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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이 떠나고 싶었기에 떠나보았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5.10 03:18
최근연재일 :
2020.07.23 00:47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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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수 :
224,703

작성
20.07.14 22:31
조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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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갸르키카의 솜-5

DUMMY

석궁을 고이 내려두고 칼을 꺼내들었다. 산짐승들을 해체하는 용도이나, 그것이 칼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유능한 사수는 화살이 없더라도 적을 사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본인은 유능하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수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이고, 넘어야할 산인 셈이다.

앞을 보지도 못하고, 마법을 쓰지도 못하는 엘프지만 신체능력만큼은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탁탁.


앞꿈치로 가볍게 땅을 두들겼다. 소리가 퍼져나가며 주위의 사물들을 인지시켰다.

이렇게 하면 가만히 있을 때보다 더 넓은 거리를 탐지할 수 있다.


『그까짓 힘으로 저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목이 조여왔다.

오범회의 간부 구르게스에게 참패했을 때의 쓴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거대한 거미가 몸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칼을 꺼내든 소녀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고치를 두 앞발로 들고서 떠나가려 했다.


기회다.

크게 내딛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반응하지 않는다.

이대로 달려가서 거미의 배를 찢는다면 일은 쉽게 풀릴 것이다.


툭.


아루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머리에 닿으며 끊어졌다.

이상하다. 이곳은 방금 지나왔던 곳이다. 실이 있었다면 처음 지나올 때에 끊어졌어야 한다.

거미는 실을 짜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세로···?!」


이외의 가능성은 없었다.

세로로 줄을 놓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두 맞아떨어졌다.

발을 멈추고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거미는 꺼림칙할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변함없이 고치를 들고 가고 있다.


탁탁.


다시 땅을 두드려보았다.

소리가 퍼져나갔다.

알아채기 힘든 범위까지 퍼져나간 소리는 두꺼운 무언가에 부딪힌 뒤, 돌아왔다.


"읏···!'


몸을 뒤로 날렸다.

순간적으로 날린 몸은 낙법조차 취하지 못하고 넘어졌다.


콰앙.


굉음이 갱도 안에서 울려퍼졌다.

귀가 예민한 아루아에게는 바로 옆에서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꺄악!"


손으로 귀를 막아보았으나, 소리는 이미 끝나고 없었다.

잔음이 갱도 안에서 메아리치며 굉음을 만들어낸 거대 거미를 보란듯이 일러주었다.

두 마리의 거미가 들려왔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았다.

아니다. 괜찮다. 할 수 있다. 약해져선 안 된다. 할 수 없더라도 해야 한다. 이 몸이 죽더라도 리시스만큼은 구해내야 한다.

전에 리시스가 그래주었으니까.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니까.


「당신에게라면··· 버려지는 것조차 좋아요···.」


그 사람이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면, 그마저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라도 이 세상에 더 있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몇 번을 버려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와 근사한 추억을 만들어나갈 수 있으니까.


"스읍··· 후우···!"


그가 자주했던 심호흡을 따라했다. 긴장감을 묘하게 풀어서 애매하게 진정시켜줬다.


거미가 몸을 틀었다.


칼을 쥔 손에 힘을 단단히 주며 발을 내뺐다.


거미가 달려왔다.


내뺀 발을 내딛으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키에에에에에에엑!"


거미가 거대한 양발을 들어올리고 입을 벌렸다.


아직. 아직이다.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이윽고 거미는 두 앞발을 내리찍었다.


「지금.」


내딛은 발의 앞꿈치를 들며 몸을 허공에 눕혔다. 추진력을 이용해 거미의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엘프는 신체능력이 뛰어나다. 때문에 달리기가 빠르다. 달리기가 빠른 종족은 짐승의 피를 이어받은 페쿠스도 마찬가지이나, 하나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엘프의 비교적 체중이 적다는 것.

짐승 같은 속도로 달리다가 몸을 미끄러뜨린다면 체중이 적은 엘프는 압도적인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즉.

이 거미의 머리부터 시작해서 그 꽁무니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다.


푹.


거미의 턱을 찔렀다. 찔렀을 뿐이나, 미끄러지는 몸은 칼날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두꺼운 표피를 베어내는 칼을 붙잡은 손목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불규칙적으로 꺾였다. 지나간 자리에서는 푸른색의 혈액이 쏟아져 내렸다.


