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지안. 님의 서재입니다.

로키 : 밤의 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N.J.
작품등록일 :
2019.04.01 10:13
최근연재일 :
2021.06.22 19:00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9,313
추천수 :
72
글자수 :
953,438

작성
21.06.22 19:00
조회
35
추천
1
글자
26쪽

22. 커튼 콜

DUMMY

“피해 규모는 어떻게 되나요?”


원형으로 만들어진 방.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방의 중앙에 도착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어둡던 방에 일제히 빛이 들어오고, 그의 정면에 있는 화면 몇 개가 한꺼번에 켜지며 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 만년 빙하 70% 소실, 바이킹족 생존 인원 50여 명입니다.


부서진 빙산의 파편들이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고, 가장 큰 조각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근육질의 사람들이 살의에 가득 찬 얼굴로 무언가 숙덕거리고 있었다.


“북부에 사는 사람들은 고생 좀 하겠네요.”

- 바이킹족과 관련해서 토벌 퀘스트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방인들의 피해가 컸으니 길드 단위에서의 자체적인 토벌 시도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또렷하고 명랑한 여성의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은 어떻죠?”

- 아틀란티스의 영토 80%가 파괴되었습니다.

“케론 님이 슬퍼하시겠네요.”


남자의 입가에 순간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 아틀란티스인들이 강제적으로 대륙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미래 예지의 힘을 타고나는 그들이기에 거대 세력들이 아틀란티스를 상대할 방법이 열세 가지 정도 있습니다만, 보고가 필요하신가요?

“아뇨.”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믐달처럼 육지 대부분이 파괴된 아틀란티스에 우뚝 서 있는 등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알아서 하겠죠. 그런데 동쪽은 어떤 재앙이었습니까?”

- 아틀란티스인들에게 밀려 심해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아쿠아리안들입니다.


방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화면이 빛을 뿜었다. 그러자 남자는 바닷속에 있었다.


- 여태까지 우리가 겪었던 수모를 갚아 줄 때다!


머리에 둥근 어항을 뒤집어 쓰고 있는 듯한 차림새의 인간들이 손에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 저 빌어먹을 아틀란티스인들에게 물의 무서움을!

- 깊은 바다의 공포를!


그들은 자신들보다 두 배는 큰 해마를 타고 바다 위로 부상했다. 물 위로 떠오른 그들은 삼지창으로 바다를 조종하며 아틀란티스를 향해 돌격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번개 마법 쓰기 딱 좋은 분들이군요.”

- 실제로 드래곤들이 힘을 합친 번개 마법에 대부분이 소멸, 훗날을 기약하며 심해의 보금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아틀란티스를 괴멸시켰으니 자신들의 힘은 충분히 보여 주었네요.”

- 모험가 중에는 아쿠아리움과 아틀란티스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고자 하는 이가 나올 것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남쪽에서는 레비아탄, 크라켄, 사이렌 등 온갖 괴수들이 튀어나왔습니다.


머리 7개가 달린 거대한 괴물 레비아탄. 크기가 고래를 훨씬 웃도는 괴수 크라켄, 감미로운 목소리로 생명체들을 현혹해 잡아먹는 사이렌 등 바다에서 말 그대로 재앙이라 불리는 것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서쪽은 어땠죠?”


- 카덴 자치령의 주인 카덴 백작이 비밀리에 양성하고 있던 흑마법사 군단이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음침한 자들이 지하에서 킬킬 웃고 있었다.


- 혼돈, 파괴, 망각!

- 우리의 시간이 다가왔다, 전우들이여!

- 태초의 존재와 계약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천사, 악마들을 사육하는 것은 물론, 지상의 생명체들에게 혼돈의 기운을 주입해 뒤틀린 몬스터로 만들어냈다.


“···네크로맨서도 있었군요.”


전장의 1인 군단. 네크로맨서가 그들만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화면을 통해 보이고 있었다.


죽자마자 언데드로 되살아난다. 온갖 저주와 방어구로 능력치가 상승한 언데드는 살아 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돌격했다.


“여기가 제일 힘들었겠는데요?”


혼돈의 힘을 받아 강화된 네크로맨서 군단. 거기에 흑마법사들도 있어 상대하기 무척 까다로워 보였다. 솔직히 말해, 네 방향 중에 가장 재앙다운 모습이었다.


