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2,307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50

작성
22.09.20 14:10
조회
250
추천
13
글자
23쪽

도망자

DUMMY

#1


에이전트(Agent).

전문 기관을 통해 강도 높은 훈련을 거치고 치열한 경쟁을 뚫은 극소수의 감응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이름.


'감응자엔 감응자로' 라는 모토 아래 감응자 강력 범죄 근절을 위해 각국 정부에서 길러 낸 에이전트는 그 나라의 비공식 군사전력으로도 통한다.

그렇기에 각국은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에이전트 육성에 힘을 기울이며 그렇게 에이전트가 된 이들이 출중한 실력자들임은 의심의 여지도 없다.


하물며 그 능력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라면 에이전트가 가지는 전술적 가치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런 에이전트조차 피해 갈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는 존재한다.


결국은 그들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란 것이다.


핏!

짧은 바람이 터지며 두 명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직후, 공기를 흔들던 여덟 개의 파장은 여섯으로 줄었다.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생물인 이상 머리가 몸뚱이와 떨어지는 순간 에이전트는 그 가치를 잃기 마련이다.


팀의 지휘를 맡은 에이전트 필로는 순식간에 두 명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엔 이미 세 명째의 머리가 날고 있었다.


마치 검은 먹물을 머금은 붓이 그림을 그리듯 새까만 궤적이 쭉 이어져 차례차례 사람의 머리를 몸뚱이와 분리하고 있었다.


필로의 눈에 그것은 너무나 빠르면서 동시에 느리게 보였다.

보인다고 해서 몸이 움직이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는 팀원들의 목이 잘려나가는 걸 두 눈으로 보면서도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착각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필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빠른 속도.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는 카르마 나이프와 머스칼의 능력을 흉내 내는 참수도.’

‘전 시라비아 마피아의 처형인 출신의 네임드. 모르스 웅골라.’


현재는 공업의 신입 팀장으로 있는 그 남자의 정보를 필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공업의 기술력이 담긴 장비와 개인의 전투 기술은 특히 위험하다.

때문에 여덟 명이나 되는 과도한 에이전트 전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원래대로라면 에이전트에게 포위된 시점에서 산에게 승산은 없었다.


‘이게 감응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오산이었다. 필로는 고작 여덟 명의 에이전트론 저 괴물을 잡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혼란에 빠진 그는 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저 이따금 번뜩이는 새까만 칼날의 궤적과 짧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이 이 참극의 전부였다.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선 속도.

필로는 이 싸움에서 궁지에 몰린 건 저쪽이 아니라 자신들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로기타!!”


그는 가까스로 외쳤다. 그러자 가장 끝에 자리를 잡았던 에이전트 ‘로기타’ 가 지면에 발을 굴렀다.

그의 능력은 통칭 ‘영역’ 이라 불리는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한 영역을 ‘고정’ 시켜 그곳에 들어온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다.


실로 강력한 능력으로 코렌 정부에서 특별히 취급하는 에이전트인 로기타였다. 다만 상대를 고정시킨 동안엔 로기타 본인도 움직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물론, 그런 단점은 이런 팀 단위의 작전에선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써걱!


“로기..”


그러나 영역은 펼쳐지지 못했고 처형인이 멈추는 일도 없었다.

로기타가 산을 멈추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날아온 새까만 칼날은 마치 총알처럼 날아와 로기타의 머리에 박힌 것이다.


자신이 던진 나이프를 잡아 뽑은 산은 단칼에 로기타의 목을 끊었다.

머리를 찌른 시점에서 이미 그가 살 가망은 없었지만, 저렇게 목을 자르는 것이 마피아 처형인 특유의 마무리 방식이었다. 필로는 그 잔혹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남은 에이전트는 넷.

순식간에 전력의 반이 날아간 상황에서 포위망은 이미 위력을 잃은 상태였다.


“!?”


포위망이 무너졌다면 상대는 더욱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단번에 시야에서 사라진 산을 쫓던 필로는 새까만 칼날의 궤적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그 궤적은 다름 아닌 필로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필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깡!


맑은 금속음과 함께 카르마 나이프의 질주가 멈췄다. 칼날이 멈춘 것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휘두르던 산도 모습을 드러냈다.

