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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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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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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9쪽

채린

DUMMY

#1


우산이 쫙 펴지는 소리에 멍하니 있던 산은 멈춰 있던 숨을 들이켰다.


검은 우산을 펼친 젊은 남자는 서둘러 채린의 곁에 붙어 그녀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의 배려에 채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하지만 다시 산을 돌아본 그녀의 얼굴엔 웃음기가 메말라 있었다.


검고 긴 머리를 반쯤 올려 고정한 비녀. 그 아래로 늘어진 붉은 비단 끈이 바람에 조금씩 휘날린다.

같은 색과 무늬가 들어간 붉은 비단옷이 매끈하게 흘러내려 그녀의 발목까지 내려왔다. 그 위로 걸친 검은 저고리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짙은 보랏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층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 수려한 모습에 산은 물론이며 윈터와 조엘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짙은 눈동자가 산에게서 옮겨갈 때쯤, 자리만이 외쳤다.


“오오! 죽음이여!”


멍하니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산은 자리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자리만은 이미 사막 위에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아 깍지 끼고 있었다. 마치 신을 향해 기도하는 독실한 신자처럼 보였다.

콥스 바탈리온의 다른 대원들도 모두 똑같았다. 산은 슬슬 이 상황에서 자신이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자리만. 뭐하는 거야?”

“죽음이다! 죽음이 왔어! 형제여! 새로운 죽음인가? 낡은 죽음인가? 알 수 없지만.. 이 느낌은 틀림없다. 아아..!”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이는 자리만에게서 산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그런 자리만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고정한 채린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산.”

“...”


산은 대답 대신 신경을 곤두세웠다. 늘어뜨렸던 카르마 나이프를 쥔 손에도 힘을 줬다.

그것과 동시에 채린의 옆에 붙어 우산을 들고 있던 남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산에게 경고를 보냈다. 남자는 어느새 산과 비슷한 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아직 정신은 남아있나요?”

“제정신이냐고 묻는 겁니까?”

“네. 맞아요.”

“대답할 이유가 없는 것 같네요. 채린 사장님.”


채린.

돈만 주면 뭐든 해주는 흥신소 겸 심부름센터인 ‘아담’ 이라는 작은 회사의 사장.

인원수가 적은 것치고는 일 처리만큼은 확실한 덕분에 적어도 이 나라의 뒷세계에서 아담은 다들 알아주는 업체였다.


그 명성은 연방 일부에도 퍼져있는 모양이라, 연방에서 코렌으로 밀입국을 시도한 불법 비등록 감응자들도 아담을 가장 먼저 찾곤 한다.


산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시라비아에서 도망치고, 온갖 나라를 떠돌며 더러운 생활을 하던 그가 코렌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아담이 심상치 않은 조직이란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자질구레한 일만 도맡아 하는 돈벌레에 불과했다. 고작 그런 조직의 사장이 이 상황에 끼어들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산은 그녀가 이 싸움을 멈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할 셈인가요?”

“후환이 될 놈들은 남겨두지 않는 게 좋거든요. 제가 여태껏 살아남은 비결입니다. 비켜주시죠.”


산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쥐고 있던 카르마 나이프를 떨어뜨렸고,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뭐야?’


떨리는 호흡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숨이 멎고 살이 썩어들어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산은 자신의 살점이 썩어가는 악취를 맡았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에게서 멀어졌고 어둡고 아무것도 아닌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깊고, 깊은 칠흑 같은 구렁텅이. 누구도 헤어나올 수 없는 끝의 입구. 그 속에서 산은 어둠 속 싸늘한 눈빛을 마주했으며 이것이 죽음이라는 걸 깨달은 뒤엔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산이 느낀 착각이었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살이 썩어들어가지도, 새까만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있지도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산의 시야엔 다시 젖은 사막의 모래와 쏟아지는 빗줄기가 들어왔다. 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모래 바닥을 짚었다.


“방금 느낀 건 죽음이에요. 산.”


채린의 목소리에 산은 흠칫했다.

생생한 죽음의 체험. 무서울 정도의 차가운 숨결이 산의 몸을 휘감았다. 산은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거리며 부딪칠 정도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당신이 저들에게 내려준 것과 똑같은 죽음이죠.”


고개를 든 산은 채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하늘 위에 있는 신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무의식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소용돌이쳤다.

산은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을 자기도 모르게 ‘죽음’ 이라 이해하고 있었다.


