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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이 떠나고 싶었기에 떠나보았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5.10 03:18
최근연재일 :
2020.07.23 00:47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1,140
추천수 :
7
글자수 :
224,703

작성
20.07.20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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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새로운 손가락

DUMMY

『여긴 내 은신처니까, 더럽히지 말고 쓰도록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리는 은신처를 떠나갔다.

아루아하고의 사이는···

멀어졌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새하얀 속살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어느정도 수긍했겠으나, 한 치조차 보지 못했다.

억울한 나의 심정을 알아주지 않는 아루아는 그럼에도 아침을 준비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으로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 주방에서 요리하는 아루아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서 식탁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턱을 괴었다.

그리운 과거가 떠올랐다.

마치 신혼부부 같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지금은 너무나도 달라진 나였다.

그 증거를 꼽자면, 생각에서 그치지 않는 나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뭐랄까, 신혼부부 같네."


그렇게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정말···! 저는 아직 리시스를 용서하지 않았다구요."


아루아는 뒤를 돌아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생각했어."

"하우으···?!"


갑자기 볼이 불그스름해지더니, 이내 휙 돌아서버렸다.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떠한가. 아루아의 귀여운 반응을 보았으면 족하다.


"리시스···."

"응."

"이제 거짓말은 안하실거죠?"


거짓말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다만, 내가 했던 말이 거짓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찌질한 변명이겠지.

이제 자기합리화는 관두자. 바뀌기로 결심했으니까.


"너에게 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아. 나의 신께 맹세할게."

"어라? 리시스는 종교가 있었나요?"

"그건 아니고, 이건 인간족이 하는 가장 급이 높은 맹세야. 지키지 않으면 살해당해도 마땅할 정도랄까."


그러면, 이라며 아루아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키지 않으면 제가 리시스를 죽여도 된다는 건가요?"


소름돋게 살벌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수를 얼어붙이는 한기와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살기가 담겨있었다.

지금의 아루아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몸이 덜덜 떨렸다.


"어, 응··· 그, 그렇지···?"

"저 말이죠. 사실은 지금도 불안해요."


몇 번이고 말해줘도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게 되어서겠지.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어릴적에, 제 어머니께서는 저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못해서 쫓겨났죠···."


그것은 내가 모르고 있었던 아루아의 이야기였다.

이제와서 나에게 들려준 이유는 뭘까.


"그래서··· 몇 번을 듣더라도, 안심하질 못하겠어요···."


아아, 이제야 알았다. 아루아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그럼 몇 번이고 말해줄게.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신에게 맹세하나요?"


아루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 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에서는 끼릭끼릭 하고 녹슨 쇠의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왜죠···?"

"이건 너에게 맹세할게. 나의 신보다도 소중한 너에게."


말을 마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괜히 멋을 부렸다고 후회했다.


"우, 우와··· 닭살···!"


몸을 부르르 떠는 아루아의 볼에는 투명하지만 입체감 있는 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어···? 아루아?"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런데도 몸은 제멋대로 움직여서 아루아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돼. 네가 운다고 해서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도 그럴게,

"지금 너의 앞에 있는 나는 훨씬 꼴사나우니까."


...


아루아가 만든 달걀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보들보들하게 으깨진 달걀과 새콤하고 달달한 마요네즈의 조합은 실로 훌륭했다. 하지만 양의 조절을 실패한 탓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음에도 대량으로 남아버렸다.

남은 건 릭에게 가져다주기로 정하고, 엘리의 은신처를 나왔다.

아침을 먹으면서 서로에게 솔직해지자고 아루아와 의논했다. 힘들거나 불편한 일이 있으면 말해주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거리를 걷다가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리시스, 무슨 일인가요?"


아루아가 실실거리고 웃는 나에게 물어왔다.


"아니, 뭐랄까, 아까 우리가 했던 대화 말이야. 신혼부부 같아서."

"그거, 아까도 말했잖아요···."