-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겁니다.


여성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왜 그러나 싶어 화면을 보고 있자니, 하늘이 갑자기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늦었던 거군요.”

- 예.

“어쩐지 많이 힘드신 것 같더라니, 혼자서 대륙을 구하고 오셨네요.”


에메랄드빛이 땅을 뒤덮자 언데드들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네크로맨서와 흑마법사들은 빛에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켰다. 거기에 가세한 드래곤의 브레스. 전황은 단 한 명의 참전으로 뒤집혔다.


“이제 대륙이 입은 피해를.”

- 라그나로크로 대륙의 주민 30%가 사망했습니다. 대륙의 50%가 지형이 파괴된 것은 물론이고 신성력과 마기의 영향으로 뒤틀리고 있습니다.


남자는 주먹에 힘을 주고 화면을 바라봤다. 신성력이 남아 있는 곳은 짙은 수림이 만들어졌고, 마기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동물이 실시간으로 미라가 되어 죽어간다.


- 라퓨타에 있는 이들은 전원 무사합니다.


남자는 여성의 보고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곳에 가지 못한 이들은 얼마나 됩니까?”

- 카드를 받은 이들 중 40%가 라퓨타에 도달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40%.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죽은 이들은 당신이 준 카드를 찢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카드를 제때 찢었다면, 생존율은 100%였을 겁니다.

“바보 같은 사람들.”


같이 죽어 주겠다는 말에도 기꺼이 희생을 선택한 어리석은 이들. 하지만 그들 덕분에, 그는 수월하게 라그나로크를 헤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 재앙으로 대륙이 입은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다만, 드래곤들의 개체 수가 심각하게 줄어들어 당분간 대륙에서 드래곤을 보기는 매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들이 있어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대륙은 진작 멸망했을 것이다. 네 개의 재앙을 상대로 브레스를 뿜어대고, 휘황찬란한 마법을 사용하는 드래곤의 고귀한 모습을 잠깐 화면을 통해 감상한 그는 몸을 돌렸다.


“들을 보고는 이제 다 들은 것 같습니다.”

-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방의 불이 꺼졌다. 출입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고,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넘었다.


“집으로.”



- 오성 그룹은 결국 이사진들이 전문 경영진을 구성해서 운영하기로 했어요. 저희 집안은 이제 대표 이사 같은 느낌으로,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게 되었고요.

“그렇군요.”


손을 대지 않았는데 저절로 핸들이 움직이는 차 안. 남자는 한 여자와 통화 중이었다.


- 아마 재명 오빠의 살인죄에 관한 재판이 끝나면 곧바로 재훈 오빠의 재판이 시작될 거 같아요.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 그렇지도 않아요.


핸드폰 너머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 이제 손을 뗐으니까요. 앞으로 오성 그룹을 어떻게 할지는 그들이 알아서 할 몫이죠. 저는 그들이 품위 유지비 같은 명목으로 주는 돈만 받아서 놀면 되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많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만.”

- ···기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니까 조금? 헤헤.


여자의 웃음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대륙을 유랑할 생각입니다.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 두, 둘이서요?

“아뇨. 블랑 님, 오르딘 님, 라스 님, 네이선 님도 함께 갑니다.”

- 아···.


실망한 건지, 안도한 건지 모를 탄식이 새어 나왔다.


- 좋아요! 이놈의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곧 쾌활해진 목소리. 그는 집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차의 문을 열었다.


“그럼 곧 보도록 하죠.”

- 예. 늦지 않게 갈게요.


통화를 끊은 그는 집의 문을 열었다.


“서프라이즈!”


한 남자가 주방 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뭐야, 왜 안 놀라?”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헤임달 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이 새끼들이 진짜···. 너무 일찍 권한을 넘겼나?”

“다시 가져가시죠.”

“아아, 됐어.”


그의 말에 남자가 질색하며 손을 흔든다.


“그것보다, 시간이 촉박하지 않아? 어서 가야지.”

“예. 박사님은?”

“나야 가장 좋은 자리에서 봐야지.”


남자가 거실에 있는 TV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운동복을 입는 것 같은 슈트를 착용하고 고글을 썼다.


- 어나더 월드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예.”


