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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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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4.07 19:32
연재수 :
2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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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11
글자수 :
1,875,939

작성
22.04.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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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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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글자
36쪽

155. 이탈리안의 말은 틀렸다

DUMMY

“위험해!”


브리튼의 페널티 킥 실축에 이은 실점이 터진 이후 넋이 나가 있던 피터 블랙은 뒷공간 패스 한 방에 로스 카운티가 무너지는 걸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얀손의 머리 위를 넘기는 볼. 오프사이드 트랩을 허물고 질주하는 바카. 깨닫고 쫓아갈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추가 골의 기회를 놓친 충격이 작지 않았던 걸까. 그동안 세비야의 공세를 잘 막아오던 수비진이 흐트러져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단번에 거리를 벌리며 볼을 잡은 바카가 방해꾼 없이 페널티 박스 외곽까지 밀고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각도를 좁히기 위해 달려 나가는 브라운. 그러나 상대는 스페인 리그에서 20골로 득점 5위를 기록 중인 수위급 스트라이커.


볼의 밑을 띄워 올린 칩슛이 골키퍼 장갑의 끝을 맞았으나, 큰 궤도 이탈 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빈 골문을 향해 떨어진다.


“염병할.”


블랙은 차마 볼 수 없어 양손으로 두 눈을 덮고 말았다.



우와아아아 -


곧이어 경기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반대편 스탠드에서 났어야 할 소리이건만. 자신의 고막을 따갑게 울리고 있는 이 상황은 대체 뭐지?


블랙은 즉시 손을 거두고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리다가 필드를 보았다.


놀랍게도 들어가야 할 볼이 바깥으로 나가 구르고 있었다.


“뭐······ 뭐야?”


“세상에! 피터, 봤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아생전 이런 경기를 볼 수 있다니!”


평소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던 토드 홉킨스가 과열된 표정으로 블랙의 옷깃을 움켜쥐며 흔들어댔다.


“그가 해냈어! 그가 해냈다니까!”


밖으로 나간 볼 대신 골문 안에 들어가 나뒹굴고 있는 보이드. 동료들이 달려가 그를 일으키며 안아주고 있었다.


“오늘 이 경기를 본 건 평생의 영광으로 남을 거야!”


“아아······ 내가 로스 카운티 팬이라는 게 처음으로 자랑스러워졌어.”


주변에서도 난리였다. 블랙으로서는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전광판에 재생되는 리플레이.


브라운의 키를 넘겨서 골문 안으로 낙하하는 칩슛. 전속력으로 달려가더니 돌고래처럼 솟아올라 떨어지는 볼에 가까스로 이마를 갖다 대는 보이드.


그의 머리를 맞고, 상단 크로스바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뒤로 넘어가는 장면이 나오자마자 재차 함성이 크게 울려 퍼진다.


“······맙소사.”


블랙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누가 봐도 들어갈 거라 생각했던 슛이 들어가지 않았다. 슈퍼 세이브로 인해서. 홉킨스조차 미치지 않고선 못 배길 그런 플레이에 의해서.


보이드의 몸을 던진 수비가 빛나긴 했지만, 볼의 체공 시간이 좀 더 길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던 기적이었다.


브라운의 손끝을 맞지 않았다면, 바카의 정교한 칩슛이 적절한 궤적을 그리며 보이드가 도착하기 전에 허무함을 선사해주었을 테니.


“저래서 이 팀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니까.”


블랙은 눈가 밑이 살짝 시큰해짐을 느꼈다.


“이 이상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우린 당당히 말할 수 있어. 로스 카운티도 챔피언의 자격은 충분했었다고 말이야.”



하지만 살 떨리는 긴장감은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다.


코너 플래그로 이동한 바네가의 예리한 킥이 올라가고, 쇄도하는 카히수의 이마에 정확히 적중한다.


워우 -


좌측 상단 구석으로 향하는 슛에 브라운 키퍼는 몸이 굳어 반응하지 못했지만, 골포스트에 서 있던 델샤드가 재빨리 반응하며 머리로 받아낸다.


박스 바깥으로 나가는 볼. 먼저 잡아서 중앙의 이보라 쪽으로 보내는 비톨로. 뒤로 빼려는 동작을 취하다가 안으로 접는 기교로 붙어오는 캐리를 떨쳐내며 측면으로 전개하는 이보라.


“미치겠군.”


블랙은 커지는 조바심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볼을 잡은 비달에게 월리스가 바짝 붙지만, 그의 뒤로 흐르는 패스. 코케가 받아 달리고 있었다.


와아아 -


환호하는 세비야 측 스탠드.


다만 함성을 터뜨린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과감하게 중앙을 버리고 측면으로 내달려 코케와 어깨를 부딪치는 얀손. 이를 보며 로스 카운티 측 스탠드 역시 열광한다.


