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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감기 님의 서재입니다.

이번 세상의 악은 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빨리감기
작품등록일 :
2022.06.25 21:30
최근연재일 :
2022.07.0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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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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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장례식

DUMMY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내 눈 앞에 있는 건, 하나의 관과 그 뒤의 다섯 개의 영정.


그리고 그 뒤로 늘어선 수십 개의 영정이다.


다섯 개의 영정에 그려져 있는 사람들은 무림맹의 주축이었던 제갈천, 유서하, 당아현, 신해, 남궁하.


그 뒤의 수십 개의 영정은 그들만큼 이름있지는 않았지만, 그들만큼이나 용맹하고 정의롭게 악적들과 싸우다 순직한 무림맹의 소속원들.


그리고 관에 들어있는 것은 너.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 한서연이다.


무림맹의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그 영정을 모셔왔던 사당에, 어느 새 이토록 많은 영정들이 모이게 되었다.


'왜 그래. 울지마.'


네가 죽던 그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덜덜 떨던 나에게 넌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어주었었다.


관에 두 손을 모으고 누워있는 너의 모습은, 조금 창백하다는 것을 빼고는 살아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무림맹의 창고에 있던 만년빙 덕분이다.


마교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무림맹이 무너진 이후, 남은 모든 재산은 전쟁 때 죽은 이들의 유가족에게 나누어주었지만, 단 하나 이것 만은 남겨 서연의 시신을 지키는데 쓰고 있다.


무림맹의 일로 북해에 들렀을 때 우연히 깊은 북해의 숲속에서 발견한 빙정이었다.


색이 일반적인 빙정과 다르게 푸른색이고 빙정 특유의 한기가 이상하리만큼 약해서 상품성이 없다고 감정되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네가 좋아해서 소장하던 것이다.


'네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이것조차도 팔아서 나눠주려 했겠지......'


분명, 확실히 그렇게 주장할 서연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왔다.


나는 오래 감고 있었기에 살짝 어두워진 눈가를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존이시여......"


너무 깊은 생각에 잠들어있었기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 자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는 데에도 잠시 시간이 걸렸다.


"아룡아, 내가...... 얼마나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지."


"꼬박 이틀......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물이나, 음식이나...... 아, 아니면 화장실이......"


내 몸종인 아룡은 과장과 걱정이 심한 성격이긴 했으나, 허둥대며 내 몸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틀을 꼬박 생각에 잠겨있었다는 것은 정말인 듯 했다.


"난 괜찮다."


"허나......"


"괜찮대도."


주위를 둘러보고는 내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는지, 아룡은 입술을 약간 깨물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듯 했다.


"왜 그러느냐."


"......검존이시여,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아룡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틀 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느냐."


"......네."


아룡은 끝내 두 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아룡이 내 몸종이 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 동안 무림맹의 동료들과 쌓은 유대감은 아룡 역시 나 못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마음 아파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난 원래부터 인간미 없는, 따뜻한 마음 같은 것이 부족한 사람이니까.


특히 서연은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뛰어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구나. 아무도...... 아무도, 오지 않았구나."


난 이 상황을 분명 예상하고 있었다.


마교와의 전쟁이 끝난 지 한 달이 넘게 지났다.


하지만 그 동안 남은 마교의 잔당을 소탕하고, 죽은 동료들의 유가족을 챙기고, 마교에게 해를 당한 이들을 구호하고, 불타고 파괴된 마을들을 재건하느라 동료들의 장례식은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내 뜻은 아니었다.


내 동료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는 것 따위는 나에게 전혀 상관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료들이라면 분명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부터 진행된 무림맹의 동료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에는......


과거 무림맹의 문을 두들기던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방문했다.


심지어 방문객의 대부분은 무림맹에 도움을 받은 힘없고 약한 민초들이었으며, 무림인들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무림맹이 강한 위세를 떨쳤을 때에는, 그리고 검존이라 불리우게 된 내가 무림맹주의 자리를 맡은 서연과 함께 흑도, 사파, 마교들과 싸울 때에는 세상이 떠나가라 칭송하던 그 수많은 이들은.


서연이 죽고 무림맹이 무너진 이후, 그 쉬운 애도의 발길조차도 보내지 않고 있다.


아니,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긴 할 것이다.


무림맹에게 밀려 입지를 잃었던 구파일방의 늙은이들이, 다시 그 권력을 잡기 위해 무림인들은 물론 무림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무림맹의 장례를 무시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해 흑도들과, 사파와, 마교와 싸우다 죽은 동료들의 목숨이.


이렇게 싸게 취급될 것이었던가.


"하하......"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에 와서야 처음으로 진정 알게 되었다.


구파일방의 늙은이들이 은혜를 모르는, 오직 권력과 위세만을 탐하는 더러운 자들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악적들과 싸울 때는 무림맹에게 위선적인 호의와 존경을 보냈지만, 뒤로는 언제든 우리를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잡으려 칼을 갈고 있었던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저 지켜야 될 대상으로만 여겼던, 힘 없는 민중들도 결국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들인 것 역시 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지킬 때는 환호를 보내더라도, 결국 우리가 힘을 잃는다면 누구보다 빨리 우리에게서 관심을 잃을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로 펼쳐진 이 세계는 어떤가.


