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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안테나 님의 서재입니다.

푸른하늘의 학교 파괴 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TV안테나
작품등록일 :
2021.06.14 01:27
최근연재일 :
2021.06.20 09:00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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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52

작성
21.06.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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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65쪽

11. 괴담과 진실.

DUMMY

11. 괴담과 진실.


결과적으로 나와 신선의 대결은 신선의 과몰입 및 규칙위반에 의한 나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신선 녀석이 쓰러지긴 했지만, 나중에 듣기로는 어깨에 좀 무리가 간 것 말고는 다친 게 없다고 전해 들었다. 나 또한 아무런 탈도 없었다.

“....”

신선과의 대결로 얻은 게 있다면 그 뒤로 쇄도하던 부 가입 권유가 확실히 줄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를 섣불리 건드릴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역으로...

“전학생이다...”

“야구부와의 내기에서 아주 박살을 냈다고 하던데...”

“푸른하늘 밑에 있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인 걸까?”

“쉿, 조용히 해. 괜히 불똥 튈라.”

“....”

나에 대한 헛소문과 거짓 소문이 마치 정설처럼 퍼져버렸다. 물론 개중에 맞는 말도 있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고 덕분에 학생 대부분이 나를 무서운 괴물 보듯 껄끄러워했다. 지금의 상황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정도 시선은 이전 학교에서도 충분히 느껴왔었고, 처음부터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전 학교보다는 오히려 상황은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여기는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는 않으니까.

“후후훗, 우리 학교 최대의 인기남이 여기 있었네??”

“....비꼬는 거야?”

“에이, 그럴 리가. 크크크.”

오전 일과가 끝나고 오후 부 활동 시간, 여전히 부 가입을 하지 않고 떠돌이처럼 학교를 배회하다 어느 정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내게 아린이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뭐,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었거든.”

“호오, 진짜? 우왕, 청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거 무진장 설레네.”

과장된 말투로 호응하는 아린이 역시나 어린아이처럼 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 그럼 우리 청호가 어떻게 고백을 하는지 한 번 들어볼까?”

천진난만한 미소,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은 키에 앳되어 보이는 모습은 상당히 귀여운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린을 과격히 짝사랑하는 신선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고, 나는 그녀에게 두려움에 대한 감정이 솟구쳤으나 애써 침착하게 굴었다. 야속하게도 아린은 신선의 마음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

“어디 아파? 우리 청호, 인상이 안 좋네?”

“크흠, 아냐. 난 괜찮아. 그것보다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다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같이 학교를 부수자고 제안하고선 이제는 며칠 동안 내 주위만 맴돌며 감시만 하잖아.”

“음, 그건 그냥 청호 쪽에서 재미난 일이 많으니까. 나 혼자서 구경하는 거지.”

“....거짓말하지 마. 푸른하늘도 같이 있는 거 알아.”

“어라, 알고 있었네?”

조금은 놀랍다는 듯이 아린이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말 그대로 신선과의 대결 이후에 아린과 푸른하늘은 학교에서 내 주변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중간에 나의 의심을 덜기 위해선지 이따금씩 아린이 의미 없는 말을 건네는 것 말고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죄지은 사람 쫓아오는 것처럼 따라다니면 없던 신경도 생길 수밖에 없잖아.”

“흐음, 어쩔 수 없네.”

아린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벤치 뒤편으로 시야가 닿지 않는 소나무 밑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푸른하늘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검붉은 눈빛이 나와 마주하자, 그녀는 별수 없다는 느낌으로 자연스레 한쪽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태연히 내게 다가왔다.

“미행한 건 미안해.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냐. 너를 위해서라도 아직은 그냥 지켜봐야겠다고 판단했던 것뿐이야.”

“하아, 너희들 지금 내가 받는 시선을 알고 있지 않아? 혁명단이랑 엮일 대로 엮어서 곤란해졌는데, 모른 척 주변에서 지켜만 보는 건 너무하잖아. 너희들이야 능력도 대단하고 학교 수업이나 활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난 그럴 입장이나 능력도 안 된단 말이야. 솔직히 이기적으로 굴자면 난 너희들한테 말려든 거야.”

나는 그간 담아왔던 말을 한꺼번에 털어놓았다. 푸른하늘과 아린에게 무작정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꼭 한 번은 그들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과 이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말이 사실이니까. 아무래도 너한테 더 이상의 피해가 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았던 거야.”

“그럼 미행은 왜 하는 건데? 처음부터 그냥 내버려 두면 되잖아?”

“그건....”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괄량이 같던 아린도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나와 푸른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잔잔한 바람이 일렁이는 순간, 그녀가 무겁던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드려야 하니까.”

“뭐..?”

“이건 너희 어머니가 직접 부탁하신 거야. 학교에 전학 오면 너를 지켜봐달라고 하셨어.”

어머니가 푸른하늘한테 직접 부탁을...?

아무리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는 해도 어머니는 1회 졸업생이다. 나이 차이는 물론이고 고향에 계신 외조부모님도 어머니의 소식 자체를 모른다. 하지만 푸른하늘은 어머니의 최근 행방까지 조금은 아는 눈치였다. 대체, 서로 무슨 사이인 걸까?

“너,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어?”

“응.”

“어떤 분이야? 아직, 만나고 있는 거야? 지금은 어디 계시는데??”

“아쉽게도 나도 이젠 만날 수 없어. 정확히 1년 전, 내가 학교의 뜻을 어기고 혁명단이 되기 전에 만났던 게 마지막이야.”

1년 전, 그렇다면 지금 당장에 어머니를 만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나는 복잡한 심경에 가만히 머리 한쪽을 움켜쥐었다. 분명 집을 나간 뒤로 소식 한번 보내지 않았으면서 여기선 나를 지켜봐달라는 부탁을 하셨단 건가? 아직도 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지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나에게 푸른하늘이 결심한 듯 다시 말을 건넸다.

“비록 어머니의 행방은 모르지만, 너한테 대신 전해 줄 사실이 있어.”

“....”

“너의 어머닌, 이 모든 게 다 너를 위해서라고 했어. 그리고 언제나 널 아끼고 걱정하셨지. 물론 내가 어머니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곤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어머니가 너를 여기로 전학시킨 건 절대 나쁜 의도가 아니야.”

가만히 올려다본 푸른하늘의 깊어진 눈동자가 머리 위 진짜 하늘과 대조되면서 한순간, 깊은 물웅덩이 처럼 일렁거렸다. 그것은 처음 그녀를 나무 위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렇구나. 전학 온 그날, 버스터미널에 있던 나무 위의 그녀가 있었던 건, 전학 온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청호 네가 전학 첫날부터 학교가 부서지면 좋겠단 소원을 엿들은 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야.”

“아! 그, 그거는...!! 으음, 뭐라 해야 되지... 아, 모르겠다 정말!”

그때의 기억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가자, 나는 말을 더듬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만 차마 붉어지는 얼굴을 막을 순 없었다. 보호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건 그냥 학교 가기가 내키지 않아서 농담 식으로 중얼거렸던 건데, 하필 푸른하늘이 듣게 될 줄 몰랐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너를 함부로 할 생각은 없어. 대신 네가 원하는 부분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야. 여기선 너의 생각이 가장 중요한데, 내가 보기엔 넌 아직도 서성이고 있는 것 같아.”

“서성인다고..?”

“그래, 아직도 이곳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하고 어떤 걸 원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

“난, 그냥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야.”

“미안하지만 그건 범위가 너무 넓어. 행복해지고 싶다거나, 돈을 많이 가지고 싶은 것과 다를 게 없어. 좀 더 구체적이면서 네가 하고 싶은 목표는 없는 거야?”

나는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들이 어딘가 변화하길 바랐을 뿐이었고, 무언가 구체적인 목표를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걸, 나도 모르겠어.”

“뭐, 너무 신경 쓰진 마. 그걸 모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니까.”

