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2,729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2.09.26 14:10
조회
247
추천
9
글자
21쪽

난입

DUMMY

#1


두 남자는 빗줄기 너머 서로의 눈을 직시했다.


양자의 거리는 약 10m 남짓.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대치가 한동안 계속됐다. 마음만 먹으면 산은 이미 루저의 목을 베었을 테지만, 산의 나이프는 여전히 축 늘어진 채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뭘 망설이지?”


침묵은 깬 것은 루저였다. 산은 루저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산 스스로도 자신이 멈춰선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깐이나마 함께 일했던 공조 수사에서의 인연이 있어서? 아마 그런 건 아니리라 생각했다.


거센 빗줄기를 쏟아붓는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빗물을 머금은 사막의 모래가 시커멓게 물들고 하늘과 땅이 모두 텁텁한 장막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여기서 내 목을 베고도 내 후배들까지 뒤쫓을 자신이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 건가?”

“..모르겠네요.”

“지금 제정신으로 있는 건 맞지?”


루저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물어왔다. 산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했다.


“제정신?”

“얼굴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너무 스마일 페이스야. 혹시 자기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던 건가?”


움찔한 산은 조심스럽게 자기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이랬죠?”

“군인들 썰어댈 때부터.”


정신을 놓은 건 아니었다. 눈앞의 루저를 두고도 무작정 달려들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이 꺼림칙한 미소는 확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히죽거리는 입꼬리가 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딱딱하게 굳어 풀리지 않았다.


결코 이 상황이 즐거운 건 아니었다. 웃을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수 많은 군인들을 죽였고, 또 죽이고 있다. 지금도 간간이 콥스 바탈리온의 총성이 들려왔다. 그들에게 추격을 명한 건 산이었다.


“시라비아의 웃는 처형인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지. 열 살 정도밖에 안 된 꼬맹이가 웃으면서 사람 머리를 미친 듯이 따고 다닌다니, 진위를 떠나서 유명해지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

“그쪽은 마피아들이 키운 히든카드였겠지? 아마 그대로 시라비아에 있었다면 지금쯤 꽤 높은 위치였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봐도 되나?”


산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빗줄기에 차가워진 공기 속으로 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시간 끌려는 겁니까?”

“맞아. 하지만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음.. 얘기할 생각 없다면 이대로 그냥 싸워도 되는데.”


물끄러미 내린 시선 끝엔 새까만 카르마 나이프가 보였다. 빗물에 씻겨나가는 피가 사막의 젖은 모래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 나이프만 있으면 장갑차도 문제가 없었다. 여덟 명의 에이전트도 모조리 사냥했다. 고작 에이전트 한 명에게 고전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산은 조금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루저의 말대로 여유롭게 그의 목을 베고 도망친 나머지 에이전트를 쫓아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시라비아에선 자유가 없었거든요.”

“자유?”

“전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거지 같은 세상인데, 자유롭게 모자란 것 없이 살다가 후회 없이 가야 덜 억울하죠.”

“생각보다 흔해빠진 목표구만. 그래서 공업에 들어간 건가?”

“예.”

“그럼 지금은? 지금은 자유롭다 느끼나?”


루저의 말에 눈썹을 긁적거린 산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빗줄기에 흘러내린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렸다.


“솔직히 모르겠네요.”

“흠. 인생 선배로서 조언 하나 해주자면 세상 어디에도 자유란 놈은 없어.”


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딜 가도 법은 있다. 도시의 장벽도 있으며, 사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있다.

그리고 공업의 직원이 된 이후, 노페이스의 팀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산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따지고보면 이건 모두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이었다.


“기왕이니 한 번 묻지. 혹시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으음.”


루저는 까슬까슬한 턱을 긁적였다. 그리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찮다는 듯 쓸어넘겼다.


“그건 헤이카 미켈런을 위해서라고 봐야하나? 아니면 그 여자가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산의 눈이 놀라 조금 커졌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루저를 마주 보았다.


“왜? 내가 이런 걸 아는 게 이상한가?”

“..어디서 들은 겁니까?”

