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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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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33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2.10.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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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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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9쪽

속는 자, 속이는 자

DUMMY

#1


시라비아 베르몬드.


그곳에서도 반으로 나뉜 구 루마니아 지역 북부에 자리 잡은 소도시 ‘핀 오크’ 의 거리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6월에 내리는 눈이라고 딱히 각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라비아의 변덕스러운 이상 기후는 이 땅에 몸 붙인 주민이라면 이젠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지붕이라도 있는 이들은 창문을 굳게 닫았고, 가난한 거리의 이웃들은 눈과 추위를 피해 더욱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덕분에 거리는 평소보다 더 삭막해졌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추위가 지나갈 때까지 몸을 웅크린 자들의 숨소리가 전부였다.


그런 거리를 매끄럽게 나아가는 검은 차량이 한 대.


유리창조차 바깥에선 그 내부를 확인할 수 없게 코팅이 되어 있는 차량은 시라비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마피아들의 주된 이동 수단이다.

그러나 멈춘 차량의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누구라도 이 시라비아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춥구만.”


뿌연 입김을 흘리며 중얼거린 오코넬이 익숙하게 트렁크를 열었다. 그는 안에 있는 물건을 슥 훑어보곤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가 챙기는 물건의 대부분은 작은 나이프나 권총에 쓸 탄약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트렁크에서 끌려 나온 건 옛 처형인들이 쓰던 섬뜩한 처형검이었다.


짐을 전부 챙긴 오코넬은 트렁크를 닫고 돌아섰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텅 빈 거리에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처형인 오코넬이 싸늘하게 내리깔린 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의 메마른 구둣발 소리만이 거리를 울렸다.



...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가로지르던 오코넬이 멈춘 곳은 한 술집 앞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이 술집은 위로도 3층, 아래로는 커다란 지하 저장고까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이곳이 플뤼테의 아지트였기 때문이다.


시라비아 마피아의 최고 간부 중 하나가 이런 술집을 아지트로 삼았다는 건 농담같이 들릴 만도 하다.

하지만 플뤼테는 저택이나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기보단 내킬 때마다 술을 가져다 마실 수 있는 술집을 아지트로 삼길 원했다. 그녀는 애주가였다.


덕분에 오코넬이 플뤼테의 아지트를 찾아오는 건 어렵진 않았다. 술집이란 언제나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달려 있던 작은 종이 딸랑거리며 울었다.


“왔어요? 늦었네.”

“...허.. 녀석.”


가게 안쪽을 둘러보던 오코넬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바 안쪽에서 어설프게 유리잔을 닦으며 그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산이었다.


그를 제외하고 안에 있는 손님이라곤 퀭한 눈으로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는 시카가 전부였다. 따지고 보면 손님으로 볼 만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산과 시카.

두 사람을 노려보며 오코넬은 방아쇠울에 넣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산 이 녀석..’


무작정 칼질할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이 술집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산의 동료가 그 악명 높은 폭탄마라는 것은 오코넬이 도저히 무시하지 못할 요소였다.


지난번 연방에서 오코넬은 시카의 폭탄이 그 커다란 루아 호텔 빌딩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걸 직접 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산이 속해 있는 노페이스 팀을 개인적으로 조사한 것도 있었기에 오코넬은 ‘폭탄마 시카’ 에 대한 위험성을 꽤나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솜씨가 좋은 처형인이라도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고성능 폭탄은 위험하다. 게다가 시카는 초재생을 가진 감응자였다. 처형인 오코넬과는 절대적으로 상성이 좋지 않은 상대였다.


오코넬의 눈이 술집 내부를 빠르게 훑는 걸 본 산이 말했다.


“뭘로 드릴까요?”

“일하는 중엔 안 마신다.”

“아~ 일하는 중이었구나.”


어울리지 않게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쓴 산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오코넬의 시선은 여전히 가게 내부를 훑으며 혹시 모를 폭탄을 경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없군. 그래도..’


시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허술하게 폭탄을 깔 정도로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오코넬은 여전히 폭탄이 숨어 있을 법한 장소를 짚어가며 산에게 물었다.


“산아. 대답은 준비 됐냐?”

“그거 말인데요. 음..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흠?”


산은 닦던 유리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플뤼테가 튀었어요. 저까지 통수 맞았습니다.”

“..내가 바보로 보이냐?”


오코넬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산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요. 플뤼테 숨겨놓고 이딴 소리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 근데 진짠데 어쩝니까.”

“그럼 넌 여기서 뭐 하는 건데?”

“뭐하긴요. 플뤼테가 버려두고 갔으니 여기 있는 술 다 공짜잖아요? 갑자기 할 일도 없어지고 기분도 꿀꿀해서 여자랑 술이나 마시러 왔죠.”