“....”

“좋아, 평범한 학교생활이라고 했지? 광범위하긴 해도 일단 그거라도 어떻게든 해보자.”

어느새 풀이 죽은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인지 그녀가 끼고 있던 팔 장을 풀며 좀 더 활기찬 목소리를 내었다.

“굳이 도와주려는 건 좋은데, 이미 이렇게 된 걸 어떻게 바꾸겠다는 거야?”

불쑥.

“어허! 우리 청호가 아직도 이 혁명단에 대해서 잘 모르나 본데, 푸른하늘은 현재 학교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 그녀가 나서기만 하면 해결 못 할 일도 뚝딱이라고!”

나의 앞으로 정확히 얼굴을 들이밀며 콧대만 잔뜩 세운 아린이 자신의 턱에 엄지와 검지로 만든 브이 자를 갖다 붙였다.

“미안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혁명단이 개입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아...??”

“너희들 능력이나 실력은 잘 알겠는데 애초에 학교에 반기를 들고, 모든 학생을 적으로 두고 있는 혁명단한테서 해결을 받는다는 게 에러 아냐?”

“음....음....으으....”

당당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아린이 잔뜩 고뇌에 들어찬 표정으로 탈바꿈했다. 그녀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헤헤,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청호랑 손절 쳐야겠다.”

“자신 있게 말해놓고 바로 손절?!”

능청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너스레를 떠는 아린이지만, 사실 처지를 바꿔보아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혁명단 자체가 학교 내 부정적 이미지를 모두 껴안은 존재인데 이들이 직접 나의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음, 그럼 학교를 정복해서 세뇌해 버리면...?”

“완전 틀렸어! 접근 자체가 글러 먹었잖아!”

“역시 원인이 되는 학생들을 제거해야 하나?”

“....”

대화가 진척되질 않는다. 나의 답답한 심정을 공감한 것인지 아린 옆의 쿠요미도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아린과의 대화로 의미 없는 좌절을 경험하고 있을 때, 드디어 푸른하늘이 나섰다.

“확실히 나와 아린의 개입이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될 순 없을 것 같아. 음, 그렇다면 우리가 너한테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고 실질적으로 청호 혼자서 행동하는 수밖에 없겠어.”

“혼자서? 자원봉사라도 해야 하나?”

“뭐, 나쁘진 않지만, 실질적으로 요즘 학생들의 시선을 바꾸려면 좀 자극적인 게 필요하지 않아?”

확실히 자원봉사가 학교 선생님들이라면 몰라도, 학생들 간의 이미지 쇄신에는 씨알도 안 먹힐 터였다. 푸른하늘 말대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 사건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최근 학생들 사이에 도는 소문 하나를 이용하자.”

“소문?”

아주 잠깐이지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푸른하늘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반짝였다.

“...뭔가, 불안한데?”


오후의 부 활동이 끝난 지 한참인 하교 시간, 교내 어느 외딴 건물의 빈 교실에서 푸른하늘이 교탁에 서 있고, 나와 아린, 그리고 쿠요미가 각자 중앙의 책상과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밖은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해 주황빛 노을빛이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 전교 회장의 경험이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푸른하늘이 능숙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사태가 진중한 만큼 매우 자연스럽고 단 한 번에 큰 효과를 볼 계획이 필요해. 그러니 단숨에 학생들의 이목을 끌면서 청호의 탁한 이미지를 벗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번 회의의 중요사항이야.”

“호오, 대단해. 푸른하늘~!”

“하하....”

서로가 나름의 방식으로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푸른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누가 봐도 작당 모의의 현장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학생 간에 가장 뜨겁게 오르내리는 괴담 하나를 파헤칠 거야.”

“...???”

“폐쇄적이고 부지가 넓은 만큼 학교 내 존재하는 괴담은 상당히 많아. 여기서 최근 뜨겁게 떠오르는 신흥 괴담을 파헤치고 우리가 그 진상을 밝히는 거야.”

“잠깐만, 잠깐만. 아무리 학생들의 니즈가 있을 순 있다고 해도 그렇지, 괴담이라고? 그게 과연 소용이 있을까?”

황급히 손을 들어 푸른하늘의 주장에 의문을 표하는 나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소문만 무성한 괴담이라면 그렇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괴담이 진짜라는 말이야?”

스윽.

푸른하늘은 이곳 교실에 모이기 전 미리 챙겨놓았던 종이 뭉치들을 모두의 시선에 잘 보이도록 들어 보였다.

“이건, 내가 최근 학교 전산상에 있는 정보들을 빼돌려서 문서화한 거야. 이곳에 각종 학교 내 사건, 사고들을 확인할 수 있지.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 학교엔 개교 이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종류의 사건이 하나 있어.”

정돈된 종이들을 손으로 넘기던 그녀의 손이 어느 한 페이지에 머물렀다. 그리곤 자연스레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문서 하나를 내게 들이밀었다.

“그건 바로, 불법 침입자에 의한 자료기밀 유출 미수사건이야.”

기분 탓일까? 딱 들어도 뭔가 아주아주 복잡한 일이 일어날 거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 진지한 푸른하늘의 모습에 나는 책상에 놓인 종이의 글귀를 간략히 훑어보았다. 해당 종이에서 타 경쟁업체와 세력에 의한 기밀유출 행위가 국가적 차원으로 도약함에 따라 비이상적인 무력 간첩행위가 심화되었다는 문장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보고된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회는 불법 침입자가 현재 이 학교에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물론 아직 밖으로 반출된 자료는 없는 상태라 공개적인 조사는 하고 있지 않지만, 뒤로는 은밀하게 침입자를 추적 중인가 봐.”

어, 설마? 에이, 아니겠지?

“여기 이 사실들을 토대로 난 최근에 무성한 학교 괴담 하나를 주목했어.”

와, 설마 진짠가..?

“밤늦은 시간,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빈 건물에서 귀신의 흔적과 소리가 들린다는 무척 단순한 괴담이지. 하지만 난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 해당 괴담의 목격자가 증가한 날과 학생회의 불법 침입자 보고서 갱신 일자가 완벽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점차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갔다.

진짜는 아니겠지? 설마 이걸 나보고...????

“그리고 난, 이 불법 침입자의 그간 행적이 겉으론 의미 없어 보여도 일정한 패턴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아냈어. 그리고 오늘 저녁, 나의 자료조사와 직감에 따르면 이 건물 옆 동에서 명백히 불법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낼 거야.”

“...?!”

“그때 청호가 나타나 멋있게 사건을 해결한다!”

쿵!

그녀가 그대로 손바닥으로 칠판을 내려치자, 칠판에 묵어있던 가벼운 먼지가 일었다. 일렁이는 먼지 속에서 푸른하늘은 비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전설이 되는 거야.”

“전설은 개뿔, 무슨 말도 안되는...크억!”

“우왓! 완전 재밌겠다~!!”

“우욱...야, 얼굴...치워..!”

들뜬 표정에 웃음을 만발하는 아린이 나와 푸른하늘 사이로 냅다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더라도 일개 학생인 내가 그런 위험한 일에 끼어든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어른들의 사정이 가득한 사건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분명 봉변을 당할 게 뻔했으나, 아린은 그런 눈치조차 없이 실실 웃으며 나를 정신 사납게 만들었다. 당장에 저 멀리 밀쳐내고 싶지만, 몸집과 다르게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아무리 밀어도 그녀는 내게 붙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린의 호응을 등에 업은 푸른하늘이 슬그머니 더욱 내 쪽으로 다가왔다. 우측에는 아린, 왼측은 푸른하늘로 완벽히 둘러싸였다. 푸른하늘이 구슬이 굴러갈 듯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이건 막강한 권력의 학생회도 일부만 알고 있는 중대 사건이야. 이걸 해결만 한다면 학교 내 영웅으로 인기몰이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그런 일로 인기몰이한다는 보장이 어딨어?!”