필로는 얼떨결에 산의 눈을 마주쳤다.


끔찍한 독기로 가득한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다.

사람의 목을 베는 일 외엔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 눈은 마치 차가운 강철이나 날붙이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눈이 필로를 노려보았다. 베일 것처럼 섬뜩한 시선에 필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쏴!”


하지만 카르마 나이프는 그의 목을 떨구지 못했다.

목에서부터 얼굴의 하관까지. 마치 금속처럼 번들거리는 필로의 피부는 카르마 나이프의 특수 칼날도 견딜 정도로 견고했다. 그것은 필로의 능력이었다.


그의 외침에 세 명의 에이전트가 쥔 권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총알은 모두 필로의 몸에 부딪혀 튕겨 나갈 뿐, 산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디로..’


필로를 포함한 에이전트들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더 이상 날아드는 칼날도 없었다. 필로는 산이 이미 옥상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물끄러미 머리가 잘린 네 명의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제 죽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죽은 얼굴이었다.


여덟 명의 에이전트.

그 절반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한 산의 칼부림에 그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제아무리 경험 많은 에이전트라 해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팀장님..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분명 감응자가 아니라고..”

“정보가 틀렸을 가능성도 있다. 공업에서 의도적으로 거짓 정보를 흘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파장이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방금 그자는 감응자가 아닙니다!”

“...”


서로 겁에 질린 시선을 마주할 뿐인 에이전트들은 누구도 이 현장의 참극을 머리로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저런 속도로 움직일 수 없다. 만약 움직인다 하더라도, 인간의 몸은 저런 속도를 견디지 못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건 현실로 벌어졌다.


그러던 중, 필로는 옥상 문에 튄 피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닉. 슈타벤. 루돌프. 놈을 계속 쫓는다. 능력 사용은 작전 종료까지 허가한다.”

“팀장님. 네 명이 아웃입니다.. 작전은 중지하는 게..?”

“캐티가 한 방 먹였다.”


필로는 목이 잘린 에이전트 중 한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뜬 눈으로 굴러다니는 머리의 주인은 ‘캐티’ 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여성이었다.


“놈은 부상을 입었다. 지금.. 지금 잡지 않으면 나중엔 걷잡을 수 없는 놈이 될 거다. 발견 즉시 사살해라. 반드시 사살해.”


그의 말에 에이전트들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2


한가롭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순 없어 계단을 뛰어내렸다.

굴러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으며 속도를 유지하던 난 빌딩을 반쯤 내려왔을 때쯤 다리를 멈췄다.


“허억.. 헉!”


가슴이 아프고 다리가 저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르마 나이프를 쥐고 있던 오른팔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옷이 찢어진 흔적을 보면 뭔가 날카롭고 무거운 것에 찍힌 것 같았다. 외투를 벗어 팔을 지혈했지만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역시 힘든데.”


능력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전에 최대한 정리할 셈이었다. 하지만 역시 속도가 모자랐다.

네 명째에서 삐끗하더니, 다섯 명째에서 기어코 에이전트가 카르마를 받아쳤다.


“필로라고 했던가.”


하필이면 카르마 나이프로도 자를 수 없는 능력자라니, 심지어 팀을 이끄는 녀석답게 순간의 판단과 반응도 빨랐다. 하마터면 역으로 당할 뻔했다.


“후우.. 하아..”


천천히 숨을 고르고 카르마 나이프를 왼손으로 고쳐잡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이런.”


그렇게 1층에 겨우 도착했건만 로비에도 정부에서 나온 녀석들이 깔려있었다.


심지어 군용으로 보이는 바리케이드를 입구 쪽에 둘러놔 함부로 나갈 수도 없다. 카르마 나이프라면 바리케이드를 자를 순 있지만, 그 주변에 깔린 놈들은 위험하다.


저렇게 큰 바리케이드를 자르는 것 자체가 시간이 걸린다. 그 순간의 빈틈을 노려 총이라도 쏘거나 만약 저 중에도 에이전트가 있다면 그대로 끝장이다.


“...”


이와중에도 위에선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발소리가 계속 들렸다.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로비를 살피던 내 눈은 바로 옆 구석에 있는 혜니의 의류 매장에서 멈췄다.

