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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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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3.1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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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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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168. 스코티시 레벨이 아니다

DUMMY

“이탈리아 출신 감독은 수비적인 성향이다. 그런 제 고정관념을 깨뜨린 사람이에요. 우리 시대엔 카테나치오로 워낙 유명한 나라였잖아요? 물론 수비적인 운영을 꺼내 들 때도 있지만, 사실 그는 공격 축구를 선호해요. 그래서 다들 적응하는 데 한동안 애를 먹었죠. 이를테면······ 첫 시즌 전반기가 끝나갈 무렵, 새롭게 만든 훈련 규칙이 있어요. 속공 전개 시 쓸데없는 패스를 하거나 뒤에서 너무 많이 볼을 돌리면 바로 수첩에 적히고, 그 리스트에 걸린 인원은 끝나고 남아서 체력 단련 벌칙을 받는 거죠. 이 벌칙 코스를 피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초반에는 팀원 전체가 고스란히 보충 훈련을 받는 경우가 많았었죠. 감독님은 도전적인 패스를 실패하는 것보다 무의미한 패스만 반복하는 걸 더 용서하지 않는 그런 분입니다.” - 피지컬 트레이너 ‘조나단 달젤(Jonathan Dalzell)’ -


*******


로스 카운티의 개막전 이후, 스코틀랜드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왜? 이 시합은 처음부터 프리미어십 챔피언의 승리가 자명했었다.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한 방을 노리는 대담한 도박사들조차 안정적인 베팅을 택할 정도였다.


심지어 로스 카운티는 퇴장의 수혜를 보긴 했지만, 작년 개막전에서도 라이벌 인버네스 캘리도니언 시슬을 4 : 1로 격파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이유는 5 : 0이란 결과보다 90분 내내 펼쳐졌던 과정에 있었다.


“마치 던디 FC 진영 앞에 거대한 그물망을 쳐두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 같았어요. 크게 힘들이지 않고서 말이죠. 프리미어십을 수년간 봐왔지만, 이렇게 일방적인 시합은 처음입니다. 리그를 휘어잡았던 올드 펌의 경기력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 축구 평론가 ‘에릭 프레스턴(Eric Preston)’ -


“던디 FC가 로스 카운티 진영까지 넘어온 게 몇 번이었죠? 한······ 다섯 번이었나요? 네? 아······. 네 번이라고요? 하하, 이것 참.” - 하일랜드 풋볼 라디오 진행자 ‘콜린 피콕(Colin Peacock)’ -


22 대 78이라는 경악스런 점유율.


3 슈팅과 1 유효 슈팅을 기록한 홈팀, 반면 35 슈팅과 10 유효 슈팅을 퍼부은 원정팀. 무려 열 배를 넘어선 횟수.


그 세 번마저 요행을 바라는 중거리 슛 시도가 다였을 뿐. 던디 FC는 로스 카운티의 골문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90분 내내 단 한 번도.


두들겨 맞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그런 경기였다.


명색이 프로인데, 무기력한 모습으로 반격할 엄두조차 못 내던 선수들. 참다못해 일찍 경기장을 나가버린 관중들. 흥에 취해 응원가를 열창하던 로스 카운티 측 스탠드마저 머쓱해진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


상대의 안방에서 벌어진 참사. 결과보다 더 참혹한 과정의 반복.


홈팬들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원정팬들은 환호를 크게 내뱉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드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에게 동정심을 받는 거부터 수치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경기가 더 충격인 건 로스 카운티가 의도적으로 볼을 돌리면서 점유율을 늘리는 축구를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들은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던디 FC 선수들이 소유권을 가져와도 쉽게 뺏겨버렸어요. 한마디로 압박에 질식해버렸단 얘기죠.” - 스코티시 스포츠 해설자 ‘롭 맥케나(Rob McKenna)’ -


“우리가 볼을 잡았을 때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로스 카운티가 볼을 잡고 있었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화도 나지 않네요. 단지 머리가 멍할 뿐이에요.” - 던디 FC 서포터 ‘리키 데블린(Ricki Devlin)’ -


사람들은 즉각 이 사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로스 카운티가 그토록 막강한 걸까? 아니면 던디 FC가 준비를 잘못한 탓에 벌어진 사달일까? 두 팀의 간극이 이만큼 심각하게 벌어져 있는 건가?