“그건 걱정하지마. 학교의 안위를 위해 성실히 활동하면 제공되는 실적 시스템을 달성하면 상점과 더불어 명예 학생의 권리를 가질 수 있어. 그러니까 적어도 널 깔보는 사람은 없어진다는 거야.”

푸른하늘의 상체가 나의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 들이민 얼굴 탓에 그녀의 모든 숨소리가 내게 들리는 듯 했다.

“...자, 잠시만. 근데 너희들은 학교를 망하게 하는 게 목적 아냐? 이런 일에 관여하는 건 오히려 학교 쪽을 돕는 일 같은데?”

그러자 이번엔 아린이 나서서 내 앞의 책상을 양손으로 내려치곤 당돌하게 외쳤다.

“무슨 소리야?! 우릴 뭐로 보고! 적어도 우리한테도 그게 있다고...!! 그, 그거! 음, 뭐더라?”

“도리..?”

“그래..! 적어도 우리만의 도리가 있다고! 다른 일엔 일절 관여하지 않고, 건물을 박살낸다! 그게 바로 우리 혁명단의 방식이란 말씀!”

“무슨 방식이 그래?! 테러범이야?”

“어허, 걱정하지 말아. 인명피해는 없게 조심하니까.”

오, 신이시여. 차라리 지금 당장 이 건물이 무너져서 다시는 이들과 엮이지 않게 해주소서.

깊은 좌절과 함께 속으로 신의 구원을 외쳐보지만, 역시 쉽사리 그의 응답은 들을 순 없었다. 가만히 옆에서 아린의 말을 듣고 있던 푸른하늘이 다시 나섰다.

“나머진 내가 설명할게. 우선 아린의 말대로, 우린 학교를 방해하고 파괴하는 게 목적일 뿐 다른 일엔 끼어들진 않아. 물론 이번 일처럼 정보를 유출하려는 외부세력을 돕거나 그 외 계략을 이용한다면 좀 더 쉽게 학교에 피해를 주고 골머리를 썩일 순 있겠지.”

내게 가까워진 상체를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고는 이번엔 창가 쪽으로 다가가 가만히 학교 밖을 내다보았다. 샛노란 노을이 검붉은 머리의 푸른하늘을 덧씌우면서 아련한 후광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러다간, 원하는 건 무슨 일이든 자행하고 마는 기대기업에서 어떤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지 몰라. 자칫 이곳의 모든 학생을 평생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 안타깝게도 학생을 위한 학교가 오히려 학생을 인질로 삼고 있는 거야.”

창밖을 지켜보던 푸른하늘이 찬찬히 뒤를 돌아 우리를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우리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학생을 위해 일어난 혁명단으로서 이런 학교를 용납할 수 없어. 물론 반대로 학교에선 가장 내치기 아까운 능력자인 내가 스스롤 인질 삼아 학교를 괴롭히는 거로만 보이겠지만. 아무튼, 나로선 이곳을 바로잡으려면 내부에서 힘을 모아 항쟁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그 내부에서 지지세력이 되어줘야 할 학생들은 오히려 혁명단을 극도로 미워하는 게 현 상황이었다. 결국, 푸른하늘은 건물과 시설만을 무너뜨리는 단순 위력시위로 학교타도와 견제에 대한 의지를 표출하고, 뒤로는 함께 할 동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들에겐 참으로 외롭고도 험난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

잠깐 숙연해진 분위기를 뒤로하고 이어서 푸른하늘은 이 일에 관한 자신의 진짜 속내도 내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너한테 이 일을 맡기려는 건, 사실 이 사건이 학교의 진실과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야.

“진실...?!”

두려움과 걱정 가득하던 내가 진실이라는 말에 더욱 귀를 세웠다.

“물론 모든 걸 다 알아낼 순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학교의 실태를 네 두 눈으로 마주하길 바랐던 거야. 그러면 말성이는 너의 마음도 갈피를 잡을 테고, 앞으로 혁명단에 대해 직접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하하..., 지금 맘 편히 그 진실이란 걸 다 알려주는 건 안 돼?”

“후훗, 그건 네가 이 일을 무사히 해결해서 어머니 바람대로 학교에 잘 적응하게 된다면 꼭 그러도록 할게.”

“....”

사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그것보다는 이 학교가 숨기고 있는 비밀과 진실에 대한 호기심이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수긍의 의미로 내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자, 푸른하늘이 기세등등하게 웃음 지었다.

“후훗. 자, 그럼 시작하자.”

어느새 창밖의 노을빛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교실 창가 반대편과 천장에 서서히 어둠이 드리워졌다. 또한, 나의 얼굴에도 똑같이 긴장감과 걱정의 기운이 드리웠다.


[여기는 G동의 지휘부 아린, 청호 학생은 응답 바란다.]

“....”

[아아, 여기는 G동의 지휘부 아린, H동의 청호 학생은 즉시 응답 바란다.]

“왜 그러는데? 잘 들려.”

[그야, 이번 작전 성공을 위해서 통신상태 점검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그걸 지금 수십 초에 한 번씩 하는 게 정상이냐?!”

[푸하하하, 이거 너무 재밌어~! 하늘아, 너도 할래?]

전화기에 연결해놓은 한쪽 이어폰 너머로 쓸데없이 유쾌한 아린의 웃음소리가 따갑게 파고들었다. 진지함이라곤 일도 없는 이 상황이 나의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청호, 말한 지점엔 도착했어?]

이번엔 푸른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진지한 그녀의 말투가 아린의 장난기 섞인 말투보다는 듣기 좋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초라함이 희석될 순 없었다.

“방금 도착해서 기다리는 중이야.”

[잘했어. 이곳에서 그쪽 건물을 대부분 감시할 수 있으니까. 예상 침입 경로로 대상이 나타나면 바로 알려주도록 할게. 그때까진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현재 내가 있는 곳은 6층으로 지어진 H동 건물의 3층, 그중에서 위치상 한가운데에 있다. 이곳의 건물은 특이하게도 건물 내 공간을 따로 나누지 않는 통짜형 공간에 책장과 함이 가득한 곳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건물 열쇠로 입구의 자물쇠만 따고 들어와 이렇게 구석진 곳에 자릴 잡고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었다. 만약 이 모습을 누가 본다면 오히려 내가 불법 침입으로 잡혀갈 것이다.

“하아, 별 짓을 다 해보네.”

해가 다 저물고 인적없는 건물의 삭막함은 모든 소음을 다 차단해 버린 것만 같았다. 나의 미세한 몸짓과 먼지 내려앉는 소리까지 생생히 들려오는 듯했다.

“...그나저나, 여긴 뭘 보관하는 곳이지?”

어둠 속에 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주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은 색이 바랜 차디찬 회색빛 철제책장과 파란색 함들이 순서도 없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처음엔 자료를 열람하는 도서관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철제책장과 함들의 간격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좁고 인테리어가 단순하기 그지없는 창고의 모습이었다.

결국, 가만히 있기 좀이 쑤신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푸른하늘의 말이 있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너무 어두운데...”

휴대전화 불빛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밖에서 지켜보는 푸른하늘 쪽의 감시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함부로 시도할 수 없었다. 철끈에 묶여 아무렇게나 방치된 듯한 서류와 파일집이 가득한 함을 지나, 이번에 나의 손끝에 양장본 형식의 책들이 잡혔다.

“....”

책장에 꽂힌 양장본의 거칠고 투박한 표지들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작게 이는 먼지와 더불어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책 내음이 더욱 강하게 진동했다. 우연히 손가락이 멈춘 곳의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두워서 정확한 내용을 읽을 순 없었지만 그사이 더욱 어둠에 적응한 내 눈과 멀리 창밖에서 묘하게 들어오던 가로수 빛을 통해 띄엄띄엄 글자를 확인해 보았다.

