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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책


[공책]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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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Alexander Romanovich Luria; Александр Романович Лурия, 1902-1977)
원제 : The Mind of a Mnemonist : A Little Book about a Vast Memory 




이 책을 읽다보면 참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째서 인간은 5감 중 특히 시각 위주로 발달하게 되었을까? 
시각뇌가 냄새나 맛을 처리하는 영역보다 훨씬 더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그토록 강렬한 공감각을 지닌 S도 그 모든 것을 시각화시켰던 것일까? 
인간의 뇌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공감각을 지니게 되었더라면 과연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그리고 S보다는 덜 조형적이었다면..?) 
숫자나 단어, 목소리, 맛과 냄새, 음악, 혹은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모두 한데 뒤섞인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종소리만 들어도 거기에서 다른 모든 감각을 한꺼번에 느꼈던 S에게 세상은 얼마나 화려하고 또 얼마나 흥미진진한 곳이었을까? 


S의 기록 

(.....) 저는 늘 이런 감각을 경험합니다. 전차를 타고 갈 때면 제 이빨에서 그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느껴지는 겁니다. 한 번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면서 아이스크림을 산 즉시 그 근처에 앉아 먹고 오면 그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안 느껴지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행상에게 가서 무슨무슨 종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스크림 파는 아주머니가 그러더군요. "과일맛 아이스크림이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아주머니의 말투는 마치 그 입에서 커다란 석탄더미라든가, 시커먼 숯덩어리가 막 튀어나오는 느낌을 주는 겁니다. 결국 그런 식의 대답을 듣고 나니 도무지 아이스크림을 먹을 엄두가 안 나더군요. (.....) 이런 일도 있죠. 제가 뭘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읽는 책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잘 안 가곤 합니다. 감각이 온통 음식 맛으로 쏠리기 때문이지요. (.....) 

저는 음식도 그 이름, 혹은 그 단어의 소리에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마요네즈(mayonnaise)를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더군요. 그 단어는 바로 '즈'(z, 러시아어의 철자법을 따르면) 음절 때문에 완전히 맛을 버렸거든요. (.....)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죠. 어느 식당에 갔더니, 웨이터가 와서는 식전에 과자라도 좀 드릴까요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겠다고 했더니, 이 사람은 어디서 롤빵을 가져오는 겁니다. '이게 아닌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과자가 아닌데.' 과자(러시아어로는 '코르지키korzhiki)라는 말에서 '르'(r)와 '즈'(zh) 음은 아주 딱딱하고 바삭바삭하고 씹히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죠. (.....)

(1939년 5월의 기록) 




S에게는 모든 숫자나 단 하나의 철자, 아니, 쉼표 하나에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기에 커다란 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시란 서로 연관성이 별로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었고 가장 난해한 장르였다. 모든 것을 맛보고 듣고 이미지화 시켜야 했기에 추상적인 단어는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었다던 S. 



S의 기록 

'없음(無)'이란 단어를 예로 들어보죠. 저는 이 단어를 읽은 순간, 이야말로 매우 심오한 어떤 것(有)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없음(無)'을 오히려 실재하는 '어떤 것(有)'이라고 지칭해야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이 '없음(無)'을 버젓이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분명 어떤 것이어야 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비교적 깊은 어떤 의미를 이해하려면, 저로선 그 대상의 이미지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집사람에게 과연 '없음(無)'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개념이 매우 자명하게 여겨지는 듯 집사람은 단순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없음(無)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 개념을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 '없음(無)'을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집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논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 논리는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근거 위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볼 수 있었고, 그건 곧 우리가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만약 '없음(無)'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 보일 수 있다면, 곧 그것이 어떤 것(有)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겨났던 거죠. (.....) 



미미하기는 하지만 공감각적 특성은 유년기의 전유물일 것만 같았다. 
세월이 지나 유년기가 저 멀리 손닿을 수 없는 꿈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단지 시간적으로 멀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약간은 공감각적 특성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춘기를 지나면서의 기억들도 아득하기는 하지만 유년기처럼 완전히 분리된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 이유가 덜 분화되었던 오감의 특성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그 시절의 세상은 그토록 생기발랄하고 유기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 어떤 것도 잊지 않았던 S는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강렬한 (더 강렬해진) 공감각의 소유자였고 여전히 아이 적 꿈을 쫓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여전히 앞으로 뭔가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만 믿었다. 그의 삶은 매우 수동적이었고 끝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5분 전에 들은 말과 5년 전에 들은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 세상이 그가 소유한 세상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리라. 





목차 

저자서문
제1장 프롤로그
제2장 기억술사와의 첫 만남
제3장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력
최초의 요소
공감각(共感覺)
말과 이미지
기억력의 결점
직관(直觀) 기법
망각의 기술
제4장 기억술사의 내면세계
사람과 사물
제5장 기억술사의 정신
S의 강점
S의 약점
제6장 기억술사의 행동 조절
객관적인 자료
마법에 관하여
제7장 기억술사의 인성

저자 : 알렉산드르 R. 루리야에 관하여
S : 솔로몬 셰르솁스키에 관하여
1987년판 해제 - 제롬 S. 브루너
초판 해제 - 제롬 S. 브루너
역자후기






댓글 4

  • 001. Lv.30 온연두콩

    16.05.16 18:57

    어머, 재미있어요. 두 번 연속으로 읽었어요.
    제목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라길래 과잉 기억 증후군을 말하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군요.

    S가 기록한 감각 중에 저도 공감하는 게 있어요.
    좋지 못한 버릇이라고 생각해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진 않지만,
    이름, 혹은 단어, 혹은 발음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것 말이지요.
    특히나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의 목소리나 말투, 발음에 민감해서
    그것이 오히려 저를 괴롭히는 꼴이 되고 말 때가 있을 정도예요.

    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 수업 시간에 들었던 걸 떠오르게 합니다.
    역시나 흥미롭네요. (저는 철할 수업을 꽤 좋아했었거든요 +_+)

  • 002. Personacon 이웃별

    16.05.16 22:17

    ㅎㅎ 콩님. 좋지 못한 버릇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살짝 그런 면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편이고요. 가끔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뿐인데 혼자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니까요.. ㅠ 그래서 사람들에게 화도 못 내요. 반대로 제가 그렇게 석탄덩어리처럼 느껴질까봐요.. XD
    S는 대부분을 시각화시켰대요. 그래서 추상적인 부분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신기하죠. :D

  • 003. Personacon kkaje

    16.05.17 14:18

    오오오, 멋진 구절이다 하고 찾아봤더니 품절이군요. Xd

    공감각은 참으로 재밌어요. 어떤 사람은 소리를 듣고 맛을 느끼거나 색을 본다거나요. 맛으로 통각을 느낀다거나요. 암튼 한때 무지하게 부러워했더랬죠. 애니라는 이름에서 토스트 맛이 느껴진다니 너무나도 멋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버터를 잔뜩 바른 살짝 태운 토스트라니요. 오오오오..... XDDDD

  • 004. Personacon 이웃별

    16.05.17 21:13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또 어째서 감각이 이런 식으로 나뉘어졌는지도 궁금하고요.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올리버 색스 아저씨가 좋아했던 책이라고 해서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도 재미있어요. 까까님. 이 책이 품절이면 그걸 한번 찾아보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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