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6. 상담하는 부인 (1)
2-47. 상담하는 부인
율리아는 허름한 털 망토를 뒤집어쓴 채, 유모와 단 둘이 한 거리를 방문했다.
꽃향기와 향수 내음이 넘실대는 신전 거리도 아니었으며, 짠내와 비린내를 풍기는 생선 거리도 아니었다.
이국의 향신료와 향료 냄새가 넘쳐나는 향신료 거리도 아니었으며, 썩은 가죽 냄새와 기괴한 약물 냄새가 나는 무두질 거리 역시 아니었다.
율리아가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사기꾼의 거리였다.
신분이 불명확하고, 가난한 외국인, 야만족들이 모여 사는 공화국의 가장 밑바닥 쓰레기통 말이다.
왜? 그 이유는 율리아도 정확히 몰랐다. 굳이 설명하자면,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니면, 뭔가에 단단히 홀린 거나.
그래, 홀린 것이 분명할 터였다. 그렇지 않고선 유모와 단둘이 이 위험한 거리를 방문 할리 없지 않은가?
율리아는 거리를 들어온 지 채 몇 걸음을 지나지 않아,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그럴듯한 호위병 하나 없이 유모만 데리고 이곳에 왔는지.
허나, 그럼에도 율리아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더 깊숙이 들어갔다. 정말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율리아가 그런 자신을 외면하듯 주변을 둘러봤다. 마음속의 불길함과 불안함을 외면하듯 말이다.
율리아의 눈에는 우선 거리가 보였다. 낡고 노후화된 포장도로가 말이다.
공화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포장도로는 오랫동안 방치 됐음에도 그 견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청결함은 아니었다.
무지렁이 야만인들은 창피함도 모르고 도로에 똥이나 오줌을 뿌렸으며, 심지어 어느 나라 사람일지도 모를 이국의 점술사가 그 위에서 판을 깔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장님인 듯 눈을 감은 채 알 수 없는 주문이 읊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모습에서는 신비로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눈먼 장님이 사기 치는 느낌만 들뿐이었다.
‘그래, 그 여자에 비하면 말이지.’
뒤이어 보인 것은 거리 양편에 세워진 건물로, 여느 빈민가처럼 낡고, 노후화된 건물이 즐비해 있었다. 그 옆에 불법으로 세워진 가건물들이 보였는데, 건물 벽면에는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온갖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율리아는 그 낙서를 읽을 수 없었으나, 거칠게 쓴 필체와 여성의 성기와 남성의 성기를 부각해 그린 조잡한 낙서를 보고 그 뜻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여느 빈민가나 뒷골목에 있는 부도덕하고, 상스러운 농담 내지 욕설이겠지. 세상은 전부 뻔하니 말이다.
그때, 율리아의 앞에 한 자그마한 뭔가가 다가왔다.
한쪽 팔이 없는 꼬마로 시궁창 쥐처럼 더러웠는데,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 억양을 섞어가며 율리아에게 돈을 구걸했다.
“돈! 주세요. 돈 필요해요. 아가씨. 한 푼 만요. 한 푼! 제발요!”
깨진 토기 그릇을 흔들며 구걸하는 아이를 보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자신의 올케언니인 시니아였다면 동정하며 동전을 쥐어 주었겠지만, 율리아가 보기에는 칼만 안 든 꼬마 강도로 밖에 안 보였다.
왜냐고? 이 아이에게서는 특유의 비굴함 대신 먹이를 발견했다는 교활함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먹이를 찾았다는 그런 생쥐 같은 교활함.
율리아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아이의 교활한 태도가 불쾌했고, 자신을 노렸다는 것도 불쾌했다.
그런 율리아의 마음을 읽은 유모가 나이에 맞지 않게 재빠르게 행동했다.
“이 더러운 게, 감히, 뉘 앞을....! 꺼져! 쉭! 쉭!”
유모의 외침에 아이는 한순간 겁먹으며 물러섰지만, 이내, 꼬마의 얼굴에는 미소가 띄어졌다.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는 그런 미소 말이다.
아이는 갑자기 넘어진 척 바닥에 주저앉더니,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우는 것이 아닌 악을 지르듯 사납게 울었는데,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이 한 부부가 다가왔다.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는 빨간 코에 술배가 툭 튀어나온 뚱보였으며, 여자는 사마귀가 자란 매부리코에 늘어난 뱃살을 한 나이 든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이 흡사 걸레와 같이 더러워 보는 것만으로 소름을 돋을 지경이었다.
