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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곰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생각

원후왕


험한 산을 오르는 이가 있었다.
깎아내릴 듯 아찔한 계곡, 울창한 산림을 노니는 자는 검은 가사를 두른 노승이었다.
희끄무레한 짧은 머리털 밑으로 첩첩이 쌓인 인자한 미소는 시종일관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조금만 삐끗해도 추락할 높은 산을 오르며 그는 숨 한번 헐떡이지 않았다.
심지어 첩첩산중을 노니는 이도 오로지 그 하나였다.

"어흠. 참으로 맑은 공기도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허. 시상이 절로 떠오르면 좋으련만, 기쁨도 속세에 두고 왔으니 내 이를 어쩌하랴. 시재가 없으니 답답하나 불자가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아니되겠지. 아미타불. 아미타불이로세. 어흠."

노스님의 중얼거림이 부드럽게 울려퍼졌다.

"그러니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오공아?"

인자한 미소가 길 옆을 향했다.
그곳엔 커다란 동굴이 하나 있었다. 작은 철장하나 없는 동굴 안에는 대단히 위압감 넘치는 누군가가 큰 몸을 짓이겨 넣은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다란 꼬리, 자주빛 털이 감도는 눈썹. 붓으로 그린 듯 살기 넘치는 눈매. 앙 다문 두툼한 입술 사이로 길쭉한 송곳니가 비죽 튀어나와 한층 그의 모습을 괴기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방금 숯에 옮은 양 활활 타는 불꽃같은 갈기털. 그는 손오공이었다.
손오공은 아무런 결박을 하지 않은 채 동굴에 들어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체념에 가까웠다.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어허, 요 녀석 말뽄새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이 놈아. 스승이 제자를 보러 오는데 일이 있어야 하느냐?"
"제자도 제자 나름이지요. 제자가 스승을 찾아뵙지 못함은 이 무슨 불경이란 말입니까."
그르렁, 하고 손오공은 큰 숨을 내쉬었다.
"속세. 내세라 하지요. 천년만년 살아온 놈들도 불경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도 내 스승만큼 훌륭하신 분을 뵌 적이 없소."
"나도 너 처럼 멍청한 원숭이는 처음이니라."
노스님의 태연한 대꾸에 손오공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
"거, 말씀 하시고는."
"거, 녀석 냄새 하고는."
"내 벌을 받아 이곳에 갇혀 있는데 어찌 씻겠습니까?"
"개나 고양이는 제 침으로 잘만 씻더구나. 너는 어찌 그렇게 하지 않느냐?"
노스님의 말에 손오공이 우람한 가슴을 쭉 펴며 당당히 말했다.

"나는 원후왕이오."
"나는 부처다."
"틀렸습니다. 부처는 저 위에 있지요."
그의 대답에 노스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재주가 좋아졌구나. 오공아, 내 오는 길에 경치를 봐 두었는데 하필 이를 표현할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마음에 담고 말았느니라. 너와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좋았을꼬 하며 걸었다."
"나는 그런 재주는 없습니다. 내 재주란 것은 오로지 여의봉으로 스승님 앞길 가로막는 놈들을 강정마냥 깨부수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노스님이 손오공 앞, 동굴 입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네 마음에 달린 문제이니라. 부처도, 원후왕도 네 마음에 달린 문제야."
"그리 생각한다면 무엇이 어려운 문제겠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쉬울까요!"
순간, 손오공의 눈이 활활 타오르며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스승님께서는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저도 한때는 금수의 왕이었으며 하늘을 호령하기도 했습니다! 알량거리는 하늘 위 대신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며 자유를 누렸지요! 나는 그런 놈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불도의 길을 알려 주시고, 죄를 뉘우쳐 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노스님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내 제자가 아니란 말이냐?"
"자격이 없지요!"
"자격은 누가 주는 것이냐? 내가? 아니면 네가 얻은 것이냐?"
노스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흉흉하던 손오공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노스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게는 아직도 네가 어린 원숭이 같다. 투정부리기 좋아하고, 때도 쓰고 앵앵거리는 아기 같구나."
"뭐요?"
"아기 같다고 하였느니라. 어허라, 이 녀석아. 사실 이곳 풍경이 무에 좋단 말이냐. 죄수가 죽기 직전까지 가두는 마산이거늘. 어찌 좋겠느냐. 다만 내 안에 풍경이 있고 부처가 있으니 이 곳은 명산이고 또 절경이니라.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일이다.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닌, 내 마음에 달린
일이 바로 부처요, 나 자신이니라."
노스님, 아니 삼장법사가 조용히 합장하며 절했다.
"나는 이만 가련다. 오공아, 나는 내게 죄를 묻고자 온 것이 아니다."
손오공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유난히 작고 여윈 삼장법사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것을 손오공은 놓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제자를 보러 오는 것에 일이 어디 있겠느냐. 제자야. 몸 성히 잘 지내거라. 나는 너를 원망하지도 않고, 또 동정하지 않는다. 네 말마따나 너는 왕이었고, 제천대성이며 또 이 땡중의 제자가 아니더냐. 어허, 통재라. 나는 부처의 자식이라 아들이 없지만, 내게 남은 정은 네가 가졌으니 이 또한 부처의 뜻이고,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이제 나는 가련다. 얼마 남지 않은 열반의 길에 가야하니 매우 바쁘나 네게 하고픈 말이 있어 찾아왔니라."
손오공은 어느새 그의 등 뒤에 정좌해 앉아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의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음을 비우거라."
평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또한 마음이니라. 내 안에 부처가 있는데 계율이 무슨 법이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또한 잊어버리거라. 너 자신을 잊고 다시 태어나거라. 불에 태워 없애 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얻거라."
삼장법사의 몸이 여위어 갔다. 가을나무처럼, 새 생명을 심어주듯 끝없이 읊조렸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부처의 품에 들고 나는 이제 새 갈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내게 남은 짐이 바로 너이더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했으며 더 이상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의 부처는 너를 용서하라 말씀하시는구나. 네 안의 너는 어떠하냐? 네 자신이 원망스러우냐?"
"그...그렇습니다. 제자, 미칠 듯이 저를 저주합니다. 불사자의 육체가 이토록 괴로우며 고통스러운지 몰랐습니다!"
"어허, 불사자란 괴로운 법이다. 세상 모든 업보가 네 어깨 위에 있구나. 허나 이를 짐이라 여기지 말고 가벼운 옷이라 생각하거라. 한풀, 한풀 겹겹이 입고 나면 그 어떤 것보다 너를 따스히 지켜줄 것이니라. 이윽고, 부처가 마음에 깃드는 법이다. 부질없이 용서하라, 아끼라고 하지 않겠다. 운명이 가는 곳으로 가거라.  마음을 다하여 너를 섬기거라. 누가 너를 미워하겠느냐? 누가 너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바로 너 자신. 스스로를 아끼거라."
"스승님!"
"이제 가련다. 길을 떠나련다. 어허, 가볍구나! 이토록 가벼운 길이 있을 줄이야..."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허망함을 알면서도 손오공은 손을 내밀었으나 그의 스승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윽고, 삼장법사가 사라졌다. 손오공을 손을 거두며 흐느꼈다. 텅텅 비어버리고, 악만 가득할 줄 알았던 마음은 어느새 작은 온기와 굵은 씨앗이 들어 있었다.
"못난 불제자, 스승님 가시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제 자신을 알겠나이다."

스스로 열반에 들기라도 하듯, 손오공의 눈가에 맻힌 굵은 눈물방울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소리는 깃털보다 가볍고 허허로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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