"키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런···!」


차마 끝까지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거미에 꽂은 칼이 마찰을 늘린 탓이었다.

실수했다. 계산하지 못했다.

어중간하게 베인 거미는 죽지 않고 여덟개의 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밑에 있던 아루아는 당연하게도 거대한 다리에 치이고, 짓밟혔다.


으드득.

으득.

으드드득.


"커헉···!"


몸이 두둥실 뜨더니, 이윽고 벽에 쳐박혔다.

폐속에 남아있던 공기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난데없이 부러진 팔이 들고 있던 칼을 떨구었다.

기침이 나왔다. 피가 섞여있다.

흘러나온 피를 소매로 닦으며 애써 일어섰다.

거미는 여전히 날뛰고 있다.

복수심을 가질 정도로 지능이 뛰어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저대로 놔두면 적어도 쫓아오지는 않을 거다.


"금방··· 갈게요···! 리시스···!"


부러지지 않은 손으로 칼을 주워서 입에 물었다. 그리곤 벽을 짚었다.

발에 차이면서 다른 거미가 지나왔던 길의 옆으로 날아올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불행의 위로 겹친 행운에는 감사해야할까.

잘 모르겠다.


「그런 건, 당신에게서 배우고 싶어요···.」


머리가 뜨거웠다. 손을 가져가니, 뜨겁고 질척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다. 터질 것만 같다. 열이 나고 있는 걸까. 정신이 아찔하다. 머리를 얻어맞아서 그런 걸지도.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죠···?」


아무런 문제없다. 팔 하나가 부러진 게 전부다.

이 정도는 리시스가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주었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자라다. 더 다쳐야만 한다. 엉망진창이 되어서 리시스를 구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깨어난 그에게 이렇게 말해줘야만 한다.


'정말이지, 제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칭찬도 받아야 한다.

쓰다듬도 받아야 한다.

서로 부둥켜안고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모험을 계속해야 한다.


『너에게서는 허브의 향기가 나. 진정되고 , 안심되는 향기야.』


"리시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시간이 지체된 탓에 거미의 꽁무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구나.』


그럼에도.

찾아야만 한다.

찾아내고, 구해내서, 그가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말겠다.


「피 냄새···.」


문득 코끝이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녹슨 쇠와 비슷한 피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이내 포화시킨다.

기억 속에 있는 냄새다.


「리시스의 피···.」


잘 설명하진 못하겠으나,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혈흔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니, 들려오고 있다.

피의 냄새가 들려온다.

떨어지는 피의 방울이 들려온다.


「가까워···.」


아까 머리를 얻어맞으면서 턱이 빠져버린 걸까. 침이 흘러나왔다.

거미의 형상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차츰 빨라지더니, 어느샌가 달리고 있는 자신이 들려왔다.


"찾았다···!"


바로 앞이다.

달려가서 죽여주겠다.


찰박.


생리적으로 역겨운 냄새. 이어서 질척하고 끈적한 액체가 발에 휘감겨왔다. 사방에 널린 고치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거미도 들려왔다.


"윽···!"


몸을 뒤로 눕혔다. 그대로 넘어졌다.

스르륵 미끄러지던 몸이 거미의 앞에 도달했다.

돌발적인 동작을 준비하지 못했던 발목은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접질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야, 자신이 나아가는 그곳에 리시스가 있었으니까.

부딪히지도, 베어내지도 못했다.

거미의 다리 끝에는 실로 이어진 고치가 들려있었다.

거미는 고치를 이용해서 넘어진 아루아를 공격했다. 내려찍고, 휘두르고, 빙빙 돌렸다.

그런 거미의 공격을 피하고자 구르고, 일어섰다가 넘어지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리시스는 무기가 아니야!!!"


화가 났다. 화가 났다. 화가 났다.

거미를 찢어죽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온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미 터졌을지도 모른다.


휙.


아루아는 바닥에 자빠지며 고치를 피했다.

이후부터 아루아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달려나갔다.

접질린 발과 멀쩡한 발, 부러진 팔과 멀쩡한 팔까지 써가면서 달려갔다.

손에 들린 칼이 끈적한 점액으로 더럽혀졌다.

점액으로 젖은 옷과 피부가 타는듯이 괴로웠다.