서로 팔이 엉킨 채로 치열하게 경합하는 두 선수. 안으로 길게 치며 얀손을 돌파하려는 코케의 드리블에 양 팀 팬들의 소리가 더 높이 치솟아 오른다.


박스 안에 진입하려는 무모한 드리블을 놓치지 않고, 슬라이딩하며 갈고리 걸듯 태클로 낚아채는 얀손.


“그렇지! 잘했어!”


블랙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코케가 넘어지면서 항의하지만, 주심은 두 팔을 좌우로 내젓는다.


그사이 서둘러 일어난 얀손이 앞으로 찔러주었고, 캐리는 볼을 건드리지 않은 채 패스의 결을 살리며 부드럽게 몸을 돌린다.


허무하게 벗겨지는 비달. 가로막아서는 크리호비아크마저 뚫어내는 캐리의 왼발 터치.


삑 -


“저, 저, 저!”


블랙은 흥분하며 삿대질을 날렸다.


크게 공중에 떠오르며 곤두박질친 캐리. 고의로 크리호비아크가 다리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부상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상황.


물론 이대로 캐리를 보내줬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강제로라도 역습을 끊는 게 크리호비아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가는 응당 치러야겠지만.


“고작 옐로? 레드카드를 줘버렸어야 했는데!”


“심정은 이해하지만······ 퇴장까진 무리야, 피터.”


홉킨스는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이제 후반 80분에 접어든 시각.


“흥. 경고 한 장 받았다고 바로 빼겠다, 이건가?”


블랙은 크리호비아크가 교체로 나가는 걸 지켜보며 툴툴거렸다.


“나폴리가 우리한테 어떻게 졌었는지 안다면 저럴 만도 하지.”


승부가 원점이 된 후 더욱 가빠진 흐름. 남은 십분 여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변수가 될 만한 부분은 제거해 둘 필요가 있다.


크리호비아크는 팀에서 궂은일을 도맡는 위치인 만큼 카드 누적의 가능성이 높은 선수. 지금처럼 경기가 거칠어질수록 불안 요소가 된다.


홉킨스의 말대로 나폴리는 그 카드 관리를 소홀히 해서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치지 않았던가.


에메리 역시 안 좋은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새로 투입된 인원은 데니스 수아레스(Denis Suarez).


준수한 발재간을 통한 돌파가 장기인 선수로 수비적인 면에선 좀 떨어질 순 있으나 공격적인 부분이 뛰어난 재능이다.


그를 투입한다는 건 2선의 화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의미.


세비야는 연장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무리 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로스 카운티의 집중력도 많이 흐려진 상태였으니까.


위기를 모면하는 멋진 수비가 몇 번 나오긴 했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그런 장면이 연달아 나올 만큼 팀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다.


미드필드진 사이를 가르는 이보라의 패스.


“제발 정신 차려!”


블랙이 애원하듯 소리쳤지만, 새로 들어온 돌격대장에게 쏠리면서 또 바네가를 노마크로 놔두고 만다.


측면으로 빠지면서 볼을 몰다가 대각선으로 꺾어 패스를 내주는 수아레스.


기습적인 중거리 슛.


일직선으로 날아간 볼이 키퍼의 손을 벗어나 미세한 차이로 골대 옆을 빗나간다.


모두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브라운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방금은 바네가의 킥이 조금만 정확했어도 끝난 게임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단 한 방이 승부를 가를지도 모르는 시점.


정신력을 전부 짜내도 모자랄 판에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골문을 지키는 수문장으로서 당연히 불만을 표출할 만한 일이었다.


전반전 때만 해도 철저하게 중거리 각을 내주지 않던 선수들의 그 견고한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팀이 안정을 되찾으려면 원래대로 돌아와야 해.”


홉킨스의 말이었다.


“듬직하게 로스 카운티를 이끌던 우리 주장의 모습으로 말이야. 아직도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데······.”


“······확실히.”


평소의 브리튼이었다면 이럴 때 먼저 큰 목소리를 내면서 독려했을 텐데.


필드에서 열심히 지시를 내리며 팀원들의 위치를 조정해주고는 있으나, 표정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선수 생활을 통틀어서 가장 거대하고도 중요한 시합이야. 그런 무대에서 페널티 킥 실축도 모자라, 동점마저 내줬으니. 아마 이 경기를 패배한다면 자신이 그 원흉이 된 거라며 자책하겠지.”


블랙은 착잡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작 그렇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가 탓하겠냐고······.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세비야를 상대하면서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도 브리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데.”


“딩월의 골이 들어갔을 때도 그의 활약이 컸지. 아니, 전반적으로 훌륭한 퍼포먼스였어. 그래도 딱히 위안은 되지 못할 거야. 워낙 책임감이 투철한 선수니까.”


“그렇겠지. 어느 정도는 부담감을 벗어던져도 될 텐데. 이미 올 시즌 로스 카운티는 대성공을 거뒀는걸. 그리고······ 아직 패배한 것도 아니잖아!”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드럼 스틱을 뽑아 드는 블랙.


