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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안테나 님의 서재입니다.

푸른하늘의 학교 파괴 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TV안테나
작품등록일 :
2021.06.14 01:27
최근연재일 :
2021.06.20 09:00
연재수 :
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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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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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수 :
158,752

작성
21.06.1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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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8. No, 900.

DUMMY

8. No, 900.


그 뒤로 천근과도 같던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을 땐, 나 홀로 보건실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저녁노을에 비쳐 노랗게 물든 창틀을 보며 마치 모든 게 꿈이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학생부장 윤 신아 선생님을 마주하면서 나의 감각은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왔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나는 이후 별문제 없이 하교한 뒤, 앞으로 내가 지낼 자취방에 늦게나마 도착할 수 있었다. 깔끔하고 널찍한 집이지만 반겨주는 거라곤 미리 부쳐놓은 이삿짐들이 전부였다. 정신없이 짐들을 방 한편으로 몰아넣고 당장에 필요한 물건들만 꺼내 놓는다.

“.....”

대충 끼니를 때우고 거실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앉았을 때는 베란다 밖으로 큼지막하게 둥그런 달이 떠 있었다. 시골이라 그런지 달빛은 무척이나 환하고 은은했으며 이는 창밖의 한적한 시골 풍경과 제법 잘 어울렸다. 습관대로 벽을 등지고 쭈그린 채 의미 없이 창밖만을 바라봤다.

“좀 더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도시를 벗어나 이곳 시골로 내려온다면 갑갑하던 이전 학교에서의 기억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로는 그게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하루만에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걸 알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전학을 권유한 걸까?

“춥다...”

가볍게 떨려오는 오른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떨궜다.


다음 날, 쪼그려 앉은 상태 그대로 밤을 보내버렸지만 나는 익숙한 듯이 눈을 비비며 새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곤 막힘없이 등교준비를 끝낸 뒤, 집을 나섰다.

기대고등학교의 학생은 학교 내에 운영되는 기숙사를 무조건 이용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기숙사 인원은 학교의 정원에 딱 맞춰줘 있는 탓에 예외인원에 해당하는 전학생은 외부에서 등교해야만 했다.

비록 학교 내에 각종 시설이 존재한다곤 하지만 기대고교의 학생은 졸업까지 절대 학교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기본교칙임을 깨달은 건 꽤 나중의 일이었다. 이러면 교도소와 다를 게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도 푸른하늘과 아린을 제외하곤 이 교칙에 대외적으로 불만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소 신기할 뿐이었다.

부스럭부스럭.

“....??”

으리으리한 학교 정문에 지나갈 즈음 정문관리실에서 뒤돌아서 바삐 무언갈 찾는 관리인 아저씨를 목격하였다.

‘저건, 뭐 하는 기계지?’

자연스레 나와는 등을 지고 라디오처럼 생긴 기계장치를 더듬으며 무언갈 열심히 조작하는 아저씨에게서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

“으아아악!!”

아저씨의 갑작스런 비명에 나 또한 똑같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어음,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뭐야, 전학생이구나. 어휴, 원래 이 시간에는 여길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통학하나 보구나.”

“아, 네...”

평상시 능청맞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관리인 아저씨는 땀까지 삐질 흘리며 잔뜩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원래 내가 좀 집중할 때 말 걸면 쉽게 놀라는 편이어서 말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이미 잔뜩 경계하는 눈빛의 아저씨에게 뭔가를 더 묻는 것이 어려웠던 나는 떨떠름한 표정에 가벼운 목례 후 교문을 지나쳤고, 뒤돌아서 눈치를 보던 중 부리나케 학교 교실로 뛰어갔다.


교문에서의 궁금증을 뒤로하고 들어선 학교, 그곳에선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옭아맸다. 어제 학생부장 선생님께선 푸른하늘과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곤 말했지만, 결국 이곳에서 나의 존재감이 퍼질대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나는 학교 내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전학생을 허락지 않던 이 명문고에서 내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푸른하늘과는 어떤 관계인지 등, 나에 대한 여러 소문이 밑도 끝도 없이 돌고 있었다.

‘하아, 단단히 큰일 났네.’

역시나 반에 들어서도 시선은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반 전체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그 순간 전신을 짓누르는 부담감에 멈칫하지만, 우연히 마주친 부반장 세진과 이루를 포함해서 반 친구들에게 애써 태연한 척 인사를 건넸다.

“조, 좋은 아침...!”

“....”

“....”

대실패. 애초에 좋은 대접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괜한 경쟁자가 더 생겼다며 뒤에서 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타인이 자신과 다르다고 여기는 순간,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경계와 하대뿐이었다.

잠시 후, 시작되어야 할 수업시간에도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담임선생님은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학생들은 기계처럼 자율학습을 시작했다. 그때야 무심결에 나를 의식하던 이들의 시선이 차츰 사라져갔다.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당장이라도 박차서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본능적으로 여기 또한 내가 있을 곳이 아님을 직감했다. 따스한 해가 비추는 창가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딩동뎅동~.