뒤에서 날아오는 고치는 피하지 않았다. 그냥 달렸다. 달리다보니 피해졌다.

가까워지자 거미가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래서 위로 뛰었다. 위로 올라탔다. 올라탄 뒤에 칼로 찍었다.

찍고, 찌르고, 갈랐다.

격한 몸부림에 날아가 벽에 부딪혀도 다시 달라붙어서 찔렀다.

몸 위로 올라타서 찔렀던 곳을 집요하게 찔렀다.

거미의 뇌를 직접 꺼내서 손톱으로 찢고 싶었다.


"키야아아아아아악!!!"


버티지 못한 거미가 높이 뛰어올랐다.

천장과 가까워졌다.

부딪혔다.

그 순간마저도 아루아는 칼을 쑤셔넣었다.

천장과 거미의 사이에서 찌부러질 때에도 칼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천장에서 떨어진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녀는 아직 거미가 멈추는 걸 귀에 담지 못했다.

비참했다.

몇 번이고 날아가다 부딪혀 터져버린 고치들에서는 갸르키카들의 녹아내린 사체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그들의 피와 살을 녹이는 점액이 섞이고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고치를 내던지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미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리시스···.」


더는 움직여주질 않는 몸에서는 원통함으로 이루어진 눈물조차 흘러져나오지 않았다.

지켜내지 못한 그를 위해 울어주는 것조차 해줄 수 없었다.

은혜에 보답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함께 갈 테니까 그때도 잘 부탁한다고 어리광 부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의 곁에서 함께 녹아내리는 건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걸요···.」


죽음의 문턱이 이르니, 뭐라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똑같은 최후를 맞는다면 그것도 낭만적인 죽음일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주마등인 걸까.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 버려지기 전. 마지막으로 저택에서 먹었던 만찬이 떠올랐다.


「하필 이런 때에···.」


최고로 맛있는 저녁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먹은 뒤에 죽고 싶었다.

그 소원이 이뤄진 걸까.

바로 앞에서 아픈 추억이 되어버린 만찬의 냄새가 풍겨왔다.

맛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입을 벌려보았다.

혀끝이 짜릿하면서 기나긴 갈증이 해소되는 쾌감과 허기가 채워지는 전율이 잠시나마 돌아왔던 의식을 끊었다.


「더러워···. 그런데 맛있어···.」


자꾸만 바닥을 핥아마셨다.

갸르키카의 피와 살을 녹이는 점액이 뒤섞인 그것은 미지근한 샴페인이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났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몸은 그 역겨운 음료를 매만지며 더 마시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하···! 아하하···!"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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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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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Personacon [탈퇴계정]
    작성일
    20.07.15 10:15
    No. 1

    공부 중입니다. 저랑 다른 스타일과 아이디어를요.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B둘기
    작성일
    20.07.15 22:23
    No. 2

    제 글로 공부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처음이어서 기쁘네요. 원하시는 답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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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죄송합니다. 갈아엎겠습니다. 20.07.25 32 0 -
38 잠깐의 휴식 20.07.23 23 0 15쪽
37 도적의 가르침 20.07.22 20 0 12쪽
36 신, 그리고 모험가의 국가 20.07.21 22 0 11쪽
35 새로운 손가락 20.07.20 24 0 12쪽
34 돌팔이 의사 20.07.19 18 0 13쪽
33 갸르키카의 솜-完 20.07.18 21 0 17쪽
32 갸르키카의 솜-7 +2 20.07.17 30 1 13쪽
31 갸르키카의 솜-6 20.07.15 28 1 12쪽
» 갸르키카의 솜-5 +2 20.07.14 33 1 12쪽
29 외전 - 그 소녀가 살아가는 이유 +2 20.07.13 33 1 17쪽
28 갸르키카의 솜-4 +2 20.07.13 25 1 12쪽
27 갸르키카의 솜-3 20.07.11 21 0 14쪽
26 갸르키카의 솜-2 20.07.10 20 0 11쪽
25 갸르키카의 솜 20.07.10 29 0 12쪽
24 인형을 만드는 대장장이 20.07.08 29 0 13쪽
23 지하국가 달란 20.07.08 26 0 11쪽
22 변수 20.07.06 26 0 12쪽
21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20.07.05 24 0 12쪽
20 마법을 연습하자 20.07.04 3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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