그 둘은 우는 아이를 확인하고는 연극배우처럼 놀란 척을 하더니, 여자는 아이를 달래고, 남자는 알아듣기도 힘든 공용어로 율리아에게 뭐라 따지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그때 본능적으로 자신이 제대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우는 척하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 뭐라 위로하더니, 무릎에 상처가 났다며 화들짝 놀라고는 아이를 끌어안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가리키며 당장 사과하고, 합당한 보상을 지불하라고 화를 내며 재촉했다.
“내 아이! 다쳤다! 착한 아이! 착한 아이인데, 왜 그런 것이오! 우리 외국인이라? 용납할 수 없는 비열한 짓! 그래, 비열하오! 사과하시오! 그리고 음... 그래, 치료비! 치료비 주시오! 내 아내에게도 위로금 주시고! 암! 암!”
말이라기보다는 단어를 나열하는 느낌.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더욱 찌푸리고 말았다.
자기 앞에서 잘난 듯 지껄이는 외국인 잡놈의 냄새와 태도 모두 거슬려서 말이다. 만약, 하레스가 곁에 있었다면 남자는 등뼈가 보일 때까지 채찍질하고, 여자는 말에 매달아 달렸을 터였다. 한쪽 팔 없는 장애인 꼬마는 아마 어디 광산에 팔아버렸을 테고....
그런 것들이 지금 자기 앞에서 뭐라도 되는 듯 지껄이다니. 율리아는 단순한 짜증을 넘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도대체 자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문득, 머리가 차가워지며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런 감정이 들자 율리아는 그냥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한순간 뭐에 홀린 것을.
그렇게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갑자기 사내가 율리아 앞을 막아섰다. 인상을 가득 쓴 채.
“어디 가냐! 내 아이 다쳤다! 내 아내 울렸다! 보상해라!”
유모가 율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허나, 사내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약이 오른 듯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먹잇감을 만난 들개처럼.
율리아는 자신을 얕본 사내에게 인상을 쓰며 경고했다.
“저리 비켜라. 외국인. 난 너희들의 협작질에 넘어갈 정도로 자비롭지 않으니. 감히, 외국인 따위가 공화국 귀부인의 앞길을 막지 마라.”
출신도 불분명한 외국인 떨거지가 공화국 시민, 더욱이 귀부인을 협박하는 것만으로 큰 죄였기에 율리아는 그에게 경고했다. 자신을 위해, 또 그를 위해.
허나, 놈은 상상 이상으로 무식했는데, 율리아의 친절한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인상을 더 쓰며 소리쳤다. 온 동네 사람 다 들으라는 듯이.
“외국인?! 이봐. 여기 봐라! 모두 여기 봐라! 내 아이 다치고, 아내 울린 여자. 나에게 외국인이라 모욕하고 협박했다! 우릴 모욕하고 협박했다!”
그러자 개와 같이 널브러져 있던 부랑자, 넝마를 뒤집어쓴 채 쓰레기 더미에 있던 거지, 수상쩍은 고기를 팔던 푸줏간 주인, 시체처럼 생긴 가발장수 등이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어딘가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흡사, 어린 시절 들은 무서운 이야기의 악당들 같았다.
수치스럽게도 이때 율리아는 호위병 없이 온 자신을 원망했다. 역시 이런 쓰레기통에 그냥 와서는 안 됐는데.
찰캉거리는 가발장수의 가위소리가 가까워질 때쯤 누군가 율리아의 뒤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율리아 손님?”
마치 쇳소리처럼 쉭쉭 거리는 목소리. 깜짝 놀란 율리아가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리자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볼품없이 비쩍 마른 노인으로, 무슨 병에 걸렸는지 피부는 도마뱀 비늘 같은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었는데, 머리는 거의 다 벗겨져 핑크빛 정수리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다시 물었다.
“율리아 손님?”
그제야 율리아는 이 기괴한 노인이 누군지 기억했다. 마녀의 경호원이었다. 율리아의 결혼식 전 점을 보러 간 신통한 마녀의 경호원.
“그래, 내가 율리아다.”
율리아는 본능적으로 노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노인은 굽은 등을 더욱 굽히며 따라오라는 듯 한쪽 팔을 가리켜 길을 안내했다. 율리아가 잠시 고민하다 노인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움직였는데, 놀랍게도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혹시 몰라 율리아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자해공갈단 부부와 부랑자, 거지, 백정, 가발장수 모두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듯 율리아를 외면한 채 딴청을 피웠는데, 아까 전 잡아먹으려던 태도와 너무 달라 의아함마저 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그때. 아내인 여자가 아이를 질질 끌며 남편에게 다가와 뭐라 따졌다. 노인이 뚜두둑 목을 꺾으며, 바라보자 남편은 오히려 아내에게 주먹을 날려 닥치라고 소리쳤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노인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얻어맞은 여자는 코피를 흘리며 발랑 넘어졌고, 아이는 진짜 울기 시작했는데, 사내는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욕을 토하곤, 아이의 머리채를 붙잡아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갔다.