“평범하게 생각하는 놈들은 아직 모를 거야. 세계 연합의 늙은이들도 당장 헤이카가 자기 사업을 위해 하늘을 되찾으려고 한다고만 알고 있어.”


루저는 버릇처럼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이런 빗속에서 눅눅하게 젖은 담배는 불이 붙을 리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루저는 젖은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데 난 인간 관찰이 취미거든. 자주 타인을 관찰하고,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망상에 빠지곤 해. 정말 비생산적인 일이지.”

“고작 그런 걸로 헤이카의 목표를 알았다고..?”

“개인적으로 주워들은 것도 있어.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결론에 도달하더군. ‘헤이카 미켈런의 최종적인 목표는 새로운 세상이고, 하늘을 되찾는 건 그 일환에 불과하다.’ 반응을 보니 얼추 맞춘 것 같은데.”


대답을 망설이던 산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맞습니다."

“이거 참.. 탐정이라도 된 기분이구만.”


산은 카르마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뺐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루저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죠?”

“뭐? 그 여자의 계획에 대해서? 당연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

“하지만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단 생각도 들어. 지금 시대는 계속 썩어 문드러지기만 하니까.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엔 동감이다.”

“그럼..!”


루저를 향한 산의 눈빛에 잠깐이나마 활기가 돌았다.


세상 모두를 적이라고 생각하던 헤이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그녀의 진의를 꿰뚫어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군이 있었다.

산은 루저가 뱉을 의외의 대답을 기대했다. 그녀를 도울 또 한 명의 이해자가 늘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확실히 그런 면에서 보면 헤이카 미켈런이 정답일지도 모르겠어. 지금 세상엔 그 여자가 아니면 그런 대범한 일을 시작할 배짱 있는 인간이 없거든.”

“하지만 생각의 여지가 생겼을 뿐, 아직 답을 내기엔 일러.”


루저는 검은 장갑을 꽉 당기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 파장에 밀려 터져나갔다.


감응자의 파장. 전투 개시를 의미하는 그 능력 발동에 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지금 여기서 자넬 막아야 한다는 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

“왜죠? 헤이카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저랑 싸울 필요는 없잖습니까.”

“조금 전까지 자기가 뭘 했는지 까먹은 건 아니겠지?”


루저의 날카로운 눈빛이 산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난장판이 된 사막 국도 위. 검붉게 물든 모래엔 사람의 머리와 몸뚱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얼굴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썰어대는데,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지. 이래 봬도 난 에이전트거든. 경찰 비스무리한 공무원이야.”

“..저랑 싸우면 죽을 겁니다.”

“시간 벌이는 충분히 했어. 생각보다 유익한 대화였다.”


루저가 두 주먹을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산은 머릿속의 잡념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그는 카르마 나이프의 칼날을 제일 짧게 접고 역수로 고쳐 쥐었다.


칼자루를 말아쥔 산의 손등에 빗방울이 톡톡 튀었다. 그 너머 검게 음영이 드리운 처형인의 얼굴이 섬뜩하게 웃었다.


다시 침묵의 대치가 시작됐지만, 이번엔 길지 않았다.


움직인 건 산이 먼저였다.


그의 발치에 있던 젖은 모래가 팍 튀었고 동시에 산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대로 루저의 목을 향해 검은 궤적이 날아들었다.


“!”


하지만 산은 순간적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루저에게서 되려 거리를 벌렸다.

루저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쫙 펴진 채 그의 목 근처를 막고 있었다. 양팔을 X자로 교차하고 있는 루저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엿보였다.


“궁금하지 않나? 전차도 종잇장처럼 썰어대는 그 나이프랑, 내 능력. 과연 누가 먼저일까.”

“...”


산은 지난 공조 수사에서 봤던 루저의 능력을 떠올렸다.


그의 능력은 분해.

저 손에 닿는 모든 걸 분해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이다.


공조 수사 당시엔 빌딩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렸고, 조금 전엔 사막을 쩍쩍 가르며 커다란 구멍까지 뚫었다.


이건 루저의 말대로 누가 먼저인가를 두고 겨루는 승부였다.