빛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과 함께, 그는 어느 적막한 바닷가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예.”


오른쪽 어깨에 앉은 헤임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로키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황제의 쉼터. 제국의 통치자가 묻히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삭막하군요.”

“어차피 죽어서 이런 곳에 묻힐 테니 괜한 사치 부릴 생각하지 말라는 황제들의 뜻이 담긴 장소입니다.”

“···훌륭하네요.”


로키는 바다를 보며 계속 걸었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지만, 햇볕이 따갑지 않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렇게 계속 걸으니, 점차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로키.”

“이그니 교황 성하.”


로키는 자신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와 손을 건넨 이그니 교단의 교황과 악수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매우 유감이네.”

“바쁘신 와중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와야지.”


이그니가 정색하며 말했다.


“비록 우리의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이 자리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그니 교단의 평판이 나빠질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네. 마음에 드는가?”

“훨씬 낫네요.”


로키와 이그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세 분은?”

“그들이야 신성력 채우느라 바쁘지.”

“안 주신 모양이군요.”


그의 말에 이그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준 게 아니라 못 준 것이네. 내가 받은 것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시기가 좋지 않았군요. 유감입니다.”

“최근 대륙의 정세가 급격하게 요동쳤으니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이것이야말로 고귀한 존재의 뜻 아니겠는가?”


그 말을 끝으로 로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그니의 잠시 후에 보자는 말에 미소로 대답한 그는 계속 걸었다.


“로키!”

“···칼?”


브렌트 왕국의 카디르. 그곳의 훈련소 교관이었던 칼이 아내로 보이는 여성과 어린 아들, 딸을 옆에 두고 그에게 다가왔다.


“내 훈련소의 마지막 수료생이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세웠을 줄이야! 덕분에 용병 일을 안 해도 평생 먹고살 돈을 벌었네.”

“제 이야기가 그렇게 돈이 되나요?”

“그럼요.”


칼의 아내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호호 웃었다.


“오죽하면 글자 하나 모르는 이 사람이 음유시인이 되겠다고 피리를 만지작거리겠어요?”


로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려 칼의 두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형이 로키에요?”

“라그나로크의 대영웅?”

“내가 로키인 것은 맞지만, 하나 틀린 게 있구나.”


그는 두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영웅은 라그나로크에 너희와 어머니를 훌륭하게 지켜낸 칼 님을 두고 하는 말이란다.”

“우리 아빠가 정말 영웅이에요?”

“맨날 듣기 짜증 나는 노래만 불러서 싫은데.”


칼이 얼굴을 붉히고는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왜 하냐며 핀잔을 주었다. 아이들은 그에게 혀를 내밀며 얼굴을 찡그렸다.


“귀여운 아이들이군요.”

“예.”


헤임달의 말에 대답한 그는 잠시 후에 보자고 말한 후 칼을 지나쳤다.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로키는 사람을 피하려고 길을 걷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이.”


누가 그의 발목을 걷어찼다. 시선을 내리니 양손에 맥주잔을 들고 있는 헤테로도스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테로도스 님. 와 주셨군요.”

“그렇게 신기한 기운을 가진 인간은 난생처음 봤다.”


로키는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모래사장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헤테로도스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잔을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제는 네게 그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분이 물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경지입니다.”

“흥.”


로키는 헤테로도스를 따라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인간들이 제법 재밌는 말을 하더군. 들은 것 있나?”

“아뇨. 없습니다.”

“네 검에 이름이 붙었다.”


로키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이건 그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 엘프가 만든 검은 ‘엘리멘탈 소드’, 내가 만든 검은 ‘빛과 어둠의 춤’이라고 하더군.”


그렇게 말하는 헤테로도스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일단 이름에 같잖은 엘리멘탈, 파이어, 아이스, 이딴 수식어가 붙은 것부터가 저급하다는 뜻이다. 반면에 내가 만든 검을 봐라. 얼마나 유려하고도 세련된 이름이냐!”


그가 잔으로 모랫바닥을 찍어대며 크게 웃었다.


“빌어먹을 숲쟁이 놈들! 평생 무기를 만든 내게 대적하려 들다니 어림도 없었지! 암, 그렇고말고!”