델 레오네는 또 무슨 짓을 벌인 것인가?


전술적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고, 선수들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따져보려는 이들도 있었다. 아예 다른 부분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서 모두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던디 쇼크. 한 골만 더 들어갔다면 던디 쇼크의 스코어가 그대로 재현될 뻔했습니다. 그걸 피해 간 게 그나마 위안거리일까요?]


던디 유나이티드가 그들의 홈인 태너다이스 파크에서 여섯 골을 내주며 참패했던, 이후 감독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면서 사퇴까지 했던 경기.


프리미어십 명가 던디 유나이티드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고, 로스 카운티를 향한 인식이 치솟아 오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그 사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태의 희생양 역시 그들과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둔 던디 FC다. 그래서 생각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더 한 상황일 수도 있다. 던디 유나이티드는 최소한 저항이라는 걸 하기는 했으니까.


결과가 좀 더 참담할지언정 중앙선 한 번 넘는 것도 버거워하며, 전진하는 걸 두려워하진 않았다는 거다.


물론 당시 로스 카운티와 지금은 다르다.


더 높아진 수비 라인, 더 체계적으로 가하는 압박 대형. 그때 경기를 뛰었던 구성원과도 달라진 부분이 제법 많다.


게다가 그들의 압박 체계는 ‘산 파올로의 기적’을 전후로 나뉜다는 얘기까지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로스 카운티는 던디 쇼크 못지않은 임팩트를 강렬히 남겨주었다.


이로써 던디 유나이티드 팬들은 던디 FC의 조롱에 크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희들도 똑같다며 받아칠 명분이 생겼으니까.


그동안 자기들이 프리미어십으로 올라오면 바로 던디를 대표하는 팀이 바뀔 거란 소리를 얼마나 지겹도록 들어왔던가.


그래도 받아왔던 조롱을 되갚아주지는 못하겠지만. 그건 곧 다가올 로스 카운티와 경기를 치르고 나서 결정할 일이다.


자칫하면 다시 던디 FC 쪽으로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을 테니.


패자들의 진흙탕 싸움은 일단 넘겨두고. 이건 정말이지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이들의 기억에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수준이었다.


“로스 카운티의 전력이 약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놀라워요. 더 강해진 것 같아요. 기존 선수들의 기량이 오르고, 팀워크는 더 발전해서일까요? 부팔의 공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 축구 분석 프로그램, 스코티시 풋볼 데이 고정 패널 ‘조니 밀러(Jonny Miller)’ -


사실 작년에도 그랬다.


요앙 아르킨이 빠지고, 공격수 보강이 없는 시점에서 추락할 일만 남았다는 전문가들의 혹평을 비웃듯 로스 카운티는 더블 크라운을 달성했다.


소피앙 부팔과 에드빈 데 루어가 떠났음에도 그 공백을 메우지 못했으니 이번에야말로 흔들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개막전부터 스코티시 일대를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단정 짓기는 이르다. 이제 고작 한 라운드를 치렀을 뿐. 이러나저러나 던디 FC는 갓 올라온 승격팀에 지나지 않으니.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


[다음 경기는 로스 카운티의 홈입니다. 빅토리아 파크가 아니라 햄던 파크지만요. 분명 홈이지만, 거리는 원정길이나 다름없는 그런 이례적인 장소에서 펼쳐지는 첫 번째 경기. 과연 선수들이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까요?]


발표 직후 온종일 인터넷 커뮤니티와 도시 곳곳을 뜨겁게 달궜던 햄던 파크의 홈구장 대여 소식.


다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티켓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하루도 채 안 되어 홈팀 좌석이 매진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애초에 카운티 신드롬을 노리고 햄던 파크에 입성할 계획을 세운 거긴 하지만, 기대치를 훌쩍 넘어서는 효과.


