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이단영의 서재입니다.

전체 글


[심연의 사냥꾼들 - 설정] 저자의 서문(舊)

이븐 베르자크의 전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내게 달성할 수 없는 위업처럼 보였고 무엇보다도 생식능력을 잃은 마물을 생태계에 방생함으로써 개체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나의 야심찬 계획이 이제 막 발돋움하던 중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마음을 돌리기까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써서 독자 제현을 지루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다는 사실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러한 제안에 응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훌륭히 증명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대신에 내가 이 책에서 택하게 된 서술의 방식을 변호하는 데 서문을 할애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베르자크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다음은 일반적인 전기의 형식을 빌려 이븐의 초기 생애를 아주 조금 기술한 것이다.


이븐 베르자크는 1247년 잔베르 근교에서 사냥꾼인 다비드 베르자크와 그의 아내 에브나 베르자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인 에브나는 산고의 후유증으로 앓다가 그해 봄에 죽었다. 물론 이븐이 아직 젖을 떼기도 전이었다. 이븐은 산양의 젖을 먹고 자라나 아주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사냥을 옆에서 거들며 훗날 그의 대적자들에게 파멸을 안길 안목을 키워 나갔다.


나는 이런 식으로는 베르자크의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내가 이제는 베르자크의 이름을 따서 베르자키스나이센이라는 길고 멋없는 이름으로 개명된 잔베르에 그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찾을 요량으로 방문했을 때, 그의 전투를 기록한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찾은 성당의 전시관에서 맛본 쓰라린 실망감은, 위와 같은 식으로 쓴 전기에서도 재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발견한 이븐 베르자크는 빛을 다루는 화가의 능숙한 솜씨에 힘입어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지각 있는 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만큼 자명하게 광휘를 두른 성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 깔린 산더미 같은 늑대인간들의 시체로 미루어 짐작건대 저 유명한 잔베르 탈환의 모습을 담고자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잔베르 탈환이 있은 훗날 베르자크를 만나볼 수 있었던 행운 덕분에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사건의 전말은 훨씬 처참하고 동시에 지저분한 것이었다. 그가 늑대인간들의 내장에서 튀어나온 오물을 뒤집어쓰고 또 때로는 그것들의 시체를 덮어쓰고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전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명감에 불탄 것은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은 어쩌면 제안을 받기에 앞서 예정된 일일지도 모른다. 베르자키스나이센의 성당에서 사려 깊게도 내게 마련해준 작업실을 사양하고 그가 유년을 보냈던, 이제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무단 침입하여 한동안 체류하며 이 책을 쓴 것은 바로 그런 성자 베르자크가 아닌 범인(凡人) 베르자크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나는 앞에서 이 글을 일컬을 때 전기라는 말을 피하고 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더 분명하게 하자면 이것은 소설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실존하고 있거나 한때는 실존했던 이들이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와 대사를 쓸 때에는 그들이 실제로 남긴 기록, 그리고 아주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참고했다. 그것조차 불가능할 때에는 인물의 행적을 조심스럽게 쫓아 그가 했을 법한 생각을 유추해내서 썼다. 다행스럽게도 베르자크에게는 그의 행적을 증언해 줄 많은 수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이 책은 베르자크뿐 아니라 그와 풍진의 시기를 함께 했던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에 마음이 상한 이들도 분명 있을 것으로 안다. 나는 순수한 악을 묘사할 때는 그것이 항상 마물을 향하도록 글을 가다듬었지만 때로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악의 영역을 넘겨다본 인물도 있었고 그러한 인물을 묘사할 때 그가 저지른 일들을 마치 없었던 것인 양 쓰거나 혹은 더 심하게는 불가피했던 일인 것처럼 포장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나는 그들이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가정 하에서 최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동기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 대해 어떤 편견이나 주관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있는 그대로를 쓰려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이고 몇몇 경우에는 그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 책의 기획자이면서 나의 고용주이기도 한 제르비엘 박사는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수많은 문필가들을 제치고 마물의 생포를 주문하는 괴팍한 대학 교수인 나를 집필자로 선택한 것일 테다. 그러므로 나의 주관과 편견은 필연적인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불러일으킬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오롯이 나의 책임이다.


사냥꾼의 시체는 혼자서 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옳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표독스러운 마물들이 찢어놓은, 사냥꾼의 장렬히 산화한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언제나 여러 인부들이 동원되었지만 때로는 이들의 일감이 예기치 못한 행운을 맞아 줄어들기도 했던 것이다. 사냥꾼들이 묻힌, 마일스아이렌에 마련된 사냥꾼의 전당에는 무거운 석제 관 뚜껑 대신 조촐한 나무판자로 덮어둔 석관이 있는데, 항상 손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들 손무덤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석관이다.