“돌아왔나요?”

“..예?”

“이젠 웃고 있지 않네요.”


산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꺼림칙한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극심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마치 뇌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몸이 기울어지는 걸 깨닫기도 전에 산은 모래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2


산이 눈을 뜬 곳은 낡고 녹슨 해안 창고였다.

차갑게 불어오는 밤바다의 바람과 파도 소리, 비리고 짠 냄새가 났다.


근처를 둘러본 산은 이곳이 익숙한 창고임을 깨달았다. 네키타 항구의 폐창고였다.

바깥은 어둑어둑했지만, 저편으론 해가 뜨고 있는지 불그스름한 빛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산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


산은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를 베개로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새근거리는 은영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산은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군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군화의 주인은 아까 전, 채린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던 젊은 남자였다. 산은 그를 알고 있었다.


“건우. 오랜만이네.”

“그래.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몰랐는데. 산.”


그는 아담의 직원이자 가끔 들어오는 ‘칼 쓰는 일’ 을 전문으로 하는 아담의 유일한 싸움꾼이었다.

그리고 산이 코렌에 정착할 때, 그와 함께 붙어 다니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산은 가슴팍에 있는 은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너 뒤질까 봐.”

“내가? 왜?”

“내가 죽이려 했거든.”


뚱한 표정으로 말하며 창고 맨바닥에 주저앉는 건우였다. 산은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히죽거렸다.


“농담?”

“아니. 진짜로.”

“..사장님이 시켰냐?”

“내가 주장했지. 너 모가지에 현상금 걸린 건 알지? 게다가 지금 너 수배 떨어졌어. 괜히 우리가 도운 거 걸리면 아담도 위험하거든.”

“그래서 아예 싹을 도려내려고 했다?”


건우가 끄덕였다. 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에게 실망하거나 하진 않았다.

입장을 바꿔본다면 아마 산도 비슷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골이라곤 해도 고객과 동료를 저울질한다면 동료를 우선시하는 게 당연했다.


“그걸 은영이가 막아준 건가.”

“울고불고 막았지. 얼마 전에도 그렇고.. 이 녀석이 너 되게 신경 썼다. 아담은 너 같은 난봉꾼 뒤처리 하려고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흐음. 맛있는 거라도 한 번 사야겠네.”


산은 은영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침까지 질질 흘리며 뭔가를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산이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크음..”

“펠리컨이 그러던데, 너 어깨 작살나기 직전이란다. 오른팔 그만 써.”

“펠리컨은 또 뭐야?”

“그 머리 벗겨진 노땅 의사. 펠리컨 선생이라 불려.”


산은 건우가 말하는 의사 이야기에 은영이 처음 데리고 왔던 그 늙은 의사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맡겼던 혜니에 대해서도 떠올린 산이었다. 그는 재빨리 물었다.


“내가 맡겼던 사람은?”

“저쪽.”


건우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엔 간이침대에 반듯이 누워 잠들어 있는 혜니가 있었다. 창백했던 얼굴도 이젠 불그스름하게 핏기가 돌았다. 산은 안도했다.


“다행이다..”

“애인이냐? 저 여자 하나 지키려고 정부군이랑 에이전트 죄다 썰어댄 거야?”


애인이냐는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힌 산이 고개를 저었다.


“애인은 아니고 직장 동료..”

“애인도 아닌데 그 짓거릴 했어? 너도 단단히 정신이 나갔구만.”

“음.. 그럴지도.”


산의 대답에 건우는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산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순간 화가 나더라고. 욱했어. 자꾸 엿 같은 일만 생기다 보니까.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저질렀지.”

“그래서 군인들을 그 꼬라지로 만들었냐. 에이전트 본부에 폭탄 테러한 것도 네가 지시한 거야?”

“폭탄 테러? 음.. 아, 그건 아마 자리만이.. 아니지. 결국 내가 시킨 셈이네.”


자리만에게 시카와 야차의 일도 맡겼던 산이었다.

설마 자리만이 에이전트 본부를 공격할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지만, 자리만의 전술을 생각한다면 에이전트 본부를 동시에 공략했던 건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덕분에 추가적인 에이전트 투입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 에이전트들은 어떻게 됐어?”

“그건.. 아니다. 사장님한테 가서 직접 들어. 눈 뜨면 보내달라고 했으니까.”


