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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 님의 서재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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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부정
작품등록일 :
2013.10.10 18:50
최근연재일 :
2013.10.24 15:13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12,665
추천수 :
260
글자수 :
99,381

작성
13.10.14 21:16
조회
309
추천
12
글자
9쪽

8화

DUMMY

“학교 다녀왔습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무의미한 인사. 요즘 수정이 집에 오면 처음 하는 일이다.

불 꺼진 집안. 현관의 노랗고, 어두운 센서등 만이 수정을 반길 뿐이다. 여름임에도 썰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인기척 하나 없는 집안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수연이 만나고 있는 남자 덕분에 좀 더 넓고 깨끗한 곳으로 이사 올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낯설다. 추억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집. 엄만의 손때라곤 티끌만치도 묻어있지 않은 곳. 그래서 수정은 이곳이 꼭 남의 집 같았다.

수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동화를 벗어던진다. 차가운 눈빛이 집안을 훑는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마신다. 엄마나 언니가 있었다면 컵에 따라 마시라며 구박을 했겠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할 사람이 없기에 거침없이 병에 입을 대고 마셨다. 그래서인지 싱크대에 물을 틀 일이 없어 싱크대가 바짝 말라있었다. 그 때문인지 살짝 냄새가 올라오는 것도 같다. 수정은 인상을 쓰며 물을 살짝 튼다. 하수도는 구조상 너무 안 쓰면 냄새가 난다. 마치 이 빈 집안의 외로움처럼.

아침은 그냥 먹지 않고, 점심과 저녁은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먹으면 되기 때문에 밥솥의 코드도 빼둔 지 오래다. 어머니의 도마소리가 이제는 낯설 지경이다. 아침엔 그 소리가 시끄럽다고 그렇게 싫어했었는데.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컴컴한 집안에 푸른빛이 차오른다. 적막했던 집안에 그나마 말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방송을 봤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기분 나빠.’


마치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 같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텔레비전 속의 그들이 왜 웃는지도 모르겠다.

들고 있던 리모콘을 집어 던졌다. 하도 집어 던져서 그런지 흔들면 덜그럭 소리가 났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살 수 있으니까.

방에 들어간 수정은 옷을 갈아입었다. 슬쩍 침대를 바라본다. 더블침대. 언니와 쓸 땐 무척이나 작아보였는데 오늘따라 무척이나 넓어 보인다.

그녀의 언니인 수연이 집에서 자지 않은지 꽤 되었다. 엄마를 밤새 간호하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잠깐 들러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는 것 같다. 빨래는 자신이 대신 돌렸다. 어차피 세탁기가 하는 일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다 돌아가면 꺼내서 널기만 하면 되니까.

언니에게 미안했다. 같은 딸인데 누구는 밤새 간호하고 누구는 주말에나 잠깐 얼굴을 비추고. 아무리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도 자신의 몫을 해야 할 터인데. 가끔 티격태격 싸우긴 하지만 이럴 땐 언니가 정말 언니 같다고 느낀다. 그녀는 어른. 자신은 아직 아이라는 것을 요즘 너무 실감한다.

빨래 통에 든 빨랫감들을 세탁기에 넣고 동작버튼을 눌렀다. 웅웅거리는 세탁기를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온다.

피곤함에 잠에 들고 싶지만 빨래가 다 돌아갈 시간인 한 시간 동안은 잘 수 없다. 널어놓고 자지 않으면 요즘 같은 날엔 빨래에서 엄청난 냄새가 날 것이다. 마치 걸레를 대충 빨아서 대충 말린 것 같은 불쾌한 냄새가.


‘뭐로 시간을 때우지?’


온 종일 책을 보고 온 터라 다시 문제집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문득 언니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수정의 방엔 책상이 두 개 있었다. 각자의 책상엔 열쇠로 잠글 수 있는 서랍이 있었다. 같은 방을 쓰기에 서로의 사생활이 거의 없기에 암묵적으로 둘은 각자의 서랍에 대해서는 손대지도 묻지도 않기로 했다.

하지만 수정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고, 그 호기심만큼이나 똑똑한 아이였다. 수정은 언니 몰래 그녀의 열쇠를 하나 복사해둔 것이었다. 학생인 그녀에게 어른의 이야기만큼이나 흥미진진한 것은 없기에 한 발칙한 행동이었다.


‘열쇠를 어디다 뒀더라.’


자신의 서랍을 뒤져 구석에 숨겨둔 수연의 열쇠를 꺼냈다.

찰칵.

열쇠가 돌아가며 서랍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 언제 들어도 설레는 소리다. 두근두근. 항상 표정 없던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지어진다. 살짝 올라간 입매가 낯설다.