보아하니 안쪽엔 놈들이 없는 것 같았다. 잠깐이지만 몸을 숨기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흐읍!”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 튀어 나갔다. 그리고 곧장 의류 매장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날 본 녀석은 없는 모양이다. 난 바닥을 기어 걸려있는 옷들 사이로 굴러 들어갔다.


“썅. 더럽게 아프네.”

“팀장님?”

“!?”


화들짝 놀라 옆을 보니 나랑 똑같이 옷 사이에 쪼그려 있는 혜니가 있었다. 그녀도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날 보더니 내 팔을 보곤 입을 막았다.


“엇, 상처가.. 다치셨어요?”


제대로 지혈이 되지 않았는지, 빨리 움직이며 느슨해졌는지 팔을 묶었던 외투가 피에 푹 젖어있었다.

혜니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쪽으로 기어왔다.


“혜니 씨. 왜 아직 여기 있어요?”

“전 잡히면 곤란해서요. 박사님이 중요한 걸 맡기셨거든요.”


혜니는 능숙하게 내 팔을 지혈했다. 손수건으로 모자라자 걸려있는 옷 중 하나를 찢어 사용하기도 했다.


“솜씨를 보니 평범한 옷가게 주인은 아니시네요.”

“다들 비밀 하나씩 있죠. 타이밍 보다가 이동해요.”

“로비에 놈들 쫙 깔렸는데요?”

“매장에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있어요. 주차장이요. 차 가져오신 거 아니에요?”


그러고보니 지하 주차장에 캐스팔그를 대놓았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 가져왔죠.”

“아무리 팀장님 다리가 빨라도 달려서 도시를 벗어나긴 힘들 거예요. 차 타고 나가요.”


혜니의 말대로였다. 아까 같은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순 없다. 난 어디까지나 단기결전에서 강하지 장기전으로 싸움이 늘어지면 힘이 빠진다.


“음. 지금 가죠.”


때마침 로비에선 공업 직원이 뭔가를 항의하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덕분에 이 틈을 타 기어간 혜니가 매장 구석에 있던 문고리를 잡았다.

지하실로 통하는 철문. 하지만 얼마나 오래 열지 않았는지 여는 것과 동시에 쇠가 긁히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

“앗. 죄송해요. 기름칠이라도 해둘걸.”

“달립시다.”


난 혜니를 팔 안쪽으로 낚아채고 달렸다. 아슬하게 등 뒤에선 총성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벌써 놈들이 따라붙었다.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가자 지하 주차장이 나타났다.

아직 이쪽엔 사람이 없었지만 추격자가 몰려오고 주차장 출구가 막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저깄네.”


입구 근처에 주차해놓은 캐스팔그를 찾았다.

하지만 운전석을 열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공기가 울렁거리며 파장까지 퍼졌다.


‘빠르기도 하네!’


옥상에 있던 남은 에이전트 넷. 놈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와 다시 이쪽을 포위하고 있었다.

몇 발의 총성이 더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난 혜니를 데리고 캐스팔그 뒤에 숨었다. 내 애마를 방패로 써야 한다니.. 끔찍했다.


“팀장님~ 팀장님~”

“왜요. 저 바빠요.”

“이거 입으세요. 제가 챙겨왔어요.”


혜니는 내게 웬 검은 코트 하나를 건넸다. 지금 아직 더운데 이런 두툼한 코트라니.. 얼어 죽을만한 곳에서 입으면 딱 좋겠네.


“아까 말했던 거예요. 박사님이 꼭 전해달라 했던 거.”

“혜니 씨. 챙겨준 건 고마운데 조금 이따 입어도 될까요? 쟤네 에이전트라서 집중해야..”

“이거 평범한 코트 아니에요. 일단 입어보세요.”


혜니의 말을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공업에서 대표님이 날 위해 특별히 제작한 코트인데다 평범한 놈이 아니라면 뭔가 기능이 달려 있다는 거다.

난 주저 없이 코트를 둘렀다. 역시 묵직하고 벌써 더웠다.


“후우.. 흡!”


그래도 뭔가 있겠지 싶어 칼을 말아쥐고 단번에 자리를 박찼다.