“한탄만 늘어놓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직접 보여주자고. 이래서 우리 숫사슴들이 여기로 모여든 거니까.”


홉킨스가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로스 카운티의 서포터. 우리는 그 목적 하나로 모인 집단이지.”


높이 들어 올린 팔이 박력 있게 드럼을 내려친다.


둥 -

둥 -


이어서 블랙이 내뱉는 한마디. 그 소리를 신호로 잠시 멎었던 합창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것은 비록 단순했지만, 동요하는 로스 카운티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면서 절망하고 있는 한 명을 향한 팬들의 마음을 보내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외침이었다.


*******


승리. 우승을 갈망하는 두 나라의 서포터들.


양 팀 스탠드가 전력을 다해 응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스타디온 나로도비가 격하게 진동한다.


선수들도 이에 보답하기 위해, 유로파 리그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기 위해 남은 힘을 거리낌 없이 쏟아낸다.


후반전이 더 격렬해진 것은 교체로 들어왔던 이보라가 블랜차드와 몇 번이나 볼 다툼을 벌였는지 횟수만 세어 봐도 알 수 있었다.


공중볼 경합만 서로 엎치락뒤치락하기를 여러 차례. 이번에는 이보라의 헤더가 블랜차드보다 먼저 닿으며 쟁탈전에 승리한다.


바네가가 잡자마자 곧바로 딩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왼발로 볼을 옮기며 부드럽게 회전하는 바네가. 제대로 따돌렸나 싶었지만, 이내 쫓아와 슬라이딩 태클로 저지하는 딩월.


두 선수가 쓰러지고, 세컨드 볼을 수아레스가 잡아낸다.


연속으로 달려드는 블랜차드와 캐리의 압박을 드리블로 회피한 뒤 줄 곳을 찾는 수아레스. 측면 터치라인에서 달리기 시작한 비달을 확인한다.


그러나 인터셉트 당하는 볼.


길목에 뛰어들며 수아레스의 패스를 차단한 선수는 놀랍게도 바네가와 뒤엉키며 쓰러졌던 딩월이었다.


그새 몸을 일으켜 여기까지 가로질러 달려온 것이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저 순박한 얼굴의 스코틀랜드 청년을 상대해왔던 모든 선수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감상. 그건 세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로채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딩월. 이보라가 막아섰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 크게 무리하지 않는 편이었다.


뒤로 빼는 볼을 이어받는 캐리.


쭉 뻗어나가는 로빙 패스가 중앙을 훌쩍 넘겨 전력 질주하고 있는 월리스 쪽으로 날아간다.


위기를 감지하고 빠르게 올라와 붙는 코케. 체격으로 누르며 볼을 받아내는 월리스. 이에 굴하지 않고 팔을 휘감으며 끈덕지게 방해하는 코케.


팽팽하던 싸움의 균형은 월리스가 옆으로 짧게 내주면서 깨져버린다.


횡패스를 받은 선수는 이번에도 딩월이었다.


바네가와 수아레스에게 훼방을 놓고, 이보라를 끌어당겨 캐리에게 볼을 건네준 뒤에도 쉬지 않고 달려와 월리스의 볼을 받아주는 연결고리 역할까지. 이 모든 플레이가 한 사람에 의해 나온 거다.


정작 그를 견제했던 이보라는 뒤처진 채 쫓아오고 있었다.


‘다들 지쳐가는 후반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빛을 발하는 선수.’


이미 자국에서 이 한 줄의 평가로 이름값이 치솟아 오른 스코티시 하드워커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코케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월리스가 내달렸고, 딩월이 타이밍에 맞춰서 밀어주자 세비야의 측면이 원투패스로 완벽히 붕괴된다.


간만에 펼쳐지는 로스 카운티의 공격에 들썩이는 관중석.


코케가 무너지면서 중앙의 카히수가 수습하기 위해 딸려 나온다.


속력이 붙은 월리스가 한 번 더 길게 치고 나가며 경합을 유도했고, 한 걸음 차이로 앞지르자 함성이 한껏 드높아진다.


박스 외곽에서 올리는 크로스. 발을 뻗는 카히수. 블로킹을 벗어난 볼이 콜로지에자크와 트레물리나를 넘겨 먼 포스트에 도달한다.


거기엔 박스 안으로 매섭게 쇄도하는 블랜차드가 있었다.



파앙 -


미사일처럼 일직선으로 달려들며 이마에 적중시킨 헤더 슛. 그물을 흔드는 통쾌한 소리 대신 둔탁한 글러브의 파열음이 경기장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뛰어올라 머리 뒤로 빨려 들어갈 뻔했던 슛을 쳐낸 리코의 엄청난 선방.


양 팀 스탠드 측 모두가 경악했다. 들어갈 줄 알았던 슛이 키퍼의 손에 걸려 골대 위로 넘어가고 말았으니.