“...이란, 자극을 통해..저장..전달의 강제적 변화..극명확한 가소성?”

아무래도 자연과학에 대한 서적을 집은 모양이다. 글 이외에도 뭔가 실험을 하는듯한 사진과 도표들이 즐비했다. 그렇지만 눈을 아무리 찡그리고 노려봐도 읽히지 않는 부분은 도저히 읽히질 않았다. 괜히 눈 건강만 악화시킨다는 기분뿐이었지만, 얼떨결에 몇 문장을 읽어냈다.

“실험에 가장...적합한 대상자의...최소나이는...30세 이전의 남녀이다...부작용으로는 구토, 정신착란에 의한 섬망...기억상실...”

그리고 참고 사진으로 나와 있는 사진을 확인한 나는 본능적으로 읽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읽을수록 무언가 불쾌하고 찝찝한 문장, 기묘한 참고 사진에 덜컥 두려워졌던 나는 아무렇게나 책을 덮어버렸다.

“대체, 뭐지...? 이게 대체 무슨 책이야?”

대략 잃어 본 책의 큰 틀은 실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중 나를 무척이나 꺼림칙하게 만들었던 건, 인체실험에 관한 내용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실험을 어떤 이유로 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도저히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후우, 의학서적이나 제약 관련 서적인 걸까? 설마, 이곳 전부가..?”

무더기로 놓인 책과 자료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외부침입자가 노릴 정도라면 이곳에 중요한 정보들을 모아놓은 게 분명한데, 그런 것 치고는 보안이 일반 자물쇠뿐이란 게 어처구니없었다.

“이건 마치 정보가 빠져나가도 별 상관없다는...”

[불빛이다! 청호, 동쪽 3번 출구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깊은 고뇌에 빠지던 찰나, 휴대전화에 이어진 이어폰에서 다급히 푸른하늘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불빛? 정확히 무슨 불빛인데? 여기 창밖엔 아무것도 안 보여.”

[...잠깐만, 뭔가 이상해.]

푸른하늘의 목소리가 이번엔 적잖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휴대전화의 상태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한...가....아냐... 서쪽...북...쪽.. 사방에서...지금 뭔가 일이 꼬인 것 같아. 지금 당장 거기서..]

뚜뚜뚜...

통신망을 벗어난 것처럼 목소리를 잘라먹던 휴대전화는 급기야 강제로 통화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바라본 휴대전화 화면의 수신호 표시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순히 신호가 약해지면서 끊긴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나와 푸른하늘의 전화가 강제로 차단된 느낌이었다.

“뭐야? 불법 침입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건가? 대체 무슨..”

쿠웅.

“....?!!”

번쩍이듯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나의 모든 감각이 천장을 향했다. 고요함 그 자체인 이곳에서 위에서 들려온 명확한 소리. 정확히 나의 바로 위층에서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뭐지..? 위에 누가 있는 건가? 분명 나 이전에 건물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을 텐데?

백색의 천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홀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뚜벅뚜벅.

이번엔 미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작았지만 이건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다. 좀 더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소리를 키우던 발소리는 자연스레 나의 머리 위를 지나치며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위층의 존재는 나란 존재가 아래층에 있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아래에선 다수의 누군가가 접근하는 중이고 위에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있는 탓에 괜히 나만 그사이에 끼인 형국이 되었다.

다시 창밖을 힐끗 내다보지만 어두운 창밖엔 역시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내겐 상황을 이해시킬 정보 자체가 부족했다. 하다못해 밖에 있는 자들이 몇 명인지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할 순 없었다. 나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창밖과 바닥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이 건물은 문을 잠그고 숨을 곳도 없었다. 일단 단순히 최악의 수를 상정해서 밖과 위에 있는 자가 모두 한통속이며 나와 대적해야 하는 존재로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젠 건물 밖에 위치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다수를 상대할 것인지, 아니면 위층의 1인을 상대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천천히 바닥에 대고 있던 귀를 떼었다. 정확하다곤 할 순 없지만, 아직 아래에선 움직임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로운 수는 상대가 적은 위쪽을 먼저 공략하는 것이었다. 위쪽 공략이 성공한다면 정보수집이나 인질로 활용하며 타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혹 난처한 상황에 몰리더라도 이 건물 높이와 비슷한 옆 동으로 달아날 수...

“....있을까? 끄응.”

혹여나 싸움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아무리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이길 거란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위층의 존재가 정말로 학교의 정보를 탈취하기 위해 찾아온 스파이라면, 혁명단의 도움 없인 안 될 거란 의구심만이 가득했다.

“...그저, 최선을 다하자.”

얼마나 고민했을까? 이를 앙다물고 거칠게 주무르던 미간에서 손을 뗀 나는 결국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조심히 복도 끝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건물 자체가 오래되거나 노후화되진 않았기에 별다른 소음 없이 3층에서 4층 복도로 올라섰다.

“....”

빤히 복도 쪽을 바라보지만 너무나 어두운 탓에 무엇하나 제대로 볼 순 없었다. 살금살금 발끝으로 책장들을 벽 삼아 찬찬히 층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감도는 긴장감에 입안에 고인 침이 한 사발이었으나 삼키는 소리조차 꺼려지던 나는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리고 네 발.

스윽.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책장 더미들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찍소리 없이 숨죽여 책장 뒤로 몸을 숨긴 나는, 조심히 검은 그림자를 지켜봤다. 복도 쪽 창가로 흰 상자를 들고 옮기던 그림자는 상자를 내려놓았고, 상자는 내용물의 무게 탓에 생각보다 육중한 소리를 내었다.

쿠웅.

밑에서 들었던 소리와 똑같았다. 나에게서 등을 지고 있던 그림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충분히 익숙해진 나의 눈동자가 그를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었다.

“....관리인 아저씨?”

“흐억, 거기 누구야?!”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은 독특한 리액션으로 반응하는 걸 보니 경비아저씨가 분명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학교 내 시설관리인인 아저씨라면 분명 아군이 확실했다.

“관리인 아저씨 맞죠..? 저 매일 교문에서 인사드렸던 전학생이에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 관리인 아저씨에게 모습을 보이자, 적잖이 당황하시던 아저씨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사태를 파악했다.

“...아아, 그 전학생? 그래, 교문에서 항상 인사를 했었지, 참. 근데,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아하하, 그게 말이죠...”

의외의 만남에 안도하곤 들뜬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선 나는 좀 더 선명하게 관리인 아저씨와 흰 상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길을 잃었어요. 하하하~.”

나는 마치 아린처럼 단순할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에 맞춰 관리인 아저씨의 표정도 아린을 대하는 나처럼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변했다.

“길을 잃어? 이 시간에 학교에서?”

“네, 아직 전학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잖아요. 이번에 천체관측부라는 곳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저녁에 활동하거든요. 이 근방에서 부 활동 참관을 하다가 잠시 부원들이랑 멀어졌는데, 밤이라서 그대로 길을 잃었어요.”

“...음, 그래. 천체관측부가 저녁에 활동하도록 승인받은 동아리긴 하지.”

“학교가 보통 넓어야 할 텐데, 저한텐 아직도 익숙지가 않네요. 분명히 이 건물 옥상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봐요. 그래도 아저씨를 만나서 다행이네요. 제발, 길 좀 찾아주세요.”

“....”

복잡하면서 미묘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아저씨가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소 짓는 내가 머쓱하던 찰나, 아저씨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구나. 하던 일은 마저 끝내야겠지만 학교 밖까지 데려다줄게.”

“정말 고맙습니다.”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가자, 먼저 앞장서라.”

“어? 그런데 저기 학생부장 선생님이 계시네요?”

“뭐?!”

관리인 아저씨의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학생부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꺼내자, 놀란 아저씨는 그 누구보다 매섭게 뒤를 쳐다봤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교복 안주머니에 품었던 커터칼 하나를 빼 들어 정확하게 관리인 아저씨를 노렸다.