드디어 고대하던 오전 자율학습이 끝나고, 오후의 부 활동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나를 두고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부 활동을 위해 자리를 떴으나, 나 혼자 교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삭막해보이긴 해도 차라리 이게 더 좋았다.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한 이 순간이...

“청호...”

“으응..??”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부반장이 나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두가 나갔다고 생각했던 순간, 낌새도 없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윤 신아 선생님이 이번엔 어디 가지 말고 교실에 남아있으라고 했어.”

“설마, 그 교칙이랑 부 활동 때문에..?”

“.....”

부반장이 얼음처럼 굳은 눈동자를 내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좀 자유로워지나 싶었는데...”

“그리고...”

“....???”

“손님이 온 것 같아.”

부반장이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똑똑똑.

창밖에서 익숙한 얼굴의 곰 인형이 창문을 두드린다. 옆에서는 아린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아, 더 꼬이겠네.”

드르륵.

창문을 열어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쿠요미와 아린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전학생! 학교생활은 잘 즐기고 있니? 흐흐흐.”

천상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다른 이의 책상 위를 가벼운 발놀림으로 넘어 다니는 아린이 내게 물었다.

“너, 지금 일부로 능청 부리러 온 거야?”

“설마! 내가 우리 청호한테 뭐하러 그러겠어??? 후훗.”

“.....”

놀란 눈동자, 거기에 미소를 머금은 입가를 한 손으로 가리는 동작을 취하지만 그 모습이 그녀를 더욱 능글맞은 모습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근데 우리 청호, 벌써 친구를 사귀었나 보네. 능력이 대단한걸?”

“....No, 127. 이 아린.”

“어머, 나를 알고 있네. 이야~ 나도 인기인이구나.”

부반장이 차분한 어조로 아린의 학생 번호까지 읊으며 책상 아래에서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부반장의 냉한 눈빛과 아린의 싱그러운 눈동자가 교차했다.

“학교 내 유일한 불법써클, 혁명단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학생회에서 예의주시해야 할 인물에 더불어 학교를 좀먹는 대상 중 하나.”

“...호오, 너 정말 건방진 소리를 아무렇게나 뱉네?”

아린의 입가에서 피었던 미소가 사그라든다. 여전히 눈동자는 능글맞게 웃어 보이지만 이미 서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튕기며 반 전체를 무거운 공기로 짓눌렀다. 갑작스레 치닫는 삭막함에 나는 홀로 눈동자를 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뭐, 하지만 여기서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

“....”

다행히도 이내 여유로운 모습으로 눈길을 거두는 건 아린 쪽이었다. 아직도 올라선 책상 위에서 가볍게 양팔로 팔짱을 꼈다.

“이야~, 근데 어떻게 눈 하나 깜빡 안 하네. 신기하다, 너 혹시 학생 번호가 어떻게 돼?”

“...No, 440.”

“440?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아하, 알겠다. 네가 그 석고붕대로 모든 학번대결을 기권승으로 이겼다는 3반의 부반장이구나?”

“.....”

“확실히, 팔의 깁스가 굉장하네. 상당히 독특한 방식이야.”

아린은 부반장의 팔에 두른 깁스를 빤히 내려다보며 흥미로운 모습을 보이지만, 부반장은 이런 대화에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깁스에 대해 언급하자, 아예 뒤로 물러나 나의 옆에 나란히 붙어섰다.

“히잉, 너 정말 재미없다. 적어도 청호는 이것보단 재밌는데.”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 무슨 소리야? 학번대결이라니?”

“아, 청호는 모르나?”

가만히 있던 내가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분명 아린이 대결과 순위라는 말을 언급했는데 그게 본능적으로 나의 신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린은 사뿐히 책상 아래로 내려와 이번엔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가진 학생 번호를 걸고 싸우는 학교 내 공식적인 능력싸움을 말하는 거야. 번호가 낮은 학생이 높은 번호의 상대를 무력으로 이기면 해당 번호를 가질 수 있고, 수많은 대결과 승리를 통해 누구든 상위권의 번호를 차지할 수 있어.”

“이 번호, 바뀔 수 있는 거야? 게다가 이 번호가 등수를 나타내는 거였어?”

“딩동댕, 우리 청호가 정확히 이해했네.”

“말도 안 돼. 네가 말하는 게 진짜 싸움을 말하는 거야? 세상에 학생끼리 싸움을 붙이고 그걸로 등수를 정하는 학교가 어딨어?”

“어딨긴, 바로 여기지! 어서 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기대고등학교에~.”

신사 흉내를 내며 아린은 장난스레 치마 끝을 잡고 오른발을 뒤로 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얄미운 아린의 모습에 항변하려는 순간, 창가 쪽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실감하는 모양이네.”

“....?!!”

분명 처음에 아린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교실 밖 창가에 누군가가 바람에 일렁이는 커튼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릿결에 12시 정각의 햇빛을 등지면서 검붉은 눈동자를 드리우던 이의 정체는 푸른하늘이었다.

“여기 기대고등학교는 1학년에 모든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수료해. 하지만 2학년 이후론 학교를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전교생이 학생 번호를 위해 무한대결을 펼치는 전쟁터야.”