총알처럼 날아가는 몸을 제어하며 가장 가까이 왔던 녀석의 목을 향해 카르마 나이프를 휘둘렀다.

녀석은 몸에서 연막처럼 뿌연 연기를 뿜었지만 내 쪽이 더 빨랐다.


목이 베인 녀석의 머리가 날았다. 하지만 연기가 여전히 시야를 방해했다.

연기 너머. 다른 녀석이 내게 손바닥을 겨누고 있었다.


“!”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건 유리처럼 투명하고 예리한 칼날이었다.

어찌나 날카롭고 단단한지 주차장 기둥에도 푹푹 박혀댔다. 심지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칼날이라 전부 피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찔리는 걸 각오하고 몸을 틀었다. 급소만 피하면 어떻게든 머리는 쳐낼 수 있는 각이 보였다.


“!?”


하지만 칼날은 이 코트를 뚫지 못했다. 두꺼워서 그런가? 아니, 단단한 벽에도 박히는 놈이 코트 하나를 못 뚫어?

그제야 이 코트가 혜니의 말대로 평범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난 앞에 있던 차량을 밟고 날았다.


녀석은 자기 능력이 먹히지 않는 게 이상했는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난 그 얼굴에 카르마 나이프를 던졌다.

고속으로 날아드는 나이프를 피할 능력은 없었는지, 나이프에 얼굴이 뚫린 녀석이 기우뚱 쓰러졌다. 녀석이 바닥에 나자빠지기 전에 나이프를 회수해 목을 베어 마무리했다.


“닉!”


탕! 투다다당!


‘SMG?!’


뭔놈의 에이전트가 기관단총을 긁어대나 싶었는데, 또 다른 녀석이 공중에 총기를 둥둥 띄우고 갈기고 있었다.

이런 실내에선 확실히 소총 같은 놈보단 기관단총이나 권총이 유리하다. 그리고 그게 한 번에 열 자루나 되고, 쉴 새 없이 교대로 갈겨댄다면 평범하겐 대응할 여지가 없다.


심지어 녀석은 총을 자유자재로 이동시켰다.

내가 차량 뒤에 엄폐하면 총이 머리 위로 날아와 날 향해 불을 뿜는 식이었다.

성가신 능력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겐 통하지 않았다.


‘이거 괜찮네.’


코트의 방어력은 내가 봐도 비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아무리 총알이 날아들어도 몸이 느끼는 충격은 어린애가 주먹으로 두들기는 정도였다.

코트로 가려지지 않는 머리나 다리만 조심하면 총에 맞아 벌집이 될 일은 없었다. 자리만의 슈트가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차량에 몸을 숨기고 크게 돌았다. 거기에 속도를 붙여 주차장의 기둥과 벽, 낮은 천장을 밟으며 추진력을 더했다.


그렇게 세 번째 녀석은 머리가 잘리는 마지막까지 발악하며 총을 쏴댔다. 피에 젖은 카르마 나이프를 털어내 고쳐잡았다.


“휴우.”


이제 남은 건 하나.


“...”


마지막까지 남은 ‘필로’ 라는 에이전트는 내게 무작정 달려들진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목이 잘린 세 명을 훑더니 날 노려보았다.


자기 팀원을 일곱이나 잃었으니 내게 화가 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애초에 에이전트가 여덟씩이나 달려드는 게 훨씬 너무하다. 난 나대로 살려고 필사적이었을 뿐이다.


“...델라리온 머스칼도 그렇고.. 네놈도 그렇고.. 그 여자는 괴물만 긁어모으는 건가?”

“괴물이라 미안하네. 근데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카르마 나이프의 칼날을 길게 늘이자 녀석은 전신을 금속처럼 번들거리게 만들었다.


‘카르마로 벨 수 없는 몸.’


차에 참수도가 있지만 이제 와서 가져오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에이전트가 여덟이든 하나든, 일단 눈앞에 있는 게 ‘에이전트’ 라는 위험한 놈이란 건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충격에도 견디려나? 어떻게든 공격을 누적시키면 승산이 있을지도..


탕!

그때 주차장을 울리는 총성에 녀석 주변으로 희뿌연 가루가 터졌다. 녀석은 손으로 가루를 털어내며 콜록거렸다.