상대 팀 또한 승리에 절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한 번 극적인 장면이 벌어지나 싶었는데, 이런 것마저 안 들어간다면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로스 카운티 팬들에게 약과일지도 몰랐다.


블랜차드가 발목을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었다. 회심의 헤더 슛 이후 수비수와 충돌하면서 착지를 잘못한 모양이었다.


*******


“아······. 제임스의 발목에 결국 무리가······.”


스튜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필드를 보았다.


득점을 못 한 건 둘째치고, 당장 블랜차드가 빠져버린다면 그를 대체할 만한 자원도 없을 텐데. 그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다.


의료팀이 허겁지겁 뛰어가 확인하는 동안 급격하게 흘러가던 경기장의 시간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스튜어트를 포함한 코치진과 관중들 모두 쓰러진 선수에 집중했다.


오직 한 사람만 다른 곳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리차드!”


브리튼의 이름을 부르며 손짓하는 델 레오네.


대기심의 움직임이 없는 걸로 보아 교체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잠깐 여유가 생긴 틈을 타서 뭔가 전술 지시라도 내리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스튜어트는 브리튼의 뺨을 대뜸 두 손으로 덥석 잡아버리는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블랜차드만 보고 있던 관중들의 시선마저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스타디온 나로도비에 운집한 언론 매체와 사진사들은 아마 이 희귀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리차드! 내 눈 똑바로 봐!”


그는 여전히 브리튼의 뺨을 꽉 잡은 채로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게 하고서 말을 시작했다.


TV 화면으로는 격려를 해주는 거라 추측할 수 있을 뿐. 자세한 건 알 수 없겠지만, 이탈리안 옆에 서 있던 스튜어트는 모든 내용을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저 사소한 해프닝이야. 아까 전의 실축으로 자책하고 주눅들 필요는 없어. 경기력에 영향이 갈 정도의 일까진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제가······.”


“이건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팩트만을 얘기하는 거야.”


“······.”


“잘 들어!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어! 동점이고, 시간이 남아 있지. 허나 계속 이런 모습이면 결국 패배하게 된다. 자네는 캡틴이야. 숫사슴의 완장을 달고 있는 캡틴. 중심이 흔들리면 팀도 흔들릴 수밖에 없어.”


감독의 손이 내려가 브리튼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물론 심정은 이해한다. 중압감이 큰 시합에서 실점과 연결되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부담에 짓눌리면서 세비야에게 두려움을 느낀 거겠지. 그런 감정은 전투 불능에 빠진 거나 다를 바 없어.”


그가 계속 말했다.


“부임 당시에 내가 했던 말 혹시 기억하나? 상대의 위상에 눌려서 스스로 억제당하지 말라고. 지금 자네가 그 꼴이야. 감독으로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


“원래대로면 이럴 때 교체를 감행해야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왜인 줄 아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부터 자네의 귀가 막혀있다는 증거야.”


브리튼 -

브리튼 -

브리튼 -


대면하고 있는 감독과 주장의 머리 위로 무수히 쏟아지는 콜네임. 한참 전부터 이곳에 울려 퍼지고 있던 합창이었다.


“들리나? 저들은 자네를 책망하지 않아. 리차드 브리튼이 팀에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헌신해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도 이렇게 웅크리기만 한다면 그거야말로 팬들을 배신하는 행위가 되는 거다.”


스튜어트는 흐리멍덩하던 브리튼의 동공이 어느 정도 돌아온 걸 확인했다.


“내가 지향하는 로스 카운티의 철학을 누구보다 훌륭히 실천했던 건 바로 자네야. 이제껏 잘해왔는데 고작 몇 분 동안 느낀 부담감으로 평생의 미련을 남길 셈인가?”


“······.”


“결과가 어떻게 되든 후회 없이 뛰길 바란다, 리차드.”


“······명심하겠습니다.”



돌아선 브리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튜어트는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그사이 블랜차드는 몸을 일으켜 의료팀의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면서도 연신 고개를 완강히 내젓고 있었다.


악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더 뛸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듯했다.


상태를 최종 점검한 의료팀이 벤치 쪽을 향해 사인을 보낸다.


“교체해야 할 정도는 아닌가 보네요. 제임스의 의지력은 참······.”


스튜어트는 안도감과 걱정이 뒤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리차드는······ 괜찮을까요?”


“괜찮아야 해. 반드시.”


감독이 필드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무거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끝났네, 닐. 남은 몫은 선수들에게 달렸어. 변화를 위한 교체는 없을 거니까. 이대로 지켜보세.”


이윽고 경기가 재개되었다.


*******


체력이 고갈될수록 절실함은 조급함으로 번져간다.


마음이 앞서다가 패스 미스로 볼을 헌납하는 비톨로.


공격진의 압박을 피해 좌측으로 보내는 얀손. 월리스가 받아서 터치라인을 따라 올라간다.