사람들은 이미 로스 카운티의 첫 홈경기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15-16 Scottish Premiership 2 Round >

로스 카운티 : 파틱 시슬

2015년 8월 8일 (토) 15:00

햄던 파크 (관중 수 : 46,287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잭 마틴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존 맥긴 / 리차드 브리튼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폰투스 얀손 / 스콧 보이드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쳇. 많이도 몰려들었군.”


파틱 시슬의 감독 아론 아치볼드는 햄던 파크에 모인 군중들을 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스 카운티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파틱 시슬에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어떤 언론에서도 자신이 저 막강한 로스 카운티를 곤란케 만들었던 인물이라 소개해주지 않는다.


이탈리안이 부임했던 첫 시즌, 리그 컵을 일찍이 탈락시켜버렸을 때. 셀틱과 우승 레이스를 치열하게 벌이던 작년, 1 : 1 무승부를 거두며 발목을 잡아챘을 때. 전부 파틱 시슬의 아론 아치볼드가 해낸 일인데 말이다.


물론 전체 성적을 들춰보면 7전 1승 1무 5패라는 초라한 진실이 숨겨져 있지만, 아치볼드에게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사내니까. 그게 숱한 경질이 난무했던 프리미어십 바닥에서 버텨오게 해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겐 안타깝게 됐군. 딱히 볼거리가 제공되지는 않을 거니까.”


여전히 그는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4-5-1 시스템을 꾸준히 연구하여 숙련도를 끌어 올렸고, 개막전에서 전 시즌 4위 팀인 세인트 미렌을 상대로 1 : 0 승리를 따내며 제대로 효과를 확인했다.


로스 카운티라고 다를 게 있는가? 제아무리 저놈이 전술가라 해봐야 깊은 늪 속에 빠지면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테지.


“아치볼드식 늪 축구를 보여주마.”



전반 6분.


스로인 찬스에서 길게 박스 안으로 던져 넣은 공격이 만든 혼전 상황.


세컨드 볼을 먼저 잡은 게리 프레이저의 터닝슛이 브라운 키퍼의 선방에 막히고, 아치볼드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며 포효했다.


“봤지? 벌써 다르잖아!”


이른 시간에 슈팅 하나를 가져가며 골까지 넣을 뻔했으니 이 팀은 던디 FC 따위와 다르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설마 그게 전반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슛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시간이 갈수록 오묘하게 바뀌는 필드의 흐름. 로스 카운티의 볼을 잡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며 파틱 시슬과의 격차를 벌리기 시작한다.


다섯 명을 꾸역꾸역 배치해놓은 중앙은 그 숫자가 무색할 만큼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왜 빼앗지도 못하는 거야?”


접근하기도 전에 패스를 돌리며 회피하는 브리튼과 딩월의 간결한 볼 처리. 두 명의 수비가 에워싸도 끈질기게 지켜내는 맥긴의 볼 키핑.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와아 -


관중들의 환호가 절로 나오는 캐리의 전진 패스가 수비의 틈을 노리며 위협적으로 들어온다.


“······.”


괜찮다. 이쯤은 예상했다. 아치볼드 역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어차피 주도권을 내주고, 템포를 질질 끌면서 루즈한 경기 양상으로 끌고 가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런데 파틱 시슬의 진영에서도 똑같이 유린당하는 건 문제가 많았다.


“뭐 하는 거야!”


우측으로 뻗어나가는 캐리의 롱패스. 톰슨에게 맥없이 뚫리는 측면.


띄워 올린 크로스가 번개처럼 쇄도하는 딩월의 머리에 도달하고, 골대 위를 스치며 밖으로 나간다.


간담이 서늘한 공격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다시 볼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파틱 시슬.


오버래핑해 올라간 월리스가 맥긴의 스루패스를 받아 짧게 크로스를 찍어 올리고, 이번에도 딩월이 몸을 던지며 다이빙 헤더를 시도했지만, 옆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온다.


“침착하게 처리해, 멍청아!”


