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섭의 설정에 대해서는 제 서재 게시판을 통해 간간히 공개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가독성의 편의를 위해 공지를 통해 공개를 합니다. 앞으로 추가되면 종종 갱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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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관제와 무장쪽 설정
조직도는표를참조하시고..
일단 품계로 따지면 정1품인 삼공(태위.사공.사도 같은..)은 일종의 명예직+황제 자문직이고.
실무직인 3성의 장관인 문하시중. 중서령. 상서령을 재상이라고 통칭하는데 이 중에 상서성의 장관인 상서령은 이세민이 진왕시절에 겸한적이 있어서 이 시대에는 공석이고. 차관인 좌우복야가 상서성의 수장을 나눠맡고 있습니다.
문하성과 중서성은 모든 면에서 좌·우 한쌍을 이루었는데, 재상격인 시중(侍中)과 중서령(中書令)은 정3품이고, 차관인 황문시랑(黃門侍郎)과 중서시랑(中書侍郎)은 정4품, 판관(判官)인 급사중(給事中)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은 정5품의 벼슬입니다.
상서성은 중서성에서 기획되어 내려온 명령이이 문하성에서 심의. 검토되고. 상서성에서 시행되는 관계로. 명령체계상으로는 중서성과 문하성의 하부기관이지만. 품계상으로는 더 높습니다. 규모도 크고요.
상서성 아래에는 6부가 있습니다.. 3성의 상호관계는 청사의 위치로도 잘 알 수 있는데, 중서성과 문하성은 궁성의 정전(正殿) 좌우에 있는 데 반해 상서성은 관청가인 황성의 거의 중앙에 있다고 하네요....
상서성의 장관인 상서령은 종1품. 정2품 좌·우 복야(僕射)으로 중서령.문하시중보다 품계가 높고, 판관에 해당하는 정4품 승(丞)이 실무 집행을 담당했습니다.. 상서도성(尙書都省)은 좌사(左司)와 우사(右司)로 나누어져 있는데, 좌사가 이부·호부·예부를 관할하고 우사가 병부·형부·공부를 담당했습니다.
6부의 장관인 상서는 정3품이므로 관등상으로는 시중이나 중서령과 같으나 실질적으로는 행정장관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밑에는 차관격인 시랑(侍郞)이 있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황제의 보좌격인 간의대부와 감찰을 맡는 어사대부가 있습니다.
당에서 재상급이면.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좌우복야 4 관직인셈인데. 이중 장손무기가 상서우복야로 ‘승상’이라 불리는 이유는 능연각에 제일 앞에 초상이 걸린 공신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방현령 등과 함께 3공의 하나인 사도와 태위에 임명되기도 한 ‘삼공급의 상서우복야’이기 때문입니다.
즉 품계로는 2품이지만 실제로는 상서령이 공석이 관계로 우복야가 된 1품급의 2품관인거죠... 좌복야와는 관등상으로는 동급이지만. 실제로는 더 위인거죠.
그래서 위징. 방현령.두여회. 진숙보 같은 그와 비슷한 급의 원로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 승상이라는 존칭이 붙은 겁니다. 642년에 위징에 이어 승상 겸 태위가 되면서요.
그리고 무관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만.
설정상으로는 무신들은 ‘xxx대장군(예. 좌령군대장군) 같은 직책이 되면 몇품이다. 하고 품계가 딱 정해져 있지 않고.. 개인적으로 무신 개인에게 품계가 주어집니다. 보통 16위의 대장군급이면 2-3품급. 장군은 2-5품. 중랑장은 4-5품 정도입니다. 다시말해 몇품급의 장수가 되면 그에 맞게 직책에 오르던가. 그 반대로 직책에 맞게 품계가 오르기도 하죠. 대개 설인귀가 있던 유격장군은 5품정도급이니. 중랑장으로 승진하면서 4품이 되었겠죠?
그래서 앞에 xxx가 안붙는 16위에 속하지 않는 대장군인 이적이나 죽은 이정. 수군대총관인 장량. 은퇴한 울지경덕. 노국공으로 노주도독인 정교금(정지절) 같은 16위 대장군보다도 윗줄인 공신급(국공급) 대장군들은 각기 1.2품인 표기대장군. 보국대장군으로 통칭으로 ‘대장군’으로 불립니다.
이적 같이 병부상서를 겸하고 있는 경우엔 병부상서는 상서성 휘하의3품이지만 무신품계로는 2품인 보국대장군 혹은 1품인 표기대장군이니 장손무기와 대등하게 논쟁이 가능한 수준이죠... 작중에는 그냥 대장군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이정이 죽은뒤 은퇴한 울지경덕과 함께 1품 표기대장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품인 보국대장군은 장량과 정교금 이구요. (1년전 죽은 유흥기도 보국대장군)
보통 16위의 대장군들은 고참급은 2품下(종2품. 보국대장군은 정2품)인 진군대장군. 보통은 3품인 진군대장군이나 관군대장군, 귀덕대장군이라고 보시면됩니다. 16위의 대장군직은 직책인 셈이죠....