로키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를 가져오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헤테로도스의 상대는 혹시라도 거래를 틀 수 있을까 기대하는 상인 유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진정한 기사가 등장하셨군.”

“아서 폐하. 그리고 멀린. 이분은···.”


아서와 멀린에게 반가운 미소를 지은 로키는 멀린의 반대편, 아서의 왼쪽에 서 있는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여성을 바라봤다.


“마지스 왕국의 두 마도사 중 한 명인 하프린입니다.”

“로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응. 나도.”


로키가 내민 손을 덥석 잡은 그녀는 멀린을 노려봤다. 멀린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녀는 곧바로 텔레포트를 이용해 사라졌다.


“···예민하신 분이군요.”

“자다가 억지로 일어나서요.”

“자다가?”

“수면기에 접어든 드래곤일세.”


아서가 웃으며 말했다.


“안 일어난다고 버티는 것을 어떻게든 끌어냈지. 이 자리만큼은 얼굴을 비추라고 말이야. 자네를 봤으니 돌아가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랬군요.”


어쩐지 라그나로크에도 그렇고, 다른 드래곤들이 싸울 때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했더니 수면기에 들었을 줄이야.


“이거 괜히 분노를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당신에게?”


멀린이 하늘을 가리켰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가 고개를 들어 위대한 수호자의 방문을 환영했다.


“로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카슈테르가 일행을 대표해 앞으로 나와 손을 내밀었다.


“유감이다.”

“여러분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로키는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예. 금방 갈 겁니다.”


드래곤 일행은 단체로 걸음을 옮겼고, 수많은 인파가 저절로 좌우로 갈라졌다.


“저희도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예. 그때 뵙겠습니다, 폐하. 대마도사님.”


로키는 걸었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영감님!”


그에게 멋진 가면을 만들어 주었던 가면 장인이었다.


“그놈은···. 그놈은 어땠냐.”


가면을 너무도 많이 만든 탓에 자신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착용하게 된 노인이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저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감님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놈이 퍽이나 그랬겠다.”


혀를 찬 장인은 홱 몸을 돌리고 걸어갔다. 로키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웃고 있었냐?”


노인이 별안간 뒤돌아보며 물었다. 로키는 그가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며 최대한 밝게 웃었다.


“예. 눈이 부실 정도로.”

“가면이 망가지면 찾아와라.”


그 말을 남긴 노인은 두 번 다시 뒤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로키는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로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왜 이제 와 인마!”


블랑이 핀잔을 주었다.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블랑이 그의 품에 옷을 한 벌 안겨 주고 뒤쪽에 있는 천으로 가려진 공간을 가리켰다.


“얼른 갈아입고 나와.”

“예.”


로키는 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블랑이 그에게 건네준 것은 한 벌의 제복이었다. 기본적으로 검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소매 끝자락이나 옷깃, 단추 등을 강조한 단조롭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그런 제복이었다.


“이것 역시 루센트 제국의 풍조인가요?”

“금색으로 강조할 곳은 강조했으니, 불필요한 치장 따위 할 이유가 없죠.”


헤임달의 말에 웃은 로키는 마찬가지로 검은색에 금색으로 꾸며진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탈의실을 나갔다.


“제법 잘 어울리는데?”


블랑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게. 한 번 노려 봐?”

“라나 님!”


반가운 얼굴의 등장이었다. 뒤이어 베른, 라튼을 비롯해 럴러바이 전원이 그와 똑같은 제복을 입고 등장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로키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할 말이 많지만, 나중에 하기로 해. 밀린 사람들이 많아 보이니까.”


라나가 뒤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녀의 뒤쪽에 오르딘을 선두로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영원한 침묵 인형사들이 있었다.


“잘 어울리는군요.”

“···너도.”


오르딘이 신경질적으로 목 주변의 옷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당신은.”

“카라스 남작 사건 당시에 오르딘과 같이 있던 인형술사군요.”


헤임달의 설명에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으니까.


“그, 그때는-.”

“당신은 라그나로크 때 동료를 배신하고 숨어 있었나요?”

“예? 그게 무슨···.”

“이놈의 전투 스타일은 인형들과 합을 맞추는 근접 공격이다. 그럴 수는 없어.”


오르딘의 설명에 로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로키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인형술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로키라고 합니다. 당신은?”