채앵!

하지만 마치 나의 움직임은 손바닥 안이라는 걸 증명하듯 관리인 아저씨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오기도 전에 나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공격을 튕겨낸 물건의 정체는 아까부터 뒷짐으로 숨겨놓던 잭나이프였다.

“이거론, 무린가...”

그야말로 선제공략의 대실패. 전혀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섬뜩.

찬찬히 고개를 돌리던 아저씨한테서 무언의 중압감을 느꼈다. 그의 손에 들린 은색의 잭나이프가 어두운 이 공간에서도 시퍼렇게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 갑작스레 날 공격했지?”

분명 눈은 벌레 하나 못 죽일 듯이 순진한 모습이었지만, 칼을 쥐고 나를 노려보는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아직도 나와 아저씨의 주변은 모든 게 소리를 잃은 듯 고요하기 짝이 없어 더욱 그러했다. 역시나 도망 같은 건 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력으로 어울려드릴 작정이었다.

“하하, 그야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

“거기 흰 상자, 이곳 상자가 아니죠? 이곳의 함이나 상자들은 공통으로 모두 파란색뿐인데 그 흰 상자는 관리인 사무실에서만 사용하는 거잖아요. 게다가 이곳엔 책이나 종이뭉치 같은 서류밖에 없다고 들었거든요. 자세히 보지 않아도 박스의 내용물이 종이나 서류가 아니란 건 눈치챌 수 있죠.”

일단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비록 단의 능력이 가동하고 있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정면승부에서의 경험치는 내가 현저히 적다는 걸 몸소 느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세를 유지한 채 미묘하게 한 발씩 물러나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죠. 관리인 명분으로 이 시각에 건물로 들어와 있는 건 문제 될 게 없어 보이지만 건물에 불 한 번 켜지 않고 이 어두운 곳에서 뭔가를 한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네요. 간단한 작업이라고 해도 왜 그 흔한 손전등 하나 없으시죠?”

나의 걸음에 맞춰 관리인 아저씨도 자연스럽게 한 발 두 발 똑같이 거리를 좁혀왔다.

“나를 공격한 이유가 그것뿐이냐? 흰 박스를 들고 어두운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아뇨. 사실 가장 큰 이유가 더 있죠. 애초에 이곳 건물은 제가 들어올 때부터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거든요. 근데 이곳에 미리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면 대체 아저씨는 어딜 통해 들어오신 걸까요?”

“네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먼저 들어오고 난 후에 들어왔을 수도 있을 텐데?”

거짓말이다. 이곳에 내가 들어온 뒤로는 푸른하늘이 건물의 입구는 다 감시하고 있었다. 이후로 들어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물쇠가 풀어져 있다는 걸 관리인인 아저씨가 후에 봤다면 그걸 수상히 여기고 숨어있는 나를 찾아다녔어야 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절 보고 뒤쪽 허리춤에서 그 나이프를 쥐고 있었던 건 맞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누군가에게 흉기를 휘두른다는 건 미친 짓이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전학생이라서 그런 것도 잘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이곳 학교에서 문구류를 제외한 날붙이의 소지가 교칙 위반이라는 건 알고 있다. 어찌 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관리인 아저씨가 무력행위도 일삼는다는 스파이라고 판단하고 대응해야만 했다.

잭나이프를 한 손으로 한 바퀴 휘두르던 아저씨가 모든 시선을 내게 쏘아 보냈다.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단 한 번에 승패가 갈릴 것이라 확신했다.

“아...”

그때 유독 밤하늘을 어둡게 가린 구름이 한순간에 걷히며 선명한 달빛이 학교 건물에 내리쬐었다. 아침을 맞이하듯 복도의 모든 어둠이 옅어지며 아련한 달빛으로 가득 차지만, 나와 아저씨의 사이의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

들켰다!

“쿠요미~!!!”

와장창~!

창밖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쿠요미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냅다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 사실 쿠요미와는 이 층에 올라오기 직전에 만나서 이때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쿠요미는 처음부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푸른하늘과 아린의 반대쪽에서 시야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고, 내가 포위되었다는 걸 알고 나를 만나러 왔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전투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창밖에서 정보를 전달하며 날 지켜보고 있었다.

“우라챠~!!”

“뭐, 뭐야. 인형?!”

저돌적으로 뛰어든 쿠요미가 부서진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지기도 전에 요란한 기합소리와 같이 이단옆차기를 시전했다. 당황하던 아저씨가 뒤늦게나마 반응해보지만, 분명히 늦었다. 쿠요미의 발차기가 정확히 옆구리에...!

푸욱.

“....??”

하지만 곰인형의 몸을 가지고 있던 쿠요미의 타격계 기술은 인형 특유의 재질 때문에 강한 충격을 주질 못했고 오히려 역으로 힐링 될만한 푹신한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소프트웨어가 뛰어나도 하드웨어가 부실하면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 쿠요미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아주 귀엽지만, 악마답게 매서운 눈빛을 뿜어댔다.

“아직이다!”

쿠요미는 옆구리에 안착한 발을 디딤돌 삼아 순식간에 어깨와 팔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이프를 쥐고 있는 손목을 온몸으로 붙잡더니 관절기를 시도했다. 그렇다. 하드웨어가 아무리 약하다 하더라도 서브미션으로 승부수를 던진다면 쉽사리 밀리지는 않을 터였다.

“이 인형은 뭐야?! 크악...!”

쉽사리 곰인형을 떨쳐낼 수 없었던 아저씨는 결국 쿠요미에게 관절기를 허용했고 쿠요미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손목을 꺾자, 그 효과가 상당했다. 손쉽게 자세를 무너뜨렸고, 아저씨는 다급한 마음에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쿠요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빈틈...!!

혼자선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둘이라면 승률은 상승하는 법! 비록 아린과의 계약조건으로 그녀 없이는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평범한 곰 인형이라지만, 그는 완벽한 틈을 만들어주었다.

“으아아아~!”

“크윽...!!”

기합과 함께 나의 커터칼이 아저씨를 제압하기 위해 다가가던 순간, 아저씨는 바로 반대쪽 허리춤에서 나이프 하나를 더 뽑아 들었다.

채앵! 콰직!

하지만, 단의 능력으로 빨라진 반사신경 덕에 나는 커터칼로 보기 좋게 나이프를 사선 위로 쳐냈고 쥐고 있던 나이프는 천장에 박혀버렸다. 묵직한 진짜 칼과 부딪힌 커터칼은 그 충격으로 손잡이 자체가 부러져 버렸지만, 나는 그 기세를 잃지 않고 맨몸으로 그에게 돌진했다.

쿠당탕탕!!

분명 태클로 넘어뜨릴 속셈이었지만 그 순간마저도 몸을 비틀어 회피한 아저씨로 인해 나와 아저씨, 그리고 쿠요미가 바닥에 실처럼 뒤엉켜 굴렀다. 처참히 바닥에 나뒹굴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옷깃과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거...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아저씨가 자신의 양다리로 나의 몸통을 붙잡은 뒤, 뻗은 나의 팔을 있는 대로 꺾어버렸다. 커터칼이 부서지면서 단의 능력을 상실한 내가 펼치는 그라운드 싸움은 쥐약이었다.

“너나 놓으시지!”

하지만 이내 아저씨의 머리맡에 나타난 쿠요미가 양다리론 목을 조르고 양손으론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뜯었다.

“크악, 이 빌어먹을 인형이!!”

한순간 아저씨의 관절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역으로 아저씨의 팔을 제압하려 하지만 아저씨는 좀처럼 쉽게 제압당하지 않았다. 머리를 앞으로 젖힌 뒤 강하게 바닥으로 내려치는 거로 쿠요미의 조르기에서 벗어난 아저씨가 거칠게 쿠요미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고, 그 사이 완전히 몸 위로 올라탄 내가 다시 제압해 보지만, 그걸 또 기상천외한 그라운드 기술로 반격했다. 벽에 내쳐진 쿠요미가 그걸 보곤 다시 아저씨한테 달려들었다.