카르마 나이프가 저 손을 잘라내는 것과, 저 손이 카르마 나이프와 함께 산의 몸을 산산조각내는 것.


서로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승부가 난다. 산은 눈앞의 남자가 쉽지 않은 상대임을 직감했다.


‘닿으면 끝이다.’


칼이든, 팔이든, 옷깃이든. 설령 머리카락 한 올이 스쳐도 몸이 분해된다. 그러니 저 손에 닿지 않으며 루저를 베는 게 관건이었다.

고민 끝에 산은 카르마 나이프를 가볍게 고쳐잡았다.


‘던지는군.’


루저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서로의 수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핏!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카르마 나이프가 총알처럼 날아갔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산은 어깨에 메고 있던 검집에서 참수도를 뽑아 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나이프였지만, 이미 그 수를 읽고 있던 루저에겐 날아오는 나이프를 막아 분해하거나 피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프와 동시에 날아드는 산이었다.

만약 나이프를 분해하거나 피한다는 선택지를 고른다면 산의 참수도는 그 빈틈을 노려올 것이 뻔했다.


‘나쁘지 않은 수지만..’


결단을 내린 루저가 움직였다.


까앙 ─ !


강렬한 금속음이 공기를 때렸다. 산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참수도를 막고 있는 새까만 칼날을 노려보았다.


‘카르마 나이프?’


카르마 나이프를 분해하거나, 피하거나.

일반적으론 그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겠지만 루저는 나이프를 낚아채 되려 자기가 써먹는다는 선택을 했다.


‘그걸 잡았다고?’


힘껏 던진 카르마 나이프는 산의 가속을 받아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랐다. 루저는 그 빠른 나이프를 잡아챘고, 곧바로 뒤따라 날아든 산의 참수도를 카르마로 막아낸 것이다.


“이건 못 베는 건가?”


카르마 나이프의 칼날과 맞부딪친 참수도를 지그시 바라보던 루저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산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단 한 번도 참수도와 카르마 나이프를 서로 부딪쳐 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두 무기가 부딪칠 거란 전제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카르마 나이프의 절삭력이 이 참수도마저 자를 정도였다면.. 산은 그 이후의 일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카르마 나이프는 참수도를 자르지 못했다.

산은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 할지, 카르마 나이프도 자르지 못하는 게 있다고 실망해야 할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루저의 다른 손이 산의 복부를 향해 움직였다. 산은 카르마를 쳐내며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흠.”


카르마 나이프를 슬며시 내린 루저가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산도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 속도에 반응했다.’


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루저를 노려보았다. 반면에 루저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엿보였다.

이전에 상대했던 에이전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 아저씨가 생각보다 버텨서 놀란 모양이네.”

“...”

“별거 아냐. 단순한 수 읽기지.”

“수 읽기?”

“자기보다 빠르고 강한 상대와 정면으로 겨룰 땐 수를 읽는 거다. 상대가 움직이는 걸 보고 반응하면 이미 늦거든. 예측하고 미리 자세를 잡는다고 해야 하나.”


산은 눈썹을 찌푸렸다. 루저의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저건 애초에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고 반응하는 거라고?’


카시라트에서 상대했던 여덟 명의 에이전트조차 반응하지 못했던 산의 칼부림이었다.

그걸 루저는 수 읽기라는 어이없는 비결로 대응한다는 소리였다.


말로만 들었다면 산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엔 산의 움직임에 실제로 반응하며 싸움을 여기까지 끌어낸 루저가 있었다.


“난 이 나이까지 싸움질밖에 안 했거든. 이것마저도 못 해먹으면 굶어 죽어야지. 그보다 이 칼 괜찮은데. 역시 공업제야.”


이미 익숙해진 것처럼 손안에서 카르마 나이프를 놀리는 루저는 날을 펼치고 접는 기믹까지 모두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처음 카르마를 쥐고 설명서를 한참이나 읽은 끝에야 카르마의 기믹과 구조를 이해한 산으로선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회심의 일격을 노리고 카르마 나이프를 던졌던 건 결국 악수가 되었다.