“그럼, 부 활동은..?”

“뭐, 전쟁터라곤 했지만 진짜 여길 피 터지는 전쟁터로 만들 순 없잖아? 학생으로서 효과적으로 신분과 본분을 유지하고, 그들 간의 세력 활동을 관리하는 방편일 뿐이야.”

“.....”

푸른하늘의 말은 졸업하는 순간까지 학생들끼리 투기를 하라는 잔혹한 말이었다. 대체 학교는 무엇 때문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 걸까?

터무니없는 대화에 동요조차 없이 서 있는 그녀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던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른하늘과 아린, 그리고 부반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너희들도, 벗어날 수 없는 거구나.”

“흠, 눈치는 빠르네. 그래, 맞아. 그리고, 여태까지 그 누구도 이곳을 바꿀 수 없었지. 게다가 이렇게 비정상적인 학교지만 밖에선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문고라 불리지. 그런 이미지에 여태까지 이곳의 비밀을 숨길 수 있었다는 건, 학교와 배후의 기대기업에 그만한 능력과 권력이 있다는 뜻이야.”

이곳의 교칙과 질서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구속하고 학교의 권익만을 챙기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무척이나 뒤늦게 이해하고 말았다. 푸른하늘과 아린, 그리고 혁명단의 진정한 존재의의를.

푸른하늘은, 서 있던 창가에서 사뿐히 내려와 아린의 옆에 서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우리 혁명단이, 이런 학교를 파괴하기 위해 있는 거야. 그리고 이 목표는 분명 너의 바람이자, 나의 바람이지. 안 그래? 청호.”

그 순간 창가로 불어오는 작은 바람, 그에 살랑이는 푸른하늘의 머리카락, 딱딱하지만 온화한 목소리가 어느 한순간의 기억을 들춰냈다.

“호, 혹시! 그때 나무에 있었던 여자아이가 바로..?”

푸른하늘은 대답 대신 그때와 똑같은 자그마한 미소를 보였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할게. 나는 이 학교에서 Student No.1과 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학교의 뜻을 거역하고 혁명단을 이끄는 푸른하늘이라고 해.”

“그리고 나는 훌륭한 조력자, Student No.127, 이 아린! 그리고 여기는 나의 사랑스러운 곰 인형 쿠요미!”

“쿠요미가 아니라 아블모즈다! 하아. 제발 부탁이니 소년, 너라도 제대로 기억해라.”

새로운 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 학교의 반란군일 줄이야.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구한 나의 삶 때문에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난 No. 440, 유 세진...”

“뭐, 뭐야...? 부반장 너까지 왜 자기소갤 하는 거야?”

“상대가 인사를 건네잖아? 너도 해.”

“나, 나도...? 으음, 난 No. 1001, 신 청호...”

뜬금없이 진행된 자기소개로 어영부영 나의 학생 번호와 이름을 말한 그때, 지켜보던 아린이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뭐야, 뭐야? 청호, 너 진짜 웃긴다. 하라고 진짜 하냐?”

“시, 시끄러..!”

얼굴을 붉히고 잔뜩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아린을 나무라지만 그녀의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거기다 푸른하늘까지도 뭔가 웃음을 참는 시늉을 하자, 부끄러움이 얼굴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푸른하늘이 분위기를 정돈했다.

“아린, 사람을 대놓고 놀리면 못써.”

“푸후훕, 좋아좋아. 알았어, 그만할게. 그렇다면 이제 혁명단의 뉴 멤버인 청호와 같이 열심히 학교를 부수면 되는 거야? 신난다~!”

“음, 동료가 늘었으니 축하파티라도 해야 할까?”

“오오, 듣고 보니 그러네. 메뉴는 내가 정할래!”

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들은 진짜 철없는 여고생처럼 막무가내로 자기들끼리 이야길 나누며 뭔가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야기가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빠져 열띤 토론을 펼치는 혁명단에게 나는 제재의 목소리를 가했다.

“얘들아, 잠깐만!! 아니 그 보호수에서는 내가 소원을 빌었다곤 하지만 난 진짜 학교를 부수는 거에는 관심 없어! 게다가 난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무슨...”

“무슨 소리야, 청호? 미안하지만, 숨겨도 소용없어.”

“뭐?”

한순간의 정적, 푸른하늘과 아린, 쿠요미까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적중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더라도 네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쯤은 모를 리 없는데. 안 그래?”

“아니. 난, 평범해!”

“아냐, 평범한 걸 바라는 거겠지.”

둔탁해진 분위기 속에서 어느 순간 나의 코앞까지 푸른하늘의 얼굴이 다가왔다. 푸른하늘의 새하얀 피부와 대조될 정도로 어두운 눈동자에서 더욱 오묘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평범한 학생은 절대 이곳에 올 수 없어.”

푸른하늘의 눈을 보고 있으니 한껏 아련한 기운에 빠져들었다. 모든 게 꿰뚫려 낯부끄러워진 기분과 함께 나의 기세가 짓눌리기 시작했다.

“청호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우리에겐 이렇게 느긋하게 대화 나눌 시간도 없어. 아직도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인데, 그러면 너도 어서 이 학교의 진정한 진....”