블랜차드가 나란히 함께 달리며 손짓했고, 뒤늦게 눈치챈 이보라가 다급하게 쫓는다.


그러나 진로를 막아선 코케 앞에서 머뭇거리다 판단이 늦어진 월리스. 뒤따라온 비달의 발에 걸린 패스가 부정확하게 흐르고, 볼을 받아주려던 블랜차드는 몸의 중심을 잃으며 휘청거렸다.


세컨드 볼을 차지하여 순식간에 세비야의 역습으로 전환하는 이보라.


패스를 받아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수아레스. 캐리가 경합을 붙지만, 빼앗지 못하고 측면으로 전개하는 패스까지 허용한다.


수비 가담으로 월리스를 방해했던 비달이 어느새 중앙선을 넘어 수아레스의 패스를 받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저지하려는 얀손의 속도마저 추월하는 비달. 마지막 혼신의 힘을 짜낸 질주에 세비야 측 스탠드가 미친 듯이 날뛴다.


절묘하게 휘어진 크로스가 보이드의 발마저 통과하며 골문 앞까지 배달된다.


뒤쪽으로 뛰어드는 바카의 날카로운 쇄도.



우와아아 -


역전 골의 환희 대신 반쯤 체념했던 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스타디온 나로도비가 다시 붉은색에서 군청색의 함성으로 뒤덮인다.


이번에도 점수는 바뀌지 않았다.


모두가 볼에만 시선을 두고 있을 때. 혼자 바카의 동선을 밟으며 악착같이 쫓아간, 정확히 디딤발을 짚고 슛하기 직전에 앞으로 발을 갖다 대며 막아낸 선수 덕분이었다.


“으아아! 델샤드, 최고다! 넌 유로파 리그 베스트 일레븐 확정이야!”


블랙은 참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 질렀다.


한 골을 넣은 것이나 다름없는 슈퍼 세이브. 몇 분 전에 로스 카운티가 맛보았던 좌절을 세비야가 느껴볼 차례였다.


델샤드의 발에 맞은 바카의 슛이 옆으로 튀고, 허둥지둥 잡아낸 브라운. 정면을 보면서 힘껏 볼을 던진다.


캐리가 잡아 전방을 훑어보더니 내려온 딩월에게 넘겨주고 달리며, 자신의 앞쪽을 양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밀어주는 딩월의 리턴 패스. 중간에 끼어들며 가로채는 이보라.


고조되어가던 숫사슴들의 목소리가 턱 막혀버린다.



역습 중 턴오버. 축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팀이 전체적으로 전진하며 앞으로 쏠리니 후방이 취약해지고, 수비진도 정비를 미처 끝마치지 못한 상황.


볼을 주고받으며 나아가던 딩월과 캐리가 일시적으로 붕 뜨고, 그 말은 곧 그들이 전담하던 세비야 2선들의 마크가 비었다는 뜻이 된다.


바네가에게 전달되는 볼. 보이드와 델샤드 사이로 아주 잠깐 새 크게 벌어진 간격. 유로파 리그 최고의 플레이메이커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동시에 눈빛을 교환한 바카가 수비 라인을 허무는 데 성공하고, 바네가의 발에서 떠난 볼이 그 허점을 찌른다.


흐트러진 대열의 틈새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스루패스.


단번에 골키퍼와의 단독 찬스를 만들어내는 위력적인 한 방이었다.


그 길목에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을 때의 얘기지만.


“그거야, 리차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스튜어트가 기뻐하며 외쳤다


몸을 날린 브리튼이 슬라이딩하며 가까스로 볼을 건드리고, 자로 잰 듯 정확히 직선으로 나가던 바네가의 패스가 굴절된다.


경로가 바뀐 볼을 잡으려는 수아레스였지만, 달리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여 그의 발꿈치 뒤쪽으로 흐르고.


세비야가 기회를 놓치니 자연스레 찾아오는 로스 카운티의 턴.


수아레스를 지나친 볼은 얀손의 발 앞에 굴러갔고, 곧바로 찔러준 패스는 캐리에게 닿는다.


아까와 달리 우측으로 크게 전환하는 그의 왼발.


캐리의 패스가 트레물리나를 넘겨 톰슨에게 도달하고, 충전해두었던 준족 윙의 스피드가 재가동된다.


비톨로의 패스 미스를 시작으로 급박한 템포의 역습을 번갈아 주고받은 지 벌써 다섯 번째.


그 종지부를 찍어내겠다는 듯이 내달리는 톰슨의 폭발적인 스피드. 여기서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후방에서 빠른 커버에 들어가는 콜로지에자크.


챔피언 팀의 능숙하고 투지 넘치는 대처에 톰슨의 속도가 정체된다.


바짝 추격해오는 트레물리나와 함께 양면으로 에워싸는 세비야. 좀 전에 당했던 월리스처럼 압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빼앗기기 일보 직전.