아이가 울면서 외쳤다.
“아파요! 아파! 죄송해요! 아파요! 더 잘할게요! 아저씨! 죄송해요! 아파! 아파요!”
뒷골목 어둠으로 아이가 사라지자 율리아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봤다. 노인이 다시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율리아 손님?”
“알았어. 따라가지. 나도 볼일이 있으니.”
“율리아 손님.”
노인이 안내한 곳은 역시나 마녀의 천막. 다만, 예상과 달리 천막은 철거됐으며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
늙은 고양이 같은 여자 경호원의 지휘 아래 거리의 부랑자와 고아들이 커다란 마차 두 대에 짐을 싣고 있었는데, 각 수례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산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가령, 색아 바랜 마녀의 천막이라던가 말이다. 그 외에도 쇠화로, 약초포대, 비쩍 골은 검은개와 벌거벗은 광산난쟁이, 생쥐가 가득 담긴 상자, 뼈를 담은 유리병, 깃털이 다 뽑힌 얼룩새, 박제한 정체 모를 짐승, 온갖 해골 등등 흡사 악몽을 실는 것 같았다.
율리아가 그 광경을 보며 노인에게 물었다.
“어디 떠나는 건가?”
노인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율리아 손님.”
노인의 대답에 율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노인은 자기 이름밖에 말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건지 의심스러웠기에.
다행히 불쾌함이 깊어지기 전에 누군가 해답을 줬다.
“히히히. 너무 그리 불쾌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그 노인은 저주에 걸려 약간 모자란 부분이 생겼다오.”
얇고 가느다라면서도, 날카롭고 확신에 찬 목소리. 율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서 있는 마녀가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율리아가 기척도 없이 다가온 마녀를 보며 놀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흉측한 생김새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비록, 거적때기를 걸치곤 있었지만, 그녀의 흉측한 외곽을 다 가리지 못했는데, 멀어버린 두 눈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거적때기 밖으로 뛰어나온 팔이나 손 등은 나무껍질처럼 질겨 보였다.
특히, 축 늘어진 허연 머리카락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옛날이야기 망태기 노인을 연상시켰다.
길 잃은 아이를 납치해 노예로 부리는 괴물 노인 말이다..... 그 이야기가 떠오르자 율리아는 한순간 자신이 길 잃은 아이가 된 착각이 들며 등골을 타고 오싹한 불쾌감이 올라왔다.
노인이 작게 낄낄 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시지요. 부인. 전 아이를 좋아합니다. 결코, 납치 따위 하지 않습니다. 오, 그럼요. 그럼.”
또 속마음이 읽히자 율리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정말 무슨 신통력을 가졌단 말인가?
“너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가씨. 하찮은 재주일 뿐입니다. 암, 보기만 할 뿐 그 이상은 감히 할 수 없으니 말이오....”
율리아는 마음을 고쳐 잡으며 당당히 섰다. 정체도 모르는 마녀에게 휘둘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난 더 이상 아가씨가 아니다. 마녀.... 그리고 하찮은 재주라지만, 넌 그 재주로 날 휘두르려고 하고 있지.”
마녀는 지팡이를 쥔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결코,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능력을 뽐내고 싶을 뿐.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하 일이기에.... 그보다,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율리아가 도마뱀처럼 생긴 노인을 보고 말했다.
“.... 저 노인을 내게 보냈는데도,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모른다고?”
“전에 말씀드린 적 있듯이 인간을 스스로 원하는 것을 모른답니다. 아가씨, 아니 마님.... 그래서 저 같은 미천한 마녀는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봐야 한다오. 이를 무시하고, 오지랖을 부려 정답을 알려주거나, 능력에 심취해 지껄인다면 대가를 치른답니다. 오, 난 이미 경험했지. 경험했어.”
마녀가 전과 같이 말하며 멀어버린 두 눈을 율리아에게 보여줬다. 거북이 알처럼 하얀 눈은 예상했음에도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율리아는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태연한 척했다.
“.... 사람을 겁먹게 하는 재주가 고작 그거뿐이냐?”
마녀가 히죽 웃었다. 분홍빛 치아와 얼마 남지 않은 치아가 흉하게 눈에 들어왔다.
“겁먹게 할 생각 없다오. 마님.... 일단, 천막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율리아가 대답했다.
“안내하라.”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나무젓가락 님, 투투리 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설 기쁘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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