와장창!!!

귀가 멍해질 정도의 폭음, 그에 맞춰 한순간에 창가 쪽 교실의 모든 유리가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유리 파편들이 나의 눈앞에 쏟아져 내리는 순간.

“엎드려!”

반응할 틈도 없던 날 푸른하늘이 잡아끌며 강제로 책상 밑에 몰아넣었다. 그 덕에 눈앞에 아찔하게 아른거리던 유리 조각들을 가까스로 피해낼 수 있었다.

“기습이야! 아린, 우측 어시스트!”

“좋았어!”

창틀까지 일그러진 충격에도 푸른하늘과 아린은 더욱 침착하게 박살 난 창문을 통해서 빠르게 좌우로 흩어졌다.

“하아, 하아.”

영문모를 기습에 잔뜩 웅크려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나의 볼에 따스한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뒤늦게 바닥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한쪽 다리를 꿇고 자세를 낮추고 있던 부반장과 눈이 마주쳤다. 밖에선 푸른하늘과 아린이 일으키는 건지, 요란한 소리와 미세한 진동들이 손끝에 스며들어 왔다.

“끄응, 여긴 학교 유리창이 남아나질 않겠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혁명단이 학교의 유일한 대척점인 만큼 학생회를 포함해 그들의 활동을 와해시키려는 무리도 많아.”

부반장은 책상을 엄폐물 삼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빼꼼히 바라보았다. 나는 바닥을 기듯 움직여 창가 아래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자릴 잡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공격은 누가 한 건데? 학생회야?”

“글쎄, 하지만 학생회는 학교 기물까지 파괴하면서 무모하게 나서진 않아.”

“후우,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다는 건 그 무리도 정상은 아니겠네.”

“이렇게까지 과격한 짓이라면...”

그 순간, 부반장은 말도 끝내지 않고 자신의 이마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찬찬히 짚었던 손을 떼어내자, 새빨갛고 끈적한 핏자국이 묻어나왔다. 바라본 부반장의 머리에선 선명한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어, 너 머리에서 피가...?!”

“....아무래도 제대로 못 피한 모양이야.”

살짝 스쳤던 나와는 다르게 흘러내리는 굵은 핏줄기에 잔뜩 당황한 나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부반장은 태연하게 품 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눈가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 때문에 부반장이 괜한 일에 엮었다는 자책감으로 애꿎은 벽에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한 마음을 쉽사리 가라앉힐 순 없었다.

“정신 나간 놈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관련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휘말려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거야?! 젠장, 부반장? 우린 어서 보건실로 가자.”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들을 지나 가만히 있는 부반장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

하지만 부반장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전혀 다른 의도의 질문을 내게 던졌다.

“넌 같은 혁명단인데, 도와주지 않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혁명단도 아니고, 나 같은 놈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

“...그럴 능력이 있는데도?”

“정말 너까지 이러기야? 난 어디든 나서고 싶지 않아! 그냥, 그냥 평범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뿐이라고!”

너무 당황했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로 부반장을 나무랐다. 하지만 그런데도 부반장은 여전히 뜻 모를 표정으로 나를 일관했다.

과거, 그때도 그런 눈이었다. 내게서 무언갈 간절히 바라는, 나서서 해내길 바라는 눈동자. 하지만 결국엔...

“모두가, 날 이용만 하고 버릴 거잖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널 저버릴 이유는 없어.”

어째서일까? 왜 그때의 옛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왜 잊고 싶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걸까?

그렇게 피를 흘리고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자꾸만 나를 덮쳐왔다. 피를 흘리고 날 바라보던 눈들이 머릿속에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밖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확연히 조용해졌다. 하지만 정확히는 바로 창밖에서 들려오던 소란이 멀어진 것이었다.

부서진 유리 조각이 햇빛을 받아 부드럽게 반짝이는 교실에 적막만이 감돌았으나, 부반장은 다시 한번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해.”

어느새 바닥에 떨어졌던 핏방울들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부반장,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온몸에 알 수 없는 일련의 전율이 흘러들어왔다.

“스스로에게 마저 솔직해질 수 없다면 그건 한낱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런 말과는 반대로 부반장의 눈은 생동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그런 맹한 모습의 그녀에게선 예전부터 존재감이란 걸 느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파르르 떨리던 양손을 진정시키며 굳게 결심한 난, 움켜쥔 그녀의 팔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좋아, 그럼 내 솔직한 심정을 당장 말해줄게. 지금부터 내가 밖으로 나가 시간을 끌 테니까. 넌 당장 보건실로 가도록 해.”

꽝!

나는 바로 옆에 세워진 책상을 거칠게 넘어뜨리곤 책상 밑 서랍에서 굴러나온 물건 한 자루를 재빠르게 챙겨 들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와 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수선해진 건물 밖 정원엔 혁명단의 모습도, 그리고 기습을 가했을 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주변 곳곳에 정체불명의 다수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윽.