그때 뭔가 익숙한 인기척을 느낀 톰슨이 무의식적으로 볼을 밀어주었고, 누군가가 그의 옆을 지나치며 패스를 받아 올라간다.


델샤드의 오버래핑이었다.


톰슨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두 명이 라이트백의 스프린트까지 견제할 겨를은 없었다.


오랜만에 올라간 그의 공격이 세비야의 진영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쏟아져 나온 함성은 경기장을 넘어 이곳 바르샤바 지역을 통째로 뒤흔들 기세였다.


세비야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이를 악물며 쫓아가는 콜로지에자크의 열정은 적 팀의 선수였지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스물셋의 젊은 수비수가 작정하고 쫓으니, 서른 줄에 들어선 수비수가 속도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크로스를 올리는 척 상대의 중심을 흔들어 놓고, 가볍게 뒤로 빼주는 델샤드.


신체는 몰라도, 그의 노련함은 따라올 수 없었다.


뒤따라오던 톰슨이 다시 받아서 나아가고, 급정거하느라 몸이 쏠려버린 콜로지에자크는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는 그를 제어하지 못한다.


와아아아아 -


수비수 둘이 전열에서 이탈하고, 박스 외곽까지 단숨에 진입하는 톰슨. 카히수가 달려 나와 자세를 잡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일대일 대결을 유도한다.


톰슨의 선택은 달랐다.


카히수를 마주한 채 대각선 뒤로 꺾으며 볼을 내주었고, 그 컷백은 세비야 선수들과 팬들의 표정을 모조리 굳게 만드는 패스였다.


먼저 달려온 건 군청색의 유니폼, 이런 흐름에서 절대 노마크로 두면 안 되는 선수였으니까.


캐리의 중거리 슛이 좌측 상단 구석을 향해 나아갔고, 왼발 아웃프런트로 감긴 볼은 리코의 손에 더욱 닿기 어려운 궤적으로 휘어져 들어갔다.


철썩 -


마침내 흔들리는 그물. 일제히 폭발하는 함성.


양팔을 벌린 채 필드를 달리는 캐리와 흥분하며 그를 따르는 팀원들. 반대로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낙심하는 세비야 선수들.


눈앞의 풍경은 로스 카운티가 역전했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명확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관중석으로 달려가 기쁨을 나누는 캐리. 껴안는 팬들과 뒤따라와 달려드는 팀원들에게 이중으로 덮쳐지며 급기야 자취를 감추고 만다.


격정적인 골 셀레브레이션이 끝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그는 헝클어진 금발을 다듬으며 카메라를 쳐다보더니 웃는 얼굴로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받아서 직접 해결하는 건 내가 좀 더 나을 거라고. 농담인 줄 알았어?”


*******


풀백인 코케를 불러들이고, 케빈 가메이로를 투입하여 공격수를 하나 더 늘리는 세비야.


무리한 결정이었지만, 89분이라는 촉박한 시간을 두고 내릴 수밖에 없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반대로 여유가 생긴 로스 카운티는 캐리를 불러들이며, 대런 케틀웰을 투입했다. 수비를 강화함과 동시에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다.


팬들의 성원에 박수로 화답하며 최대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캐리. 환호와 야유가 뒤섞인 반응이 그에게 집중된다.


대기심이 표기한 5분. 적지 않은 추가 시간이었지만, 캐리의 능청스러운 행동으로 일 분이 더 지나가 버린다.


제자가 뻔뻔한 데에는 스승의 영향이 컸던 것일까.


캐리가 나간 이후 몇 초도 안 되어서 마지막 교체 카드까지 사용하는 델 레오네. 잭 마틴을 불러들이며, 스티브 샌더스를 투입하니 점점 짙어지는 패색에 속이 타는 스페인 팬들은 그가 미치도록 얄미울 지경이었다.


추가 시간의 절반이 소모되고, 세비야의 초조함은 극에 달한다.


바네가가 급히 박스 안으로 로빙 패스를 넣지만, 그 안에 포진해 있는 순수 수비수만 다섯 명.


이보라가 보이드와의 경합에서 승리하나 머리로 떨어뜨린 볼을 잡은 가메이로를 얀손이 밀착 마크하고, 케틀웰이 압박하여 기어이 빼앗는다.


샌더스가 멀리 걷어내고, 박스 바깥으로 달려 나온 리코가 죄다 올라가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전방으로 길게 올려 찬다.


이보라가 다시 한번 솟아오르며 머리에 맞추지만, 그 볼을 최종적으로 잡아채는 브라운.


끌어안고 땅에 엎드렸다가 느릿느릿 일어나더니 일부러 터치라인 바깥쪽으로 걷어낸다.


볼을 줍기 위해 황급히 달려가는 세비야 수비수들은 얼떨결에 볼 보이가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런 굴욕에도 불구하고 가차 없이 흘러가는 시계바늘. 주심은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휘슬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삑 - 삐익 -


유로파 리그의 챔피언이 바뀌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소리였다.


