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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미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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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약수터에서

이른 약수터에는 동네 어르신들로 가득했다. 얼마 전 물탱크를 청소한다고 며칠 단수를 한 탓인지 오늘 새벽따라 더욱 붐볐다. 등이 굽은 늙은 여자, 그 여자의 옆에서 엉덩이를 하늘로 쳐켜든 채 생수통에 물을 받느라 정신없는 또 다른 늙은 여자. 무엇이 그다지 좋은지 여자들의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킬킬대는 늙은 남자들. 모두들 뒤엉커 약수터 탱크의 수도꼭지 주변을 차지한 이미 늙어버린 인생들. 하지만 아직도  본능의 탯줄은 끊어내지 못한 듯했다.


정자는 그들과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젯밤 그와 씨름하느라 소모했던 옥시토신을 다시 채워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기를 돋우는 데에는 이 산의 생수만한 것이 없었다. 새벽에 떠온 생수 한 잔을 투명한 유리잔에 부워 마시면 그보다 더 맛있는 음료는 없었고 , 그것은 곧 바로 삶의 활력이 됐다. 그녀의 피곤을 일거에 몰아내 주는 물, 이상하리만치 몸이 바로 반응했다. 단지 물일 뿐이데... 그녀의 선산이 여기에 있어서 그런가... 장정자는 인동 장 씨, 장희빈 집안의 피를 받은 여자였다.


“정자야, 물 떠 가야지. 정자야...”


앞에서 웅성거리던 어르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정자의 귀에 들려온 소리였다. 


“정자야, 물 떠 가야지. 물...”


분명 자신에게 물을 떠 가라는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정자는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 고개를 휘이 돌려보았다. 주변에는 물을 떠서 내려가는 어르신들과  부산한 산새들 몇 마리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을 뿐. 잘 못 들었다 생각한 정자는 서둘러 물을 받아 백팩에 넣어 산을 내려왔다. 


아침 시간의 청소는 정자의 활력소였다. 독서를 하면서 음악도 들을 수 있는 아침 청소 시간 만큼 정자에게 편안함 을 주는 때는 하루 중에 없었다.  거실 창문을 모두 열었다. 아직은 싸늘한 바람이 햇살과 함께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로봇 청소기는 제 갈 길을 찾아 먼지를 들이켰다. 모짜르트의 40번 교향곡이 공간을 수놓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정자는 이런 기분이 계속 된다면 오늘 하루도 굿 데이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현관의 벨소리가 들렸다. 현관의 비디오폰을 들자 왠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얼굴을 화면에 한층 더 가까이 댔다. 


“저... 김우열인데요.”


김우열? 정자는 화들짝 놀라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김우열이라면 지난 번 미팅 때 만났던 그 남자? 그가 어떻게 자신의 집을 알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김우열? 전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집을 잘 못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저... 대운광고기획의 김우열 대리입니다. 대표님께서 찾아 봬라 하셔서 왔습니다.”


그제서야 정자는 확실히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직원 보냈습니다. 직접 찾아봬야 하는데 전 지금 마닐라입니다. 생일 죽하드립니다. 귀국 후 인사드리겠습니다.”


“죄송해요. 전  박 대표님 회사 분인지 모르고...”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는 김우열에게 정자가 두손을 맞잡으며 공손히 맞았다. 한눈에도 그는 영업력 있어 보였다. 단정한 머리칼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슈트 차림의 그는 정자의 말을 정중히 되받았다. 


“아닙니다. 제가 미리 연락을 드려야 했는데... 대표님께서 하신다고 해서... 결례를 했습니다.”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이것만 전달하고 가야 합니다.  아 참, 생일 축하드립니다.”


김우열을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을 현관에 내려놓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김우열은 그렇게 정자 앞에 나타났었다. 정자는 김우열이 가져온 쇼핑백 속에 든 금박지로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포장지에는 갤러리아 백화점이랑 상호가 인쇄되어있었다. 뭐지? 정자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아악!”


정자의 비명 소리가 한낮의 아파트 거실에 울려퍼졌다.


파리하게 변한 안색에 사시나무처럼 몸이 떨려오는 정자는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어 거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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