‘에이퍼로스 탄!’


감응자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비싸디비싼 총알.

뒤쪽에선 내 캐스팔그 뒤에서 권총을 삐죽 내민 혜니가 보였다.


“나이스 어시스트.”

“!”


놈의 몸의 금속화가 사라져갔다. 난 이 틈에 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카르마의 칼날이 궤적을 그렸고 녀석의 머리가 썩둑 잘렸다. 그대로 붕 떴다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는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덜 떨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카르마를 갈무리한 난 재빨리 캐스팔그로 돌아갔다.


“타세요! 얼른 빠져나갑시다!”

“네!”


시동을 걸고 혜니가 조수석에 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바로 액셀을 밟았다.

역시 한동안 운전대를 잡고 놀던 게 빛을 봤다. 복잡한 지하 주차장인데도 핸들을 이리저리 잡고 돌리다 보니 어느새 출구였다.


부랴부랴 바리케이드를 치려는 녀석들이 주차장 앞에 모여있었다. 기어를 넣고 액셀을 콱 밟았다.


몸이 뒤로 쏠리는 느낌을 받으며 캐스팔그가 소리를 질렀다.



#3


카시라트를 빠져나온 뒤, 캐스팔그가 사막길에 들어서자 비로소 추격도 떨어져 나갔다. 난 한 손으론 핸들을 잡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노페이스 팀 전원에게 메시지를 발송. 그리고 대표님께도 바로 전화를 걸었다.

카시라트 지부에도 저렇게 쳐들어 온 걸 보면 다른 지부나 본사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노페이스의 다른 팀원들에게도 에이전트가 갔을 가능성이 높다.


‘안 받네.’


대표님 쪽엔 메시지를 대신 남겼다. 곧 노페이스의 다른 팀원들에게도 답장이 왔다.

머스칼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다들 무사했다. 붙잡힌 사람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설마 이렇게 행동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은신처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다. 난 다급히 휴대전화로 GPS를 열었다.


숨을 곳이야 널리고 널렸다. 죽은 도시라던지, 사막에 버려진 건물 같은 곳에 몸을 숨기면 당분간은 안전하겠지.

문제는 오래 버틸 순 없다는 거다. 전기도 끊기고 먹을 것도 없을 테니까.


“이쪽.. 으로 가요.”

“예?”


혜니는 자기 휴대전화를 들이밀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기서도 그다지 멀지 않고, 위치로는 필라드보다 조금 더 북쪽. 글라타 국경을 코앞에 둔 곳에 웬 항구가 있었다.


“하아.. 여긴 네키타 항구라고 해요. 옛날엔 석탄 항구로 쓰였는데, 7년 전에 백사병 바이러스가 퍼져서 폐쇄된 항구예요.”

“바이러스라니.. 위험한 거 아닙니까?”

“바이러스는 2년쯤 전에 다 사라졌어요. 하지만 아직 안전성을 입증할 수단이 없어서 여전히 폐쇄돼있을 뿐이죠. 지금은 박사님이 연구 목적으로 항구를 이클립스 소유로 돌려놨어요.”

“혹시 이거 해외로 몰래 나갈 때 사용하는 항구?”


혜니는 대답 대신 배시시 웃었다. 남의 나라 밀입국을 밥 먹듯이 하길래 설마 했는데, 진짜인 모양이다.


“근데 공업 소유 항구라면 당연히 저쪽도 들쑤시지 않을까요?”

“그렇겠지만 당장은.. 네.. 당장은 괜찮을.. 거예요.”

“혜니 씨?”


이제보니 혜니의 옷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피가 차량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난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디 봐요.”


상처는 옆구리 쪽. 총상은 아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그 에이전트.’


유리 칼날 같은 걸 뿜어내던 놈이 있었다. 콘크리트 기둥에도 쑥쑥 박히던 그 칼날.

칼날이 안에 박혔는지, 관통했는지 눈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처가 깊은 건 확실하다. 출혈이 꽤 컸다.


“죄송해요. 팀장님 차 더럽혔어요..”

“상관없어요. 상관없는데. 하아..”