대체 시간은 얼마나 지나고 있는지, 내가 뭐 때문에 여기에 왔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개싸움이 계속됐다.

쿠웅!

“크윽...”

하지만 얼마 못 가 승패가 결정되었다. 머리를 쥐어 잡힌 채 바닥에 짓눌러진 내가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신음만을 내뱉었다. 쿠요미는 푹신푹신한 털이 다 헝클어진 채로 뒷덜미를 잡힌 채 제압당했다.

“아주 징글징글한 놈들. 딱 보니 학생회 놈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한껏 짓눌린 탓에 입을 잘 움직일 순 없었지만 억지로 조금이나마 고개를 치켜들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크윽,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근데 이런 거 아닐까요?”

“...??”

“으윽, 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무엇을 해야 하며 이뤄야 하는 게 뭔지를 모르니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무슨 헛소리야?!”

사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내뱉은 것뿐이었다.

“그것보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설마, 너희들만 온 거냐?”

“...저도 그냥 이 건물에 외부침입자가 올 거라는 정보를 듣고 저희끼리 확인하러 온 거뿐이에요. 그 외에는 몰라요.”

“거짓말하지 마라!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침입자라는 말에 혼자서 이곳을 찾아왔다고? 난 학생회 소속은 전부 알고 있어. 그리고 학생회 녀석들 말고는 이런 위험한 일에 끼어드는 짓은 절대 안한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 뭘 노리고 이곳에 온 거야?!”

“아, 진짜라니까요. 하아, 그냥 침입자 좀 잡아서 실적이니 뭐니 하고 이미지도 좀 챙길려고...”

“거기까집니다!!”

복도 끝에서 시작된 박력 넘치지만 맑은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파르르 떨어가며 고갤들자, 학생부장 선생님이 서 있었다. 아, 그것은 구세주를 보는 것과 같았다. 아련한 달빛 속에 계시는 메이드복의 학생부장 선생님 미모는 더욱 찬란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과 소속의 경비 및 관리책임자 이 종우! 당신이 3주간 진행한 비윤리적 첩보 활동만 16건. 이는 명백히 학교에 위해를 가하는 불법행위이며, 교내규정에 의거 학생회에서 직접 구속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건물은 학생회에서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장 항복하세요!”

이제야 이전의 상황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건물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전부 학생부장 선생님이 데리고 온 학생회 소속의 학생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려가서 선생님한테 들켰어야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자처한 것일까.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마세요. 거기서 만약 학교 내 소중한 학생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가중처벌을 피할 수 없...”

“개수작부리지 마라!!”

“엇!! 쿠요미~~!”

나를 짓누르던 관리인 아저씨는 쿠요미를 아무렇게나 창밖으로 내던지곤 갑작스레 묽은 침까지 튀겨가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것은 조금 전 대화를 나눌 때와는 180도 뒤바뀌어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불안한 모습이었다.

“어이가 없군. 뭐가 비윤리고, 소중한 학생이라는 거야! 더러운 기대기업의 멍청한 개들이 더러운 개밥만 먹어대더니 미쳐버린거야?!”

“으윽....”

TV나 영화에서 지겹도록 보이는 흔한 인질극처럼 한쪽 팔로 나의 목을 감싸 조른 아저씨가 또다시 품 어디선가 나이프 하나를 꺼내 들더니 나의 목에 정확히 가져다 대었다.

마법의 주머니도 아니고, 그놈의 칼은 어디서 저렇게 나오는 거야..?

“....”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끼고 계신 안경알이 달빛에 부드럽게 반사되면서 안경 속 표정을 읽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이 아저씨가 진정하지 못하면 침입자 검거 이전에 목이 졸려 죽을 상황이었다. 이미 아까부터 말투나 표정을 보아하니 제정신이 아니란 건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수를 강구해야만 했다.

“지금 하는 행위...”

와중에 선생님이 드디어 무겁게 닫고 있던 입을 떼며 코끝에 매달린 안경을 고쳐 씌웠다. 반짝이던 안경테 속에서 선생님의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빛이 드러났다.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요?”

“히익, 오지마!!! 그냥 날 돌려보내기만 하면 돼. 자료는 필요 없어!!”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요. 첩보 활동에서 빼돌린 자료는 어떻게 했든 아무런 상관도 없단 걸 본인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떨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으시겠죠. 확실히 말씀드리죠. 이곳에선 아무것도 나가지 못합니다. 자료도, 그리고 사람도.”

절망 자체가 되어버린 대화 속에서 절규하는 아저씨의 흐느낌이 온전히 내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내게 이 상황을 벗어날 순간은 분명 지금이었다.

“에잇...!!”

“뭐,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자식!”

나의 목에 겨눈 나이프의 칼날 부분을 망설이지 않고 한 손에 움켜쥐었다. 베여 들어가는 손에 개의치 않고 나는 곧바로 푸른 눈을 빛내며 단의 능력을 사용했다. 다행히도 단의 능력은 손잡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이윽고 단의 능력은 나의 두려움이나 위기의식을 차단했고, 칼날을 붙잡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더욱 대범하게 칼날을 잡고 있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푸른 기운이 나의 손을 일부 감싸면서 더 이상 손이 베이지도 않았다.

나 자신이 굳이 왜 이렇게까지 발버둥 치는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이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약간의 틈만 보인다면 주변에서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는 무성의한 믿음이 있었다.

“청호!!!”

그리고 그 생각은 우연하게도 들어맞았다. 저 멀리 누군가 창밖에서부터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기쁜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나를 향해 하늘에서 수평으로 날아오는 푸른하늘이 보였다. 하얀 달빛과 대조되어 선명해진 붉은 눈빛과 날개를 반짝이며 그녀는 무직막지한 속도로...

“엎드려~!!!!”

“....??!!!”

꽝! 콰장창~!!! 쿠구구궁~!

고속으로 날아드는 그녀가 창틀을 으스러뜨리며 착륙한 순간, 푸른하늘의 등에서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던 붉은 기운이 화염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여파로 층의 모든 창문이 한순간에 터져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흐트러지는 유리 조각에 반사된 눈 부신 달빛 사이로 푸른하늘의 눈동자가 아름답게 타올랐다. 마치 달밤에 나타나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처럼 찬찬히 손을 뻗는 그녀의 눈동자에 홀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멈춰라, 이 녀석들아..!”

바닥을 뒹굴었던 아저씨가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지도 못하고 충격에 휘말렸음에도 그의 손아귀 힘은 전혀 줄지 않았다.

스윽.

“모두 움직이지마..! 이곳에 내가 폭탄을 설치했다! 건물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기 싫으면 전부 내 말 들어!”

징그러울 정도로 처절해진 아저씨가 자그마한 기폭장치가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런 아저씨의 사념이 가득 담긴 아우성에 푸른하늘도 뻗던 손을 멈칫거렸다.

설마 흰 상자의 정체는 전부 폭발물이었던 걸까?

만약 폭탄이 터진다고 하더라도 푸른하늘이라면 혼자서 여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능력 하나 없는 나까지 데려가려 한다면 푸른하늘의 안전은 보장받질 못했다.

“....”

초조한 모습의 나와는 다르게 가만히 아저씨를 지켜보던 푸른하늘이 붉은 오라를 완전히 사그라뜨리고는 그를 향해 옅고 작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어서 이 학교를 부숴주세요.”

“뭐...? 무슨 막말이야. 진짜 폭탄이라고! 이곳의 자료부터 네 목숨까지 통째로 날아가 버릴 거다!”

“제 목숨은 신경 쓰지 마세요. 자료 따위는 더더욱 상관없습니다. 안일하고 어리석기만 한 이 슬픈 학교를 더는 학교라 생각지 않아요. 그러니까...”

