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저는 한줌짜리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려드는 사람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글에서는 그 향기가 너무 진하게 풍기네요.
시점이론이 50년대 이후 큰 변화를 겪지 않은 것은
소설이 그 이상의 시점을 내재하기 어렵다는 반증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게다가 새로운 시점에 대한 모험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한 소설 안에서 시점을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제가 보기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가 어느샌가 모르게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독심술을 부리듯 타인의 심리를 꿰뚫게 된다고 하면
더 좋은 소설이 될까요.
'사랑방 손님의 어머니'가 시점이 혼재하는 작품이었다면
오늘날까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논지에 맞는 예는 아닌 것 같아요.
'소녀의 관점으로 어른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잘 표현한 것'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명작이 된 이유이지, 다른 작품에도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시점을 바꾸든, 일치를 시키든 중요한것은 장치를 사용하는 이유이지 장치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1인칭 주인공 화자가 어느새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구는 상황'도 작가가 1인칭 시점을 유지시킬 역량이 없어서 제 멋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모종의 이유때문에, 납득이 가능하게만 쓴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시점 이론이 큰 변화를 겪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 교과 과정상에서 그 부분이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기존 시점 이론의 한계와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점을 분석한 이론들에 대한 거론이 없었던 겁니다.
확실히 그 이상의 시점을 내재하기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시점은 (사실 더 복잡하지만 간략하자면) 가장 작게는 주인공에게 속하며, 가장 크게는 서술하는 작가에게 속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큰 틀로만 봤을 땝니다.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렵죠.
고로 전 새로운 시점에 대한 모험이 필요하다고 얘기한 게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어차피 큰 틀은 정해져 있고, 그를 벗어나긴 어렵습니다. 다만 한 소설 안에서 시점이 일치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했을 뿐이죠.
그리고 마지막 얘기는 좀 이상하군요. 물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기존의 시점 이론에 입각한 훌륭한 작품이지만, 시점이 혼재하더라도 훌륭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담 반대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가 어느샌가 모르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얘길 진행하는 방식을 쓰면 더 나쁜 소설이 나올까요?
시점 이론의 오류 혹은 한계는 간단합니다. 최근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빈번하게 혼용합니다. 근데 기존의 시점 이론은 이런 경우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냥 예외가 되고 말 뿐이고. 하여 점차 텍스트의 구성이 지능적이고 교묘하게 바뀌어가는 추세에 맞춰 그를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이 요구되는 것이죠. 다만 국내에서는 그런 논의가 거의 없고, 외국의 이론이 번역되는 경우도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논문을 검색해 봤는데, 많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네, 네 가지 시점이 있다고 가르치죠. 문제는 그거 밖에 배우질 못했으니,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 얽매이려 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겁니다. '아, 이러면 1인칭도 3인칭도 아닌데? 나 잘못하고 있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대표적이죠.
또한 빈번하게 혼용한다는 건 사실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분명한데 마치 멀리서 새가 바라보듯 전체 지형을 주인공이 친절히 설명해준다든가(마법이나 여타 초월적 힘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절대 평범한 주인공의 시점에선 볼 수 없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 중에 툭툭 인물들의 속마음이 서술에 섞여 있다든가(사내는 책상을 후려쳤다. 젠장, 빌어먹을 일이 왜 이리 꼬였지? 답답했다. - 관찰자 시점은 인물의 겉만 보지 속은 못 봅니다. 속까지 보면 시점 이론상 그건 전지적 시점!),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작법이 발전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잡다양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론이 낡았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만, 그 낡은 이론이 여전히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래된 이론이지만(사실 문예이론 치고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점론도 초점론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부분에서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주네뜨에서 시작되어 채트먼을 거쳐 온 초점론은, 모든 문예이론이 그렇듯 꽤 큰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칭론이 제법 객관적으로 텍스트를 분석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초점론의 분석은 상당히 ‘자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독자(혹은 연구자)의 독서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분석 과정과 그 결과물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주네뜨가 초점론을 발표했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습니다.