“아, 저는 사일론이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네요.”


혼란에 빠진 사일론을 뒤로 하고 그는 영원한 침묵 소속 인형술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포옹했다가는 작은 인형에게 독침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위엄이 느껴지는군.”


다음은 다크 바겐의 차례였다. 라스를 선두로 페르, 아인델, 블라드 등 다크 바겐 전원이 한마디씩 덕담을 해 주며 먼저 포옹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이쯤 하지.”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로키의 말에 라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잘 어울리세요!”


프레이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칭찬을 건넸다. 그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프레이 님도 잘 어울리십니다.”

“가, 감사합니다!”


긴장을 풀라는 의미에서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정도 두드려 주었는데,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아예 목각 인형이 되어버린 그녀를 뒤로하고, 그는 블러드 서커스에게 다가갔다.


“우리 사이에 저런 인사는 필요 없어.”


네이선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투박한 대리석 문 앞에 섰다.


“전원 집결.”


그의 말에 블랑, 오르딘, 라스, 프레이, 네이선이 그의 뒤에 정렬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럴러바이, 영원한 침묵, 다크 바겐, 일루전, 블러드 서커스가 자리했다.


“프레이 너도 참 독하다.”

“네? 왜요?”

“어떻게 너를 첫 번째 단원으로 받을 생각을 하냐?”


블랑의 말에 로키는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또 한 명의 프레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잘못하면 도중에 죽을 수도 있겠네요.”


헤임달의 악담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사람 열 명은 가로로 설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게. 다섯 발자국 정도 앞에 검은색 돌을 깎아 만든 관이 여섯 개 놓여 있었다.


텅 빈 관 아래에 다섯 개의 관이 뒤따르듯 놓여 있었고, 그것들에는 타스, 이레인, 쿨루스, 케론, 아르헨이 웃는 얼굴로 고이 누워 있었다. 흰 꽃을 베개와 이불 삼아.


다섯 명의 시신은 온전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천족과 마족들은 그들을 곱게 죽여주었다. 물론 하나도 고맙지 않지만,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혼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보답일지도 모르겠다.


“각자 맡아야 할 것을.”


로키의 말에 다섯 단체에서 지정된 인원이 나와 관을 들었다. 일루전의 경우 낫을 든 프레이가 자신의 무기에 관을 태웠다. 로키도 맨 앞에 놓여 있는, 자신이 맡아야 하는 관을 들기로 했다.


“화이트, 블랙. 부탁드립니다.”

- 그는 용맹한 전사였네, 로키.

- 정령왕을 장의사로 쓰는 인간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빛과 어둠의 정령왕이 관을 들어 주었다. 로키는 앞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폐하! 저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이 아이의 이름을 루센으로 지었습니다!”


카펫의 양옆에 늘어선 사람들. 누군가는 울부짖으며 고맙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를 소개했으며, 누군가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진심을 담아 묵념했다.


“아빠, 저기 로키 형이 있어요!”

“쉿.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 해.”


옆에서 칼과 그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둘에게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장례 행렬은 계속되었다. 여섯 명이 묻혀야 할 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5분 정도 걸렸을 것이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도착한 로키는 그 옆에 있는 묘비의 명패를 쳐다봤다.


카일 루센트.


세월이 워낙 흘러 선명하지 않았지만, 정말 궁금했던 카오렌 루센트의 형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편히 쉬시게 하죠. 뚜껑은 준비되셨나요?”

“응.”


로키는 마지막으로 비어 있는 관의 테두리를 쓰다듬었다. 아쉽지만, 이제는 현실에 순응할 때. 관의 뚜껑을 막 덮으려는 찰나, 하늘이 열렸다.


「잠깐, 잠깐!」

“···니케 님?”


카이로스를 대동한 니케가 무언가를 품에 안고서 천천히 강림하고 있었다.


「어렵게 구했어.」

“하. 저렇게까지 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블랑의 말을 들으며 로키는 그녀가 안고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폐하.”

“구하느라 힘들었다.”


니케의 너스레에 로키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곤히 자는 듯한 카오렌 루센트의 시신을 넘겨받아 관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가는 길 허전하지 않게.”


니케가 손가락을 튕기자 에메랄드빛 꽃이 관을 가득 채웠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저 남자 덕분이잖아?”


