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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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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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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터닝 포인트(13) - Last Man Standing

DUMMY

#1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째에서 하늘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베스타의 드론 너머를 가득 채운 징글징글한 아가레스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백 마리는 넘는다.

심지어 놈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초대형 아가레스는 아직도 저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싸움을 걸어놓고, 결국 이 꼴이라니.


헤이카나 머스칼에게 한 마디씩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것도 일단은 살아남은 뒤의 일이다.


카르마 나이프를 꺼낼까, 고민하던 난 그냥 나이프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곤 오른손에 들린 머스칼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머스칼은 이걸로 아가레스를 상대했다. 아시리아 도시를 쪼갰고, 아디마 케티르 산까지 쪼갰다.

이 낡아빠진 날붙이가 대체 뭐길래 그런 위력이 뿜어져 나오는진 정말 모르겠지만 강한 힘엔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걸 휘두를 때마다 헤이카가 나가떨어졌으니까.


- 유물 라크리모사입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베르나데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녀석이 말하는 게 이 검이란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쓰면 이길 수 있으려나?”


- 스카이라인 프로토콜의 연산 결과에 따르면 ‘모체’ 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황성에 현존하는 무기 중 라크리모사가 유일합니다.


“스카이라인?”


- 현재 이 아디마 케티르 상공에 전개된 것이 스카이라인 프로토콜입니다.

- 총 159,456번의 아베스타 드라이브 가상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거쳐 완성한 플랜을 규격화한 것으로, 스카이라인 프로토콜 연산 결과에 따르면 초기 작전 성공 가능성은 약 60%였습니다.


"근데 왜 진 거야?"


- 계산 외의 패턴과 박사님의 체력 고갈입니다.

- 라크리모사는 헤이카 박사님의 몸을 자원으로 사용합니다.


“..왜 하필 몸인데?”


- 유물 라크리모사의 출력 향상을 위해 필요한 자원은 마력입니다.

- 하지만 현재 황성의 대기엔 마력이 거의 소실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몸으로 마력을 대신 공급하는 방식입니다.

- 이 이상은 델라리온 머스칼과 헤이카 박사님의 계약 내용입니다. 베르나데트는 이 사안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흐음.”


베르나데트의 목소리를 듣던 나는 가시밭이 된 주변 땅을 둘러보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박힌 금빛의 창이 보였다. 반대편에도 창이 있었는데, 창들은 서로 모양새가 조금 달랐다.


“저건?”


- 이클립스제 특수 장비. ‘황금 병장’ 입니다.

- ‘황금’ 의 성질을 띤 델라리온 머스칼 전용 무장으로 골든 에이지(Golden age)로 연계하는 핵심 병기입니다.

- 골든 에이지는 일종의 이중 성역입니다. 현재 필드에 전개된 미스틸테인이..


“못 알아먹겠다.”


- 이 땅 자체가 델라리온 머스칼 전용의 광역 도핑 필드입니다.

- 미스틸테인, 골든 에이지, 황금 병장. 초시공. 모두 델라리온 머스칼의 능력을 상한치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도핑 장치입니다.


“오호.”


버프같은 느낌인 모양이다. 다만 아베스타에서 들려오는 보고에 따르면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애초에 베르나데트는 이것들을 ‘머스칼 전용’ 이라고 말했다. 과연 내가 써먹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도 쓸 수 있어?”


- 가능합니다. 하지만 추천하지 않습니다.


“왜?”


- 이 기술은 모두 ‘델라리온 머스칼’ 을 기준으로 개발되었습니다.


“너도 머스칼 전용이잖아? 그런데 지금 나랑 대화 중이고. 그럼 머스칼 전용으로 만든 다른 것도 내가 쓸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 부작용이 예상됩니다.


더럽게 위험하단 뜻으로 들렸다.

그런데 지금 상황보다 더 위험한 최악이 있을까? 적어도 내가 보기엔 없었다.


“그래도 해보라고. 그 도핑이란 거 나한테 때려 박아 봐.”


- ..실행합니다. 사용자 전환 준비 중.


잠시 침묵하던 베르나데트가 말했다. 공업의 AI 기술이 사람을 걱정해 입을 다물 정도로 고성능이라는 사실이 놀랍긴 했다.


'어디 보자.'


손에는 아가레스를 썰어대던 머스칼의 검. 주변엔 얼마 남지 않은 머스칼 전용 버프들.

머리 위에 떠다니는 아가레스 무리 뒤에 숨어서 몸을 웅크리는 초대형 아가레스를 눈에 담았다.