나를 알아본 것인지 스산한 기운을 풍기며 나와 같은 교복의 학생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공통점으로 눈가에 생기라곤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어째선지 나를 향해 드러내는 강렬한 살의는 나의 등줄기를 한순간 서늘하게 만들었다.

“.....”

푸른하늘과 아린이 당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숨어서까지 날 맞이하는 걸 보니 저들의 목표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일격의 기습도 푸른하늘과 아린을 밖으로 유인하고 그 다음 나를 꾀어내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터였다.

물론 그것 외에 더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찌 됐든 이제부턴 그들의 모든 계략에 다 임해줄 생각이기 때문이다.

손에 꼭 쥐고 있던 필통 하나를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린 뒤 그 자리에서 문구용 커터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커터칼을 제외한 필통과 나머지 내용물들은 전부 차갑게 바닥에 쏟아졌다.

“.....하나, 둘, 셋..., 다섯 명? 아니, 주변에 얼마든지 더 숨어있군. 하지만 몇 명이 있든지 상관없어. 어차피 전력을 다할 거니까.”

그리고 이 순간만큼 나의 검은 눈동자가 머리 위 하늘처럼 아련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한편, 나와 거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똑같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학생 무리를 푸른하늘과 아린이 쉼 없이 추격하고 있었다.

“하늘아~!, 근데 이것들 도망만 치고 전혀 우릴 노리지 않는데?”

한두 명씩 목덜미를 잡아채며 도망가는 무리에게 혼쭐을 내주는 아린이였지만, 나머지 무리가 아직도 술래잡기하는 것처럼 그들과 일정 거리를 둔 채 물러나기 바빠 보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아린은 답답한 표정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분명 선제공격은 화려하게 했으면서 결국 눈치만 보면서 도망가는 게 전부야. 뭐지? 그저 단순한 유인책? 아냐, 이건 단순한 시간벌기밖에 안 돼.”

의문투성이인 상황에서 푸른하늘이 추격하던 발을 멈추었다. 그러자, 앞서가던 그들도 똑같이 속도를 맞추듯 거리를 벌리며 서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자신의 뒤편에서 스치듯 불어오는 바람에서 푸른하늘은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

“성동격서...”

“성동..?? 뭐..?”

“아무래도 이 녀석들이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닌 모양이야.”


주변에 나를 둘러싼 무리는 대략 7명, 너무 꼼꼼히 엄폐하고 있으니 정확한 인원수는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학생의 또래들만이 있는 현 상황에서, 커터칼을 뽑아 든 나에게 무턱대고 덤벼들 확률은 낮을 것이다. 어차피 부반장을 보건실로 찾아가게 하는 나의 목적은 이룬 셈이니, 나에겐 지금 이 상황을 맞서다 벗어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대충, 대충 시간만 끌자...”

“그건 옳은 선택이 아니야.”

“하지만 다른 방법이...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바로 내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조언을 건네던 부반장과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괴상한 자세를 취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보건실에 가고 있어야 할 부반장이 나의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너, 내가 분명 보건실로 가라고 말했는데 왜 따라 온 거야?”

“....정확히 누굴 타겟으로 삼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 혼자 흩어지는 건 별로라 여겼을 뿐이야.”

“후우, 좋아. 그럼 이제 부상자는 내 뒤에 그냥 붙어있어. 이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스윽.

때마침 나를 주시하던 녀석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터칼을 보고 조금은 주춤거릴 거라 믿었던 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곳 기대고등학교의 명문 학생답게(?)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와의 거리를 좁혀왔고 더욱이 그들 손에는 하나같이 묵직하거나 날카로워 보이는 너클까지 끼고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손에 들린 커터칼을 한 번 더 고쳐 쥐었다.

어디서 먼저 올까? 좌? 우? 아니면 정면?

어느새 거리를 좁히던 녀석들이 일정 거리에 도달하자마자 싸늘한 눈동자를 하곤 빠르게 나에게 덤벼드는 모양새를 잡았다. 그에 맞춰 나의 파란 눈동자도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그때, 뒤에 있던 부반장이 빠르게 나의 등을 밀어붙이며 외쳤다.

“청호, 위에!”

“....!!!”

앞에 그들은 눈속임이었다. 서서히 다가와 압박을 주며 나의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하는 게 목적이었으며 그 틈에 2층에서 예정된 기습을 가하려 했던 것이었다.

“치잇..!!”

그걸 빠르게 캐치한 부반장 덕에 나와 부반장은 정면으로 잽싸게 한 템포 이동하면서 기습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그려지고 말았다. 결국엔 이 또한 그들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만 것이다.

처음 계획한 시간벌기를 위해선 퇴각로가 있어야 하지만, 이제는 무조건 그들과 맞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

“부반장, 좀 더 가까이 붙어있어. 바로 온다..!!”

“....”

좌우전방, 그리고 후방에서 시간차!

챙, 챙! 까앙!

지체할 틈 없이 파고드는 녀석들의 공격을 타이밍 맞춰 커터칼로 맞받아내거나 흘려냈다. 이후에 다시 폼을 고치기도 전에 치고 들어오는 후속 공격을 가까스로 회피한 뒤 타이밍 맞춰 내 주변에 둘러싼 4명의 손등을 깊지 않게 그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움직임에 맞게 부반장도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공간을 내어주거나 유연하게 움직였다.