무시무시한 절삭력을 가진 카르마 나이프. 죄다 분해하는 루저의 손. 그리고 산의 속도에도 반응하는 수 읽기.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직.’


산이 참수도를 비틀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 공기가 일그러졌다.

그 변화를 눈치챈 루저가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카르마 나이프를 쥔 루저의 손등으로 빗물이 튀었다.


잠깐의 여유를 둔 산은 지면을 박찼다.


“!”


이번에도 루저는 산의 움직임에 대응하며 나이프와 손을 내밀었지만 들이닥친 압력에 그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럼에도 루저는 카르마 나이프와 손을 휘저었다. 산의 참수도는 몇 번이나 그의 목을 벨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한계는 곧 찾아왔다.

젖은 모래가 푹 파일 정도로 묵직한 압력에 루저는 점점 체력이 빠졌지만, 산의 칼부림은 오히려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 !


결국, 참수도가 루저의 카르마 나이프를 튕겨냈다. 곧바로 방어가 열린 그의 빈틈을 산은 놓치지 않았다.


“큭!”


번뜩이는 참수도의 칼날이 루저의 목을 노렸다. 루저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지만, 칼날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칼날은 루저의 어깻죽지부터 반대편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들어가 그를 베었다. 루저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젖은 모래에 피가 튀었다.


‘다음은 머리.’


참수도는 그대로 궤적을 이어가며 한 바퀴 회전했다.

크게 호를 그리며 위로 올라간 참수도가 다시 한 번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하늘에서도 우르릉하는 천둥이 쳤다.


“!?”


그러나 산은 내리치던 참수도를 멈춰 재빨리 몸쪽으로 당겼다.


큰 공격일수록 빈틈도 큰 법이다. 루저는 칼에 베이면서까지 산의 빈틈을 읽고 카르마 나이프를 던졌다.

몸쪽으로 당겨 잡은 참수도의 검면에 카르마 나이프가 부딪쳐 튕겨 나갔다.


직후, 루저의 주먹이 재빠르게 산의 얼굴로 날아왔다. 아슬하게 그의 주먹을 피한 산이었지만 뒤따라 날아온 루저의 돌려차기에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사막 위로 산이 나동그라졌다. 동시에 루저도 비틀거리며 뒤로 뛰었다.

낙법을 취한 산은 곧바로 자세를 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루저에게 재정비의 기회를 줄 생각은 없었다.


상처와 압력으로 루저의 반응은 이전보다 훨씬 느렸다.


지금이라면 벨 수 있다. 산은 그렇게 확신했다.

트럭을 보기 전까진.


“!!?”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온 군용 수송 트럭이 산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그저 서로를 향해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던 산과 루저는 누구도 그 트럭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루저를 향해 내달리던 산은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재빨리 루저가 던진 카르마 나이프를 회수해 손안에서 휘둘렀다.


찰칵! 찰칵!

새까만 칼날이 번들거리며 길게 늘어났다. 산은 그대로 카르마 나이프를 옆으로 눕혔다.


마침내 카르마의 새까만 칼날이 트럭과 충돌했다.

범퍼와 앞바퀴 타이어를 그대로 쭉 가르던 카르마 나이프가 불꽃을 튀겼다.

차체가 통째로 썰리는 충격에 트럭은 중심을 잃고 크게 기울어졌다.


“흡!”


마지막으로 카르마 나이프를 빼내듯 휘두른 산은 트럭을 쭉 그었다. 뒷바퀴 타이어가 펑하고 터지며 마침내 트럭은 완전히 옆으로 쓰러졌다.


그 짧은 순간, 트럭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이 뛰어내렸다.

트럭은 굉음과 함께 전복되어 쭉 젖은 모래 위를 미끄러졌다. 안에서 뛰어내린 두 사람은 사막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윽..!”


그 둘을 향해 돌아선 산은 갑자기 몰려온 통증에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트럭을 벤 카르마 나이프가 하필이면 오른손이었다. 몇 번이나 다친 어깨에서 끔찍한 격통이 몰려왔다.


“!”


고통에 얼굴을 찌푸린 산은 바로 정면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총을 겨눈 여자를 발견했다. 트럭에서 뛰어내려 한참을 구르던 윈터였다.