*******


경기가 끝나자마자 선수들이 달려간 방향은 한 곳이었다.


필드 안에 들어오며 그들을 맞아주는 델 레오네와 코치진들.


갑자기 스튜어트가 감독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얘들아, 감독님 잡아!”


혹시 몰라서 이때를 대비해 프리미어십 우승 당시 하지 않고 넘어갔던 것.


수석 코치의 의도를 알아챈 선수들이 감독을 둘러싸더니 번쩍 들어 올리며 헹가래를 시작했고, 그에 맞춰 팬들의 함성이 크게 울린다.


몇몇 소수의 난입은 있었지만, 저번과 달리 모두가 필드 안으로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세계적인 무대이니만큼 경비 체계가 더 철저해서 그런 것도 있고, 이미 리그 우승 당시에 한 번 크게 만끽해서 일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그때보다 오늘이 훨씬 더 기쁜 날이라는 것이었다.


“토드, 우리가 이긴 거 맞지? 우리가······ 유로파 리그······ 그러니까 이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을 해낸 게 정말로 맞는 거지?”


“그래. 심지어 더블이야. 프리미어십에 이어서 유로파 리그. 트로피를 두 개나 들어 올린 거지.”


“더블······. 더블이라······. 하······.”


울먹임과 웃음으로 뒤죽박죽된 표정의 블랙. 한동안 말없이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하더니 홉킨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오길 잘했어. 그렇지?”



블랙과 홉킨스가 주도하는 서포터즈 외에도 함께 직관하던 사람들. TV를 통해 중계를 시청하던 사람들.


로스 카운티를 응원했던 스코틀랜드인 전부가 올 시즌 일어난 최대의 기적 앞에서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폴란드로 함께 가지 못했던 로스 카운티의 남은 일원들. 사무실의 스태프들도 팀의 우승이 확정되는 걸 보자마자 열렬히 환호했다.


베테랑 수석 스카우트 폴 몽고메리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홍보 부서의 마리 코넬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믿고 있었다는 듯 덤덤히 고개만 끄덕인 건 아서 마틴뿐이었다.


선수들의 심정이야 90분간 뛰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음에도 지친 기색 없이 셀레브레이션을 멈추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딩월은 마치 계주라도 하듯 관중석 전체를 돌면서 쉴 새 없이 뛰어다녔고, 얀손은 팀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격하게 포옹을 나누었다.


주저앉아 실의에 빠진 세비야 선수들을 위로해주는 잭 마틴 같은 선수, 블랜차드처럼 그냥 필드에 드러누워 휴식하는 선수.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올해 최고의 보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브리튼.


“힘든 시합이었지?”


보이드가 다가오며 말했다.


“바네가 말이야. 나름대로 잘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세비야의 두 골이 그 선수 발에서 나왔더라. 난 방금 알았어.”


“다시 붙으면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하겠다.”


브리튼이 웃으며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이긴 건 우리니까.”


“그래······. 이긴 건 우리지.”


브리튼과 보이드는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주장.”


“내가 뭘. 너야말로 수고했지. 팀을 살리는 그 세이브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끝났을 경기였어. ······나도 끝났을 거고.”


“하긴. 내가 본 형 중에 최고로 주장답지 않은 날이었어. 그래도 막판에는 한 건 했잖아?”


“정신이 바짝 들었거든.”


브리튼의 말에 보이드가 피식 웃었다.


“감독에게 한 소리 좀 들었지?”


“제대로. 그전까진 어떻게 뛰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네. 주변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서 울리기만 했는데. 감독님에게 불려가고 나서 깨달았어. 팬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는걸.”


“······.”


“그리고 우리 팀에게서 많은 자극을 받았지. 너는 몸을 던지면서 결과를 바꿨고, 제임스는 교체를 거부하면서 계속 뛰길 고집하고, 아메드는 끝까지 집중을 잃지 않으며 상대의 결정적인 찬스를 막아내고. 다들 모든 걸 내놓고서 뛰는데 나는 대체 뭐하나 싶더라.”


“그거야 뭐, 형도 정신을 놓아버리기 전에는······.”


“어떻게 보면 너희의 투혼이 나를 구렁텅이에서 꺼내 준 거야.”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 그딴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다니.”


보이드는 깍지 낀 손을 머리에 올려놓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선수 생활을 지내면서 오늘만큼 열심히 뛴 적이 없었어. 또 이렇게 뛰라면 절대 못 할 거야. 마지막 불꽃을 태워버렸거든. 가진 기량의 이상을 죄다 끌어다 쓴 느낌이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은퇴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마 이번 시즌이 우리가 경험하는 최전성기의 추억으로 남겠지. 형도 나도 슬슬 메인에서 내려올 때가 됐잖아?”


“그래.”


브리튼은 자신의 팀원들을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별걱정은 안 되지? 세대교체는 잘 이루어졌으니까.”