여기서 보통의 학생들이라면 모두가 당황하며 주춤거릴 테지만 아직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어서 후발주자들이 파고들어왔다.

우측사선에 전후방!

이번엔 공격을 맞받아친 다음 자세가 무너진 전방의 상대를 몸으로 밀쳐내며 한 곳으로의 돌파를 시도했다. 애써 눈치를 주지도 않았지만, 부반장은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잽싸게 거리를 유지하며 나를 뒤를 따랐다. 이를 눈치챈 몇 명이 나의 앞을 가로막아 섰고, 난 다시 녀석들과 합을 주고받았다.

빠직!

그 순간 위태롭게 서 있던 커터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커터칼은 부러져야 더 날카로워질 수 있으니까.

드르륵!

기회라고 착각하고 파고드는 한 녀석에게 커터칼의 새로운 날을 뽑아 올린 내가 더욱 손쉽게 공격을 막아내었다. 커터칼과 너클이 불안하게 맞부딪치는 순간, 부반장이 앞으로 달려 나와 왼팔의 깁스로 목덜미를 망설임 없이 가격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녀석의 뒤로 돌아가 녀석의 목을 팔로 휘감고 전형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악인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하아, 하아!”

호흡이 급속도로 나빠져 왔다. 이 눈을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해본 적도 처음이거니와,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게 실패할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나와는 반대로 정체불명의 학생 무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수그러들 줄 모르는 더 매서운 눈빛을 내게 쏘아보냈다.

“하아,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건지 몰라도 더는 서로 다치지 않으려면 여기서 끝내는 게 옳지 않을까? 설마 혁명단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일단 난 무관하다고 말 하고 싶은데.”

“.....”

“이런, 노리는 건 그렇다 쳐도 왜 아무런 대꾸도 없는 거야...!!”

윽박지름과 동시에 붙잡고 있던 놈을 그들 곁으로 냅다 밀어 던졌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긴다는 불쾌한 기분 탓에 차분해지지 못한 나는 부반장이 곁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그들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

그때,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의 간격을 좁히며 순식간에 나의 얼굴에 너클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뭐, 뭐가 이렇게 빠..

퍼억!!

정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눈앞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리곤 세상이 몇 바퀴를 도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핑하고 빠르게 회전했다. 이런 와중에 비참하게 널브러지지 않으려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으나 결국엔 허망하게 나자빠졌다.

“청호...!”

쓰러진 나를 향해 부반장이 조용하게 불러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드러누운 나는 죽은 사람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나에게 다가오는 악인들의 발소리에 반응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희들, 내가 아무리 칼을 들었다지만 너클로 얼굴을 그렇게 때리는 건 미친 짓 아냐?!”

“....!!”

기절한 사람처럼 누워서 눈조차 뜨지 않은 채 허공에 외쳐대자, 그들이 다시 한번 더 덤빌 듯이 너클을 조정했다.

“정말, 사람이라도 죽일 셈이야?!”

반동과 함께 고개를 들어 소리친 뒤, 잔뜩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칠 듯이 아려오는 얼굴을 감싸 쥐곤 계속해서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두란 말이야!”

그렇게 엉망이 된 나의 모습을 마주한 그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지럽다, 아무리 머리를 휘젓지만 한 번 어긋난 초점은 쉽게 맞춰지지 않았다. 거기다 얼굴이 끈적끈적한걸 보니 아무래도 머리에서 피도 흘러내리는 모양이었다.

“...저 녀석 오른쪽 눈이 부, 붉은 색이다!”

“역시 전학생은 푸른하늘 쪽의 수하였던 건가?”

피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들은 나에 대해 단단히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무리들 사이에서 유독 튀는 당당함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던 그 모습은 처음 전학 왔던 날 만났던 Student No. 906의 김 리온이었다. 분명 눈 깜짝할 순간이었지만 나를 눕힌 것도 리온의 솜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 경계하던 자들을 능숙히 뒤로 물리며 앞으로 나온 리온을 나는 하소연을 이어나갔다.

“하, 미안하지만 오해도 적당히 해야지. 내가 왜 푸른하늘의 수하라는 거야?”

“그럼 그 붉은 눈은 대체 뭐지?”

“몰라서 물어?! 사람을 그렇게 후려쳤으니 눈이 터져나간 데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눈가에 고인 거잖아!”

“.....아?”

울컥.

“아, 는 무슨! 장난치는 거야?!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푸른하늘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어.”

단순히 푸른하늘과 엮었다는 사실로 여기까지 온 것도 모자라 이런 짓과는 어울리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자아내는 리온이 얄미웠던 나는 그에게 크게 소리쳤다. 단순히 주변에 한 명씩은 있을법한 게으르고 약삭빠른 친구라 여겼지만 리온은 이제 그 이상으로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푸른하늘의 수하가 아니더라도 너와 나는 이렇게 만날 운명이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무런 죄도 없는 날 뭐 때문에..”