“너..!”


결국,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되돌아왔다. 루저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런 윈터를 바라보았고, 산은 재빨리 왼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파캉!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긴 윈터였지만 산의 머리를 향해 쏜 총알은 그의 코트에 막혔다.


“조엘! 선배부터!"

"예!"


뒤에선 루저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온 조엘이 능력을 사용했다. 루저에게 기껏 입힌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그를 막으려 움직이려던 산은 또다시 어깨의 통증에 움찔했다. 윈터는 그런 산에게 총을 겨눈 채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형제.”


윈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새 주변을 가득 메운 콥스 바탈리온의 검은 슈트들이 세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늦었네. 도망친 놈들은?”

“전부 처리했다.”


조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막 이곳저곳에 전복되어 뿌연 연기를 흘리는 군용 차량들이 가득했다.


“...”


윈터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총은 여전히 산을 향하고 있었지만, 산이 입은 코트는 총으로 뚫을 만한 게 아니었다.

윈터는 슬며시 루저를 돌아보았다. 루저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선배는 부상.’


그녀는 다음으로 주변을 훑었다.


‘포위당해서 도망칠 길도 없고.. 트럭도 잃었어.’


마지막으로 그녀는 바로 앞의 처형인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소름 끼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독기를 품고 있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지만, 도저히 이 상황을 파훼할 방법이 없었다.

굳이 도망치는 코렌 정부군까지 추격해 모조리 섬멸한 이들이 정부 소속 에이전트가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둘 리가 없었다.


윈터는 낙담한 듯 고개를 떨구며 권총을 내렸다.


“바보같이.. 이러면 개죽음이잖아..”


한 명을 위해 다 같이 죽자는 고상하고 멍청한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루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그녀가 트럭을 돌린 건, 어떻게든 살아나갈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향해 자리만이 권총을 겨눴다. 산은 자리만을 막지 않았다.


“....!!!”


방아쇠울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던 자리만이 갑자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건 자리만 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콥스 바탈리온 전원이 무언가에 크게 놀란 듯 동요하고 있었다.


자리만의 이상을 조금 늦게 감지한 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오... 온다..”

“뭐..?”

“뭔가가 오고 있어.. 죽음? 이건 죽음인가?!”


자리만이 온몸을 벌벌 떨며 뒷걸음질쳤다. 윈터와 조엘도 갑작스러운 콥스 바탈리온의 이상 행동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산은 사막 저편에서 빗줄기를 뚫고 접근하는 차량 한 대를 발견했다.

군용은 아니었다. 이런 사막에서도 거뜬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 오프로드 카였다.


“...”


산은 자리만과 그 대원들의 이상이 저 차와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참수도를 검집에 먹이고, 왼손으로 카르마 나이프를 말아쥐었다.


마침내 도착한 차량이 산과 윈터의 사이에 멈춰 섰다.

콥스 바탈리온의 포위망은 무의미할 정도였다. 자리만과 그 대원들은 저 차의 등장에 겁에 질린 듯, 다들 거리를 벌렸기 때문이다.


차문이 벌컥 열리며 운전석에서 먼저 사람이 내렸다.

헐렁한 점퍼 아래로 방탄조끼와 전술용 장갑, 군화를 신은 젊은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본 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뒷좌석의 문도 열리며 한 여자가 내렸다.


“양쪽 모두 무기를 거두세요.”


차에서 내린 여자는 가장 먼저 그렇게 말했다.

부드럽지만 어째선지 거부하기 어려운 목소리에 산은 비틀었던 카르마 나이프를 축 늘어뜨렸다.


“현 시간부로 이 현장은 ‘아담’ 에서 관할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채린.

돈만 주면 뭐든 하는 흥신소, 아담의 사장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욕망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완결 공지 +3 23.05.08 144 0 -
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1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2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3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5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59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7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8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1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6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3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4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7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1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0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8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7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0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4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6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6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5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8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0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2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7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3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6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5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8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2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1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2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7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6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4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0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3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2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5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2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4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4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79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1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6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1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1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0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8 10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