리하리란 걸 알고서 공업에 붙은 거로군.”


스콧이 끄덕였다. 그는 남은 콜라를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알뜰하게 입에 털어 넣은 스콧이었다.


“우연히 아시리아에서 그와 마주쳤네. 그래서 얘기를 좀 나눴고, 이것저것 물어봤지. 그 중엔 이런 질문도 했어. ‘헤이카 미켈런과 아가레스. 둘 중에 누가 이 전쟁에서 이기느냐.’ 라고.”

“당연히 헤이카 미켈런이라고 대답했겠군.”

“흐흐. 아니.”


스콧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루터스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둘 중엔 승자가 없다고 했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더 미래를 본 건가?”

“아니. 그가 말한 건 아시리아의 하늘 탈환 전쟁의 결과야. 헤이카 미켈런과 아가레스. 둘 중엔 누구도 승자가 없다. 이게 핸들러의 대답이었네.”


루터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미래 관측의 정확성을 논하기 이전에 둘 다 승자가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전쟁의 승자는 헤이카 미켈런이었고, 공업이었다.

그래서 인류는 하늘을 되찾았다. 그녀가 패했다면 하늘은 여전히 괴물의 손에 있었을 것이다.


“산.”

“산?”

“공업에 노페이스라는 팀이 있네. 거기 팀장을 하는 젊은 애송이가 하나 있어. 이름이 산이야.”

“코렌의 에이전트 전력을 반 토막 냈다는 그 팀장이군.”


스콧이 끄덕였다.


“핸들러는 그가 이긴다고 말했네. 헤이카도, 아가레스도 아니라. 그 젊은이가 이긴다고.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모체' 를 죽인 게 바로 그 젊은이일세.”

“...어쨌든 그는 공업 소속 아닌가? 그가 이기는 것과 헤이카 미켈런이 이긴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지?”

“큰 차이가 있지. 루터스.”


다시 캔을 입술에 가져갔던 스콧은 이미 텅 빈 콜라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내가 보기엔, 그 젊은이가 바로 우리가 애타게 찾던 ‘칼날’ 이야.”

“...!!”


루터스는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콧도 히죽 웃고 있었다.

스콧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글라스 너머에 있던 파란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생기가 넘쳤다.


“확실.. 한 건가..? 아니, 확실하겠지. 자네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으니..”

“그래. 난 거의 확신하고 있네. 그 젊은이가 맞아.”

“드디어 찾았군. 그래.. 후...”

“그렇다고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르지. 문제가 좀 있으니까.”


스콧은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루터스는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떨궜다.


“헤이카 미켈런..”

“그래. 하필이면 그 여자가 꽉 쥐고 있어. 그 여자는 자기 계획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우릴 방해하려고 그 젊은이를 쥐고 있는 건 아닐 텐데, 이유는 모르겠더군.”

“..괜찮네.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으니까.”


루터스가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보던 스콧이 콧방귀를 뀌었다.


“헤이카 미켈런한테서 그 젊은이를 빼앗을 셈인가? 무리일걸? 무슨 보물처럼 다루던데.”

“다 방법이 있지. 마침 들려오는 소문도 있으니.“

“소문?”


루터스는 심호흡하며 넓은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가 재차 화려한 보르단의 전경을 품으며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늘을 탈환했으니, 곧 전쟁이 터질 거야.”

“전쟁이라면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펑펑 터지지 않나?”

“그런 소꿉장난이 아니라 아주 큰 전쟁.”


루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에 품은 보르단의 문명의 불빛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크루아틀의 정복 전쟁. 아니..”


한 방울의 땀이 루터스의 턱선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그의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똑 떨어졌다.


“정복 대전(大戰)이겠군.”


주인 없는 하늘 저편에서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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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22.11.04 22:20
    No. 1

    연합이 월교 편을 든다면 공업도, 그 뒤에 남을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들은 뭘 원하는 걸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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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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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완결 공지 +3 23.05.08 145 0 -
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2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2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3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5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0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7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8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1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6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3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4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7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2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0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8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7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0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4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6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6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5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8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6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3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5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5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0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2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8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3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2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1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9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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