그러자 리온은 특유의 능청스러움에 날카롭고 매서운 미소를 더하더니, 갑작스레 감격에 겨운 말투로 두 팔을 내게 벌려 보였다.

“기대고등학교의 전학생 신 청호!, 이 학교에 다른 학년도 아니고 2학년으로 전학을 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네가 비범 그 이상이라는 건 누구나 다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야. 그리고 네가 과거 누구의 아들인지를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런 널 두고 실력을 시험하러 오지 않는다면 그건 말도 안 되지.”

“설마...”

“학교에 전설적인 역사를 써 내린 최강의 수석졸업생, 진 서은 선배의 아들. 그게 바로 너잖아?”

어머니의 이름이 나의 귀를 맴돌았다. 단순히 어머니의 이야기였을 뿐인데도 나의 감정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그렇다,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의 전교 1등이 학업 성적으로 우위를 가리는 게 아니라면, 이곳의 졸업생이었던 나의 어머니는 푸른하늘처럼 막강하거나 우월한 능력자였음을 뜻하는 거였다. 과거, 어머니는 어린 나이로 이곳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싸움과 대결을 치렀기에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것일까?

“....”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대체 날 여기로 전학시킨 이유는 대체 무얼까?

예전부터 혹 어머니를 만난다면 건네주고 싶은 말이 입가에 맴돌다 무의식적으로 내뱉는다.

“참, 바보같네...”

“....??”

“결국, 나를 이렇게 해서 너희들이 이루려는 게 뭔데?”

“흥,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올 텐데? 이곳에서 학생으로서 노려야 할 건 석차뿐이야. 하위석차는 차별받고 상위권의 학생이 되어야지만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이지. 그러니 너처럼 앞으로 높은 석차를 차지할 유망주를 미리 손봐주지 않으면 우리가 곤란해서 말이야.”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는 것이 이제는 놀랍지 않았다. 이미 이 학교는 정상의 범위를 넘어서 아예 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리온이 손가락을 좌우로 가볍게 까딱였다.

“물론 이렇게 한 명을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공식적인 방법은 아냐. 교칙에서도 권하지 않는 어긋난 방식이지. 하지만 우린 그딴 건 개의치 않아. 왜냐면 우리는 9클럽! 전교 말단의 모임이자 더럽고 치사한 일은 서슴지 않는 진정한 불량아니까!”

파앗!

“....!!”

리온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면의 흙바닥을 차올리며 작은 돌무더기를 내게 날려 보냈다. 얼굴까지 흩뿌려지는 흙과 자잘한 돌들을 반사적으로 한쪽 팔로 막아서는 순간, 리온의 손에서 차갑게 번뜩이는 날붙이가 나의 턱 아래에서 솟아올랐다.

카가가각!

다행히도 반사적으로 반응한 본능으로 리온의 날붙이를 커터칼로 막아냈고, 서로의 날붙이가 소름 돋을 정도의 날카로운 음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리온이 휘두른 날붙이 또한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문방구용 커터칼이었다.

이후 나와 녀석의 날이 서로 맞물린 채 물러설 수 없는 아찔한 힘겨루기를 이어졌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뺀다면, 불 보듯 상대의 커터칼에 피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하하하~! 혹시 방금 치사하다고 생각했어? 당연히 치사하지~! 우린 No. 900 이하의 학생들로 구성된 막장클럽이니까! 어차피 약한 놈들은 어떻게 발버둥 쳐도 올라갈 수 없어! 그래서 우리는 이 지옥에서 한데 뭉쳐 윗놈들에게 더러운 방법으로 맞서며 살아가고 있는 거다! 거기다, 가끔은 더러운 일도 맡으면서 보수도 좀 챙기면서 말이지!”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왜, 괜한 일을 하는 것 같아? 진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나 본데, 이곳에서 넘버가 뭘 의미하는지 어떤 대우를 받는질 안다면 그런 말 못 할 거다. 이건 단순한 클럽이 아니야, 진정으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쩌적...쩌적...

서로의 커터칼에서 금방이라도 쪼개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단순히 문방구용 커터칼이니 내구성의 한계는 당연히 따라오는 문제였다.

“아니면 이건 어때? 전학생인 네가 우리 클럽에 들어오는 거야. 어쩌면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제일 괜찮을 것 같은데, 안 그래?”

“퍽이나....!!”

쩌적..! 콰직!

양쪽의 커터칼이 동시에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을 신호로, 서로가 새로 날을 뽑아 올리고 부딪히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기상천외한 경합이 일어났다. 그럴수록 나의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 또한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는 나에게 안 좋았던 옛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분 나쁜 일이기도 했다.

우지끈!

그리고 모든 칼이 부러져 손잡이마저 나가떨어질 때 리온은 지체없이 다른 한 손에 끼고 있던 너클로 나의 얼굴을 강타했다.

퍼어억!!!

“젠....장....”

이것 또한 처음 경험해보는 엄청난 충격. 모든 정신이 셧다운 되며 그대로 그로기 상태가 되어 몸이 뒤로 뉘어지는 와중, 감기는 두 눈으로 리온의 얄팍한 미소가 들어왔다.