“학생 No.1 푸른하늘!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세요! 더 이상의 도발은 위험합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학생부장 선생님이 화가 난듯한 어조로 푸른하늘을 꾸짖었다.

“....”

“그 이상은 학생의 신분이라도 봐 드릴 수 없습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그냥 물러나세요!”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팔을 휘젓지만, 그런 경고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푸른하늘이 작은 숨소리와 같이 엄숙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어서 해보세요.”

그녀의 짙고 검은 머릿결이 가볍게 일렁인다.

“으아아아!!!”

“푸른하늘~!!!”

“....!!!”

아저씨의 의미 모를 괴성. 격앙된 선생님의 외마디 외침. 비장하게 서 있는 푸른하늘 앞에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질 이해하길 바라지만 그럴 수 없던 나는 기폭장치의 작동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파앗!

번개 같은 속도로 나의 목덜미를 잡아챈 푸른하늘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게 뚫린 창밖으로 몸을 내던진다. 멀어져가는 학교 건물에서 굉렬한 폭발음과 더불어 빨강과 주황빛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귀를 뚫는 굉음과 섬광이 나의 온몸을 감싸 타오르려던 찰나, 자신의 곁으로 더욱 끌어당기며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폭발을 등지고 나를 감싼 그녀와 한순간 눈을 마주치지만 무능하기만 한 나는 그녀를 걱정할 생각조차 들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대었다.

꽈과광~!!! 쿠궁!!! 쾅!!

4층 전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큰 폭발에 휘감겼다. 당연히 거대한 충격파와 불꽃에 휘말린 우리는 상당한 비거리를 맨몸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나를 껴안은 푸른하늘의 붉은 오라가 나와 그녀의 전신을 적신 채, 어느 한 건물의 창을 뚫고 들어갔다.

적지 않은 속도로 추락한 우리는 그곳의 책상 더미들과 부딪히면서 둘로 나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윽. 푸, 푸른하늘...”

폭발의 열기와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채 추락했으나, 어째선지 기절하지 않았던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채 힘겹게 푸른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있는 푸른하늘은 미동조차 없었다. 붉은 기운 마저 사라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흐트러진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일어나....!! 푸른하늘!!”

몸을 일으켜 가까스로 네발로 기어가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숨을 쉬는지조차 몰라 귀를 얼굴 가까이 가져가려는 순간, 그녀가 큼지막한 눈을 멀쩡히 떠 보인다. 자세히 보니 교복이나 얼굴 군데군데 그을음 자국은 있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너, 괜찮은 거야? 등은 안 다쳤어?”

“등...?”

“그래, 너 날 구하겠다고 폭발을 등지면서 날 감쌌잖아.”

그러자 푸른하늘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나의 멱살을 잡고 머리카락에 흐트러진 자신의 얼굴 가까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대꾸했다.

“나보단 네가 어떤지를 걱정해야지, 뭔 소리야? 뭐, 움직이는 모습이랑 얼굴 상태를 보니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폭탄에 직접 휘말린 건 넌데...”

“걱정 안 해도 돼. 등도 멀쩡하니깐.”

“뭐? 거짓말.”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해? 확인해 볼래?”

벌떡하고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내게 등을 보여주었다. 그을려서 교복 군데군데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교복 아래 그녀의 살결엔 화상이나 상처 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것보다 네 몸이나 어디 부러지지 않았나 다시 확인해봐. 떨어지는 순간까지 능력을 섬세히 조절하는 게 힘들어서 어딘가 충격이 갔을 수 있어.”

능력, 푸른하늘은 폭발부터 이곳에 추락할 때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나를 지켜준 것이었다. 문득,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능력이란 대체 어떤 능력인지 궁금해졌다.

“확인 다 하지 않았어? 뭘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야.”

“어? 어엉?! 아, 미안...”

“....네가 왜 사과하는데?”

푸른하늘이 스스로 보여줬다지만 여자아이의 드러난 맨 등을 보고 있다는 게 민망해진 나는 무심코 사과를 건넸고 그런 나를 그녀는 의아해하며 바라보았다. 쑥스러워 빨개진 얼굴을 숨기고자 나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가 어디까지 날아온 거지..?”

“여긴..., S동.”

처음 와보는 건물이었지만 복도 하나에 교실들이 일자로 늘어선 여타 다른 건물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좀 특이한 건, 복도에 일부 낡은 의자나 책상이 널브러져 있고 군데군데 낡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모든 교실 안쪽에 새까만 암막이 설치되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폐건물과 같아 보였다.

“안 쓰는 건물인가?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

“....”

“후우, 일단 너나 나나 한고비는 넘겼으니까. 그만 돌아가자. 일은 생각한 대로 풀리진 않았지만, 이 이상 뭔갈 하는 건 힘들 것 같아.”

냅다 주저앉은 채, 딱딱히 굳은 푸른하늘의 눈치를 살폈다. 당당히 꼬여버린 이번 계획에 대해서 위로도 건네보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슬프게도 내게 남은 건 실적과 이미지가 아니라 건물폭발과 자료의 소실만이 전부였다.

학생부장 선생님이랑 아저씨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상황에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별 무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앉아 있는 푸른하늘에게 손을 내밀었다.

“....”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일어나고도 여전히 말이 없는 푸른하늘을 뒤로 하고 나서지만, 문득 교실에 짙게 쳐진 암막으로 시선이 몰린다. 무엇 때문에 이런 저녁에도 커튼을 쳐놓은 것인지 몰랐던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마치, 무언가를 꼭꼭 숨겨 놓은 것처럼 보여 같은 교실의 모습인데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뭐가 있는 거지?”

결국, 나가다 말고 어느 한 교실 창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암막 커튼이더라도 커튼과 커튼 사이의 틈새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교실 안에 자그마한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있... 으, 으악~!!”

열심히 안을 훔쳐보던 나는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차리자마자 뒷걸음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눈썹을 찡그리며 녹슨 부품처럼 돌아가는 고개로 푸른하늘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글픈 눈동자로 나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안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어...”

“....”

“왜 말이 없어? 안에 저 사람들 뭐야? 혹시, 죽은 거야?”

“....죽은 건 아냐.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론 죽어간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모습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리고 조금 전 H동에서 살펴본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대체 여긴 뭘 하는 곳이야? 이 학교는 대체 뭘 하려는 거고? 말해줘, 제발 말해줘!”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를 주체하지 못하던 나는 푸른하늘을 보고 윽박질렀다. 그것은 아직도 이곳이 잔혹한 비밀들이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었다.

내가 커튼 사이로 본 것은 교실에서 등 하나 켜지 않고 가지런한 모습으로 줄 맞춰 있는 수많은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생이, 실험대의 피실험자처럼 기울어진 의자에 누워 머리와 사지에 수많은 장치와 선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특히 내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건, 머리의 절반을 감싸던 장치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맞춰 모두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로운 듯 손과 발가락을 움츠리고 얼굴과 입술이 새하얗게 질린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의 머릿속에 들어온 이 충격적인 장면들은 나의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 좀 처럼 떠나질 않았다.

“푸른하늘,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시간이 됐어. 이제 깨어날 거야.”

“....??”

혼란스러운 나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교실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투웅. 띵띵띵띵띵.

일순간 모든 교실에서 전자기기의 전원 종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교실 안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며 일제히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드르륵~ 쿵.

“....”

여기저기서 일제히 교실 문이 열리고 초췌한 얼굴의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교실 안에서 학생들이 몰려나와 천천히 건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와 푸른하늘을 인지하는 눈치였지만 누구 하나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게, 뭐야.”