그렇게 말한 니케는 카이로스의 손목을 잡고 인파에 섞여들었다.


“그럼 닫겠습니다.”


관을 쥔 손에 힘을 주었을 때 세계가 멈췄다.


“···베르단디.”


오직 그와 헤임달만이 멈춘 세상에서 움직였다.


아무 말 없이 카오렌 루센트의 곁에 나타난 그녀는 슬픈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잘 가, 영감.”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블랑을 잠깐 본 로키는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블랙과 화이트의 도움을 받아 구덩이 안에 관을 넣고, 잘 메웠다. 그리고 그 위에, 그의 이름과 업적이 간략하게 새겨진 묘비를 세웠다.


“···감사했습니다.”


로키는 이름이 새겨진 부분에 손을 대었다가 뗐다. 그리고 일어나 여섯 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카펫길이 끝나고 무덤가를 중심으로 둥글게 대형을 만든 사람들을 보며 로키는 입을 열었다.


“이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저희가 있습니다.”


모두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입에 집중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분들을 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일상 속에서 라그나로크의 존재를, 이 여섯 명의 영웅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로키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그러길 원합니다.”


그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 대다수가 눈을 크게 떴다.


“이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제 일입니다.”


그는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제 동료의 일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사시면 됩니다. 물론 종사하는 분야가 분야인지라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다섯 단체의 특징상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서서히, 조금씩 천천히 여러분의 일상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 주세요.”


로키는 고개를 돌려 그의 다섯 동료들을 잠깐 바라본 후에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러분을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그것이 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다려 주었고, 그는 충분히 고민한 끝에 끊어진 말의 뒷부분을 이었다.


“1대 밤의 황제, 카오렌 루센트의 뒤를 이은 2대 밤의 황제 로키가 드리는 약속입니다.”

“훌륭한 연설입니다.”


헤임달의 칭찬에 미소를 지은 그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 왼쪽 다리를 뒤로 빼며 허리를 숙였다.


“밤은 언제나 여러분의 편일 것입니다.”



-끝-


작가의말

그동안 제 소설을 읽어 주신 독자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로키 : 밤의 황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후기 21.06.22 41 0 -
공지 필체에 관해 공지드립니다. 21.02.27 120 0 -
공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21.02.26 52 0 -
공지 밤의 황제 관련 공지입니다. 19.05.10 83 0 -
공지 연재 주기 관련 공지입니다. 19.04.18 110 0 -
» 22. 커튼 콜 21.06.22 36 1 26쪽
163 21. 종막(5) 21.06.21 15 0 20쪽
162 21. 종막(4) 21.06.20 14 0 13쪽
161 21. 종막(3) 21.06.19 13 0 11쪽
160 21. 종막(2) 21.06.18 27 0 12쪽
159 21. 종막(1) 21.06.17 19 0 12쪽
158 20. 혼돈(3) 21.06.17 20 0 12쪽
157 20. 혼돈(3) 21.06.16 18 0 11쪽
156 20. 혼돈(2) 21.06.14 18 0 12쪽
155 20. 혼돈(1) 21.06.13 27 0 12쪽
154 19. 라그나로크(11) 21.06.12 22 0 12쪽
153 19. 라그나로크(10) 21.06.11 26 0 12쪽
152 19. 라그나로크(9) 21.06.10 24 0 12쪽
151 19. 라그나로크(8) 21.06.09 20 0 12쪽
150 19. 라그나로크(7) 21.06.08 23 0 12쪽
149 19. 라그나로크(6) 21.06.07 21 0 12쪽
148 19. 라그나로크(5) 21.06.06 26 0 12쪽
147 19. 라그나로크(4) 21.06.05 29 0 12쪽
146 19. 라그나로크(3) 21.06.04 20 0 13쪽
145 19. 라그나로크(2) 21.06.03 18 0 12쪽
144 19. 라그나로크(1) 21.06.02 18 0 12쪽
143 18. 마계의 문(3) 21.06.01 20 0 13쪽
142 18. 마계의 문(2) 21.05.31 21 0 14쪽
141 18. 마계의 문(1) 21.05.30 25 0 12쪽
140 17. 신의 이름으로(4) 21.05.30 22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