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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미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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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어둠의 심연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소설이라지만 묘사를 위한 묘사와 복잡한 문장 구조로 인해  정자처럼 성질이 급하거나, 나처럼 단순하게 사고하는 둔치들에게는 ‘조지프 콘라드’의 ‘하트업다크니스’가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찰리 말로의 회상에 의지한 소설의 구조에 다소 지루한 느낌을 받았고, 인간의 악마성을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인간들로 북적이는 현실 또한 악의 일반화라는 도덕의 경화현상을 가져오게 하였다. 


프랜시스 코프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의 모태가 된 소설이지만 정자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인 세상이었다. 기분이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아 목로술집에서 술잔이라도 벗하고 싶었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로 목로술집이 생각났다. 행여 젊음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려나, 생각은 행동을 유발한다.


‘인간이 상아를 쫓아 악을 행하는 것, 살인, 강간, 방화, 밀엽, 음모, 반란, 복수와 같은 음지의 인간이 뙤약볕 아래 득시걸거린다. 그들을 마주한 니그로들은 인간인가, 짐승인가. 되묻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광경, 죽음을 마치 멀리 간 애인이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며 나무그늘 아래에서 온갖 구부러질 수 있는, 찌그러질 수 있는, 비틀어질 수 있는 자세로 육신의 고통을 잊게 할 죽음을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나약함인가, 절망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인가. 난 지금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두 잔을 마시고 그 소설 속 세상일 것 같지만은 않은 역겨운 상상의 산물의 포로가 되어 있다. 기분이 더러워 술을 마시지만 더 더러운 것은 모든 남자들이 소설 속 인물처럼 내 망막에 맺힌다. 문제다.


현실감이 떨어진 복장으로 치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분장까지 한, 한  무리의 남녀가 우루루 술집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요란한 등장이 정자의 상념을 뚫고 들어와 헤집어버렸다. ‘어둠의 심연’은 순식간에  ‘술집의 혼란’으로 바뀌어 버렸다. 


모두 여섯이었다. 남자 셋, 여자 셋 아니 그렇게 표현하면 틀렸다. 여배우 셋, 남배우 셋이 맞다. 그들은 무대의 틀을 벗지 않고 있었으니까. 어딘가에서 러허설을 하고 작은 뒷풀이 자리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아직 세상을 알 나이와는 거리가 다소 먼 무리였다. 그들 중 나이가 들어보이는, 그래 봐야 고작 30대 초반 남짓, 여배우가 주인집 아주머니를 불러 주문을 했다. 커다란 덩치에 하녀의 복장과 메이커업으로 분장을 했는데, 짐작컨대 비중 있는 조연으로  현실적으로 흥행을 이끄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공간을 지배하는 제스처로 봐서.


“아줌, 여기, 껍데기 3, 소주 3, 잔 6, 젓가락 6, 그리고 밑반찬 좀 주세요!”

“아이고, 주문 한번 차지다. 누가 김 감독 아니랄까봐? 좀만 기둘러!”


바람이 불거나 어깨가 시리거나 가슴이 아려오면 자주 찾는 돼지 껍데기 구이에 김치두루치기가 일품인 대학로 골목에 자리한 소줏집이다. 골목이 골목인 만큼 연극쟁이들과 글쟁이 그런 류의 치들이 무리를 지어 들러,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떠들다 벽면에 되지도 않는 글 나부랭이나 끼적이다 가는 곳, 알만하다. 


자주는 아니지만 주인집 과부가  알아 볼 정도의 사이. 언제나 혼자니까 매상하고 거리가 먼 손님이라 손님이 없으면 반갑고 있으면 귀찮은 그런 류였다. 정자는.  


무리들 틈에서 그새 소주를 세 병 더 주문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소리가 점점 힘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여자, 남자, 여자, 남자 그리고 짱! 가자! 돌으자! 미치자! 마시자!


“넌 말이야, 지중해의 남자가 무슨 그러냐?”

“지중해의 여자인 너는어떻고?”

“야, 인마! 지중해나 남해나 짠물은 마찬가지야 그냥 남해의 남자로 해.”


자작은 강요하지도 강요 당하지도 않아 알코올과 영혼의 만남이 자연스럽다


정자는 다시 잔을 채워 목젖 깊은 곳으로 부어 넣었다. 소주쯤이야. 보드카였음, 생각했다. 저들이 지중해와 남해로 세상을 이야기할 때, 정자의 머릿속에는 온통 콩고의 뱀처럼 긴 강과 비명을 지르며 지축을 흔들다 쓰러지는 코끼리의 가족들, 그들의 두개골에서 흐르는 붉은 저주가, 인간을 향한 저주가, 잘려진 상아의 영혼처럼 자신의 우울을 난도질했다.


코끼리의 저주는 언제쯤 고개를 들까. 아마도 자신의 두개골이 비통한 균열로 보름달 아래 고통으로 사무칠 즈음일까? 그날이 올까. 보름달이 뜨면 찾아오는 어떤 늑대 영혼의 저주처럼.


아무래도 오늘은 남자 사냥을 포기해야겠다. 정자 역시 코끼리 사냥꾼처럼 코끼리의 영혼을 빼앗는 남자 사냥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하루 만큼은 자신의 욕정을 무덤 속에 파묻어 놓고 욕정의 그림자만으로 자신을 달래고 싶었다. 어쩌랴. 생겨 먹은 것이 그런 것을. 이제 무리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오, 너 지중해의 남자여, 너의 성기를 저 태양에 달궈 디오니소스의 포도주와 함께 마시리라!”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나는 그것으로 정체성이며 그것으로 존재하는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야. 날 볼 게 뭐 있어? 그것 말고. 내 아내의 애인 아폴론보다, 포세이돈보다 나은 것은 그것 하나야.  그러니 날 그만 내버려 둬!”


밤은 깊어왔다. 동숭로 기타쟁이들이 버스킹하며 놀고 있다. 


군중 속 년들은 노래하는 놈 주위에 서성이며 암내를 드리운다. 세상은 암내가 없으면 존속될 수도 없고 지구가 돌지도 않는다. 암내는 세상의 정복자, 잔혹한 사냥꾼 ‘커츠’의 냄새와 같다. 남자를 사냥하는 암내로부터 남자들이여,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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