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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라파엘

500년 전이지만 여전히 푸릇한 당신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군요. 창백한 석고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담고 있는 당신의 고뇌를 저는 알고 있어요.  어젯밤 당신이 바티칸 벽에 ‘아테네 학당’의 벽화를 그리다 말고 율리우스 교황에게 불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소식을 들은 저는 발코니에 나와 섰어요.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나오길 망설이는 어둠 속에 전 숨 숙인 채 서 있었어요. 발 아래 당신이 즐겨 거닐던 정원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무심히 저의 심사에 파고 들었답니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은 당신이 오늘 새벽, 멀리 바티칸의 정문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멈추었습니다. 저의 우울했던 시간이 말이죠.

멀리서 바라본 당신의 축 처진 등짝에서 율리우스의 욕정을 읽을 수 있었어요. 전 그래도 라파엘, 먼 발치의 당신 모습만으로도 안도했죠. 안도하는 저는 당신의 아픔에 그저 이방인인 셈이었죠. 그렇지만 아시나요?  당신의 시선과 음성과 심지어 심장의 소리까지도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아도 함께 하고 있어 괜찮아요. 잘 가세요.  멀리 도망가세요. 


오늘 아침 저를 보는 당신의 초상이 무얼 말하고 있을까요? 아뇨. 전 알지 않을래요. 당신이 말하는 대신 제가 할래요.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 는 말을요. 당신이 저의 아버지를 만날 때부터 저라는 여자는 당신의 사람이었어요. 전 잊을 수 없어요. 당신의 맑은 얼굴에는 그림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이, 이글거리는 눈빛 속에 뒤섞여 마치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지요. 당신이 저와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 보다 어깨를 으쓱하며 아버지께 물었죠. “레오, 당신의 능력은 신이 주신 건가요?”라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허허, 세상에 신이란 없어. 나의 작은 재주는 그저 내가 호흡하는 거와 같이 그저 살아가는 수단일 뿐이야.” 당신의 관심은 딴 곳에 있었죠. 네, 그랬을 거예요. 아버지의 말에 침묵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저의 집에 눌러앉았으니까요. 그때 전 알았어요. 당신의 차디찬 이성과 뜨거운 열정이 마치 제논이 말한 ‘화살의 역설’처럼 세상에 영원할 것임을요. 차가운 이성과 타오르는 욕정의 당신, 아... 무서웠어요. 당신의 악마 같은 내면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딩신은 결코 루시퍼처럼 추락하진 않을 것도 알았죠.  빛도 어둠도 아닌 당신은 그냥 신비한 전설처럼 세상이 감응하는 화가로 영원할 테니까요.  


당신이 나와 함께 정원을 산책할 때에는 가끔 긴 한숨으로 당신의 갈등을 에둘러 표현하곤 했지요, 오, 라파엘.  전 당신이란 사람으로 변모한 또 다른 제 전부를 잊을 수 없어요. 라파엘, 깨어나세요. 시간 따위는 이제 우리 접어버려요. 시간이란 우리를 갈라놓기 위한 신의 장난일 뿐, 대지의 지축을 흔드는 지진처럼 시간을 잘라버리세요. 그리고 폭우와 번개 아래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저를 보세요.  광야의 개암나무 잎사귀처럼 바람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저를 보세요. 가련한 저를 긍휼히 여기시어 얼른 저에게 오세요. 당신을 제 세포 하나하나가 터질듯한 환희로 맞이할 수 있도록... 무심한 시간의 세계를 너머 이곳으로 오세요. 라파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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