산의 선글라스가 시카를 가리켰다. 멍하니 있던 시카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저씨. 눈독 들이지 마시죠. 제가 찍어놓은 사람이니까.”

“저번엔 직장 동료라면서? 그리고 넌..”

“관계는 언제든 바뀌기 마련이죠.”


산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인상을 찌푸린 오코넬은 그대로 산에게 향하던 관심을 뚝 끊어버리곤 빠른 걸음으로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구두가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삐걱거리는 소음이 술집 내부에 울렸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던 산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휴... 진짜 혼자 왔네..?”


마침내 오코넬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는 선글라스를 슬쩍 올렸다.


“확실히 표정 숨기기 좋긴하네. 왜 양복쟁이 사기꾼들이 이런 거 쓰는 지 알겠어요.”

“...”


뚱한 표정으로 산을 바라보던 시카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산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저기요. 시카. 일단 오코넬부터 낚고 봐야죠. 연기 좀 잘 해봐요. 누가 봐도 좋은 관계론 안 보이잖습니까. 스마일 좀 해봐요.”

“...”

“쩝. 싫은 티 너무 내는 거 아냐? 저 상처받습니다?”

“..별로 싫진 않아요.”


의외의 대답에 산은 입을 ‘헤’ 하고 벌린 채 시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얼빠진 얼굴을 본 시카가 다시 말했다.


“좋지도 않아요.”

“쳇.”


다시 가까워지는 오코넬의 구두 소리에 산은 재빨리 선글라스를 바로 썼다.

그리고 서둘러 술잔에 술을 채워 시카의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자, 건배!”

“...”


잔이 부딪치고 산이 술을 홀짝거렸다. 그러면서도 산은 선글라스 너머로 1층에 내려온 오코넬을 주시했다.


“뭐 찾았어요?”

“아니. 쥐새끼 둘 빼곤 없어.”

“우린 쥐 아닌데?”


오코넬이 콧방귀를 뀌었다.


“산아. 플뤼테랑 떨거지들 어디다 숨겼냐?”

“글쎄 내가 숨긴 거 아니라니까요.”

“...”

“절 회 뜨기라도 하게요? 그런다고 모르는 걸 아는 척할 순 없죠. 그리고 나 건드리면 에콰가 화낼 텐데?”


에콰라는 이름에 하나 남은 눈으로 오코넬의 노기가 뿜어져 나왔다. 산도 입은 웃고 있었지만, 선글라스 너머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공기가 끈적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네 어머니를 이딴 일에 팔아먹을 생각은 마라.”

“팔아먹을 생각도 없고, 애초에 에콰는... 하, 말을 맙시다.”

“어차피 여기서 플뤼테를 잡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떨거지들 족치면서 알아내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군.”

“그러게 애들 좀 데려오지. 답지 않게 왜 혼자 왔대요?”

“너랑 싸울 줄 알았거든.”


산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한테 처형인들을 더 잃을 순 없어. 처형인은 귀중한 인력이라고.”

“내가 무슨 연쇄 처형인 살인마도 아니고.. 그리고 원래 그런 타입 아니었잖아요? 저는 ‘약한 놈은 죽는다.’ 라고 배웠는데?”

“넌 규격 외야. 지금의 너라면 내가 기른 애들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도 여유로울 거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한 말에 산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술을 들이켜기로 했다. 물론, 술인 척하는 레모네이드였기에 산이 취할 일은 없었다.

새콤달달한 맛을 입안에서 굴리며 산이 잔을 달그락 내렸다.


“그럼 플뤼테는 어떻게 찾으려고요? 이제라도 애들 데려오시게?”

“정말 네가 숨긴 게 아니라면 여기서 너랑 다투는 건 의미가 없겠지.”

“그럼요. 이 술집에서 싸워선 안 될 이유도 있고. 저도 터지는 건 별로라서.”


산은 시카를 슬쩍 보며 말했다. 오코넬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쪽도 손해가 크거든요? 스토커한테 돈 냄새 나는 사업 제안받고 플뤼테를 지키려던 건데, 플뤼테가 나 몰라라 하고 튀어버리는 바람에..”

“플뤼테는 그런 여자가 아닌 걸로 아는데.”


오코넬이 말을 끊었다. 산도 그녀를 설득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오코넬의 반응은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플뤼테가 배신을 당했어요. 자기 부하들한테.”

“배신?”

“지하실 아직 안 봤죠? 거기 가봐요.”


오코넬은 미심쩍은 눈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글라스에 가려진 표정까지 꿰뚫어볼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코넬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지하 저장고는 내려갈수록 익숙한 냄새가 났다.

당연히 술 냄새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 섞인 피비린내를 오코넬이 착각할 리 없었다.


“...”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 ‘딸깍’ 하며 지하 저장고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넓은 저장고의 중앙.