당황한 수비수가 코너킥 라인으로 걷어내 버리는 걸 보며 아치볼드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지는 코너킥. 캐리가 차올린 볼이 먼 포스트 쪽에 대기하고 있던 얀손의 머리에 떨어졌고, 그의 헤더는 직선으로 날아가 골대가 아닌 딩월의 이마를 맞췄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마치 이제 좀 넣어보라는 듯이.


철썩 -


“먹혀도 하필 저놈에게······.”


멍하니 서 있다가 머리를 강타당해 쓰러지면서 벌러덩 드러누운 딩월이 헤실거리며 일어나는 광경은 아치볼드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관중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멋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저 꼴사나운 득점을 허용한 건 파틱 시슬.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굴욕을 느낄 새도 없이 몰아쳐 오는 공세.


측면은 톰슨에게 초토화된 상태였고, 캐리의 왼발에서 뿌려지는 볼은 파틱 시슬의 수비 진영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마틴이 박스 바깥으로 나와서 볼을 받고, 뒤따라온 수비수가 필요 이상의 과격한 몸싸움을 걸며 그를 넘어뜨렸다.


주심의 어드밴티지 선언. 그러나 파울을 불지 않은 게 도리어 불행이었다.


볼은 뒤에 있던 브리튼에게 굴러갔고, 직선으로 뻗어나간 중거리 슛이 키퍼의 손을 벗어나 시원하게 골문 안으로 꽂혀 들어가고 만다.


2분 만에 추가 골을 넣어버린 로스 카운티.


아치볼드의 귓불을 벌겋게 물들이던 열기가 얼굴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던디 FC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그물망에 걸려들어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전반 27분.


추가 골 이후로도 포위망에 갇혀 연거푸 밀려오는 위기를 모면하기에만 바쁜 파틱 시슬.


또 한 번의 코너킥에서 세컨드 볼을 잡은 맥긴에게 데뷔골을 선사해줄 뻔했으나 간신히 수비가 막아냈고, 톰슨과 월리스가 번갈아 좌우로 침투해서 노린 완벽한 득점 찬스는 키퍼의 선방으로 저지해냈다.


특히 멀티 골을 노린 딩월의 날카로운 중거리 슛을 날아올라 쳐낸 건 이주의 선방 하이라이트로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무슨 소용일까. 막았으면 받아쳐야 하건만, 그러질 못하니 다음 공격을 대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헌신적인 수비의 노고에도 감독은 수세에 몰린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며 다그치기만 할 뿐이다.


아직 후반전이 남았는데도 벌써 정신력의 한계가 밀려오고 있었다.


계속되는 로스 카운티의 주도.


롱패스 성공률만 90%를 기록 중인 알렉산더 캐리의 전개가 좌측면으로 빠진 맥긴에게로 향한다.


볼을 잡은 맥긴의 뒤로 빠르게 돌아나가는 월리스. 이 패턴에만 수차례 당한 터라 자연스레 몸이 쏠리는 수비수들.


그러나 맥긴은 가볍게 수비의 키를 넘긴 패스를 안쪽으로 보냈고, 그곳에는 잭 마틴이 침투 중이었다.


월리스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틈새가 크게 벌어지고 만 것이다.


“막아!”


붉게 상기된 얼굴로 외치는 아치볼드.


박스 안으로 진입한 마틴의 오른발 슛은 달려드는 키퍼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며 그물을 흔든다.


“제에에에길!”


아치볼드는 끝내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


후반전에 들어서 각각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한 양 팀.


파틱 시슬은 톰슨에 의해 넝마가 되어버린 레프트백과 델샤드를 한 번도 뚫지 못한 윙어를 빼며 질책성 교체를 가했고.


로스 카운티는 스티브 샌더스와 리암 보이스를 투입하면서 델샤드와 딩월을 쉬게 해주었다.


후반 60분이 되자 대런 케틀웰이 들어오고, 캐리까지 빠지면서 경기 템포는 점차 느슨해졌다. 천천히 체력 관리에 들어가려는 듯했다.


아치볼드가 원하던 흐름이었지만, 이미 세 골을 내준 후라 의미는 없었다.