멍하니 서서 나의 곁을 지나쳐 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나를 지나치는 학생 그 누구도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다. 몸을 비틀거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에 얼굴색은 잿빛이었다. 패잔병과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여전히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1학년이야. 그리고, 1학년 모두가 다 저런 모습이지. 청호, 네가 등하교를 하면서 여태 1학생 구역을 지나쳐 왔겠지만 아마 한 번도 1학년을 마주친 적이 없어서 몰랐을 거야. 만약 네가 부 활동을 하는 교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면 본 적 있을 수도 있겠지만...”

“1학년...?”

천체관측부, 그곳에 우연히 들어갔을 때 책상에 엎드려 꼼짝도 안 하던 1학년들의 모습이 스쳐 떠올랐다. 분명 밖이 요란스러웠는데도 쥐 죽은 듯 잠만 자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 되짚어서 교무실에서 이야기하던 선생님의 말씀과 아린과 나눴던 대화, 그리고 1학년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느꼈던 감정과 괴리감이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여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1학년이 복도 너머로 모두 사라지고 나서, 나는 푸른하늘에게 이곳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추궁했다. 이제는 강제로라도 이 학교의 진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게 바로 이곳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거야.”

나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교실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큼지막한 기기를 바라보았다.

“저 교실 안에 있는 장치는 인간의 뇌, 특히 외부에 대한 자극에 따라 발달 가능성이 큰 어린 학생들의 뇌에 수 많은 감각 정보들을 입력하게 되어있어. 그러면 특정한 감각 정보에 따라 뇌 신경 세포들이 새로운 연접을 만들어 내고, 뇌는 폭발적인 변화를 겪게 돼.”

푸른하늘은 쉽사리 믿기지 않는 공상과학과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미 이곳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충분히 봐왔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거짓말로 치부하지 않고 계속해서 경청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뇌가 변화하는 걸 뇌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해. 다시 말해 저 기계는 뇌 가소성이 뇌에 발생할 때까지 의식적, 무의식적 자극을 무한 반복시키는 거야. 이걸 응용하면 모든 학생이 선택된 정보와 지능을 습득하는 게 가능해져. 그리해서...”

“일반 고등과목 교과과정에 관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맞아.”

푸른하늘의 말을 듣던 도중 떠올랐다. 폭발에 휘말리기 전, 더 정확히는 관리인 아저씨를 만나기 전에 어둠 속에서 무작위로 꺼내 읽었던 책의 내용 중에 비슷한 말이 적혀 있었다. 제대로 읽지도 않았던데다 생소한 단어가 많아 어물쩍 넘겼었지만 푸른하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때의 내용이 대강이나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기기에는 큰 단점이 하나 있어.”

“단점..?”

“개인차는 있겠지만 뇌로 향하는 감각 정보는 결국 순응이라는 과정이 일어나. 이 과정은 원래 뇌에 누적되는 피로와 변화를 줄이는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지만, 대신 가소성도 일으키지 않아.”

활짝 열려있는 교실 문에 다가가 푸른하늘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기계가 순응을 감지하면 가소성을 위해 역치 값 이상의 자극 즉, 더 많고 강한 자극을 내보내게 돼. 그렇게 한꺼번에 들어오는 강력한 감각 정보들은 극심한 통증과도 같아서, 지속하게 되면 몸과 정신이 무너지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학생들에게 그런 짓을 한다고?! 이건 정도가 지나치잖아. 다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고!”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거지. 잔인하지만 이 장치의 효과를 똑똑히 보려면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사용방법밖에 없거든.”

격하게 항변하던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푸른하늘은 조그맣게 몸을 떨었다.

그렇다. 푸른하늘도 1학년 때 이 일을 똑같이 경험했다. 자신도 그런 일을 겪었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홀로 학교와 맞서 싸워 왔다. 나는 여태까지 언성을 높인 것에 미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후, 푸른하늘의 설명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1학년들은 1년 내내 해당 분야의 권위자나 연구진들의 평가하에 기기 이용시간이 설정되고, 성과가 없는 학생은 해당 기계를 24시간까지도 이용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미친 짓이야. 정말, 미친 짓이라고... 여긴 학교잖아. 학교에서, 이런 짓을 하는건...”

“청호, 사실 이곳 누구도 여기를 학교라고 생각하지 않아.”

“...!!”

“다들 그렇게 부를 뿐, 애초에 이곳 누구도 여길 학교라 여기지 않아. 미안하지만 유일하게 여길 학교라 받아들이려 한 건 너 혼자야.”

나는 정신이 흐려질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벽에 둘러싸여 숨 하나 제대로 쉬지 못하는 갑갑함이 내게 찾아왔다. 힘들게 마주한 학교의 비밀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두려운 모습이었다. 분명 모든 게 그대로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 혼자 세상과 멀어져 있었다는 진실에 세상이 조금씩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덥썩.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나의 옷깃을 푸른하늘이 잡아끌었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와 하얀 피부가 나의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정신 차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미안.”

“이 기기는 기대기업에서 만들어 낸 인류의 혁신과도 같은 발명품이야. 쉽게 상용화는 할 수 없지만, 만약 이 기계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지식과 관련된, 아니 세상 모든 산업과 시스템, 그리고 인과관계의 가치를 뒤바꿀 수 있어.”

우울해 보이던 푸른하늘의 눈동자에 다시 의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든 의지를 내게 불어넣듯 그녀는 나의 옷깃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래서 기대기업은 이 기기를 독점한 채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정확히 알아둬. 여긴 학교가 아니야! 탐욕 덩어리인 자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하기 위해 부려먹을 유능한 장기 말을 배출하는 장소일 뿐이야.”

“....”

푸른하늘은 이어서 멍하니 서 있는 나의 손목을 아무렇게나 잡아끌었다. 나는 몸을 허우적거리며 그녀와 같이 복도 끝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벗어났다.

“너, 다시는 내 눈앞에서 그런 멍청한 눈 하지 마.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바보같이 멈춰있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한 말 절대 잊지 마. 그게 진실이니까.”

학생으로서 본분이 되는 3년 과정을 단 1년 만에 끝내고 남은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시작되는 피 튀기는 경쟁. 서로를 죽이지만 않을 뿐 상대를 제압하고 위협하고 무너뜨려야만 하는 2년간의 지옥, 당연하게도 이 또한 기대기업이 안주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더불어 이곳은 학생에게 잘못된 사상과 이념을 주입하고 격이 다른 능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전투능력과 개성을 다루게 하려고 수많은 연구실험과 장비를 지원하여 강력한 능력자들을 양성해왔다. 이 또한 그들만이 안주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 대부분이 그들의 뜻에 거역하지 않았다. 모두가 기대기업과 학교의 밑거름이자 발판이 되는 걸 영광으로 여기고 선망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기만 한다면 미래엔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넌, 그걸 알면서도 그간 맞서 싸워 온 거야?”

“왜? 조금은 달라 보여?”

“....”

“흥, 침묵하지 못하고 괜히 앞장서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멍청한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지.”

“아냐, 그렇지 않아.”

잡아끌던 손에 저항하며 나는 그대로 푸른하늘을 멈춰 세웠다. 여전히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나 또한 그녀의 보드라운 손목을 같이 감싸 쥐며 말했다.

“절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넌 대단한 사람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때 늦은 시간에 맞춰 교내를 밝게 빛낼 가로등이 물결처럼 일제히 가동되면서 학교 곳곳에 새하얀 빛을 퍼뜨렸다. 달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손목을 감싸 잡던 우리는 좀 더 환하게 각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로 서로 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눈만 바라보던 중, 그녀가 피식하고 실소를 자아냈다. 그리곤 다시 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가자! 아직 우리가 할 일은 끝나지 않았어.”

“무, 무슨 일..?”

계속해서 팔을 붙잡은 상태에서 그녀가 유쾌한 미소로 화답했다.

“청호의 이미지 개선 프로젝트!!”

“....?!!”

환하게 내리쬐는 수십개의 가로등 불빛 아래를 나와 푸른하늘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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