“....!!!”

콰앙!

귀신같이 치켜뜬 눈과 동시에 넘어가는 몸 뒤의 지면을 힘차게 발로 박차며, 오히려 기울어지는 몸을 추진력 삼아서 온몸을 앞으로 내던져 전력으로 리온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뻐어억~!!

“끄아아아~!”

광대뼈 부근을 얻어맞은 리온의 몸이 삽시간에 나가떨어지더니, 이어서 엄습하는 아픔에 온몸을 비틀었다. 나는 단순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리온의 모습에 화가 났던 걸까? 아니면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해 준 리온의 모습에 화가 났던 걸까? 아니면 그저 나에게 이런 싸움을 걸어 온 리온에 화가 났던 걸까?

“....”

하지만 뭐가 되었든 리온이 잘 못 한 것 같으니 조금이라도 더 혼쭐을 내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이 푸른 눈은 나를 괴물처럼 만들어 버렸다. 괴롭다는 듯 왼쪽 눈을 움켜쥔 채 고뇌에 빠져있을 무렵 바닥에 쓰러진 리온이 소리쳤다.

“이 괴물같은 놈! 태생부터가 남다른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분한 마음에 바닥에다 너클을 내팽개친 리온이 푸르게 부어오른 얼굴로 원망스럽다는 듯이 나를 나무랐다. 언제나 능글맞던 리온이 누구보다 험상궂은 얼굴을 지을 수 있다는 건 다소 놀라웠다.

“너 같은 놈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어떻게 하든 좁힐 수 없는 재능의 차이가 얼마나 뼈저리게 우릴 괴롭히는지!”

“난, 아무것도..”

“멍청하긴! 네가 아무것도 하고 안 하고는 상관없어! 너의 존재 자체가 우릴 괴롭힌다고! 빌어먹을 유전자! 빌어먹을 태생! 다 없애버리고 싶...!!”

스윽.

“그쯤하는 게 좋아.”

“....!!”

“푸른하늘...”

눈치챌 틈도 없이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나와 리온의 사이로 푸른하늘이 등장했다.

“나름 걱정했는데 잘 해결된 모양이네?”

그리고 아린도 쿠요미를 껴안은채 내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 푸른하늘이 등장했을 뿐인데 모든 9클럽의 일원들이 불안 섞인 말투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악독한 놈들이라도 푸른하늘 앞에서는 역시 별다른 내색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다시금 푸른하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푸른하늘, 그녀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리온을 노려봤다.

“9클럽이라는 녀석들은 전부 한심하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 이제 들어 온 전학생에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

“시끄러...! 네가 우리 처지였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하지만, 너희들이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뭐?”

“사람은 서는 곳이 바뀌면 보는 곳도 바뀌는 법이거든. 네가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결국 누군가의 불행이 반복될 뿐이잖아. 누구나 1등을 바라지만 모두가 1등을 할 순 없지.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기도 할 순 있어도 신은 그걸 이뤄줄 수 없지. 그러니, 지금의 너희들이 너무 불행하다면 차라리 좀 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때?”

“선동하지 마, 이 위선자...! 깨달음을 얻고 대의를 위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학교 전체를 위협하는 네가, 어디서 말장난이야!”

“...야! 그 입 다물지 못해?!”

거칠어져 가는 대화 속에서 아린이 유쾌하게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그녀는 한순간 섬뜩하고도 거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네 녀석, 선을 상당히 쎄게 넘었어.”

푸른하늘을 제외한 모두가 굳어가는 표정의 아린을 쳐다봤고 나는 옆에서 연신 마른침을 삼켜댔다.

“우리 하늘이는 너희들이 어떤 짓거리를 해도 해치진 않겠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거든? 그러니 난리는 이 정도로만 하고 이제 각자 볼일이나 보러 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 기운, 거기에 진정한 살기라는 것을 간접 체험한 9클럽 무리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그들 모두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사람을 빼고.

“.....”

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하지만,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나를, 아니 정확히는 우리를 노려봤다. 다행히도 한껏 치솟던 감정은 정리된 모양이지만 표정으로 치면 지금이 훨씬 더 무서워 보였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놓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두고보자, 전학생.”

설마 물러나지 않는 건가라고 생각하던 순간, 리온은 나지막하게 내게 한마디를 던지곤 그대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심과 함께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어느새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보며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아무도 날 기억하지 말았으면....”

나의 말을 듣지는 못했겠지만, 나의 모습을 푸른하늘과 아린, 그리고 부반장이 무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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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2. 밤하늘의 별. 21.06.19 24 0 49쪽
13 11. 괴담과 진실. 21.06.19 25 0 65쪽
12 10. 삼각관계. 21.06.18 17 0 31쪽
11 9. 천체관측부. 21.06.18 19 0 30쪽
» 8. No, 900. 21.06.17 14 0 41쪽
9 7. 푸른하늘과 혁명단. 21.06.17 19 0 28쪽
8 6. 반역자. 21.06.16 19 0 33쪽
7 5. 2학년 3반. 21.06.16 1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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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교문과 관리인. 21.06.14 1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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