건우가 창고 바깥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간 산의 시선은 부둣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채린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산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발소리에도 채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도 그치고 동이 트기 직전인 어둑어둑한 바다가 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잘 주무셨나요?”


채린은 산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의 옆에 선 산도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예.”

“아까 전 에이전트분들은 무사히 돌려보냈어요.”


묻기도 전에 채린은 말했다. 어둑한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짙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짙어 보였다. 산은 그 눈을 훔쳐보며 끄덕였다.


“잘.. 됐네요."

"후환이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실은 별로 죽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루저와 윈터. 두 사람과의 연은 공조 수사가 전부지만 그들로부턴 무언가 다른 걸 느끼던 산이었다. 오로지 산을 적대하기만 하던 에이전트들과는 분명 달랐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해봤지만, 산의 머릿속은 여러 복잡한 것들로 가득했다.


"헤이카의 위치가 확인됐어요."


그런 복잡한 생각도 채린의 말에 전부 날아갔다. 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음영이 드리웠음에도 채린의 얼굴은 잘 보였다.


“아디마 케티르예요.”

“..아시리아의 산이네요.”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산. 그리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이죠.”


산은 헤이카가 왜 그런 곳에 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헤이카의 목적은 아가레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하늘과 가장 가깝다는 아디마 케티르 산이라면 하늘의 괴수와의 결전을 치르기엔 썩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당장 그곳으로 달려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은 조금 더 침착하게 생각했다.

아시리아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배로 밀입국한다고 해도 아디마 케티르의 정상까지 올라서 그녀를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산 본인이 그녀의 전쟁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고작해야 칼이나 좀 쓸 줄 아는 칼잡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괴수를 상대로 활약할 일은 없었다.


“이미 알겠지만 당분간은 숨어 지내야 할 거예요. 헤이카가 전쟁을 끝낼 때까지요.”


채린의 말에 산은 동의했다. 직접 돕는 게 어렵다면 지금은 헤이카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엔 머스칼이 있을 것이다. 그쪽을 걱정하기보단 당장 자신을 걱정해야 하는 게 맞았다.


“이 난장판을 쳤는데 숨을 곳이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세계 연합에 소속된 나라 중에선 사실상 없다고 봐야겠죠. 그러니 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나라가 좋을 거예요.”


채린의 대답에 산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요..”

“적당한 곳이 두 군데 있잖아요? 산이 씨도 잘 아는 곳이에요.”

“...”


사실 진작에 떠오른 곳이었다. 하지만 산은 별생각 없이 그 두 곳을 머릿속에서 치웠었다.

그럼에도 채린은 다시 산의 앞에 그 두 선택지를 내놓았다.


“시라비아와 올드 아일랜드.”

“..그쪽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아니면 세계 연합의 에이전트에게 계속 쫓겨 다녀야 할 텐데요?”


산은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진 꽤 여유롭게 압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코렌 정부군과 코렌 정부의 에이전트만을 상대했기 때문이었다.


코렌의 에이전트 본부를 날려버렸고, 에이전트와 군인을 상대로 무력 충돌을 벌였으니 이제부턴 세계 연합이 직접 움직일 게 뻔했다.


세계 연합에서 보내는 에이전트의 숫자와 위험도는 가늠할 수도 없다. 그야 연합에 속한 모든 국가의 베테랑 에이전트는 죄다 몰려올 테니 말이다.


더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세계 연합의 평화 유지군까지 산을 쫓기 시작하면 단순히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도망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


냉정히 생각해봐도 채린의 말대로였다.

지금 가장 숨기 좋은 장소는 세계 연합에 가입되지 않은 나라. 그중에서도 연합의 에이전트와 평화 유지군마저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뿐이다.


‘마피아 놈들이 먹은 시라비아. 썩어빠진 기사들이 지배하는 올드 아일랜드.’


분명 세계 연합의 눈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두 곳은 산에게 있어 썩 좋은 기억이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래 전 있던 마피아와 기사들의 전쟁.

거기서 오코넬과 함께 수많은 기사의 목을 썰어댔던 산이었다.

올드 아일랜드에 들어갔다가 만약 기사에게 발각되면 그 뒷일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세계 연합의 에이전트보다도 성가신 적들이었다.


‘그럼 시라비아 뿐인가?’


기껏 도망쳐 나온 곳으로 숨어들어 간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더 나은 곳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간다고 쳐도 어떻게 가죠? 연합에서도 저희가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걸 그냥 두고 보진 않을 텐데요.”