무자비한 폭격은 마침내 멈췄으나 파틱 시슬은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후반전 주도권을 잡아내지 못했다.


로스 카운티가 살벌하던 압박을 풀고, 라인을 내려준 덕에 공격을 나가볼 순 있었지만, 후방의 견고한 벽을 뚫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그냥 추격할 플랜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아치볼드는 비길 생각으로 햄던 파크에 온 거니까. 점수를 내줬을 때 어떻게 할지는 준비조차 안 된 상태였다.


아까운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초조함만 더해가던 파틱 시슬은 이내 자멸하고 말았다.


측면에서 올린 맥긴의 크로스, 쇄도하는 보이스의 헤더. 수비는 그저 추가 실점을 막아보려 노력했을 뿐이지만, 애꿎은 볼이 정강이를 맞고 골문 안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치볼드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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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4 : 0 파틱 시슬 >

에이든 딩월(13‘)

리차드 브리튼(15‘)

잭 마틴(28‘)

아이작 매클러스키(OG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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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ngwall Football Press ] 파틱 시슬, 호되게 당하다


[ Daily Mirror ] 경기 후 인터뷰를 거절하고 회견장을 빠져나간 아치볼드


[ Daily Telegraph ] 어메이징. 커리어 최초로 시즌 초반에 연속 골을 달성한 에이든 딩월


[ Daily Mail ] 블랜차드를 향한 최종 비드를 준비 중인 셀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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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 Scottish Premiership 3 Round >

로스 카운티 : 하이버니언

2015년 8월 12일 (수) 19:30

햄던 파크 (관중 수 : 48,131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필립 로스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존 맥긴 / 대런 케틀웰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대니 패터슨 / 스콧 보이드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파격적인 경기를 두 번씩이나 보여준 로스 카운티.


3~4일 간격으로 잡힌 일정 때문에 주전 몇 명을 벤치에 앉혀놓았음에도 그 놀라운 퍼포먼스는 도통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앞선 두 경기에 비하면 압박의 강도가 눈에 띄게 줄었지만, 그게 하이버니언에게 유리하게 작용되는 일은 없었다.


살짝 엉덩이를 뒤로 뺐다고 중앙 싸움에서 밀려날 체급은 한참 벗어난 지 오래니까.


처음에는 좀 밀어붙이는 듯했으나 이렇다 할 공격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던 하이버니언.


오히려 뒤로 물러선 로스 카운티를 보고 자신들의 축구가 먹혀든 거라 착각했는지 서서히 라인을 올린 건 최대의 실수였다.


전반 36분.


서로 중앙을 바짝 견제하면서 소강상태 비슷한 흐름으로 접어들 즈음.


예고도 없이 뻗어나간 캐리의 로빙 패스가 수비진의 머리를 넘겼고.


안으로 좁혀 들어간 월리스가 달라붙는 수비수와의 몸싸움을 이겨내며 가슴으로 받아내더니 박스까지 진입해 각도가 모호한 니어 포스트로 왼발 슛을 날리며 선제골을 기록해 냈다.


단 한 방의 급습으로 무너져 내린 하이버니언.


그리고 두 번째 골은 또 하나의 플레이메이커를 통해서 나왔다.


후반 58분.


좌측으로 빠져들어 간 딩월이 막아서는 수비 둘을 피해서 횡패스를 보냈고, 박스 부근까지 올라온 캐리가 받았는데.


황급히 에워싸는 두 명의 틈새로 볼이 빠지면서 박스 안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맥긴이 골문을 등진 채 자리 잡은 상태였다.


위협을 감지한 수비수들이 달려들었지만, 맥긴은 뒤돌아서지 않은 자세 그대로 가볍게 옆으로 토스하듯 패스를 넘겼다.


이미 딩월과 캐리에서부터 너무 많은 수비를 투자해버린 상황. 그 바람에 반대편은 휑하니 비어있었고, 몰래 진입해 있던 케틀웰은 방해꾼 없이 맥긴의 패스를 받아 그물을 흔들었다.