서랍이 열리자 수많은 편지와 몇 권의 일기장이 나온다. 이 편지는 수연의 남자친구인 순정이 보낸 것이다. 편지는 따로 봉투를 빼놓고 보관하고 있었다. 봉투는 그저 보통 볼 수 있는 흰 봉투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너무 양이 많아서 봉투까지 보관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얼핏 봐도 500통이 넘었으니까. 일기장은 수연의 것이었다. 매일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일이 있을 때는 가끔씩 적는 것이었다.

수정은 먼저 편지에 손을 댔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단 말이야.’


역시 몰래 읽는 연애편지는 재밌다. 특히 이 순정이란 사람은 글재주가 좋은 것 같았다. 단어를 쓸 때도 흔히 보는 단어가 아니었고, 사랑을 표현하는데도 남달랐다. 거창하거나 느끼하진 않았지만 솔직하고 감성적이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읽을수록 언니인 수연이 부러웠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몇 개의 편지를 더 읽은 후, 이번엔 수연의 일기를 집어 들었다. 가장 최근에 쓰던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역시 안 보는 사이에 새로 일기를 몇 개 더 써놓았다.


‘음?’


그녀의 눈에 새로운 사실이 들어온다. 병원의 한 의사가 자신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표현에 조금 흔들려 순정에게 미안하다는 내용까지.


‘이건 좀 의외인데?’


수정도 수연이 얼마나 그의 애인을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물론 수연이 비밀로 사귀고 있는 터라 자신에게 소개해주진 않았지만 그 정도는 순정이 보낸 편지와 수연이 쓰는 일기장의 내용만 비교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호기심이 더욱 발동한 수정은 연신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픈 이야기. 그리고 그 의사의 도움. 엄마와 자신에 대한 걱정. 돈이 주는 서러움. 결국 의사를 선택한 일. 그리고 통보한 이별.


‘맙소사.’


손에 힘이 풀린 수정은 들고 있던 일기장을 놓치고 말았다.


‘헤어졌구나.’


수정은 다시 서랍 속에 놓인 편지들을 봤다. 종종 같이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편지와 사진들은 정성스럽게 정리되어 있었다. 날짜별로. 분명 요즘도 신경 써서 챙기는 것 같다.


‘헤어진 후에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보관할 정도인데 왜 헤어진 거지?’


그녀의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순정의 벌이가 그리 시원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편지들에도 그런 점이 종종 언급되어있었다. 새 소설을 출판한 이야기. 그래도 본전은 넘어 수익은 조금씩 나서 계속 출판할 수 있어 좋다는 말. 좋은 선물을 하지 못해 미안해하던 글귀. 그 어귀 때문에 몰래 그의 소설을 찾아 읽은 적도 있었다. 따뜻하지만 흥행코드는 없는 글. 좋은 글이었지만 잘 팔리지 않는 글. 분명 그라면 아픈 엄마와 의대를 꿈꾸는 고3인 자신을 돌볼 수 없음이리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수정은 수연에게 더욱 더 미안해졌다.


‘내가 언니에게 짐이 되고 있었구나.’


허탈함, 미안함, 부끄러움이 수정을 내리 누른다. 생각해보니 언니도 무척 공부를 잘 했던 것 같다. 그 때 자신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라 긴가민가하지만. 원하던 과, 원하던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우리 집은 첫 등록금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것 같다. 좁은 방 안에 셋이 모여 잤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언니와 그 남자의 이별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편지와 일기를 훔쳐보면서 알았다. 그동안 언니가 팍팍한 삶 속에서 그를 만남으로서 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속으로 많이 응원했다. 언니가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을 결국 언니 손으로 버렸다. 사람들은 욕할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이유로 오래 사귀던 사랑을 버리고 돈이 많은 의사에게 간 것이라고.


‘그런 게 아냐. 그렇게 떠민 것은 나와 엄마니까.’


수정은 이해했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려면, 자신의 등록금을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단 것을. 평범한 가정이었다면 수연은 분명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또 이렇게 되었네. 나 때문에 언니가 희생된 거야.’


수정은 다시 편지와 일기를 예전처럼 잘 정돈해두었다. 서랍을 잠그는 그녀의 얼굴이 다시 차가워졌다.

일찌감치 어른의 사정을 알아버린 그녀는 어느새 웃음을 잃었다.

수정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작가의말

1화 조회수가 50인데 그 뒤로는 뚝 떨어지는 군요. 실력의 모자람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Personacon 이설理雪
    작성일
    13.10.14 21:59
    No. 1

    오메....수정이 저 어린것이... 대학 포기한다카것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0 부정
    작성일
    13.10.15 02:06
    No. 2

    대포는 아니되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강훈(姜勳)
    작성일
    13.10.21 14:23
    No. 3

    아직 실망하기에는 너무 이른 듯합니다.
    좋은 글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것도 글쓰는 것의 일부랍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0 부정
    작성일
    13.10.21 15:07
    No. 4

    조회수가 안 나오는 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독률이 떨어지는 것은 신경이 조금 쓰이네요. 무언가 읽는 사람과는 맞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라서요. 하지만 한 분이라도 읽어주신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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