팔 하나만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진 사냥꾼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 우연히 마물의 뱃속에서 소화가 덜 된 채 핏덩어리로 발견되는 사냥꾼도 있다. 이들의 유해는 시신의 다른 부위가 후에 수습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나무판자로 덧댄 손무덤에 묻혔다. 사냥꾼의 전당을 방문해본 이라면 시설 관리인이나 동전 몇 푼에 사냥꾼의 생애와 비화를 조잘조잘 읊어다주는 꼬맹이 안내원들로부터 익히 들었겠지만, 혹은 나무판자를 걷어내고 그 속을 확인할 만큼 대담한 방문자라면 직접 보아 알겠지만, 지금 베르자크를 위해 마련된 석관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권총 한 자루만이 들어있다. 내가 쓴 결말의 모호성은 바로 이 같은 베르자크의 미완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베르자크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흥미로운 주제를 꺼내기에 앞서 오랜 시간 뜸을 들이는 나의 못된 버릇이 베르자크와 나 사이에 있었던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려는 욕심을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아마도 본문을 통해 충분히 전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본다. 잔베르에서 그가 벌인 반쯤은 영웅적이고 반쯤은 광적인 늑대인간 사냥으로 처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뒤 교단의 전설적인 마물 사냥꾼으로 자리매김한 이븐 베르자크의 생애를 독자 제현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는 돌발적 사건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이야기 역시 지방의 어느 작은 여관에서부터 시작된다.

                                                                                         1291년 봄
                                     베르자키스나이센에 있는 어느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슬로언 드웬다이크


*편집자 주: 드웬다이크 씨는 여기서 자신의 최신 연구 과제를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지만 본문과의 연관성을 고려했을 때 삭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편집자의 조언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었다.
**편집자 주: 드웬다이크 씨는 이 책의 1판이 출간된 뒤 책에서 묘사한 몇몇 인물들의 유족들에 의해 복잡한 소송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변호사 선임을 위한 수임료를 현재 모금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구매하실 때 사은품으로 함께 지급된 책갈피를 참고해주시 바랍니다.



댓글 2

  • 001. Lv.74 수국과국화

    18.10.13 01:49

    아, 본문은 가독성을 훨 좋게 만든 거엿네요. 옛날에 돈 키호테 서문이 이런 느낌 받았는데 ㅋㅋㅋㅋㅋ
    중세에 쓰인 소설을 읽는다는 컨셉에는 잘 맞긴한데, 이건 좀 과몰입인듯 합니다ㅋㅋㅋㅋㅋㅋ 누갘ㅋㅋㅋ 인터넷 소설에 풀로 서문을ㅋㅋㅋㅋㅋ그것돜ㅋㅋ 작중 작 서문을ㅋㅋㅋㅋㅋㅋㅋ

  • 002. Lv.27 이단영

    18.10.14 22:03

    지금 보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올렸나 싶기도 한데, 또 나름대로 공을 들인 글이라서 아쉽기도 하네요. 과몰입 인정합니다.


댓글쓰기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글목록
번호 제목 작성일
22 잡담 | 병고스 21-10-14
21 잡담 | 이요 환담 20-09-21
20 연재 관련 | 베일 20-09-19
19 텍스트 - 교차 |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20-05-09
18 연재 관련 | 차기작 표지 작업 19-09-29
17 텍스트 - 교차 | 절망에 대한 반항 - 루쉰 19-03-27
16 심연의 사냥꾼들 - 설정 | 지도(미완성) 19-02-23
15 연재 관련 | 7막까지 읽으신 분들께(내용 정리, 스포일러 포함) 18-10-07
14 연재 관련 | 휴재 공지(9/6~9/30) 18-10-02
13 텍스트 - 교차 | 『위쳐1: 엘프의 피』 - 안제이 사프콥스키 18-09-30
12 텍스트 - 교차 | 『소설의 현대 시학』 - S. 리몬-케넌 *1 18-08-29
11 텍스트 - 교차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 마이클 셔머 *2 18-08-18
10 텍스트 - 교차 | 〈We Don't Need a Hero〉 - Edguy 18-08-17
9 잡담 | 『심연의 사냥꾼들』의 인물들에게 테마곡이 있다면 *2 18-08-04
8 텍스트 - 교차 | 『엔드게임』 - 사무엘 베케트 18-08-02
7 텍스트 - 교차 | 『중세교회사』 - R. W. 서던 18-07-29
6 잡담 | 심영의 사냥꾼들 *2 18-07-21
5 심연의 사냥꾼들 - 설정 | 주요 세력 관계도 18-07-16
» 심연의 사냥꾼들 - 설정 | 저자의 서문(舊) *2 18-05-22
3 텍스트 - 교차 | 안개와 비 - 샤를 보들레르(황현산 譯) 18-05-15

비밀번호 입력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