“육로를 완전히 막겠죠. 해상은 빈틈이 있겠지만, 지금 바다에 나가는 건 그다지 추천하지 않아요.”


채린은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바다의 수평선을 눈짓했다. 이젠 고개를 슬쩍 내민 아침 해가 붉었다.

하지만 그 햇빛엔 드문드문 검은 점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던 산은 온몸에 힘이 쫙 들어갔다.


저것들은 아가레스였다.


“헤이카가 아가레스를 죽였어요. 그리고 그 피를 아디마 케티르 정상에 뿌려대고 있죠.”

“다른 아가레스를 부르려는 건가요?”

“맞아요.”


동포의 피 냄새에 이끌린 아가레스는 모두 아디마 케티르로 몰려들 것이다.

한껏 몰려든 아가레스를 항공전력과 해상 전력. 그리고 델라리온 머스칼로 일망타진하는 것. 아마 헤이카가 노리는 건 그것일 터였다.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아가레스가 원래의 궤도를 벗어나 움직이고 있어요. 그들의 ‘하늘길’ 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하늘길?”

“아가레스가 오가는 길이에요. 모든 아가레스는 자신만의 하늘길이 있고, 그 길로만 다니죠. 항로(航路)라고 보면 될 거예요.”


하늘에 아가레스와 새 이외의 것이 날아다니는 걸 본 적 없던 산에겐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채린은 그런 산을 향해 말을 이었다.


“피 냄새에 흥분한 아가레스들이 언제 지상을 공격할지 몰라요. 특히 활동이 활발한 바다라면 더 위험하죠. 별일 없이 아디마 케티르로 몰려드는 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봐야 할 정도예요.”

“..대충 알겠습니다. 근데 그 말대로라면 육로도 뱃길도 다 끊겼단 소리잖아요?”

“네. 그래도 하늘이 남아있어요.”


아가레스가 날뛰느라 바다에도 못 나가는 마당에 하늘을 이야기하는 채린의 말을 산은 따라가지 못했다.

채린의 손가락이 먼바다의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엔 아가레스 외에도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저게 뭐죠..?”

“이클립스 공업의 수송기예요.”


말로만 듣던 수송기를 난생처음 본 산은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로 쇳덩어리가 날고 있네..’


아마 과학자가 아닌 이상은 다들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인류가 하늘을 빼앗긴 지 150년이 넘었다. 그동안 하늘을 가로지르던 과거 인류의 유산은 모두 녹슨 고철 덩어리가 되었고 당연히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 그 누구도 하늘을 나는 쇳덩어리를 본 적은 없었다.


예외로 드론 정도야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지만, 크기부터가 남다른 비행체는 확실히 산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산에겐 머스칼의 요술이나 저 수송기나 똑같이 마법처럼 보였다.


“헤이카는 이런 상황도 모두 예상했던 모양이에요.”

“하, 하지만 하늘엔 아가레스가 있잖아요!? 바다랑 육로보다 훨씬 위험한 거 아닌.. 가..?”


애초에 비행기를 처음 보는 산에겐 어떤 확신도 없었다. 하늘을 빼앗긴 이 시대에서 버젓이 날아다니는 수송기가 대체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지 산은 알 수 없었다.


“글쎄요. 그건 헤이카만 아는 비밀이겠죠.”


채린의 대답에 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수송기는 항구에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본 수송기는 훨씬 컸다. 심지어 항구 앞바다에 멈추더니 제자리에서 수직으로 착륙하고 있었다.


그때, 채린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수송기는 조심스럽게 위치를 다시 잡아 항구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그러는 사이 산의 뒤에는 콥스 바탈리온이 우르르 몰려들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을 보던 산은 눈썹을 긁적거렸다.


‘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리만 콥스와 그 대원들의 모습.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던 죽음을 떠올린 산은 채린을 돌아보았다.


사막에서 에이전트와 대치하던 그들을 말 한마디로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리고 산은 그때 채린이 보여준 섬뜩한 환상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장님. 대체 뭐하는 분이죠?”


산의 질문에 채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산을 공포로 물들이는 무언가가 없었다.


“아담의 사장이에요.”


산이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채린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산은 수송기에서 항구로 내리는 이클립스의 무장 전력을 발견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들 사이로 뒤늦게 수송기에서 내린 건 헤이카의 비서실장인 닐라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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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6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3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5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5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0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2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8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3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2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1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9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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