조선시대의 문무관이 가선대부니 통정대부니. 품계에 따른 작호가 있고. 영의정. 판서 등의 직책이 따로 있던것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실제로는 약간 틀리지만 이해를 돕기위한 예입니다.)
이런걸 일일이 따지면 엄청 복잡해지기 때문에 작중에는 그냥 생략되어 있습니다. 추후 서술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설정으로는 미리 공개됩니다.
@ 당나라 중앙군인 16위에 대해 간략하게.
당의 초기 중앙군은 수의 제도를 본받아 부병제를 기초로 16위가 편성되어있다. (부병제는 쉽게 말해서 백성들에게 일정한 군역을 치르게 하여, 소집하는 군대)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부병제만으로는 돌궐과 토번. 위구르등의 적들을 막기 힘이들고 변방으로 군대를 소집하는 것이 쉽지않아. 중기이후에 절도사제도로 변형된다.
절도사는 각 변방에 행정과 군권을 가진 절도사를 두고, 그 휘하에 상비군을 결집시켜두는 방식으로 보면 이해가 쉬운데. 이는 후에 중앙의 통제가 약해졌을때. 절도사가 군벌화가 되는 이유가 됩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당의 군사력이 약해지는 계기는 일단 이세민이 남긴 국력을 가지고 이치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이후 측천무후의 시대가 되며 토번에게 대패를 당했고. 또 돌궐이 재건되었으며,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는 혼란속에서 아예 옛 고구려 영역은 통제할수 없는 지역이 되어버려 발해까지 건국되어 버리죠.... 아울러 고선지의 원정이 탈라스전투에서 실패하며 더는 당은 뻗어나갈 추진력이 떨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를 모으는데 오래걸리는 부병제보단 변방에 일정한 군대를 주둔시키고. 절도사에게 맡기는 방식이 생겨난 셈이죠. 물론 중앙의 통제가 개판이 되면서 절도사들은 모두 군벌화 되고. 안사의 난까지 이어집니다.
@ 당의 인구와 국력에 대해서.
작중에는 당의 인구는 6-700만호 수준에 3천만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수나라때 인구를 기준으로 설정된 수치로. 실제 집계된 호구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수문제 시절의 전성기를 맞은 수는 인구 890만호에 달했지만. 양제의 삽질과 수말당초의 혼란으로 인해 많은 인구가 줄어듭니다. 물론 줄어든만큼 사람이 죽었다기보다는 유민화 되거나. 당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인구가 유출되어 집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편이 옳겠지만.
당의 고종 이치가 즉위한 652년 무렵에는 380-400만호 수준만이 집계되었을 정도입니다. 수문제 시절의 반이죠.... 이세민이 정관의 치라는 중국역사상 몇 안되는 황금기를 주도했음에도 인구는 수문제의 반. 경작지는 3분의 1수준이었습니다. 그만큼 전란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겠죠..
다음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당시 인구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고종 이치에 이르러, 돌연 어느날 이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호부상서 고이행(高履行)에게 묻는다: "작년 전국에 인구가 얼마나 증가했는가?" 고이행이 답한다: "작년의 인구증가는 예전과 같습니다. 여전히 15만호입니다."
이치가 다시 묻는다: "그럼 우리 나라는 현재 인구가 얼마인가?" 고이행이 대답한다: "380만호입니다". 이치는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본다: "흠...현재 380만호. 정관지치가 모두 23년이니 매년 인구가 15만호씩 증가하면 23년간 증가한 인구수가 바로 360만호이다. 안맞는다. 설마 정관지치를 막 시작했을 때 인구총수가 20만호밖에 되지 않았단 말인가?" 고이행이 답한다: "어쨌든 비슷할 겁니다."
이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수나라 개황연간에 인구가 얼마였는가?" 고이행이 회답한다: "그 당시의 호구총수는 870만호입니다." 이치가 깜짝 놀란다. "네 말은 수당교체기에 전국의 인구가 거의 다 죽었단 말인가?" 이치는 한참을 생각하고는 다시 묻는다: "그럼 수나라 개황때 생산한 양식은 얼마였는가?" 고이행이 대답한다: "당시의 양식은 870만호가 50년은 충분히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치가 깜짝 놀란다: "당시에 생산력이 그렇게 높았단 말인가? 알겠다. 정관지치는 바로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로 50년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식을 미친듯이 먹어치운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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