“엄청 잘됐지. 안심하고 물려줄 수 있을 만큼. 그런다고 바로 쉽게 내줄 생각은 없지만, 준비는 해놔야겠지. 뭐······ 나는 만족해. 내내 행복했고.”


보이드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저 감독을 지금에 와서야 만났다는 거? 좀 더 일찍, 우리가 주연이었을 때 왔다면 어땠을지. 가끔 상상하게 되더라. 아끼는 동생들이지만, 그 점은 살짝 질투가 나기도 해.”


브리튼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


2014/15 UEFA Europa League Champion 'Ross County'


평생 기록될, 영원히 남을 명칭이었다.


트로피에 새겨지는 로스 카운티의 이름.


시즌 내내 온몸을 바쳐 싸워온 이유이자 그 결실이 브리튼의 손에 쥐어졌고, 그는 성배를 옮기듯 조심스럽게 돌아선다.


선수들은 진작 시상대에 모여들어 마지막을 장식할 셀레브레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브리튼과 보이드가 트로피의 양쪽을 잡아들어 올리자, 기다리던 선수들과 관중들의 함성, 폭죽이 동시에 터진다.



[2014/15 시즌 유로파 리그 우승! 그 주인공은 로스 카운티입니다!]


중계 해설자가 선언하듯 날린 멘트는 현실감이 몽롱해서 멍한 표정으로 시청하고만 있던 맥도넬과 펍 안의 사람들마저 결국 들끓게 만들었다.


“드디어 실감이 나······. 우승했어. 우리가 우승했어!”


“저 트로피가 우리 것인 게 확실한 거지? 말도 안 돼······.”


“그냥 우승도 아니야! 더블이라고, 더블! 프리미어십 우승도 확신하지 못했었는데······ 이건 기적이야.”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는 사람들 속에서 맥도넬은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고만 있었다.


“우리 팀에 왜 이런 기적이 계속 일어나는지 알 것 같아.”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그 기적을 행하는 신이 저기에 있잖아. 그는 감독이 아니야. 로스 카운티를 구하러 온 신이야.”


감정이 복받쳐 오른 탓에 한 말이겠지만, 반박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2년 전, 안토니오 델 레오네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수들에게서 트로피를 받아 품격 있는 모습으로 들어 올리는 이탈리안이 줌인 되며 해설자의 멘트가 흘러나온다.


[올해는 적응기를 가져야겠지만, 내년에는 스코티시 전역을 놀라게 할 것이며, 정확히 삼 년 차에 세계를 뒤집어 놓겠다고.]


클로즈업 상태로 서서히 올라가 트로피를 잡은 감독의 손을 비추는 카메라.


[하지만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고작 이 년 만에 뒤집어 놓았으니까요.]


멈춘 화면은 트로피에 새겨진 우승팀의 이름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제는 전 세계가 로스 카운티를 알고 있습니다.]



=============================

< 세비야 2 : 3 로스 카운티 >

그제고시 크리호비아크(69‘)

카를로스 바카(75‘)

+++++++++++++++++++++++++++++

잭 마틴(32‘)

에이든 딩월(63‘)

알렉산더 캐리(88‘)


=============================



우승 셀레브레이션을 끝마치고, 자리를 떠나지 않는 관중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트로피를 전리품처럼 높이 든 선수들과 그들을 거느린 채 앞장선 감독의 위용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걸어 들어오는 스타디온 나로도비의 터널은 개선문이었으며, 마치 처음부터 하일랜드의 위대한 군대와 이탈리안 개선장군의 귀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것이 구단주 로이 베넷의 감상이었다.


그는 경기 종료 이후 즉시 객석에서 내려와 대런 코너 단장과 함께 터널에서 쭉 대기하고 있었다.


필드 위에서 나누는 기쁨은 고생했던 그들에게 온전히 양보해주고 싶어서였다. 환대는 들어와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감독에게서 비치는 후광은 도통 사라지질 않았으며, 더블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 밑도 끝도 없이 벅차오르는 기분.


‘아아, 멋진 사람. 대단한 사람. 이런 사랑스러운 사람 같으니.’


전혀 제어되지 않아 끊임없이 되뇌는 속마음.


그래서일까. 담담히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려 했던 계획과 달리 베넷은 감독의 손을 잡은 채 내려다보는 관중들 앞에서 끝내 말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 사랑합니다!”


작가의말

글을 완료하면서 제가 구제 불능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늦지 않겠다 해놓고 더 늦어버려서..

실망하셨어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절단해놓고 늦어버리다니..

나름 메인 이벤트가 되는 구간이다 보니

평소보다 더 신경 쓰이고 그러네요.

재미라도 있으면 그래도 다행일 텐데..

분량도 쓰다 보면 계속 이렇게 돼서

읽는 독자분들도 피곤하실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결승전도 마무리되었고

다음부터는 서서히 조절해 나가겠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짱짱가 님

모아두상 님

foir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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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47 4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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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18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0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28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51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62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05 4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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