차가운 돌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진 시신들이 있었다.


총을 얼마나 갈겨댔는지, 걸레짝이 될 정도로 너덜너덜한 시신은 마구 뒤섞여 몇 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오코넬은 그렇게 널브러진 시신 중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보고 몸을 낮춰 살폈다.


‘볼드..? 플뤼테의 오른팔이었을 텐데.’


처형인 오코넬과도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플뤼테의 간부급 조직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시신들의 난잡한 총상은 딱 봐도 기관단총이었다. 플뤼테가 즐겨 쓰는 무기다.


그렇게 시신을 살피는 오코넬의 등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따라왔다.


“플뤼테는 자기 부하들을 가족처럼 믿고 아꼈죠. 그런 놈들이 뒤통수를 친 겁니다.”

“..그런 일로 상심해서 플뤼테가 다 버리고 도망쳤다고?”


오코넬의 어조에는 날이 서 있었다. 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금 플뤼테는 예전의 플뤼테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오코넬. 플뤼테의 분신을 몇 번 심문했죠?”

“열 두 번.”

“평범한 사람은 한 번만 당해도 똥오줌 다 지리는 그 끔찍한 고문을 플뤼테는 죽을 때까지 열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정신이 멀쩡하겠어요? 게다가 플뤼테는 감응자잖아요? 해까닥 돌아버리면 그대로 가는 게 감응잔데. 이상할 것도 없죠.”

“어째 내가 그렇게 믿어줬으면 하는 말투인데.”


산은 피식하고 웃으며 오코넬의 옆으로 다가왔다.


“예. 믿어줬으면 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저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콥스 바탈리온이 갈겨대는 총알도 비싸고, 수송기 움직일 때마다 그것도 다 돈이에요.”

“원하는 게 뭐냐?”

“절 고용하시죠?”


오코넬의 하나뿐인 눈이 희번득하며 빛을 냈다. 반면에 산은 여전히 선글라스 너머로 표정을 감춘 채 딱딱한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다.


“플뤼테가 도망친 시점에서 이미 스토커의 의뢰는 무산됐고, 저도 손해를 메꿔야겠으니 돈이라도 만져야겠습니다. 돈 주면 플뤼테 찾아 드릴게요.”

“굳이 네 도움이 없어도..”

“아베스타.”


산의 중얼거림에 오코넬은 숨을 들이켰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갑자기 홀로그램처럼 여러 영상이 떠올랐다. 산의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니라, 오코넬의 하나 남은 눈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이었다.


“..이건 뭐냐? 시라비아?”

“공업이 기술력 하나는 끝내주잖아요. 전 지금 실시간으로 시라비아 전역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도망친 플뤼테를 찾는 것도 가능할걸요?”

“그럼 진작에 찾으면 됐잖아? 왜 이제 와서..”

“스토커가 지켜달라 했던 건 ‘최고 간부 플뤼테' 지 ‘도망자 플뤼테’ 가 아니거든요. 말했잖아요. 도망친 시점에서 스토커의 의뢰는 끝장난 거라고. 찾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거 쓰는 것도 돈이거든요?”


오코넬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산이 공유한 아베스타의 영상들을 살폈다.

전부 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미다스, 콜레타, 베르몬드, 라가토니아. 정말로 시라비아의 전역을 관측한 실시간 영상이었다.


“그러니 돈 냄새가 나는 다른 쪽에 붙기로 했습니다. 어때요? 처형인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반대로 처형인이 이런 편의를 돈 주고 이용하는 건 딱히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요?”

“...”

“싸게싸게 해드릴게요. 아는 사이니까. 옛정도 있고. 수송기는 서비스. 죽기 전에 하늘은 날아봅시다.”


오코넬이 김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망할. 아주 돈벌레가 다 됐구나.”

“누구 덕분이죠.”


산의 영업용 미소가 활짝 번졌다.



#2


오코넬에겐 아베스타를 이용해 플뤼테의 위치가 라가토니아의 한 항구 도시에 있다고 알렸다.


말로만 해선 믿지 않았겠지만, 아베스타의 영상으로 직접 보여줬더니 오코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플뤼테를 뒤쫓았다.

그 등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처형인의 살기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 선글라스가 아니었다면 구겨진 내 표정을 그대로 오코넬에게 들켰을 것이다.


그렇게 오코넬을 태운 공업의 수송기가 라가토니아로 향하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난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다. 긴장이 풀리자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휴. 쫄려 죽는 줄 알았네.”

“무서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코넬이잖아요. 자존심 상하지만.. 난 아직 저 아저씨 못 이깁니다. 괜히 시라비아 최고의 처형인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절 방패로 썼었나 보네요.”