이후 하이버니언은 무의미한 공격만 반복하다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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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2 : 0 하이버니언 >

리 월리스(36‘)

대런 케틀웰(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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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ottish Sports ] 하이버니언도 역부족, 로스 카운티의 매서운 기세


[ Daily Telegraph ] 무산된 딩월의 꿈. 세 경기 연속 골은 역시 무리였나


[ Daily Mail ] 에버튼도 본격적인 비드 준비 중, 블랜차드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


< 15-16 Scottish Premiership 4 Round >

로스 카운티 : 애버딘

2015년 8월 15일 (토) 15:00

햄던 파크 (관중 수 : 48,475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잭 마틴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존 맥긴 / 리차드 브리튼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폰투스 얀손 / 스콧 보이드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조지 맥도넬의 펍.


[리 월리스, 중앙의 딩월에게 이어받습니다. 수비 한 명을 떨쳐내며 안으로 파고드는 월리스!]


“좋아!”


[찔러주는 볼! 박스 안 왼쪽에서 받는 맥긴! 수비가 막아서지만! 리턴 패스! 월리스가 그대로 진입했습니다! 월리스! 월리스! 오른발 슈웃! 들어갑니다!]


예에 -


[참으로 베테랑다운 노련한 골이었습니다. 슛을 찰 듯 말듯 페인팅 동작으로 두 명을 속이고 오른쪽으로 빠지면서 오른발 마무리! 그대로 찼다면 수비의 몸에 맞고 나올 수도 있었죠.]


선제골은 상대 팀으로부터 시작됐었다.


니얼 맥긴의 프리킥이 깔끔하게 골문 우측 상단으로 들어가면서 리드를 잡을 수 있었던 애버딘.


하이버니언전에서 교훈을 얻었는지 곧장 라인을 가라앉히며 수비적으로 대응한 그들이었지만, 미처 간과한 게 있었다.


로스 카운티가 뒷공간을 파고드는 데에만 강점을 둔 팀이라는 건 옛말.


이제 웅크린 진형을 분해하는 것도 스코티시 리그 내에서만큼은 최상위급이라는 점이었다.


어중간하게 밀집해있다가는 방금 나온 월리스 골처럼 붕괴되는 건 순식간.


[경기는 원점. 애버딘, 다시 공격 대형을 갖추고 앞으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전진하는 게 결코 해답이라고 할 순 없었다.


[앗! 빠르게 아래까지 내려온 딩월! 뒤에서 볼을 뺏기는 애버딘! 브리튼이 볼을 잡아, 톰슨에게 연결합니다!]


[안으로 들어와 받으면서 수비를 떨쳐내는 톰슨의 아웃사이드 패스! 맥긴이 받아 올라갑니다! 오른쪽에서 빠르게 올라오는 톰슨! 공격과 수비의 숫자는 똑같이 삼 대 삼!]


[존 맥긴! 맥긴의 선택은? 앞으로 찔러주는 스루패스! 수비를 피해 빠져나간 볼! 잭 마틴이 받습니다! 마틴! 침착하게 깔아 차는 슛! 들어갑니다!]


“그렇지! 그거야!”


역전 골이 터지자 펍 내부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를 터뜨렸고, 맥도넬 또한 텐션이 잔뜩 오른 목소리로 동참했다.


[안일한 플레이였어요. 중앙에서 압박해 볼을 빼앗고, 바로 역습을 나가는 건 로스 카운티가 제일 잘하는 겁니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요.]


[로스 카운티의 기세, 무섭습니다. 선제골을 내주고 나서도 매서운 공격을 퍼붓더니 기어이 역전해내네요. 던디 FC나 파틱 시슬이 당했던 그 무지막지한 모습까진 아니지만, 애버딘 정도 되는 팀마저 이렇게 쩔쩔매다니요.]


“난 골을 내주고 나서도 초조하지는 않더라. 전혀 질 것 같지가 않아서.”


“동감이야, 케니. 자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똑같은 생각이었을 걸.”