‘머리.’


역시 직업병인지 난 대가리부터 찾고 있었다. 역시 마무리 일격은 대가리다.


물론, 저 지렁이는 굳이 ‘머리’ 라고 부를만한 구분이 없어 보이긴 한다. 그래도 내가 아는 한, 살아 움직이는 놈 중에 대가리가 없는 놈은 없다.

주둥이 달린 쪽이 대가리겠지.


문제는 저 더럽게 큰놈의 대가리를 어떻게 써느냐.

그리고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가느냐.


난 등에 있던 가방에서 참수도를 뽑았다. 어깨가 지그시 눌리는 감각이 익숙했다.

지난번에 조정이랍시고 참수도에 덕지덕지 뭔가를 달아놓은 뒤로는 이렇게 누르는 힘이 약해졌다.


그리고 이 상태로 할 짓 없을 때마다 메뉴얼을 보며 참수도를 갖고 놀던 내가 한 가지 깨달은 건, 이 칼은 머스칼의 힘을 응용한 것이며 머스칼의 힘은 대충 중력이랑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또 하나의 재미난 걸 찾아낸 게 있었는데, 참수도를 조금만 조절해서 들면 누르는 힘이 역류한다.


요컨대 누르는 힘이 되려 위로 띄워 올린다는 뜻이다.


다만 출력이 약해진 참수도는 고작해야 유리컵 하나를 몇 센티 정도 들어 올리는 게 전부였다. 지금까진 전투에 응용할 이유가 없었다.


‘일곱 개.’


참수도에 붙어 있는 거추장스러운 장치의 개수다. 난 그 중 하나의 조임쇠를 풀어 때어냈다. 어깨의 무게가 더해졌다.

두 개를 뜯어내자 무릎이 지그시 눌렸다. 세 개째에서 허리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엄청나게 떨궈놨구만.’


남은 네 개의 조임쇠를 전부 풀고 짧은 심호흡.

나머지를 전부 떼어냈다.


“끄억...! 으으으...!!!”


무릎이 지면에 처박히고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축 늘어진 어깨는 팔을 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식인 도시에서 알산나를 처음 잡았을 때, 몸이 짓눌리던 그 느낌이 되돌아왔다.

이 말도 안 되는 압력을 몸에 걸고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압력을 거꾸로 돌린다면, 아마 난 총알처럼 튀어 오를 것이다.


- 미스틸테인 사용자 전환 완료.

- 골든 에이지 사용자 전환 완료.

- 초시공 재전개. 출력 32%


“끄으.. 후..”


전신의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주륵 흐르는 코피와 눈앞에 일렁거리는 괴상한 것들은 아마 환각이다.

머릿속이 뜨거웠다. 뇌가 달궈진다는 걸 내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였다. 그때,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가 들려왔다.


“헉... 허어.. 씨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머스칼의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 라크리모사 출력 부족.


“굳이 날 희생할 필요는 없지..”


나 말고도 주변에 널렸는데.


“흐읍!”


머스칼의 검을 거꾸로 쥐어 널브러진 공업 대원의 가슴팍을 찔렀다.

어차피 가시에 찔려 이미 숨이 끊어진 대원이다. 머스칼은 이런 사람조차 제대로 생각하는 감성 넘치는 타입이지만, 난 아니다.


시체가 쪼그라들어 끝에 가선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다 터졌다. 피를 잔뜩 머금은 머스칼의 검이 진동했다. 덜덜 떠는 쇳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 출력 회복 중. 충전 효율 약 15%.


“빌어먹을 가성비.”


같은 짓을 계속 반복했다. 이 싸움터에 왔다는 것부터 미래를 향한 발판이 된다면 녀석들도 딱히 불만은 없겠지.

그래봤자 죽은 인간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들을 애도하는 건 늘 남아있는 인간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죽음 속에서 가치를 찾고 나아가는 법이다.


푹!

또 한 명.


푹!

다시 한 명.


푹!


“커헉!”

“아, 살아있..”


헬멧을 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부들부들 떨더니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남자는 곧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검에게 흡수됐다.


- 라크리모사 최대 출력입니다.


“얼마나.. 쓸 수 있어?”


- 한 번입니다.


이렇게 쑤셔대도 결국 한 번 휘두르면 끝이라니. 정말 가성비 최악이다.

그와중에 머리가 계속 뜨거웠다. 이러다 뇌가 바싹 타버릴 것 같았다. 난 비틀거리며 압력을 딛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 마운틴 클리너 냉각 완료. 화력 지원 대기.