뭔 소린가 했더니 설마 연방에서 내가 자기를 방패로 썼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설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끄집어내다니. 평소엔 항상 퀭한 얼굴로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는데, 이 여자는 생각보다 뒤끝이 길었다.

난 서둘러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이 선글라스 어때요? 잘 어울리죠?”

“이상해요.”

“예..”


나름 멋있다 생각하던 선글라스였건만, 시카의 냉정한 평가에 난 선글라스를 벗어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쨌든 당장 어려운 부분은 넘겼으니 이후는 사무엘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난 테이블에 놓아둔 레모네이드를 마저 들이켜곤 곧장 지하실 계단으로 향했다.


불 꺼진 지하실 스위치를 누르자 다시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는 처참한 시신들로부터 고약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아무리 봐도 진짜 같네.’


사실 이 걸레짝이 된 시신은 모두 감응자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가짜다.


이번 일로 왜 각국에서 유능한 에이전트 능력자를 손에 넣으려고 그렇게 안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가짜 시체는 사무엘이 데려온 레베스타 에이전트인 ‘피노’ 라는 감응자의 능력이다.

그의 능력은 본인을 제외한 물건과 사람을 복제하는 건데, 플뤼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다.


플뤼테는 자기 자신을 늘려 싸움에 응용하는 타입. 반면에 그 피노라는 에이전트는 도구를 복제하고 또 복제해 응용하는 타입이라고 한다.


어째서 본인은 복제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본인만 아니라면 사람도 충분히 복제가 가능하고 플뤼테와 달리 복제품이 망가지거나 죽어도 본인이 없애지 않는 한 복제품은 스스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즉, 사람을 복제해 총을 쏴 죽여도 그 시신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얘기다.


‘플뤼테의 부하들을 복제하고, 그걸 플뤼테의 무기로 쏴서 전원 사살. 그 시신을 증거로 오코넬을 낚는다.’


처음엔 이게 과연 먹힐까 싶었다. 아무리 감쪽같은 능력으로 위장한다 해도 오코넬의 귀신 같은 감을 속이는 건 나로서도 도박이었다.

하지만 사무엘이 ‘무조건 넘어온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기에 일단은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결과는 정말 사무엘의 말대로 됐다. 오코넬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팀장님.”


언제 왔는지 등 뒤에서 시카가 날 부르고 있었다.


“왜요? 술 더 가져다 마셔도 돼요. 일단 시카 역할은 끝났으니까.”

“..아가레스가 나타났어요.”


시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1층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오며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평소처럼 칙칙했다. 6월에 눈과 한겨울 추위라는 웃긴 날씨를 자랑하는 시라비아의 하늘이다.

그리고 저 멀리 꺼림칙한 녀석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가레스..’


인류에게서 하늘을 빼앗은 미지의 괴수.

헤이카와 전쟁이 한창인 공업의 적.


‘진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건가..?’


지금까진 모두 사무엘의 말대로였다. 이 정도면 의심은 확신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코넬은 혼자서 왔다. 그리고 사무엘의 작전대로 오코넬이 정말 속아 넘어갔다. 지금은 아가레스 무리까지 나타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정오가 가까웠다. 모든 게 정확했다.


그렇담 이다음은?


“알려줘야지..”


난 아베스타의 단말기를 조작해 서둘러 스토커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아가레스 충돌에 대비해 라가토니아 전역에 피난령을 내리라는 메시지였다.


정말로 아가레스가 라가토니아 앞바다에 떨어지면 그 여파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솔직히 시라비아 놈들이 어떻게 되든 내 알빠는 아니지만, 스토커에게 점수를 따놔서 나쁠 건 없었다.


‘저런 것들이랑 대체 어떻게 싸운다는 거야?’


아가레스 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의문이 솟았다.

아무리 이클립스의 항공 전력이 대단하고 머스칼도 엄청난 괴물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서 보이는 무리만 해도 서른 마리는 되어 보였다.


저런 무리가 전 세계에 퍼져있다. 그야말로 징글징글한 숫자. 거기다 말도 안 되는 크기와 위험성.


고작 저 무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데, 헤이카가 싸우고 있는 아시리아 산의 정상엔 얼마나 많은 아가레스가 몰려들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시리아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가토니아 앞바다에 아가레스가 충돌하는 것처럼 세계 이곳저곳에서 성난 아가레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의 희생이 나오겠지. 그로 인해 얻는 건 인류가 잃어버린 하늘일 테고.


그래도 내가 아는 헤이카라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나오든 하늘을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


두 가치를 두고 저울질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난 술집으로 걸음을 되돌렸다.


이미 피가 묻은 손이다.

이제와서 헤이카의 검이 되기로 한 걸 후회할 순 없고, 죄책감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시라비아의 싸늘한 바람을 타고 아가레스의 낮은 포효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주말 편히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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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6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3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5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5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0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2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8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3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2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1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9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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