일전에 서사학회에 참석했을 때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좀 오래전 일이라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 텍스트의 초점화와 내포독자에 대한 논문이었는데, 발표자와 토론자가 초점화와 내포독자의 기준과 근거, 그리고 효과에 대해 한참 동안 언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심할 만큼 초점론의 목적과 효과는 독자의 감정과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 중고등과정 교과서에 초점론이 소개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문법과 일반문법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네뜨의 서사이론 자체가 수용미학을 토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언급하신 브룩스와 워런은 대표적인 신비평가이고, 주네뜨는 이들이 들고 나온 시점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접근과 규정을 시도합니다.(수용미학은 신비평적 해석을 거부합니다) 실제로 주네뜨는 기존의 문학적 헤게모니들이 미리 설정한 경계에 대해 의문을 던졌고, 그 영역을 재설정하려는 작업에 흥미를 보였습니다. ‘Discours du Récit’에 언급된 초점론은 물론이고 그가 저술한 ‘Fiction et diction’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규정되어 온 픽션의 범주를 보다 확장시켰지요.
이러한 관점을 통해 본다면 시점론을 단순히 낡았다고 본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서술 시점에 대한 문제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새롭게 등장한 초점론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혹은 기존의 이론을 대체할만한 이론이라고 포장하기 어렵게 됩니다. 다만 이 두 이론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공존하며, 작품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을 뿐이겠지요. 별가님의 글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점론에 대해 조금 더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굳이 구시대 신시대를 나눌 필요도 없이, 고정된 그리고 배웠던 시점론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 거기에 억매여 있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점 고정으로 인해 글쓰기가 어려운 면이 너무 많다는 점도 한몫 하겠지요.
좋은 글은 좋은 형식과 좋은 글쓰기 능력이 조화되어야 함은 분명하지만, 형식파괴 또한 그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50년이 오래냐 아니냐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50년이면 오래 된 거라고 봅니다. 한 세대가 지난 거니까요.
비타민 연구에 대해 보자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타민 이론은 50~70년된 비타민 이론이 주였습니다. 50~70년 후의 지금 현재에 와서 이미 과거가 된 이론은 맞지 않은 셈이죠.
사람도, 세태도, 과학도, 학문도 급변하는 시대이니, 어쩌면 시점론도 더 발전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뭐, 이쪽으로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것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현재 시점에 대한 고정관념 탈피를 시도중인 작가입니다. 전 매 작품 마다 시점에 자유를 조금씩 두고 있는데 죄근 작품은 시점의 변화를 자주 두고 있습니다. 한편당 바뀌는 경우도 있고 일인칭 주인공과 관찰자를 넘나들기도 합니다. 근데 이게 잘만 완성하면 참 매력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 매끄럽지 않은지 몇몇분들이 몰입감 문제를 지적해 주셨는데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의 파괴 시점의 파괴 위험한 발상이지만 새로운 것을 위해서는기존것을 과감히 파괴해보는것도 좋겠지요. 과학의 혁명도 기존 이론의 계승이 아닌 기존것의 파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학도 그렇게 혁명을 일으킬수 있지 않을까요? 전 과거 소설속 이모티콘 사용에 대해서도 옹호하던 입장이었습니다 기존에 없던 것의 접목은 정말 과감한 혁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ㅈ
아니 시점이론이 법칙처럼 말하는 분들도 보이네요, 이론은 이론이죠
50년전에는 시점이론으로 전부 설명가능했지만 이제와서는 아니라는 거죠
이제는 시점이론으로는 설명이 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시점이론은 낡은게 되죠. 굳이 옛작품을 들어서 설명하는것 안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작법이 발달했다고 보기는 그렇지만 이제는 시점을 섞어쓰는게 몰입감을 얻는 독자와 작가들이 생긴겁니다
아랫글을 보니 한작가분은 출판사에서 추천을 해서 시점을 섞어쓴다는 댓글도 있더군요
몰입감이 안되는분들은 기존이론에 맞춰쓰면됩니다 안읽으면 되고요
전 아래 쟁점이된글을 읽었을 때 거부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익숙해진거죠
다르면다른거지 시점이론을 강요하는듯이 보이는 분들이있네요
시점이론이 법칙이라면 모를까 이론이면 지지자와 반대자가 있는건 당연합니다
두개의 관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맞는 쪽을 받아들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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