그렇게 말하는 맥도넬은 희미하게 긴장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애버딘 때문은 아니었다.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개막전 경기를 보다가 돌연 무섭단 말을 꺼냈던 맥도넬. 그가 일평생 봐왔던 건 약체팀이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생존해나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한 이탈리안이 나타났고, 익숙했던 풍경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쾌감은 언제나 짜릿하니까. 작년은 셀틱의 아성에 맞서는 도전자로서의 서사가 확실했기에 어색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의 로스 카운티는 거대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맥도넬 외에도 오랜 기간 지켜봐 온 팬들이라면 다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압도적, 압도적, 압도적. 그리고 압도적.


올 시즌의 경기들을 요약한 단어.


전 시즌 후반기부터 그런 조짐을 드러내긴 했었다. 하지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경기력은 그 차원을 훌쩍 넘어선 수준이었다.


어렴풋이 다들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네 차례 연속으로 보여준 경기력으로 인해 완벽히 올라선 것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스코티시의 탑독으로.


보강한 건 고작 한 명이고, 전력은 똑같은데. 왜 이렇게 차이 나는 걸까?


“즐거워. 즐겁긴 한데······. 적응하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프리미어십 챔피언의 면모로서는 이게 더 어울리긴 할 테지만.



후반 67분.


[앞으로 과감히 넣어보는 패스. 그러나 얀손의 키를 넘기지 못합니다. 좀 더 세밀한 공격이 필요해 보이는 애버딘인데요.]


[단순한 패턴으로는 저 수비를 뚫어낼 수 없습니다. 방법을 찾지 못하면 이대로 계속 로스 카운티에 휘둘릴 수밖에 없죠.]


[볼을 받는 알렉산더 캐리. 길게 앞으로 볼을 찌르는······ 아앗, 빠져나갑니다! 뒤쪽으로 떨어지는 볼!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는 앤드류 톰슨!]


“우와······.”


[톰슨! 단숨에 키퍼와 일대일 구도를 만듭니다! 톰슨! 앤드류 톰슨! 고오오오올! 로스 카운티의 추가 골!]


와아아 -


물론 어색하다고 기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맥도넬은 친구들과 얼싸안으며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단순한 패턴으로는 수비를 뚫어낼 수 없다고 했었는데요. 단순하더라도 정교하면 통하는 거죠. 한 방의 패스로 애버딘이 함락되고 맙니다!]


[박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계 플레이, 볼을 뺏은 뒤의 카운터 어택, 수비 라인을 허물어버리는 다이렉트한 패스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골을 넣으며 자신들이 한 단계 위에 있다는 걸 톡톡히 어필하는 챔피언입니다!]


“이게 로스 카운티라니.”


맥도넬은 감탄과 혼란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올해 갑자기 추락한다거나 그런 걱정은 없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아. 케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러게······. 매판마다 이러니까 벌써 우승을 따놓은 기분까지 들어. 아직 많은 경기가 남아 있는데도.”


“뭐, 어때. 중요한 건 잘 나가고 있다는 거지.”


해리 윌슨의 말이었다.


“우리는 팬으로서 기뻐하면 그만 아니야?”


“그건······ 그렇지.”


맥도넬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하며 TV로 눈을 돌렸다.


뒤이어 흘러나온 해설자의 멘트가 귓속을 파고들어 와 머리와 가슴을 잔잔하게 울렸다.


[로스 카운티는 더 이상 스코티시 레벨의 팀이 아닙니다.]


맥도넬은 그 말에 동의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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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3 : 1 애버딘 >

리 월리스(29‘)

잭 마틴(35‘)

앤드류 톰슨(67‘)

+++++++++++++++++++++++++++++

니얼 맥긴(23‘)


=============================


작가의말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월드컵이 시작했네요.

대한민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이 느꼈던 감정을

부디 우리나라도 느껴볼 수 있기를.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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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199. 대립 +5 24.01.25 745 32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799 34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774 42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31 37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21 39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28 41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886 42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47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897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22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37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983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35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61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46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192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27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47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40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5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39 50 27쪽
178 178. 승부욕의 화신 +3 23.04.22 1,267 50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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