얼굴에 붉은색을 약하게 물들이며, 아루아는 고개를 돌렸다.

예전이라면 그저 기뻐했을 테지만, 지금의 아루아는 수줍어하고 있었다.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지도 않았다. 어떠한 감정도 숨기지 않은 순수한 미소였다.

조용히 길을 가다가 묘하게 거리를 좁히거나 손을 잡아달라고 하는 건 변함없지만.

하지만 변함없는 일에도 변화는 있었다.

나는 잡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예전이었다면 덥석 잡아왔을 텐데, 천천히 손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손끝이 닿자 화들짝 놀란 것처럼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다가왔다. 이윽고 손가락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감싸고, 손바닥을 맞대었다.

기나긴 여정이었다. 손 하나 잡는 게 이렇게나 어려워지다니. 그래도, 아루아의 수줍음에서 잊지못할 설렘을 받았으니 괜찮다.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아루아와 2층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릭의 집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릭은 바로 나와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깨끗하게 정돈된 집안이 보였다. 그곳에는 산을 이룬 쓰레기도, 바닥을 뒹구는 썩은 음식도 없었다.


"솜을 구해왔습니다."

"들어와."


릭은 우리에게 차를 대접해주었다. 드워프에게 차를 받는다는 건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가볍게 찻잔을 비운 릭은 아루아가 건네준 샌드위치를 한입 먹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내 아내도 이걸 잘 만들었지. 맛은 다르지만, 참 맛있어."

"감사합니다."


아루아는 칭찬을 받아서 기쁜 것 같았다. 보고있자니 흐뭇한 광경이었다.

이어서 릭은 솜을 만져보았다.


"양질의 솜이군. 좋은 실을 짜낼 수 있을 거야."

"실은 어떻게 짭니까?"

"저쪽 창고에 방직기가 있어. 그걸 써."


나는 일어나려는 릭에게 방직기의 사용법을 물어봤다. 하지만 자신도 모른다는 답이 돌아와버렸다.

방직기를 보면 사용법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먼저 방직기를 꺼내기로 했다.

창고의 안에는 먼지가 가득했고, 그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정리되어 있었다.

낡은 재봉틀과 실과 바늘이 들어있는 초콜렛 상자, 재단되지 않은 천과 그 위의 가위 등등.

그것들은 그의 아내가 남긴 유산임이 분명했다.

하나하나 추억이 담겼고, 행복이 담겨서 괴로워도 버리지 못했겠지.


"애잔함이 느껴져요···."

"동감이야."


구석에 놓인 방직기를 찾았다. 그것은 물레바퀴와도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긴한데, 봐도봐도 사용법을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설명서는 없을까요···?"


아루아는 선반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툭 하고 노트를 떨어뜨렸다. 대신 주워서 제자리에 놓으려다가 문득 내용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게 설명서가 아닐까.

노트의 표지에는 큼지막하면서도 삐뚤빼뚤한 문자들이 적혀있었다.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문자가 굶고 강직한 걸로 보아, 드워프의 문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 적힌 문자는 엘프어였다. 문자의 끝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걸로 보아, 확실했다.

연필로 쓰여진 글씨는 진한 자국을 칠칠치 못하게 남겨놓았다. 그것이 싫었던 건지, 양면에 메모 하지 않고 오로지 한쪽 면에만 글자를 적어두었다.

어린 아이의 귀여운 고집이 엿보이는 노트였다.


"그러고보니, 따님이 있었다고 했었죠."

"어라···? 이거 읽을 수 있어?"

"네, 자국이 진해서 손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손글씨의 서투름이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아루아는 정성과 열정이 느껴지는 어린 문자들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앗 하고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방직기의 사용법이 적혀있어요."

"좋아, 바로 만들자."