급한 대로 옷가지를 뭉쳐 상처를 압박해 지혈하고 있지만 이대론 오래가지 못한다.


병원부터 가? 아니, 이 상황에서 병원 관계자들이 우릴 받아줄까?

머리가 아파왔다.


“전 신경 쓰지 말고, 우선.. 항구로 가요..”

“꽉 누르고 있어요. 잠들지 말고.”


기어를 넣고 액셀을 콱 밟았다. 그리곤 재빨리 휴대전화의 통화기록을 열어 눌렀다.


{ 여보세요? 산이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


“은영아. 주문 좀 넣자. GPS 찍어줄 테니 그쪽으로 사람 좀 보내줘. 부상자가 있어. 최대한 빨리.”


{ 알았어요! }


통화를 끝내고 곧장 혜니가 찍었던 GPS 좌표를 아담 쪽으로 보냈다. 금세 ‘접수 완료’ 라는 답장이 왔다.


혜니는 얼굴을 찌푸린 채 거친 호흡을 계속했다.

차량의 흔들림에 더해지는 통증은 힘들겠지만 거친 사막길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 산 팀장님..”

“조금만 참아요. 여기만 지나면 좀 평탄...”

“이거.. 이거 저 대신 좀 맡아주세요.”


혜니가 내게 건넨 건 엄지손가락 크기의 돌멩이이었다. 빛깔도 묘한 게,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운석.’


예전에 대표님과 처음으로 자할에 갔을 때, 쟈토가 내게 줬던 거였다.

대표님은 이걸 운석.. 그것도 평범한 운석이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게 왜 혜니의 손에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박사님이.. 저한테 맡기셨던 거예요. 중요한 거니까. 후우.. 저 대신..”

“그쪽한테 맡겼다면서요. 이걸 왜 제가..”


혜니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상처를 누르고 있던 옷 뭉치도 피로 푹 젖었고 시트를 따라 흘러내린 피가 차량 바닥에도 흥건했다.


“부탁해요. 산 팀장님.”

“..대신 죽지 마세요. 혜니 씨 죽으면 누가 제 옷 맞춰줍니까.”

“에헤헤.. 노력해볼게요..”


난 운석을 건네받아 안주머니에 챙겼다.


초재생으로 즉사에 이르는 피해를 입어도 금세 되살아나는 시카.

이상할 정도로 맷집이 좋은 야차.

그리고 총알 따윈 우습게 막아대는 머스칼과 자리만.


최근들어 그런 괴물 같은 녀석들이랑만 놀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죽는다는 사실을.


‘멍청한 새끼..’


시라비아에서 끔찍하게 봐왔지 않았던가.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른 나무판자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죽어버린 녀석도 있었다.

총을 갖고 놀다 자기 배에다 갈긴 멍청한 꼬맹이도 있었다.

녹슨 칼에 살짝 베인 걸 내버려 뒀다가 얼마 못 가 죽은 멍청이도 있었다.


계단을 굴러서.

빙판 위를 미끄러져서.

파도에 휩쓸려서.

칼에 찔려서.

총에 맞아서.

들개에 물려서.


인간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하지 않다.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죽는 놈들이다.


그리고 시라비아에서 이건 상식이었다.

사람 목숨은 개미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그걸 버릇처럼 입에 붙이던 녀석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목을 베어 온 녀석들도 그랬다. 조금 전에 죽인 여덟 명의 에이전트도 그렇다.

녀석들도 죽었다. 어이 없게, 단 몇 초만에 말이다.


“..혜니 씨. 잠들면 안 돼요.”


난 한 손으로 혜니의 상처를 감싼 옷가지를 눌렀다. 혜니는 이미 손에 힘이 빠져 축 늘어져 있었다.

스스로 상처를 압박할 상태가 아니었다. 반쯤 감긴 눈도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혜니 씨.”


그래. 사람은 쉽게 죽는다.

너무나도 쉽게.


“...씨발..”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욕망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완결 공지 +3 23.05.08 144 0 -
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0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2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3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5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58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6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8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1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6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2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4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7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1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59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8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6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69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4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6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6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4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8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0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2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7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3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6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5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8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1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0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2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7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6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4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0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3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2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4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2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4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4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79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1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6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199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0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0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6 10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