사파와의 전쟁에서 많은 동료들을 잃고, 마교와의 전쟁에서 끝내 무너져버린 무림맹의 장례식에, 정작 그 희생으로 살아난 이들이 조의를 표하지 않고 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 내 옆에 항상 놓여져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검존.


검존이란 칭호는 절대 가볍지 않다.


정파 무림의 최고 강자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지만, 모든 시대에 검존이라는 칭호를 가진 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파 무림의 인정을 받을 만큼 강하고, 거기에 더해 위대한 업적과 무공을 남긴 이만이 검존이라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무림의 역사 속에서도, 검존이라 불린 자는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린 수많은 적들과 싸웠고, 이겼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내 곁의 동료들은 한 명도 남지 못했다.


기문진법과 전략의 천재였던, 가끔은 재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던 제갈세가의 차기가주 제갈천은 무림맹을 무너뜨리려 하던 구파일방의 수구세력에게 독살당했다.


누구보다 올곧고 정의롭고 협을 따르던, 나보다 스무살은 많은 것처럼 어른스럽게 느껴지던 종남파의 제일검 유서하는 정사대전에서 사파들의 검에 쓰러졌다.


사천당가 제일의 기재였던, 항상 피로와 불면으로 퀭한 눈가를 하고는 투덜대던 사천당가의 차녀 당아현은 사파의 고수 십 여 명을 데리고 자신의 독으로 죽었다.


남해의 보물이라 불리던, 파도가 치듯 껄껄거리며 시끄럽게 웃던 해남파의 신해는 항주에서 천 명의 마교도를 베고 기력이 다해 죽었다.


거만하고 도련님스러웠지만, 만약 내가 없었다면 검존의 이름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남궁세가의 남궁하는 피난민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후방을 지키다 끝내 마교의 주교들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한 달 전 드디어 내 손으로 모든 주교를 베고 전의를 가진 모든 마교도들을 중원에서 몰아내며 마교와의 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결국, 마교들과의 싸움에서 마지막 동료인 무림맹주이자 화산파의 제일검수이며,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한서연마저 죽었다.


눈물을 흘리다 못해, 이제는 거의 대성통곡하듯 엉엉 울고 있는 아룡을 보고 있자니, 내 눈에서도 마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흐르고 있는가.


"어......?"


검존이라는 호칭 외에, 사람들이 (보통은 나에게 적대적인 구파일방의 무리들이) 나에게 붙인 별칭이 있다.


철혈검제. 냉혈검수.


항상 표정에 변화가 없고, 슬프거나 괴롭다는 감정이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항상 냉정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내 동료들은 그 별칭들을 웃음거리로 사용하며 나에게 농을 던지곤 했다.


내 동료들은 내가 차갑고 냉정해보이기는 해도, 실제로는 헛점이 많고 어수룩한, 그들에 비하면 어린애 같은 성정의 소유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런 내 눈에서, 나조차도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을지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너희가 저 세상에서 지금 나를 보고 있다면 얼마나 놀려 대고 있을까.


아마 정말 즐거워 했을텐데.


"아...... 아아......"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마치 잠든 듯이 누워있는 서연을 보고 있던 내 입에서도 비명과도 같은 신음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된걸까.


"아아......아......아아아아......"


난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협? 정의?


난 그런 걸 바란게 아니었다.


난 그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하길 바랬다.


내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 앞에서도, 그 목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옳은 것들을 지킬 수 있음에 만족하며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난 우리 중 누구보다 강했지만 협과 정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동료들이 협과 정의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행복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싸웠을 뿐이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제갈천. 유서하. 당아현. 신해. 남궁하. 그리고 한서연.


그 외에도 나에게 목숨을 맡기고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동료들.


나에 비해 훨씬 대단하고 위대했던, 마치 옛날 이야기 속의 영웅들 같았던 그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평화는, 이제 그들의 죽음 뒤에 숨어 있던 비겁자들이 누리게 될 것이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약하다는 핑계로, 저 뒤에 숨어 목숨을 걸지 않은 자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다.


이 상황에 와서까지도 후방에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며 명분과 공적을 쌓는 것에만 치중했던, 암암리에 무림맹을 견제시하고 적대하는 구파일방의 남은 기존 세력들이 가장 대표적이겠지.


그들은 물론 우리보다 약하고 쓸모없었다.


하지만 정사대전 때도, 그리고 지금 이 마교와의 전쟁에서도.


그들이 내 동료들이 보여준 협의의 반의 반이라도 보여줬더라면, 어쩌면 지금 내 곁에 살아있는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길이...... 없었을까."


지난 이틀 간,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나날들을 깊고 세세하게 되돌아보았다.


내가 해온 선택들.


우리가 해온 선택들.


그 중에 어떤 것이 잘못되었기에, 결국 너희가 모두 죽었어야 했는지.