...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실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솜을 풀어서 부드럽게 만들고, 부드럽게 만든 실을 고치 형태로 만들고, 고치 형태로 만든 솜을 방직기에 넣고 돌려야 비로소 실을 얻을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쉬워보이겠지만 손가락이 없는 나로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짜야만 해.』


릭의 말은 아루아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갸르키카의 솜에 담긴 특수한 마력은 솜을 실로 만드는 동안에 제작자의 몸과 동화되어서, 그 신경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해, 내가 만들어야 나의 의수를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꼬박 반나절에 걸쳐서 실을 뽑아내자, 릭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며 실을 가지고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나와 아루아는 소파에 앉아서 낮잠을 잤다.

그대로 시간이 흘렀고, 해가 사라졌음을 알리는 시계종 소리가 들려오고나서야 릭은 작업실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10개의 손가락이 들려있었다.

꽃잎이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무늬가 새겨진 금속들은 의수(義手)라기보단 의지(儀指)라고 부르는 편이 알맞았다.


"그동안 더 가볍고 편하게 개량을 해봤지. 이제 이게 너의 손가락이야. 한 번 껴봐."


아루아는 릭에게서 손가락들을 받아, 나의 손에 하나씩 끼어주었다.

처음으로 엄지를 끼웠을 때에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과 맞닿은 순간 달라붙었다. 실과 신경이 연결되어서 하나가 된 느낌.

시험삼아 움직여봤다.

까딱까딱.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손가락을도 모두 끼워봤다.

모두 자유자재로 까딱까딱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은 이게 원래 나의 손가락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네···."


컵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감탄했다.

이야, 이건 대단한 걸.

이야아아아, 이건 정말 대단한 걸.

아루아도 신기했는지 내가 손가락을 하나 움직일 때마다 우와아,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잘려나가지 않는 이상은 계속 붙어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건 이제 됐어. 마리안타를 찾아주겠다, 그렇게 한 번 말해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릭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거북했던 걸까.

말을 바꾸며 나와 아루아의 등을 떠밀었다.


"어, 어어···?"

"시간이 늦었어. 잘들 가고, 건강하게 살아. 죽지 말고."

"저기요···?"


쾅.


닫히자마자 잠겨버린 문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었다.


...


창고에는 과거의 추억들이 가득하다.

낡은 재봉틀에서는 옷을 만들던 아내의 미소가 담겨있다.

바늘이 담긴 초콜렛 통에서는 손을 찔려가며 도왔던 열정과 달콤한 꿈을 꾸게 만든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재단되지 않은 천에는 그려나가지 못한 미래에 대한 향수가 서려있다.

그리고 그곳의 어딘가에 묻혀있을 작은 노트에는 세상 누구보다 어여뻤던 딸의 이름이 적혀있다.

릭은 오늘도 인형을 만들며, 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본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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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잠깐의 휴식 20.07.23 23 0 15쪽
37 도적의 가르침 20.07.22 21 0 12쪽
36 신, 그리고 모험가의 국가 20.07.21 22 0 11쪽
» 새로운 손가락 20.07.20 25 0 12쪽
34 돌팔이 의사 20.07.19 18 0 13쪽
33 갸르키카의 솜-完 20.07.18 21 0 17쪽
32 갸르키카의 솜-7 +2 20.07.17 30 1 13쪽
31 갸르키카의 솜-6 20.07.15 29 1 12쪽
30 갸르키카의 솜-5 +2 20.07.14 33 1 12쪽
29 외전 - 그 소녀가 살아가는 이유 +2 20.07.13 33 1 17쪽
28 갸르키카의 솜-4 +2 20.07.13 25 1 12쪽
27 갸르키카의 솜-3 20.07.11 22 0 14쪽
26 갸르키카의 솜-2 20.07.10 21 0 11쪽
25 갸르키카의 솜 20.07.10 29 0 12쪽
24 인형을 만드는 대장장이 20.07.08 30 0 13쪽
23 지하국가 달란 20.07.08 26 0 11쪽
22 변수 20.07.06 26 0 12쪽
21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20.07.05 25 0 12쪽
20 마법을 연습하자 20.07.04 3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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