- 패러데이 출력 소폭 회복. 화력 지원 대기.


베르나데트의 음성에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참수도의 칼자루를 비틀어 쥐자 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


순식간에 지면에서 튕겨 나온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에서 땅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압력에 무식한 속도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혜니의 코트가 아니었다면 얼어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점점 초대형 아가레스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최대한 놈의 주둥이가 있는 쪽으로 상승하곤 있지만, 놈을 지키듯 아가레스 무리가 더 빽빽하게 길을 막았다.


참수도를 뒤로 늘어뜨리고 오른손으로 머스칼의 검을 내세웠다.

머스칼은 날개로 날아다녔다. 반면에 난 비행이 아니라 단순히 떠오르는 것뿐이다. 공격이라도 받으면 피할 방법이 없었다.


머스칼의 접근을 막던 놈들의 공격은 크게 세 가지.

몸으로 부딪치는 아가레스 무리. 크고 작은 가시. 그리고 초대형 아가레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풍.


지금의 난 그런 것까지 파훼할 능력이 없다. 그저 하늘로 치솟는 칼잡이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저것들을 치우는 건 오로지 공업의 남은 전력에 맡겨야 했다.


“길 열어 - !”


- 마운틴 클리너 화력 지원.

- 초시공 경유. 3. 2. 1.


하늘이 물결치듯 일렁거리더니 시뻘건 불빛이 튀어나와 아가레스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전에 보았던 마운틴 클리너였다.


─ !!!!


세상을 뒤집을 기세의 폭발. 너덜너덜하게 타버린 걸레짝이 된 아가레스 무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 패러데이. 필드 오프닝.


뒤이어 하늘의 구름을 뚫고 아까 나타났던 거대한 쇳덩어리 비행체가 내려왔다.

동시에 베르나데트가 아닌 아베스타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쪽은 패러데이. 전력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산 팀장님.


“좋네.”


마운틴 클리너의 화력으로 너덜너덜해진 곳에 쇳덩어리가 온갖 무기를 쏟아부었다.

무식하게 큰 총알을 기관총처럼 갈기기도 했고, 미사일을 쏘기도 했고, 번쩍거리는 빛을 뿜어내 아가레스를 태우곤 했다.


날아드는 가시 파편이 날카로웠다. 코트의 팔 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등이나 머리 쪽을 스친 가시 파편에 피가 흘렀다.


- 20초 후, 모체가 라크리모사 사정권에 들어옵니다.


“...”


이미 몸은 한계였다. 이젠 머리가 뜨겁다는 걸 넘어서 차갑다고 느끼고 있었고, 반대로 몸이 엄청나게 뜨겁게 느껴졌다.

땀인지 피인지 모를 것을 한껏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코에서 질질 흐르는 피가 멈출 기미가 없었다.


- 15초 후, 사정권에 들어옵니다.

- 모체 내부의 에너지 급상승.

- 마력 폭풍 관측. 주의 요망.


머스칼을 날려버렸던 폭풍인 모양인데, 피할 여유 따윈 없었다.


참수도를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역시 휘두를 때는 출력이 강해지는지 치솟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


- 패러데이. 다운.


거대한 가시가 하늘에서 화력을 퍼붓던 쇳덩어리에 박혔다. 이젠 공업에 남은 화력이 정말로 나뿐이다.


- 폭풍 도달. 3. 2. 1.

- 충격 대비.


“으극..!”


참수도의 힘으로 위로 솟아오르는 힘과 위에서 날 밀어내려는 힘이 전속력으로 충돌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세웠던 머스칼의 검이 크게 휘청거렸다. 팔뚝이 괴상하게 꺾여있었다.


“오른팔 보조!”


- 미스틸테인 적용.

- 골든 에이지 적용.


부러진 팔이 강제로 맞춰지며 머스칼의 검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고통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어깨도 아까부터 뚜둑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하지만 코앞이다. 코앞에 놈의 이빨이 보였다. 가시가 아니라 이빨.

이빨이란 건 주둥이에 달려있는 법이고, 주둥이가 달린 곳은 대가리란 뜻이다.


“머리..!”


대가리만 떨구면..


“머리! 머리!”


내가 이긴다.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다리는 진작에 감각이 없어졌다. 억지로 고정한 부러진 오른팔을 움직여 머스칼의 검을 당겨 잡았다.


- 7초 후, 사정권에 들어옵니다.

- 초시공 출력 60%

- 이쪽은 패러데이! 초시공 구축! ‘모체’ 아가레스 고정합니다!