우리가, 내가 어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 결과는 바뀌었을까?


그리고 장장 이틀 간의 고심 끝에 확신할 수 있었다.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무고한 이들이 한 명이라도 죽어나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내 동료들과, 그런 것 쯤 눈 깜빡하지 않고 자기 잇속을 챙길 수 있었던 이들의 차이 때문이니까.


내가 더 강하다고 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 동료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테니까.


그런 이들이었기에, 나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만큼 끔찍하게도 강했던 저 사파들을 물리치고, 세상의 멸망과 동의어라 할 수 있을 저 마교를 막아내고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결국 나는 혼자 남았다.


"검존이시여......"


힘겹게 울음을 멈추고, 울고 있던 나에게 다가오던 아룡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는, 아룡이 갑자기 힘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룡아?"


쓰러진 아룡의 등 뒤에는, 새파랗게 빛나는 단검이 꽃혀있었다.


"말씀대로군. 검존 이윤."


어스름하게 어두워진 사당의 밖에서,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일주일을 내내 사당에만 멍하니 앉아 있었다던데. 천하의 검존도 그쯤 되면 어쩔 수가 없나보군."


난폭한 어조의 목소리에, 이어지는 경박한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방금 비수로 널 죽이지 않은 것을 자비라 생각하지는 마라. 의뢰하신 분이, 가능하면 살려서 데려오라는 말을 했거든. 물론 팔다리 정도는 잘라서 말이지."


연이어 이어지는 비웃음은 신경 쓰지 않고 아룡의 상태를 살폈다.


비수는 깊게 박히지는 않았지만, 독이 발려져 있었던 듯 했다.


즉사였다.


"......무당파에서 보냈나?"


일 순간, 자객들의 호흡이 약간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맞나 보군."


난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던 터라 약간의 비틀거림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의뢰주의 정체를 한순간에 맞춰버린 것에 자객들은 약간 놀란 듯 했지만, 내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보고 다시 자신감을 찾은 것 같았다.


"한꺼번에 덤벼라! 검존이니 뭐니 해도,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놈이다!"


순식간에 새파랗게 빛나는 검을 들고 달려드는 십 수명의 자객을 상대로 나는 가볍게 검을 한 번 휘둘렀다.


순간 검이 새하얗게 빛나는 한 줄의 선을 그렸고, 달려들던 자객들은 세상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이내, 들고 있던 검 채로 모두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커, 컥! 이게, 무슨......"


가장 뒤에 있어 한 번에 죽지 않은 자가 끔찍한 목소리로 중얼대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져 절명했다.


주변을 살펴도 더 이상의 인기척은 없었다.


멍청하게도 찾아온 자객들이 한꺼번에 다 함께 달려든 것인 듯 했다.


홀로 남은 나는, 뜬 눈으로 죽어버린 아룡의 눈을 감겨주고 서연의 관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왔다.


"......서연."


관 앞에 주저 앉은 나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말을 시작했다.


"너와 동료들이 살아있을 때였다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저런 하찮은 자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찾아오네."


이제 마교와의 전쟁도 승리로 끝났겠다, 무림맹이 빼앗았던 그들의 원래 힘을 되찾고 싶겠지.


이 것 역시 너무나 뻔하게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죽은 지금 나 홀로 그들을 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고립시키고 여론을 호도하여 과거의 구파일방이 지배하던 체제로 돌아가고자 할 것이다.


그들을 모두 쓰러트리는 것도, 베어버리는 것도, 죽여버리는 것도 나에겐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소중한 동료들이 꿈꾸었던 평화로운 세상은 없을 것이고.


그들의 이름까지도 나와 함께 더러워질지 모른다.


그리고 내 동료들이 없이는.


나는 그저 베고 죽이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그것을 저들도 알기에,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서연아. 난 있잖아."


편안한 얼굴로 잠든 듯 누워있는 서연을 보며, 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협이 뭔지, 정의가 뭔지, 뭐가 옳은 건지. 그딴 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딴 게 뭐길래, 결국 너희가 다 죽어야 했는지도."


구파일방의 잡것들을 모두 베어버리는 것.


그건 나에게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젠, 그 일에 어떤 의미조차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죽은 동료들이 살아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내겐 결국, 정의도 부도 명예도, 심지어는 평생을 바쳐온 검마저도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나보다 무공은 약해도 마음은 강했던, 나의 동료들만이 전부였다.


그걸 이제서야 진정 깨달아버린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내가 협이고 정의고 다 버리고...... 무자비하게, 지독하게, 극악하게...... 행동했더라면......"


나는 차가워진 서연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대었다.


"너도, 그리고 다들......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이제는 협의, 정의, 올바른 길.


그런 것들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나의 동료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감수하더라도.


"대답해줘."


너희들이 죽지 않고 행복해지는.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제발."


나는 눈을 감았다.


너의 가슴 위에 올려진 빙정이 약하게 빛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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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20년 전, 비무연 (1) 22.06.26 62 1 13쪽
» 0. 장례식 22.06.25 83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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