- 예상 고정 시간 2초!


충분하다.


- 5초 후 사정권에 들어옵니다.

- ..3. 2. 1.


한껏 당겨 쥔 머스칼의 검을 휘두른다.


도시도 가르고, 산도 가르고, 대균열로 협곡을 만들던 괴물 같은 검.

검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몸은 계속 상승했다.


{ !!!!!! }


초대형 아가레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어찌나 큰지 귀가 먹먹했다.

커다란 살덩이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가르던 내 몸이 마침내 그 너머 하늘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자, 엄청난 피를 뿜어내는 초대형 아가레스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 잘렸어!’


하지만 놈의 대가리가 아직 붙어있다. 대가리가 잘렸다면 머리가 떨어지며 기울어졌겠지만, 놈의 위치는 여전히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완전히 끊기엔 역시 너무 크다. 말도 안 되는 몸집이다. 한 번 휘둘러서 자를만한 놈이 아니다.


- 라크리모사 출력 부족.


하늘 위에 사람의 시체 따윈 없다. 여기서 쓸 수 있는 자원은 하나뿐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슬하던 오른쪽 어깨가 조금 전 칼을 휘두르며 완전히 나갔다. 부러진 팔을 고정해 베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오른팔!!”


오른팔이 쪼그라들다 끊어져 터졌다. 놓친 머스칼의 검을 이빨로 물었다.


- 출력 회복 중. 충전 효율.. 연산 오류.

- 라크리모사 출력 기준치 초과.

- 오버 히트 위험.


눈 앞이 새빨갛다. 뇌가 얼어붙는 것 같기도 하고, 바싹 타버린 것 같기도 했다.

목구멍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피를 막을 틈도 없이 난 참수도를 다시 비틀었다. 압력을 거꾸로 돌려 상승하던 걸, 다시 원래대로 돌린 것이다.


압력은 본래의 역할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던 몸이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무시무시한 가속도를 타고 초대형 아가레스의 등 위에 충돌했다. 물컹할 것처럼 생겼으면서 가죽은 딱딱했다.

마치 돌바닥에 곤두박질친 꼴이 되었다. 양다리가 부러졌다.


“다리.. 잡아라.. 몸도 세워..”


- 쇼크 위험성이 있..


“잡아..!”


- 실행합니다.


참수도의 압력과 비슷한 것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부러진 다리를 억지로 맞춰 세웠다.

비틀거리던 몸도 세우고, 어딘가 엇나간 허리가 뼛소리를 내며 섰다.


참수도를 내던졌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머스칼의 검을 남은 왼손으로 쥐었다.


“안 잘리면..!”


머스칼의 검으로 놈의 몸뚱이를 내리찍었다.


“잘릴 때까지 - !”


딱딱한 가죽이 쩍 벌어지며 내부가 드러났다. 몸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양옆으로 초대형 아가레스의 단면이 보였다.

이놈은 애초에 뼈 같은 게 없다. 엄청난 내구성의 가죽과 엄청난 두께의 살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베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럼 잘릴 때까지 썰어야지.


머스칼의 검을 마구 휘두르며 놈의 살점을 쩍쩍 갈라댔다. 그때마다 하늘이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반복했다.


아마 초대형 아가레스가 몸부림치고 있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놈은 날 잡을 수단을 잃었다.

이미 난 녀석의 몸속으로 들어왔으니까.


다리가 다시 엇나가 몸이 휘청거렸지만 금세 자세를 회복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베르나데트가 내 몸을 보조하고 있었다.


또 나는 꼴사나운 얼굴로 실실거리고 있겠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거대 괴수의 목을 썰어대는 놈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다.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여기서 이렇게까지 할 생각도 안 했을 거다.

아니, 그 이전에 헤이카에게 붙어있지도 않았겠지.


가르고, 가르고, 가르던 살덩어리는 정말 이 끝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추락하고 어딘가 부러지고 엇나가는 것도 이젠 횟수를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몸이 가루가 되는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움직이고 있다. 왼팔마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뿌드득’ 하며 이빨이 깨졌다.


천년, 만년 같은 시간 동안 검을 휘둘렀고, 마침내 냄새나는 살덩어리 너머 빛이 보였다.

이젠 익숙하다 못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머스칼의 검이 위로 향했다.


“머리─!!!!”



#2


푸른 천중(天中)의 아래.

빛을 머금은 백은의 검이 은빛 초승달을 그렸다.


검기는 힘을 잃지 않고 쭉 나아가 마지막 남은 살점을 도려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가르고, 세상을 가를 기세로 초승달은 끊임없이 전진했다.


그런 난폭한 검기가 끝날 때쯤, 두 쪽으로 갈라진 하늘이 기울어졌다.


“...”


그건 착각이다. 갈라진 건 아가레스였지, 하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머스칼은 하늘이 갈라졌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는 게 전부인 상태지만, 그의 시야는 활짝 열려있었다. 그는 시시각각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그 모든 걸 보았다.


그리하여 델라리온 머스칼은 이 전설적인 일화의 탄생을 입증할 증인이 되었다.


시라비아의 처형인에게 모체의 머리가 잘린 것이다.


‘웃기는군.’


세상은 헤이카 미켈런이 실패를 고려하지 않는 천재라고 말하지만, 머스칼의 인식에서 그건 다소 틀린 말이었다.


그녀의 계산엔 머스칼의 패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 들어설 경우 헤이카에겐 더 큰 것을 희생할 ‘최후의 수’ 가 있었다.


그들은 머스칼 본인의 목숨. 그것도 모자라면 헤이카의 목숨까지 사용해 저 모체를 사냥할 셈이었다.

‘적어도 세상이 멸망하진 않을 테니까.’ 머스칼다운 일그러진 평화주의자의 발상이자 헤이카 미켈런다운 정신 나간 계획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 헤이카의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는 변수가 되어 싸움에 끼어들었다.


마지막 수단을 고르기 전에, 머스칼은 그에게 ‘만약’ 의 가능성을 맡겨보기로 했다.

행여나 그가 실패하더라도 머스칼이 최후의 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진짜 해냈어.’


그러나 그 남자는 정말로 모체를 사냥했다. 압도적인 크기의 괴물이 머리가 잘려 추락하고 있었다.


주변에 잔뜩 모여들었던 아가레스 무리도 일제히 추락했다.

얼핏 보면 세상의 종말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는 광경이지만 이건 하늘 탈환에 성공한 인류의 승리였다.


- 카타스트로피 페이즈 클리어.

- 스카이라인 프로토콜 종료합니다.

- 산. 필드 아웃.


베르나데트의 목소리에 머스칼의 시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살점 사이를 훑었다.


빙글빙글 회전하던 참수도가 머스칼의 머리 위에 떨어져 ‘퍽’ 하며 꽂혔다.

조금만 낮았으면 머리에 아가레스의 가시 외에도 참수도가 머리에 박혔을 거란 생각에 머스칼이 헛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머스칼의 검을 쥔 산이 떨어졌다. 머스칼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쩍쩍거리며 끈적하게 늘어지는 핏물과 뒤틀린 창백한 손이 산을 겨눴다. 곧, 보이지 않는 힘이 퍼져 나가며 추락하던 산의 몸이 붕 떠올랐다.


산은 둥실둥실 뜬 채로 천천히 지상에 발을 디뎠다. 머스칼은 물끄러미 그를 살폈다.


너덜너덜해진 코트. 백사병이 완전히 퍼져 전부 새하얗게 변한 머리칼이나 백색의 눈동자.

오른팔은 어디 갔는지 어깨와 함께 통째로 사라져있고 몸의 뼈가 전부 부러지고 엇나가 고장 난 목각인형 같은 괴상한 자세였다.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산은 분명히 서 있었다. 찢어질 듯 섬뜩하게 웃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하얀 눈동자가 머스칼과 시선을 마주쳤다.


“사.. 산.... 으..”


가시가 하필이면 입과 목을 관통하는 바람에 머스칼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어눌한 목소리에 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산은 등을 돌렸다. 그리곤 어디론가 걸어갔다. 영화 속 좀비처럼 비적비적 걸어가는 그의 등은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 죽어가는 산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실상은 부러진 양다리를 붙잡던 보조 기술이 사라지자 몸이 무너져내린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산은 기어갔다. 그리고 머스칼의 검을 쓰레기처럼 휙 내다 버린 산이 남은 왼팔로 쓰러진 헤이카를 안았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던 머스칼이 탄식했다. 만약, 얼굴이 있었다면 머스칼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산. 그건 저주다.’


머스칼은 속으로 말했다.


‘헤이카가 네게 건 저주야.’


그의 마음속 목소리가 산에게 들릴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산에게 닿길 바라며 말했다.


‘넌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어.’

‘과거에도, 지금도.’


한참이나 헤이카를 안고 내려다보던 산의 몸이 기울어졌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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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8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2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7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4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5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9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2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9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8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1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6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9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4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1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9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4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3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2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0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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